빌립보서 제3장 강해(부산 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Ⅲ.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진 자의 삶(3:1-21)
A.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3:1-16)
1) 육체가 아닌 하나님에게로부터 난 의(3:1-9)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1] 빌 3:1 바울사도는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수 없이 하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현재 바울의 처한 상황에서 보면 전혀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로마에 의한 감금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기뻐하라고 할 때, 그 앞에 “주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바울의 기쁨이란 결코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하여 판단할 수 없는 일로 인한 기쁨인 것입니다. 자녀가 훌륭한 회사에 취직하여, 좋은 규수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또는 자신이 부귀영화를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여러 여건상 편지를 보내는 것 역시 수고로움이 아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지를 쓰는 것이 수고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사도는 이 한 장의 편지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읽히게 됨으로 피차 위로를 받음은 물론,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슨 권면이나 위로를 할 때에 그것이 공수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여과 없이 받아들여 지키려고 하는 그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기뻐하는 것은 이 편지의 교훈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견고해 지고 안전해 질 수 있다면 여러 번의 반복적인 내용을 쓰는 것조차도 수고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2] 행 16:11-15 바울사도는 특히 빌립보교회 안에 있는 약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래 빌립보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유대인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복음전도 때에는 강변에서 전도를 하였고 이 때 자주장사 루디아가 복음을 받고 그의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한 것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라 봅니다. 따라서 빌립보교회의 경우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는 유대 율법주의에 의한 문제는 적었다고 봅니다.
[3] 빌 3:2 그러나 그 중에 일부 유대주의자들은 복음을 순수한 그대로 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쩜 이들은 복음전파가 그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편이 되는 물질을 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고 돌아다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복음을 잘 몰랐으며, 심지어 복음까지 손상을 입히는 노릇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행악 하는 자들” 또는 “손할례당”(損割禮黨)이라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손할례당이란 육체에 할례를 자랑하며 마치 이러한 육체적인 표시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보증수표인 양 율법주의를 내세우며 순수 복음을 훼손시키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빌 3:3 바울 사도는 이러한 “개들”, “행악 하는 자들”, 그리고 “손할례당”과 달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사역은 손할례당과 어떠한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첫째, 진정한 할례는 양피를 자르는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하는 것이며(겔 44:7), 둘째, 그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이며, 셋째,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주의자들이나 유대인들처럼 인간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소요리문답 제1번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5] 빌 3:4-6 바울사도는 앞의 “개들”, “행악 하는 자들” 및 “손할례당”이 육체를 자랑한다면 자신도 부득불 자랑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 자신은 정통 유대인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자신도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지파에 히브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최고의 열심과 지식을 지니고 있는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보면 그는 베냐민지파로서 다른 지파가 유대 나라에서 반역을 할 때에도 이 지파는 충성하였다는 점, 자신의 조상 중에는 한 사람도 이방인이 없는 순수한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히브리인 증의 히브리인이라는 점, 그리고 그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엄격한 바리새인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자랑하려면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의 삶을 보더라도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였으며, 사실상 철저히 율법에 따라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율법을 어기지 않아 흠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자랑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3:4-5). 그리고 나아가 그는 당시 큰 도시라 할 수 있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으며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행 22:3)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자신을 충분히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6] 빌 3:7-8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바울사도의 학문의 수준, 가문 및 그의 열심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경우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알고 있는 학문, 그가 지니고 있는 율법에 따른 열심, 그리고 그의 가문에 대한 긍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긴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자신의 열심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철저히 생각하다” 또는 “철저히 심사숙고” 하여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가장 고상한 지식이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7] 빌 3:9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가 배우고 읽혀야 할 영역이 많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겠다는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의 학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성은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될 때로 부패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늘의 법을 이성으로 분석하고 알려고 해도 분명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igbang 이론을 펼치거나 진화론을 펼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갖은 방법으로 이성을 동원하여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조금 알지 못한 부분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는 그의 자만심과 자랑은 극에 달하는 것이 오늘의 학문 세계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이와 같은 학문을 그가 당시의 상황에서 모두 섭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배설물로 여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사도는 자신의 학문과 가문, 그리고 그의 열심 모두를 배설물로 여긴 것일까요?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하여 버렸을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사도는 학문이, 가문이 또한 그의 열심히 결코 그를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은 도덕으로도 윤리적인 행위로도, 돈이나 명예나 권세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롬 3:10-1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렇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以信稱義).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푯대를 향한 삶(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 빌 3:10-11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를 향한 숨김이 없는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그 권능은 알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주님처럼 직접 십자가를 지고 체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당하는 여러 고난을 생각하며 주님과 함께 묵묵히 지고 갈 것임을 다짐합니다. 특히 여기서 “알고자 하여”라는 의미는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부부가 결혼을 하여 그 상대방을 더욱 깊이 체험을 통하여 알아가는 것처럼 주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권능입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권능”이란 두나미스(Dunamis,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힘을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게 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고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이 성경구절을 놓고 혹자는 휴거를 말한다는 해석도 내어 놓지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만이 부활하는 첫째 부활을 의미한다고 봄이 옳습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 빌 3:12-14 바울사도의 경우 지금 로마의 옥중에 있으며, 어쩜 이곳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앞장에서는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후 자신도 빌립보교회가 가고자 한다고 말은 분명히 하였지만, 자신의 현 상황을 보면 그리 석방 자체가 녹록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성화를 말하며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붙어있으라고 말을 하지만, 그 역시 좀 더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지금 모든 것을 얻은 것도 아니며 온전히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지금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께 전적으로 잡혀서 살기를 원하며, 더욱 더 그렇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미래에 어떤 역경이 휩쓸고 달려든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겠다는 자신의 다짐과 고백을 담아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사도의 삶을 돌아보면,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에 오직 예수그리스도 그분 한분만을 위하여 살아왔다는 점은 그 자신은 물론 그 주위의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명한 삶의 푯대를 가지고 살아왔으며, 자신의 달음박질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쉼 없이 달려왔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온전히 잡은 줄로 여기지 않으며, 더욱 상을 위하여 과거의 일을 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엡 4:13)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것이며, 또한 자신과 같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 역시 그렇게 달려갈 것을 자신의 삶을 들어서 간접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3] 빌 3:15-16 그런데 바울사도는 이러한 경주를 함에 있어 영적으로 장선한 자로 자처하면서 온전히 이룬 자라는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지금도 역시 노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라고 한 것은 빌립보교회 내에 바울사도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계시로 그들을 가르치실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재 잘못 하는 것을 옳게 여겨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더욱 알아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잘 숙지하고 있다고 보면서, 지금 어디까지 달려 왔든지 멈추지 말고 그 경주를 완주할 때까지 계속하라는 독려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마라톤시합 중의 선수와 같이 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독수리 날개 치며 하늘로 오름과 같이 위로 또 위로 한 발짝 나아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엡 3:14) 간단(間斷)없는 경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로다”(사 40:31).
B.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3:17-21)
1) 바울사도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된 자의 삶(3:18-19)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1] 빌 3:17-19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된 삶이 아니라,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합니다. 보통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용감할 정도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바울사도가 한다는 것은 빌립보교회와 전혀 거리감이 없는, 매우 친숙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바울사도는 분명히 본 받을만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리고 사도는 자신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본받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한다. 이는 바울사도를 본받아 사는 사람이라면 분명 어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본받기를 원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대강 추측을 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갖은 고난과 고통도 감내하며 복음을 위하여 진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된 자들은 바울사도와 달리 그들은 복음을 빙자하여 자신의 배만 불리며 땅에 것만 찾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왜곡케 하는 삮꾼과 같은 존재들로 그들의 마침은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단순히 권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그리고 눈물어린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빌립보교회를 그가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2) 하늘의 시민권자의 삶(3:20-21)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빌 3: 20-21 바울사도는 자신을 본받아 사는 인생은 또한 배만 불리는 어리석은 무리가 아니라 천국시민권을 가진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시민이라면 천국시민에 걸 맞는 행동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시민권을 가진 자, 로마시대에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는 어디를 가나 차별적인 보호를 받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시민권을 가진 자는 세상의 통치권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 보다는 하늘의 통치권자인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하에 있는 자들입니다. 특히 이러한 통치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는 온전히 구원받는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각종 시련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또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자 내지 낮은 자로 분류될는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영화롭게 되었던 것처럼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천국시민은 과거나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영화를 생각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예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부자는 과거와 현재인 오늘을 살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미래의 것으로 현재인 오늘을 산 사람입니다(눅 16:19-31).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라고 적고 있습니다. 얼마나 소망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