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 인쇄술과 성경
1440년대 어느 날 프로이센 마인츠의 한 집에 귀족들이 모여 도박을 하고 있었다.
30대 청년 구텐베르크는 도박판에서 연신 돈을 잃고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돈을 잃고 집에 돌아온 그는 돈을 딸 궁리는 하지 않고
도박용 骨牌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도장처럼 만들면
글씨를 대량으로 박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나무에 알파벳을 새겨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서구 최초로 만든 목판활자다.
그러나 그는 자금이 없었다.
휴머리라는 이웃집 부자 금은 세공업자를 찾아갔다.
이 사람은 사업 두뇌도 비상한 인물이었다.
휴머리는 구텐베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나무 활자가 마멸되자
그들은 세공 기술을 이용해
구리 활자를 만들어 성경을 찍기 시작했다.
신영웅전
최초로 만든 성경책은 양피지에 36행에서 시작해 42행을 거쳐 46행을 찍은 것인데
이를 마자린 판이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휴머리의 배신이었다.
자금주가 배신하자 방법이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낙심해 있을 무렵
낫소의 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 시장으로 부임해 왔다.
독실한 크리스토교 신자인 그는 구텐베르크를 찾았다.
아돌프 2세가 성서 제작과 판로까지 도와줘
구텐베르크는 영화를 누리며
말년을 보냈다.
그 성경이 지금 미국 의회도서관 복도에 전시돼 있다.
구텐베르크의 일생을 보노라면
한 인간의 성공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먼저이며,
세상살이에 한때 실수를 하더라도 받아줄 곡예사의 보호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씁쓸할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화인 인쇄술이 도박판의 골패에서 연유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되기까지 기만·배신·좌절, 그리고 人情佳話가 두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낙심할 것 없다.
그대에게도 그런 행운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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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를 발명한 사람은 구텐베르크다.
그는 양피지에 성경을 찍는 방법으로 최초의 인쇄를 시작하였다.
그의 성경책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양피지에 46행을 찍은 것으로
1760년 마자린에서 발견되었다.
그가 인쇄을 발명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그는 골패를 즐겼는데 어느날 골패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생각하다가
각기 하나의 도장처럼 된 이 골패를 순서대로 찍으면
글씨를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덜었다.
그래서 금은 세공업자 휴머리와 의논한 끝에 휴머리는 온을 대고
그는 기술을 제공하여 인쇄소를 차렸다.
그들이 인쇄한 성경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행이 뒤따랐다.
돈벌이가 되는 사업임을 깨달은 휴머리가 구텐베르크를 내쫓고
독자적으로 인쇄소를 운영한 것이다.
돈이 없는 구텐베르크는 서글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는 크게 낙심하여 방황하다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구텐베르크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마침 마인즈의 시장으로 부임해온 아돌프 2세가
재능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살고 있는 구텐베르크를 적극 후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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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년대 어느 날 프로이센 마인츠의 한 집에 귀족들이 모여 도박을 하고 있었다.
30대 청년 구텐베르크는 도박판에서 연신 돈을 잃고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돈을 잃고 집에 돌아온 그는 돈을 딸 궁리는 하지 않고
도박용 골패(骨牌)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도장처럼 만들면
글씨를 대량으로 박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나무에 알파벳을 새겨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서구 최초로 만든 목판활자다.
그러나 그는 자금이 없었다.
휴머리라는 이웃집 부자 금은 세공업자를 찾아갔다.
이 사람은 사업 두뇌도 비상한 인물이었다.
휴머리는 구텐베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나무 활자가 마멸되자
그들은 세공 기술을 이용해 구리 활자를 만들어 성경을 찍기 시작했다.
신영웅전
최초로 만든 성경책은 양피지에 36행에서 시작해 42행을 거쳐 46행을 찍은 것인데
이를 마자린 판이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휴머리의 배신이었다.
자금주가 배신하자 방법이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낙심해 있을 무렵 낫소의 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 시장으로 부임해 왔다. 독실한 크리스토교 신자인 그는 구텐베르크를 찾았다.
아돌프 2세가 성서 제작과 판로까지 도와줘 구텐베르크는 영화를 누리며 말년을 보냈다. 그 성경이 지금 미국 의회도서관 복도에 전시돼 있다.
구텐베르크의 일생을 보노라면 한 인간의 성공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먼저이며,
세상살이에 한때 실수를 하더라도 받아줄 곡예사의 보호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씁쓸할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화인 인쇄술이 도박판의 골패에서 연유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되기까지 기만·배신·좌절, 그리고 인정가화(人情佳話)가 두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낙심할 것 없다. 그대에게도 그런 행운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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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활자가 의미를 가지려면,
구텐베르크가 했고, 서양에서 일어났던 일이 있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0. 상업적,영리적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 (자본주의, 돈은 못이긴다.)
1. 대량 인쇄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2. 대량 인쇄를 위한, 잉크, 종이, 인쇄기가 필요합니다.
3. 대량 인쇄를 통해서 지식을 보급하고, 사회를 송두리째 변화시켜야 합니다.
4. 반드시 표음 문자를 사용해야 합니다.
(표음 문자 중에서도 알파벳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구텐베르크는 처음부터 대량 인쇄를 목적으로 했고,
금속 활자 뿐 아니라,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알파벳을 사용했기에, 알파벳을 대소 문자로 대량 생산하기만 하면 되었다.
(대소문자 합쳐서 52개만 대량 생산)
영리적 목적이 있었기에 대량 인쇄 판매했고,
지식이 보급되고 사회 개혁을 넘어서, 유럽을 몰라지게 바꾸었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건, 단순히 금속활자가 아니라, 그건 그냥 수단이고, 대량 인쇄술이다.
헌데, 우리나라의 금속 활자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였다.
0. 민간 주도가 아니라, 관에서 주도하는 비 영리적 목적이 많았습니다.
(신앙이나, 잘못 만들었을 때 처벌은 한계가 있습니다.)
1. 대량 인쇄가 아니라, 목판 인쇄를 하기 전에, 샘플 생산용으로 쓰였습니다.
(일단 책을 인쇄하기 전에, 금속 활자로 뽑아보고, 대량 생산은 목판으로 했습니다.)
2. 인쇄기가 없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술적 차이다.
(구텐 베르크는 활판 인쇄술, 대량 인쇄술을 개발한 것이지,
금속 활자가 중요한게 아니다.)
3. 대량 인쇄를 하지 않았기에, 사회 변화가 없었다.
(지식은 통제 수단 이었고, 사회는 경직되었다.)
4. 대부분 한문 이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한글이 펑펑 운다....)
-이게 가장 큰 문제인데, 알파벳은, 알파벳 문자만 대량 생산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대량 인쇄가 가능하다.
하지만, 한문을 사용하면, 인쇄하려는 책에 들어가는 모든 한문을 글자 단위로 만들고,
숫자도 많아 문제가 된다.
한글로 해도, ABCD를 대량 만들면 되는 알파벳과 달리,
한글도 '가나다라'와 같이 글자 기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알파벳은 대소 문자 해서 26개씩 2벌로 52개를 의 글자를 대량으로 만들면,
책을 인쇄 할 수 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한 음절, 한글자를 모두 만들어야
책을 인쇄 할 수 있다
'ㄱ' 과 'ㅏ' 라는 활자를 만든다고 '가'라는 글자를 만들 수는 없다.....
'가' 라는 글자를 활자로 만들어야 하다.
한문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불리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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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는, 자발적 동기(돈), 편리한 문자(알파벳), 우리는 없는 '인쇄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럽을 재탄생 시키는 위대한 선구자가 되었다.
우리나라 금속활자는, 고려시대 개발되었다고는 하는데,
뭘 찍었는지, 몇권 있지도 않고,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못했다.
조선시대에도, 금속활자는 그냥 나무 활판 인쇄에 보조 역할만 했고,
사회에 기여한 바도 없다...
금속활자를 만들었다지만, 그게 대량 인쇄에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세계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없다.)
직지 심경이, 금속활자를 썼다는 의미만 있지,
구텐베르크가 이룬 업적에 비한다면, 독수리 앞에 파리도 안된다.
너무 국뽕적인 교육만 하지 말고, 전혀 다른 2개 발명의 의미를 연결 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활자 말고도 우리의 지식을 대중화시킨 위대한 한글이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1450년경)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 혁신 중 하나로,
정보와 지식의 대중화를 가능하게 했다.
독일 출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개발하며,
중세 유럽의 지식 구조와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 혁명은 르네상스, 종교 개혁, 과학 혁명의 토대를 마련하며 현대 사회의 기틀을 닦았다.
1. 인쇄술 등장 이전의 정보 확산
2. 구텐베르크의 발명
5. 구텐베르크가 남긴 교훈
결론: 구텐베르크와 지식의 혁명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은 인류의 지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이끈 역사적 사건으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이 발명은 단순한 기술적 혁신을 넘어,
정보의 민주화를 통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2.1. 초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그의 이름이 요하네스인 것에 착안하여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을 그의 탄생일로 지정한 것이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부친은 하급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의 관리로 일했으며
어머니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한편 요하네스의 부친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겐스플라이슈 추어 라덴(Friedrich Gensfleisch zur Laden)으로
성이 구텐베르크가 아니라 겐스플라이슈였는데,
요하네스가 30살 경에 구텐베르크라는 이름의 저택을 사들이면서
구텐베르크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정말 드물며
유럽 역사에 남긴 족적에 비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이동식 금속활자 인쇄기를 고안한 업적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는데,
판매용으로 제작된 인쇄물 외에는 직접 자신에 대해 남긴 문서나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의 행적은 재판기록이나 몇몇 문서에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용에 의존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이 한줌의 자료마저도 대부분 최근에 발굴된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태어났던 1400년대 초반 마인츠에서는
귀족들에게 대항한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가문이었던 구텐베르크 가족은 한때 마인츠를 떠나 엘트빌러라는 작은 마을로
도피하기도 했다.
1419년경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끝까지 학업을 마쳤는지는
불확실하다. 이후 부친이 사망하자
마인츠에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서 화폐주조와 야금업에 종사했다.
당시 마인츠에서는 기득권인 귀족들과 신흥 세력인 길드가 대립하고 있었다.
시는 부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금 제도를 운영했는데, 그 실상은 폰지 사기였다.
이 폰지 방식의 연금은 고객층을 계속 넓혀나가야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고객층이 마인츠 시민으로 한정되어 있던 상황에서는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고
궁지에 몰린 시가 세금을 올리자 길드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덩달아 분노한 귀족들이 도시 밖의 사유지로 이사를 가버리고 시는 파산했다.
구텐베르크도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진행되던 도중인 1429년
자신에게 지급되던 연금이 절반으로 줄자 시를 떠나버렸다.
2.2. 인쇄업자가 되다
1434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소송을 통하여
마인츠 시 당국으로부터 못받은 연금들을 다 받아냈고,
그렇게 마련한 목돈으로 사업을 하나 계획한다.
당시 독일 지역에는 7년마다 아헨 대성당에 찾아가 네 개의 성유물을 눈으로 보고 오는
순례 행사가 있었다.
특히 이 무렵에는 유물들을 구경할 때 작은 거울(Spiegeln)을 머리 위로 쳐들어 유물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살'을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거울에 깃든 빛살이 나중에 거울을 볼 때마다 복을 준다고 믿은 것이다.
다음 순례 행사가 1439년에 있었고,
구텐베르크는 거울을 만들어 아헨으로 가는 길목의 순례자들에게 팔 생각이었다.
나름 참신한 사업 아이디어였지만 1438년 전염병이 돌면서
이듬해에 열릴 예정이었던 행사는 연기되고 당연히 구텐베르크의 사업도 망했다.
다만 이 거울사업과 별도로 스트라스부르크로 이주한 이후부터
이미 인쇄업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439년 스트라스부르크 법원의 재판기록에서
구텐베르크가 출자자를 모아서 인쇄업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이때 자신의 야금기술을 이용한 금속활자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고 되어 있다.
1440년대에 구텐베르크의 행적은 불확실하나 1440년대 중반 시집을 출판했다는 것으로 보아 인쇄업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48년, 구텐베르크는 그의 누이가 죽으며 남긴 고향집을 상속받아 마인츠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자신이 개발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업을 시작하는데,
바로 이 사업이 유럽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발명한 인쇄기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항상 혼자서 인쇄기를 만들고 개량했으며 제작 기술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많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구텐베르크는 당시 인쇄기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마인츠의 부유한 금세공사였던 요한 푸스트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
푸스트에게 돈을 빌리는 대신 구텐베르크는 푸스트와 일종의 동업 형태로 인쇄소를 차렸다.
1450년경 그가 새로운 인쇄법으로 처음 인쇄한 책은
당시 라틴어 교재로 널리 쓰이던 <문법학(Ars Grammatica)>이었다.
얼마 후 마인츠에 있는 장크트야코프 수도원장이 구텐베르크에게
면벌부 2,000 장의 인쇄를 주문한다.
당시 교회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는 효력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정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주기적으로 발행했으며,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종이나 활자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면벌부는 인쇄품질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만족했으며 이로 인해 교회에서 계속 주문이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와 거래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구텐베르크는
독일, 아니 유럽 전역의 교회를 공략하기로 한다.
모든 교회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일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1452년부터 본격 성경 출판에 착수했으며
3년간의 노력 끝에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하는
최초의 라틴어(불가타)성서가 완성되었다.
이 성경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0굴덴이라는 거액에 팔렸다.
이 구텐베르크의 성경 초판은 180부가 인쇄됐는데,
매우 비싸긴 했지만 당시 필사로 제작된 성경이 100굴덴이 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인쇄품질도 훌륭했기 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팔아서 대박을 쳤던 구텐베르크는 같은 해
채권자인 푸스트로부터 원금반환 소송에 휘말린다.
독일의 괴팅겐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에 이 소송에 대한 기록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자신이 빌려준 돈 상당수를 다른 용도로 유용했으며 변제하려는 의지도 없어서 소송을 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소송은 1456년 결국 푸스트가 승소하면서 2번에 걸쳐 빌린 원금 1,600굴덴에 6% 복리이자를 합해서 합계 2,026길더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구텐베르크는 이 거액을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쇄장비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신세가 됐다.
2.3. 말기
재정적으로 파산한 이후의 구텐베르크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1468년에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는 짐작만 있었는데,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말년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파산한 후 충격으로 실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특별한 정황이나 근거는 없다.
소송에서 패한 이후 구텐베르크는 다시 자택에서 작은 규모로 책을 찍어내기 시작해서 1457년과 1460년에 라틴어 사전 카톨리콘을 출판했다.
1462년에는 나사우의 대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를 점령했는데
이때 마인츠에서 쫓겨나 어린 시절에 잠시 살았던 마인츠 근처 도시인
엔트빌레로 이주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대주교 아돌프 2세는 마인츠에서 계속 인쇄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1465년에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발전시킨 공로로 연금을 하사했다.
한동안 아돌프 2세의 궁정에서도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는 1468년 70여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구텐베르크의 인쇄소를 넘겨받은 요한 푸스트는
자기 사위이자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 페터 셰퍼와 같이
인쇄소를 운영하였는데 푸스트가 흑사병으로 죽자 셰퍼가 단독으로 운영하게 된다.
이후 셰퍼 집안은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려서 크게 성공했다.
인쇄업이 각광을 받자 셰퍼 외에도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들이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리면서 인쇄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미국 유타주 크랜달 인쇄 박물관에서 시연중인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기를 통한 문서 인쇄 영상.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문서 인쇄가 가능하다.
세계사에서는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역사상 최초의 본격 대량 인쇄술로 공인되어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금속활자로 인쇄된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이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한 건 구텐베르크가 아니긴 하지만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의의는 인류의 지식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킨 것에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덕분에 당시 초고가의 사치품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책이 민간으로까지 대중화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활자화된 지식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한국에서 최초로 금속활자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널리 보급하는 데에는 실패하여 조정에서 대량 생산된 농사직설, 동의보감 등의
책들도 모두 당대 생산성 측면에서 더 뛰어났던 목판 인쇄로 만들어졌으며
한국의 금속활자는 조선 초중기를 제외하면 별로 활성화되지 되지 못하였다.
3.1. 개발사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의 조폐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활자 기술을 창안한다.
금화, 은화의 초상화 도안을 찍어내는 펀치에다 글자를 거꾸로 새겨 철판에다 찍어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다 철로 만든 주조기를 덧씌워 납과 안티모니, 주석 합금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이 방식은 철로 만든 형틀 및 주조기를 쓴 덕분에 수천 번을 주조해도 모양과 크기가 일치했다. 조판과 활자에 서로 요철(凹凸)을 만들어 꽉 물리게 하는 방식을 썼으므로 수백 장을 찍어도 활자가 밀리는 일 역시 거의 없었다. 여기에 대량 인쇄에 용이하게끔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한다.
활자 인쇄가 잘 되려면 충분한 압력이 필요하지만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던 것이다.
현재도 신문과 언론을 press라 칭하는데, 이는 구텐베르크 인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1450년경 인쇄기를 발명하고,
14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다.
3년에 걸쳐서 180부를 인쇄했는데, 필사본 생산 속도와 비교하여 15배 빨랐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인쇄공의 숙련도에 따라서
1분에 2~10장 가량을 인쇄할 수 있다고 한다.
인쇄 속도에 비해서 만들어진 성서의 숫자가 적은데 그 이유는 구텐베르크는 인쇄본 성서가 필사본과 같아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컬러 그림 등을 넣어
상당히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거기에 삽화나 머리말, 장식 등은 따로 필사의 과정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는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현대 인쇄기와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기술적인 면에서 크게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제본을 고려하지 않고 양적으로만 환산하면 현대 기계식 인쇄기는 1분에 800~3,200장 가량 인쇄되어 대략 80~1600배 빠른 셈이다.
어쨌든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속도는 필사에 의존하던 기존의 방식과 비교하면
혁명적으로 빨랐다.
이후 활자 인쇄술은 급속히 퍼져서 1450년부터 1500년까지 50년 동안 3만 종의 책을 총 2,000만부 인쇄했다고 한다.
이는 이전 1,000년 동안 출판된 책보다 더 많은 양이라고 한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앨 고어가 2005년에 서울 디지털 포럼에서 떡밥을 던지기도 했고.
이를 추적한 영화 직지코드를 통해 확인해 보면 그 개연성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요약하면, 고려 금속활자술이 세계 최고(最古)이긴 하지만
소수 지배층만 인쇄술과 같은 첨단 기술을 독점했기에
한국에 유럽의 출판 혁명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다만 후술된 내용처럼 동양에서 출판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건
동서양의 문자 차이에기인한 바도 크다.
서구 제어를 표현하기 위한 활자는 알파벳 대소문자 + 약간의 구두점과 조정 문자 + 숫자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아시아 전통 문자인 한자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족히 수만 자의 한자 활자가 필요했다. 개인이 이런 엄청난 양의 활자를 만들고 보관한다는 건 엄두도 못 냈고 국가가 직접 나서야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3.2. 본격적인 인쇄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본격적인 인쇄술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3.2.1. 문자적인 이유
유럽에서 사용되는 페니키아 문자 기반의 알파벳 계열 문자는
기본적으로 20~30개 내외이다.
대소문자를 구분하고 장식용 글자체를 따로 둔다고 해도 만들어야 할 활자의 개수가 한정적이라 활자를 양산하기 쉽다.
실제로 처음 구텐베르크가 개발할 때 깎았던 활자는 알파벳, 문장 부호, 기타 각종 기호들을 통틀어 겨우 290종이었다.
구텐베르크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많다고 느꼈는지 다른 작업공 5명과 함께 작업했지만.
또한 음성을 바로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의 특성상 알파벳을 알고 자국어를 발음대로 적기만 하면 소통이 가능했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 비해 문맹 퇴치가 용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는 상용한자만 수천 자에,
전체 한자는 수만 자에 달하므로 활자를 만들기 힘들다.
조선의 금속 활자 주조량은 구텐베르크의 10배에 달했지만,
한자 전체 숫자를 생각하면 그걸로도 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한자의 모양의 복잡성 때문에 활자 자판을 맞추는 과정도 복잡하다.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판을 맞춰야 하는데, 이조차도 잘못 맞춘 경우가 흔했다.
한글은 표음 문자라는 점에서 한자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모를 결합해서 하나의 글자를 만들기 때문에 인쇄는 더 복잡하다.
한글 완성자를 일일이 활자로 만들 경우 이론상 만들어야 되는 활자의 수가
1,638,750 개라 오히려 한자보다 훨씬 많다.
현대 한국어 맞춤법에서 흔히 쓰이는 글자만 해도 2천 자는 족히 넘는다.
일제 시대에 주시경이 풀어쓰기를 주장한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심지어 문자가 전산화된 현재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니코드 항목 참조.
3.2.2. 민간 개발
주로 민간 영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퍼졌다.
당시 유럽은 중세를 거쳐 근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으므로
상공업이 발달하는 상황이었다.
거래 및 시세 등의 정보를 빨리 주고받아야 하는
상공업에서 적용되어 인쇄술이 전파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유럽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한 성경을
그때까지 가톨릭 교회와 사제들이 독점했던 것을
마르틴 루터 등이 자국어로 번역, 보급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통해 단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졌고,
이후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의 보급은 종교개혁의 열기를 급속히 확산시켰다.
3.3. 영향
사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이전에도 인쇄 기술은 존재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14세기 경부터 목판인쇄 기술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당시 목판인쇄는 목판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를 위에 올린 후 롤러로 미는 방식으로
인쇄했는데 이 과정에서 잉크가 번지거나 종이가 찢기기 일쑤였기 때문에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시절 유럽에서 책(Book)은 공예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목판인쇄를 통해 만들어진 싸구려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선 책이란 글자 정보를 전달하는 게 본질이기에 표지는 종이나 가죽을 실로 꿰맨 것으로 마무리됐으나,
유럽에선 책은 양장본 하드커버에 장식까지 들어간 공예품 개념이었다.
동아시아처럼 별다른 공예적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글자만 담긴 것은 팸플릿으로 아예 따로 구분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는 정 반대로 서구권에선 페이퍼백과 전자책이 대중화되어
성경조차 페이퍼백으로 출판될 정도이고 동아시아에선 비싼 양장본이 대중적이다.
이처럼 필사의 시대에는 책의 가격이 책의 문자 수와 정비례했다.
성경 1질 값이 시골 농노의 집보다도 비쌌고, 도시의 잘 지어진 연립 주택 1채보다 약간 낮은 가격이었다.
15세기 유럽 최고의 장서가로 알려진 제프리 초서가 보유하고 있던 책 수가 90여 권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이 정도 책을 보유하려면 엄청난 돈과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정보 전달용인 팸플릿 역시 수요가 따로 있었다.
바로 대학.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 처음 설립된 무렵에는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뒤 음독하여 내용을 외운 다음 강의를 들어서 이해하는 식이었는데,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아 교재의 핵심을 요약한 작은 책자를 강의에 가져가서 듣는 걸로 바뀐다. 그런데 팸플릿의 수요가 제일 많았던 대학에서는 필경사들을 대규모로 고용해서 자급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품질 낮은 목판 인쇄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 당시 목판 인쇄는 성화나 공문서를 복사하는 등의 제한된 용도로만 활용되었다.
그래서 구텐베르크는 이러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책이 싸구려로 보이지 않게 하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생산량을 제한했고 삽화가를 동원해 그림을 그렸다.
인문주의자와 대학이 초기에 인쇄기를 멸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기는 책의 가격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인쇄기의 가능성에 온 유럽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1470년대에는 이미 유럽 주요 대도시 12곳에 인쇄소가 열렸고, 1500년이 되면 240곳으로 늘어났다. 이 시대의 책은 국제 교역에도 쓰일 수 있는 고급 상품이었기 때문에 70%가 넘는 책이 라틴어로 쓰였고, 국제 교역망을 따라 퍼진 염가의 책은 기존의 필사본 책들을 밀어냈다. 발명 전 유럽에서 500~1400년대까지 필사된 책의 총량은 대략 10만 권으로 추산된다.[13]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1,500~2,000만 권이나 되는 책이 생산되었다. 이는 이전 인류가 생산한 책의 숫자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로 인해 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철학이나 과학을 연구하고 발표 및 정리해서 출간하여 학자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학문상의 '촉매 작용'이 활발해졌다. 물론 학문 측면뿐만 아니라 플레잉 카드같이 비 학문 분야 역시 인쇄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한 필사 시대에는 오·탈자 및 왜곡의 여지도 많았는데, 이것은 필사 과정에서 어느 사본이 신뢰도가 높은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성경을 예로 들자면 요한 복음서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 파트는 초기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후대에 각주로 첨가된 것인데, 필사 과정에서 성경 본문으로 뒤섞이는 오류가 나타났다. 심지어 어느 필사자가 '이 문단은 내가 본 다른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지웠다가, 또 다른 필사자가 '옛 글을 마음대로 왜곡하지 마시오'라며 다시 더한 사본도 있다. 책을 생산하는 방법이 오직 필사뿐이니, 이미 유통되어서 필사되고 있는 책의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원저자도 불가능했고 어느 것이 진짜 원본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쇄로 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자 '표준적인 원본'이 생겨났고 심지어 그것을 수정한 새 판본을 찍어내서 유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렇게 서지학(書誌學)이 탄생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전까지 필사로 유통되었던 책들에 대해서도 '표준적인 원문'을 정리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심지어 성경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성경과 같은 값비싼 책보다는 값이 싼 출판물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물 중에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성경이지만 사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주로 똑같은 서식과 문장이 반복해서 계속 쓰이는 행정 서류였다. 이 중에는 다름 아닌 면죄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쇄술로 인한 파급 중 제일 유명한 것은 개신교의 출현과 종교개혁일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교황파인 요한 에크와 공개 토론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루터의 연설문, 논문, 논박문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광범위하게 퍼지고 전 유럽으로 불길이 번지면서 이를 통해 개신교 탄생의 시작이 된다. 또 신구교간 종교 전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으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당시 분위기상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은 시작되었겠지만, 짧은 시일 안에 막대한 양의 문서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단 2주 만에 전 독일인을 사로잡은 종교개혁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루터가 1522년 발간한 '독일어 성서'는 널리 보급됨으로 인해 근대 독일어의 초석을 다졌고 민족주의의 형성에 기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독일에선 매년 100만 권 가량의 책이 인쇄되었다는데, 이 중 1/3이 루터의 저서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인쇄술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번역된 공인 성경과 미사 경본을 각 지방 교회에 대량으로 배포할 수 있도록 해
가톨릭이 하나로 뭉치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효율적으로
개신교에 반박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대항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개신교 평신도 A가 성경을 근거로 가톨릭을 비판하고,
가톨릭 평신도 B가 성경을 근거로 개신교를 비판하는 식의 일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은 일반인들에게 비쌌다.
1628년 영국 기준 성경 1권은 183파운드 금화로,
일반인 농부는 몇 세대에 걸쳐 돈을 모아야 살 만한 가격이었다.
책의 생산 속도는 빨라졌어도 종이 생산이 획기적으로 는 것은 아닌지라,
구텐베르크 이후에도 책의 가격은 종이의 생산량과 가격에 많이 구애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급격히 전파되고 유럽 사회를 흔든 것은 높은 도시화율과
도시민들의 높은 교육률이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지,
반대로 구텐베르크 때문에
이전에 교육이나 지식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대중들까지 지식 사회로 편입되는 격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보다 수백 년 뒤인 나폴레옹 시대까지조차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정도의 문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부사관을 하기에 충분한 인력으로 취급되었다.
훨씬 더 후대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자서전에 적혀 있는 일화를 통해서도
산업 혁명 이전의 책의 가격을 가늠할 수 있다.
어린 링컨이 이웃 부유한 농장에 가서 일했는데,
어릴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한 어린 링컨에게 농장주가 책을 빌려줬다.
집에서도 책을 읽으며 잠이 들었더니만 비가 와서 창가에 둔 책이 비에 젖었다.
링컨은 스스로 농장주에게 다음 날, 가서 모든 걸 설명하고
책값으로 한동안 거저 농장일을 하기로 농장주와 합의했다는 것.
책값이 약 360여년전보다 많이 싸졌지만,
여전히 책값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뭐 링컨은 부지런히 다 일해서 책값을 갚았는데 농장주가 기뻐하면서
가지고 있던 책을 선물해줬다는 이야기이다.
국내 위인전에서도 해당 일화를 싣으며 1820년 초반 미국에서도 책은 매우 고급스런 물품이라 보통 사람이 책 한권 사자면 당시 평균 일당으로 며칠이나 보름 이상까지 갈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고 나올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의 일화로, 종의 기원의 경우 1859년에 나온 초판 8000부가 모두 팔린 것이
엄청난 대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도 1800년대~1900년대 초에 나온 베스트셀러 소설들의 경우 대다수는 이동식 도서관을 통해서 유통되었으며, 한국도 불과 수십 년 전에도 교과서를 물려주거나, 대본소나 책방 등 책을 싸구려 종이로 찍어낸 것을 빌려주거나 중고로 사고파는 등 책은 대다수의 서민들에게는 직접 사기에는 꽤 비싼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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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의 아버지 구텐베르크 업적과 명언
인류의 4대 발명품을 화약, 나침반, 종이 그리고 인쇄술이라고 합니다.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은총의 선물이다."라고 마르틴 루터가 말했다.
인쇄술은 인간이 지식을 얻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왔고
인쇄술의 발전은 성경책 보급에도 큰 역할을 하면서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했다.
인쇄술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글자를 베껴 쓰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지만
일정한 판면에 잉크를 묻힌 뒤 종이 등의 재료에 찍어 문자나 그림을 반복적으로 복제하는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쇄술은 크게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로 나눕니다.
목판 인쇄술은 나무판에 글자를 음각이나 양각으로 새긴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기술이고
활판 인쇄술은 인쇄를 위해 만든 글자인 활자를 하나하나 따로 만든 뒤
그 활자들을 조합해 문서를 찍어내는 기술이다.
사실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은 모두 동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자 현재 남아있는 목판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
8세기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리니경'입니다.
우리나라는 1234년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해 '상정고금예문'을 찍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인데요.
1377년 고려 시대에 충청북도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 이다.
금속활자가 한국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것인지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발명된 것인지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요.
서양에서는 15세기 들어서면서 인쇄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됩니다.
1445년 독일의 인쇄업자인 구텐베르크(1397~1468)가 납으로 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납에다 주석, 안티몬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녹인 다음 글자를 새긴 틀에 부어 활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인데요.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들 때 사용하던 압착기(프레스)를 응용해
힘이 고루 가해지는 압착 인쇄기를 발명하였다.
활자, 인쇄기, 잉크, 종이 등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는 인쇄에 관한 모든 기술이 집약되어 있었다.
그는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는데요.
1282쪽에 이르는 '42행 성경'(구텐베르크 성경)이다.
각 쪽마다 42줄씩 인쇄되어 있어 '42행 성경'이라고 부르는데,
1454년 구텐베르크는 '구텐베르크 성서'를 180부를 찍어냈다.
유럽 최초의 인쇄 서적인 구텐베르크 성경은
중세 수도사들이 만들었던 성경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도록 디자인되었다.
당시 교황청은 인쇄술의 혁신이 필요했는데,
면죄부의 발행이 수월해지기 때문이었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로 성경과 함께 면죄부를 찍어내 돈을 벌었다.
15세기 후반 발달한 인쇄술로 성경이 대중에 널리 보급되었고
루터의 종교개혁 확산에도 기여하였다.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가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인쇄술을 통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오늘날 세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모두 구텐베르크 덕분이다.
모든 것이 이 근원으로 추적될 수 있지만 우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의 거대한 발명이 초래한 악은 인류가 선호하는 선에 의해 천 배나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마크 트웨인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에 대해 한 명언이다.
구텐베르크 이후 독일뿐 아니라 유럽 곳곳에 인쇄소가 속속 설립되었다.
1500년쯤에는 독일에만 300곳 정도의 인쇄소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대량으로 쏟아지는 인쇄물 덕분에 유럽 사회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를 경험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인쇄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게 되면서 폭넓은 식자층이 형성되었고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세상을 바꾼 100대 인물'에 드는 인물이 되었다.
1999년 시사 주간지 타임은 그를 '밀레니엄 인물(Man of the Millennium)'으로 선정했다.
캐나다의 문명 비평가 마셜 맥루언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능케 한
책의 대량 보급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재창조했다고 주장할 정도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인류사에 문화적,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인본주의 운동은 모두 구텐베르크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이전에도 목판인쇄 기술이 있었지만
그의 인쇄술은 지식의 전파 속도와 교환 속도를 급격히 올려
지식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혁명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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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불지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다음 두 질문에 정답을 맞혀보세요.
첫째, 미국의 시사 주간지 '라이프'가 선정한 '지난 천 년간 인류사에서 중요한 100가지 발명품' 중 1위는 무엇일까요?
둘째, 역사 전문 방송인 '히스토리채널'에서 선정한 '천 년을 빛낸 세계의 100인' 가운데 1위는 누구일까요?
첫 번째 질문의 정답은 바로 금속활자 인쇄술이고,
두 번째 정답은 이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유럽을 넘어 인류에 끼친 영향을 알아볼까요?
프랑스어로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한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그 당시 고대 로마의 전통과 문화가 남아있던 이탈리아의 도시는 이슬람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서 충분한 부와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대 로마의 고전 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이렇게 시작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운동은 알프스를 넘어 전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인본주의(휴머니즘)적이고 문화에 중심을 두고 있었던 반면,
알프스 이북의 북방 르네상스는 사회 개혁적인 성격이 강했다.
특히 중세의 봉건 체제와 종교 중심의 사회에 대한 개혁과 혁신을 주장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신생 예술을 낳았다면 북방 르네상스는 신생 종교를 낳게 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중세 권력의 상징인 교황의 착취가 심했던 독일에서 종교 개혁이 시작됐다.
독일에서는 교황의 착취와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반발이 심했고
마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의 성 베드로 성당 개축 비용에 대한 면죄부 판매에 맞서기 위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루터는 오로지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강조하고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주장해
중세의 교황 중심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로 인해 촉발된 종교 개혁을 통해 개인의 신앙과 성서를 중시하는 개신교 교회가 성립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이런 루터의 종교 개혁은 시대와 사회의 요청에 따라 전 유럽으로 확대됐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의 상징인 '95개조 반박문'은 금속 인쇄술에 힘입어 전 유럽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
루터는 인쇄술을 가리켜 "복음 전파를 위해 신이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고까지 극찬했다.
당시 인쇄술의 발달은 루터의 사상을 빠르게 지식인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판화를 통해서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도 이해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몇몇 소수의 지식인밖에 볼 수 없었던 성서는
루터의 노력으로 독일어로 번역됐다.
이후 유럽 각국의 언어로도 번역되었다.
이렇게 성서가 인쇄술의 도움으로 보급됨으로써 유럽의 대중은
지금까지 중세 가톨릭 교회가 가르친 것이 성경과 동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종교 개혁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유럽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 책이라고 하면 대부분 중세 수도사들이 직접 보고 베낀 필사본이 전부였고 그 수도 극히 적었다.
책은 소수 지배층의 특권과도 같았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서 유럽에서는 서적이 대량으로 인쇄될 수 있었고,
이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맞물려 유럽을
중세의 우매함과 암흑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인쇄술에 의해 지식과 정보가 대량으로 복제되고 대중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대중들의 힘과 목소리는 커졌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통해 쏟아져 나온 책과 여러 인쇄물을 접하며
이제 대중들은 지식이라는 권력을 갖게 됐고
이는 다시 시민 혁명을 거쳐 근·현대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정보의 대량 생산과 대중의 의식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종교 개혁·시민 혁명·산업 혁명 등을 이끌어 냈다.
이렇게 인쇄술의 발명은 사람들에게 귀중한 재산을 남겨 주었고,
소수가 아닌 일반 대중의 지식 보편화를 통해
인류의 역사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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