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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파커 팔머

작성자봉서방|작성시간12.03.06|조회수1,522 목록 댓글 2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파커 팔머

요즘 '순종'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맘 속에 부대끼는 것이 많아 고민하고 있다.
순종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리더가 얘기하면 어떠한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따르는 것일까,
개인의 자유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
권위주의에 굴복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내가 순종하지 않는 문화에 젖어있기 때문일까,
등등 여러가지로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가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란 책에서
순종에 관한 저의 고민에 잘 답해주는 구절이 있었다.

"진리의 공동체를 묶어 주는 기본적인 끈은 무엇인가?
진리는 어떤 종류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가?
아바 펠릭스* 이야기가 보여 주듯 여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순종'이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노예적 신봉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아들이 서로 대화 속에서 주의 깊게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성경 전반에 걸쳐 앎과 순종적 듣기(obedient listening)는 함께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말씀하신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진리라고 불리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듣고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여기서
예수님은 진리를 아는 것과 순종을 연결지으실 뿐 아니라,
순종과 자유를 연결지으신다.

이러한 연결은 단순히 기독교의 경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자유는 진리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취된다는 이 사상은,
지식을 통해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교양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의 영적 전통과 세속 전통 모두,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자유는 오직 진리에 대한 순종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확언한다."

 

 

 

*아바 펠릭스 - 사막의 구도자였던 4세기 초기 기독교 교부

이 책에 아바 펠릭스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몇몇 형제들이 아바 펠릭스를 찾아가서 말씀을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노인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간청을 하자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아바시여, 그렇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말씀이 없다네. 사람들이 노인들을 찾아가 말씀을 청하고

또 자신이 들은 말을 실천하던 때에는, 하나님은 노인들에게 할 말씀들을 주셨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말씀을 청하고서도 들은 것을 행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노인들로부터 말씀의 은총을 거두어들이셨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아무런 말씀을 갖지 못하게 되었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네."

이 말을 듣자 형제들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바시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은

미국 교육계의 권위자인 파커 팔머가 헨리 나우웬과 존 모가브가브와 더불어

영성, 공동체, 교육에 관해 2년 동안 2주에 한번씩 모여

대화하고 기도하며 웃고 점심을 나누며 쓰게 된 글이라고 한다.  

이 책은 진리, 공동체, 교육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쓰였지만

여러 영적, 종교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읽히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출발점에서 이런 조사가 나온다.

"그 조사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미국과 세계의 미래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경제, 환경 오염, 범죄, 도덕, 에너지, 핵전쟁에 대해 두려워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개인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대단히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통해- 특별히 그로 인해 갖게 될 직업과 관련하여-

자신만큼은 세계적 재난 가운데서도 안전과 온전한 상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육이 공동체적 관심이 부재한 결과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공동체'란 말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진 않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우리가 몸으로 가까이 부대끼는 좁은 의미의 실재적 공동체

('가족 공동체' 같은)에서부터 보다 넓은 의미('인류공동체'같은)를 포함하는 것 같다.

"공동체란, 각자 자신의 정체성과 독자적인 온전함을 가진 개별적 인격들,

고독한 자아들 사이의 관계의 그물망이다."

"자아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적이며, 그 공동체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의지한다."

"우리가 자아 전체로 하여금 관계 안에서 알도록 하면,

우리는 우리가 변화의 주체인 동시에 변화의 대상이 되는,

상호적 앎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된다."

 

또한 이 책에서는 지속적으로 '객관주의'적 인식론(지식을 아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으며,

그것이 낳은 현대 교육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다 읽은 다음에 더 정리해야 할 것 같다.)

 

p.20

공동체는 지성의 전통적 핵심 문제 네 가지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실재의 본질(존재론), 우리가 실재를 인식하는 방식(인식론),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교육학),

그리고 교육이 세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왜곡하는 방식(윤리학)이다.

 

p.22

우리는 학생들이 개념과 사실의 공적 교육과정 못지않게 제도적 양식과 관행의 '숨은 교육과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을 알고 있다....우리가 학교를, 덜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그리고 더 협동적이고 공동체적인 실재의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갈 때, 학생들은 다른 모든 삶의 본질에 대해서도 더 참된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p.23

우리는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뿌리를 두고 있는 공동체의 합의에 의존한다...과학자 공동체에는 실재는 우리의 감각이 파악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합의가 존재한다...

객과주의의 신화는 오늘날 이미 파산 선고를 받았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임을 - 그 인식 대상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임을 이해한다...

지성의 참된 역할은, 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들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일, 삶의 위대한 공동체를 다시 엮어주는 일이다...

인식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배움이라는 위대한 모험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p.26

좋은 교사는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과, 또 서로서로 공동체를 맺도록 한다. 이는 단순히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수와 학습이 요구하는 어려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즉 교실에서 지적인 엄격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뢰와 용납의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적인 엄격함은 정직한 반론 제기, 상대의 생각을 수긍할 줄 아는 자세에 달려 있는데, 이런 것들은 공동체의 '부드러운' 가치들이 부족할 때 생겨날 수 없다...

과연 지금 우리는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만들어 주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저 고립된 개인들로서 희소한 보상을 위해 경쟁하는 법을 배우고 있을 뿐인가, 아니면 학습자와 시민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풍성한 공동체를 창조하는 법을 배우는 중인가?...

우리가 학생들로 하여금 지성이란 자신을 세계로부터 떼어놓고 단절시키는 도구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반공동체적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윤리적 교육이란 학생들의 삶 속에 연결됨(connectedness)을 위한 역량을 창조해 주는 교육이다.  

 

들어가며

p.35

우리는 지성의 눈으로 사실과 이성의 세계를 본다.그곳은 차갑고 기계적인 세계지만, 예측 가능하고 안전해 보인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핵과학의 시대인 오늘날, 우리의 지성이 만들어 온 세계는 결함이 있고 위험하며 심지어 치명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뜨고 새로운 영역을 본다. 사랑의 힘을 통해 따뜻해지고 변화되는 세계, 지성으로는 볼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본다. 우리는 마음을 버릴 수 없으며, 지성도 버릴 수 없다. 어떻게 우리는 두 시선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온전한 시각', 즉 실재에 대한 포괄적 인식을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다. 나의 시각은, 인식은 우리의 감각과 이성뿐 아니라 직관, 믿음, 행동 관계 그리고 몸 자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최근의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대안적 시각, 곧 영적 전통의 중심부에서 발견되는 시각을 제공해 줌으로써 '온전한 시각'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성의 시각은 마음을 배척하나, 마음의 시각은 지성을 포용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영적 전통이 우리에게 두 눈 모두를 통해 보는 시각, 단일하고 한결같으며 온전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학문 분야는 사실과 이성을 위한답시고 진리를 폐기시켜 버렸다. 하지만 영성은 아직도 진리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매진하고 있는 분야로 남아 있다. 아마 이 책은 여전히 진리를 지적 관심사로 삼고 있는 이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책이 일상 생활 자체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기를 희망한다.

 

p.39

1장에서는 현대 지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할 것이다. 나 자신의 교육을 되돌아보고,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인도해 왔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이다....우리의 지식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나는 그 대답을 내 영적 전통의 중심에서 찾을 것이다. 이렇게 1장은 '교육의 영성'을 위한 토대를 놓는다.

2장에서는 표준적인 교육이 우리의 인식과 존재를 어떻게 형성-혹은 왜곡-시키고 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교육에서 행해지고 있는 몇몇 형성 훈련을 살펴본 뒤, 나느 왜곡의 원친을 오늘날 대부분의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객관주의적' 인식 이론에서 찾을 것이다...그것이 우리의 관습적 교수 방법의 결과임을 논할 것이다.

3장에서는 그러한 관습적 교수 방법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이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묘사할 것이다...수도원 운동의 기초를 놓았고 기독교 영성 전통의 원천이 되는, 4세기 사막 교부들로부터 유래하는 이야기다.

4장에서는 그 전통의 중심에 있는 진리에 대한 이미지, 즉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하셨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신실한 관계들의 공동체로 초대하셨던 한 인물의 이미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나는 진리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공동체적 개념이-종교적 지식뿐 아니라, 물리과학이나 사회과학, 인문학 지식에 대해서도-갖는 몇 가지 의미에 대해 말할 것이다.

5장과 6장에서는 이러한 인식 방법에서 나오는 실제적인 교수.학습 방법 몇 가지를 설명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임을 제안할 것이다. 5장은 교사가 어떻게 배움을 위한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6장은 그 공간 내에서 어떻게 교사와 학생이 진리에 대한 순종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물을 것이다.

7장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가르침을 행하는 데 필요한 영성 훈련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장.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지식의 폭력

p.46

그 과학자들처럼 나도 내게 있는 지성의 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오만에 빠져들었다. 내가 가진 힘이 적었기에 나의 오만함으로 초래된 결과들은 세계를 뒤은들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권력욕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데 내 지식을 사용했다.

 

p.49

그 조사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미국과 세계의 미래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들은 무엇보다도 "경제, 환경 오염, 범죄, 도덕, 에너지, 핵전쟁에 대해 두려워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개인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대단히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통해- 특별히 그로 인해 갖게 될 직업과 관련하여- 자신만큼은 세계적 재난 가운데서도 안전과 온전한 상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지고 자신은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마 정신의학자는 이 학생들에게 정신 분열 증세가 있다고 진단할 것이다. 개인적 안녕에 대한 환상에 집착함으로써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포로부터 잣니을 방어하려 한다고 말이다. 한편 인문학자는 그들의 답변을, 명확한 시각과 사고를 갖추도록 도와주어야 할 교육 본연의 목표를 직업 교육 중시주의가 대체해 버린 증거로 볼 것이다...그들은 세계를 조작의 대상으로 배워 왔다...그들은 세계의 작은 부분만큼은 자신이 개인적인 욕망의 충족을 위해 조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그들은 인간의 교만과 힘으로 시작해서 결국 인간의 교만과 힘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종류의 앎의 희생자들인 것이다...그들의 다음 세대에 대한 가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마땅히 의심해 보아야 한다.

 

p.51

지식의 기원과 목적

지식에는 두 가지 주된 원천이 있음을 알 수 있다...하나는 호기심이며, 다른 하나는 지배욕이다...호기심은 도덕과 무관한 열정으로서, 알고자 하는 욕구를 방해하는 어떠한 지시도 거부하려 든다. 지배욕은 권력욕의 다른 말에 불과하며, 도덕과 무관할 뿐 아니라 부패하기 쉬운 것으로도 악명 높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식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자비(compassion) 혹은 사랑- 지적 전통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영적 유산에서는 소중히 여겨지는 원천-에서 기원하는 지식이다...

지식의 기원은 곧 사랑이다. 다시 말해, 알고자 하는 우리 욕구의 가장 깊은 원천은 다름 아니라 세계가 처음 창조되었던 당시의 유기적 공동체를 재창조하려는 열정, 바로 그것이다...

현대 지식의 실패는 ...지식의 좀더 깊은 원천과 열정을 인정하고 추구하지 못하고, 윌의 지식이 창조하는 관계들-자기 자신, 이웃, 전체 유.무생물 세계와의 관계-에 사랑이 거하도록 하지 못한, 앎 자체의 실패다...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은 우리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위해 변화할 것을, 심지어 희생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호기심과 지배욕을 따르기란 쉬운 일이지만,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기도 충만한 교육

소리내어 하는 기도 시간을 허용하는 법안에는 반대하면서, 대신 철저하게 기도로 충만한 앎과 교육 방식을 요청하고자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관계성의 실천을 의미한다.

우선 기도란 자신과 타인, 인간과 인간 외의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한데 얽혀 있는 저 관대한 생명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감각은 구별짓고 지성은 분석하는 반면, 기도는 삶의 하나됨을 인정하고 재창조한다. 나는 기도를 통해, 더 이상 나 자신을 다른 이들과 세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며, 자기 욕망의 만족을 위해 그들을 조작하지 않는다....

기도에 흠뻑 젖은 지성은 더 이상 분리와 정복, 조작과 지배를 목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이제 사고는 사랑의 행위, 공동의 유대를 인정하고, 창조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올바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

"교육의 목적은 한 사람에게, 자신과 세계의 관련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정의하는 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세계가 이미 가공해 놓은 정의나, 그 개인이 멋대로 만들어 내는 정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 기도로 충만하지 않을 때, 즉 교육이 초월성에 중심을 두지 않을 때, 교육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 진정하고 자발적인 관계성을 창조하는 데 실패한다...

이러한 초월성 안에서의 교육은 삶의 외관을 넘어 숨어 있는 실재들을 보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 사실을 넘어 진리를, 자기 이익을 넘어 자비를, 쇠약한 정열과 지긋지긋한 절망을 넘어 창조 세계 공동체를 갱신하는 데 필요한 사랑을 보도록 말이다.

우리는 초월을, 자아와 세계의 실재들로부터 벗어나 위로 혹은 밖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초월이란 사랑의 영이 우리 실존의 심장부로 뚫고 들어오는 것, 불어 들어오는 것,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를 전보다 더 큰 신뢰와 희망을 가지고 보도록 말 그대로 '영을 불어 넣는 것'(in-spiration)이다...

초월성 안에서 형성된다면, 물리학의 지식은 지구의 생태를 파괴하는 도구로 쉽게 전환되지 않을 것이고, 사회과학의 통찰들도 상호 신뢰를 부수어 버리는 사회적.정치적 조작 프로그램으로 쉽게 변환되지 않을 것이며, 인문학도 우리 공동의 삶을 경멸하는 교양인을 쉽게 낳지 않을 것이다.

 

얼굴을 맞대로 보는 앎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진리는 '타당한' 개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육신이다. 우리의 지식이 추구하는 '말씀'은 언어적 구성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육신을 가지는 실재다...관습적 교육은 추상적.비인격적 사실과 이론을 다루는 반면, 기독교 영성에 의해 형성된 교육은 우리를 성육신적.인격적 진리로 이끈다...

사랑으로 변화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힘을 주위 세계에 오만하게 강제하지 않으며, 세계가 우리를 정복하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p.69

2장 영성 형성으로서의 교육

수도원 훈련과 학교

수도원은 영성공동체의 고대 형태로서, 오늘날 학교들의 역사적 뿌리 중 하나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영성 형성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바로 1)신성한 문헌들에 대한 연구, 2)기도와 관상 훈련, 그리고 3)공동체의 공동 생활이다.

나는 신성한 문헌들(sacred texts)을 연구하면서 영적 전통 및 앞서간 사람들이 추구하고 발견할 것들과 접촉한다...또한 나는 기도와 관상을 통해 형성된다. 이는 우리를 전통 너머의 모든 영적 삶의 살아 있는 원천으로 데려가 주는 훈련이다...나는 영성 공동체의 공동 생활을 통해서, 연구와 기도의 고독을 벗어나 친교와 관계의 훈련으로 인도된다. 공동체는 나의 주관적 왜곡을 맏아 주는 제어 장치다...또한 공동체 생활은 삶 속의 사랑의 열매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고 제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세가지 훈련 각각의 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는 세속 교육도 숨은 형태의 영성 형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p.74

나는 학문 사회의 경쟁에서 살아 남음으로써 '성공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었으며, 자신만만하게 성인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 후 나의 자아상은 연신 난타를 당했고, 자기 확신을 위해서는 성공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원천이 필요했다)...

교육은 자아를 앎의 주체(knower)로 세계를 앎의 대상(known)으로 그린다. 또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여, 앎의 주체로서의 자아에게 앎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우월성을 부여한다.

앎의 주체의 특징은 무엇인가? 앎의 대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인식론(epistemology)이라 불리는 학문 분야에 속한다... 앎을 통해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곧 삶에서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된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인식론은 소리 없이 우리의 윤리로 탈바꿈한다...

이를 종교 전통의 언어로 말하자면,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지적 전통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최초의 인식론적 과오를 범한 것이다. 이 과오는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으며,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말 "이제 물리학자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에 나오는 과학자들이 범한 것이 바로 그 예다. 

지식에 대한 갈망 자체가 죄나 인식론적 과오는 아니다. 그리고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의도적인 무지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식의 '종류'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제하는 지식이다. 알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사랑이 아니라 호기심과 지배욕,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는 힘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객관주의로부터 진리로

전근대 시대의 교육받지 못한 지성은 사실적 관찰이나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주관적 기능-감정, 직관, 신앙-에 의존한다. 이러한 인식 방식은...세계를 주어진 선물로, 유기적 통일체로 받아들이며, 인식의 주체를 그것의 불가결한 일부로 여긴다. 그러한 지식은 세계를 생명 없는 '사물'로 축소시키지 않으며, 모든 것을 살아있고 고동치는 생명으로 가득 채운다...이는 바로 판타지fantasy를 이루는 재료들이다...감정 직관, 신안은 빈번하게 미신, 미숙한 이데올로기, 조잡한 심리 투사를 동반하게 마련이다...객관성을 향한 추구는 선한 영적 근거를 갖고 있다...자기 중심성이라는 죄에 대해 쐐기 역할을 해줄 수 있다...전근대적 지식의 문제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문제는 그 둘의 소외와 결별이다...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이러한 현대적 결별은,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세계 사이의 공동체성과 책임성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소외된 인식 방식-나는 이를 '객관주의(objectivism)라 부른다...객관주의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에 따르면, 인식 대상은 인식 주체와 별개로 '저쪽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원자물리학에서 정신과 물질, 나와 세계 사이의 엄밀한 데카르트적 구별은 이제 타당성을 잃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객관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그림에서 자신을 제거할 수 없다.

관찰 주체와 대상의 불가분리성은 사회과학에서는 더욱 명백해진다....우리는 독자가 작가의 작품에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가져옴으로써 비로소 '예술'이라 불리는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객관주의는 특별히 우리의 교육에, 즉 우릭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 속에 제도화되어 있다. 거기서 객관주의는 '숨은교육과정'이라는 힘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습적 교수 방법은 학생들이 객관주의적 세계관을 갖도록 형성시키고 있다...

교사는 인식주체와 인식 대상, 학습자와 학습 대상 사이의 중개자다. 인식론적 연쇄 사슬에서 살아 있는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어떤 이론이 아니라 바로 교사다. 교사가 중개자 역할을 하는 방식은 학생들에게 인식론과 윤리, 즉 앎과 삶에 대한 접근법을 둘 다 전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자유에 대한 멋진 말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만일 그것을 권위주의적으로 가르친다면,...실제로는 노예의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을 진리에 대한 내적 감각의 인도를 받으며 자유롭게 배우는 법과 자유롭게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육이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사실', '이론', '객관적', '실재' 등과 같은 단어들로 말할 수 없다...그 메시지는 '진리'라고 불린다. '진리'는 과거에는 앎과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핵심적 단어였지만,...오늘날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으며, 가치 있는 지식에 관한 논의에서도 중요한 단어가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진리를 갈망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환멸의 시대에 그 단어는 대개 낭만적 환상이나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진리'는...'언약(troth)'과 동일한 게르만 어근을 가진다. 사람들은 '진리'라는 단어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언약으로, 서로를 책임지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를 맺겠다는 맹세로, 미지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신뢰와 믿음을 굳게 하는 관계로 들어간다.

진리 안에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인식 대상과의 언약 관계로 들어가는 것, 우리의 지성이 따로 떼어놓는 것을 새로운 앎을 통해 재결합시키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아는 것일ㄴ 혼인 언약을 맺는 것,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그 인식 대상과 약속을 맺는 것으로서, 우리의 온 정성과 관심과 선의를 가지고 맺는 언약이다. 진리 안에서 아는 것은 또한 상대에게 자신을 알도록 허락하는 것, 무릇 참된 관계에 따르기 마련인 모든 도전과 변화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아는 것은 인식 대상의 삶으로 들어가며, 또한 그것이 우리 잔신의 삶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진정한 앎은 인식 주체와 그 대상을 하나로 결함시킨다. 비록 그 둘이 별개라 해도 서로 상대의 삶과 운명의 일부가 된다...

사실과 우리의 관계, 혹은 그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세계와 우리의 관계는 변화될 것이다. 진리는 인식 주체에게 인식 대상과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기 떄문이다. 인식 주체와 대상은 모두 독자적인 온전함(integrity)과 타자성(otherness)을 가지며, 한쪽이 다른 쪽으로 함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진리는 우리에게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은 서로의 삶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반응할 것을 요구한다.

진정한 앎에서, 우리는 세계에 우리의 주관성을 주입하지 않으며, 세계를 우리로부터 멀찍이 떼어놓고 우리 필요를 위해 조작하지도 않는다...그럴 때 앎은, 본디 논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모든 분열된 존재를 재결합시켜 준다.

 

p.96

3장. 가르침 배후에 숨겨진 가르침

관습적 교실

...교실은 독창적 탐구를 뒤한 장소가 아니라 권위자를 모방하는 자리였고, 협동의 장소가 아니라 학습자들 간의 경쟁의 장소였다.

 

숨은 교육과정

첫째, 관습적 교실에서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외부다...우리도 자연의 일부이며 역사의 일부라는 것, 우리도 우리 자신의 관점을 갖고 있다느 것 등은 인정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인 자비와 같은 덕목이 '교육을 통해 사라져 버렸음'을 의마한다...

만약 우리가 앎이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요구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학생들은 세계를 멀찍이 떨어져 바라봄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계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배우도록 초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인식주체로서 자아의 마음은 결코 탐구의 대상이나 인식의 대상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우리는 학생들을 계속 수동적인 상태로 놔두고 꾸준히 사실을 공급해 줌으로써, 그들에게서 열정을 제거해 내고자 노력한다. 관습적 교육은 자아를 세계 안에 두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방해거리로 여겨 치워 버리려 한다...

만일 앎이란 주관과 객관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종류의 교육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은 사실을 통해 완화되고, 사실은 열정을 통해 온기를 받아 인간이 거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지느 그러한 방식 가운데서 학생들과 학과는 서로 만날 것이다...

셋째, 인식주체로서의 자아를 고립시키는 경향이다. 학생들이 모였다고 해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교수법상의 편의에 불과하다....이 교수법은 과외를 대비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다...

만익 지식이란 공동체적 헌신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믿는다면,...공동체가 장려되는 교실들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우리는 상호 책임을 지는 참여자와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서로를 그리고 세계를 조작하는 자들이 된다....우리 지식이 우리의 내적 자아를 성찰하지 않은 채 그냥 둘 때 우리는 조작자가 된다...교육을 받는 내내 우리는 살아 남기 위해 조작하는 법을 배우고, 다음에는 그 습관을 졸업 이후의 삶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만일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그러한 유기적 관계를 믿는다면, 우리는 세계를 재구성하는 법이 아니라 세계의 복잡다단한 관계들을 배우는 법을 가르쳐 주는 교수법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실은 학생들 자신도 그런 관습적 교수법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교수법은 학생들에게도 안전을 주기 때문이다...많은 학생이 교사가 직접 숟가락으로 떠서 그들의 입에 넣어주는 학습 장식을 선호하며, 더 창조적인 역할을 하라는 교사의 요구에 두려워하며 도망쳐 버린다...

우리는 우리에게 회심(conversion)을 요구하는 지식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앎의 주체가 되어 세계를 바꾸기를(convert)원할 뿐, 변화를 요구당하면서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운다 함은 변화와 대면한다는 것이다...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은 안일한 경쟁 본능을 넘어서 협력이라는 어려운 임무로 우리를 부를 것이다. 자연에 대한 지식은 지구에 대한 부주의한 착취가 아니라 주의 깊은 돌봄으로 우리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을 요구한느 진리들을 추구하기보다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사실들을 추구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회심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객관주의적 교육을 채택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또 다른 방법

사막 교부들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 중 하나로서, 이 4세기 구도자들의 경험은 기독교 전통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첫째, 그들은 기독교가 4세기에 걸친 박해 시대에서 벗어나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는 시대로 접어들던 시기에 살았다. 그러나 이 사막의 구도자들은 진리와 힘의 결연 관계라면 어떤 것이든 의심을 품었다...

둘째, 이 은둔자들은 서구의 관상 기도 전통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다. 그들의 고독한 추구로부터 수도원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간접적으로 대학들이 생겨났다. 둘 모두 본래는 인류가 타락을 통해 잃어버린 앎,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방식인 사랑에 근거한 앎을 회복하는 일에 헌신한 공동체들이었다...

 

몇몇 형제들이 아바 펠릭스를 찾아가서 말씀을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노인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간청을 하자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아바시여, 그렇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말씀이 없다네. 사람들이 노인들을 찾아가 말씀을 청하고

또 자신이 들은 말을 실천하던 때에는, 하나님은 노인들에게 할 말씀들을 주셨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말씀을 청하고서도 들은 것을 행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노인들로부터 말씀의 은총을 거두어들이셨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아무런 말씀을 갖지 못하게 되었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네."

이 말을 듣자 형제들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바시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그들은 삶 대신 말을, 실재 대신 보고를, 삶에 대한 환상만 만들어 낼 뿐 삶에 대한 책임은 면제시켜주는 말, 자신이 의지하고 도피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말을 원했던 것이다...

참된 말과 참된 세계는 인간 정신의 구성물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 우리가 지식으로 세계를 만들려는 환상을 버릴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으로 그 진리를 따라가야 한다. 이런 교육에서는 교사, 학생, 학과의 관계가 순종의 관계가 된다.

'순종'은 노예적이고 무비판적인 추종을 뜻하지 않는다. '순종'은 '듣는다'는 의미의 라틴어 어근 '아우디레'에서 나왔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분별할 줄 아는 귀, 당시 상황의 실재에 귀기울일 줄 아는 귀, 모든 실재에 반응하게 해주는 듣기가 필요하다...

교사의 임무는 학생들에게 사실들을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내면에 들어 있는 진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그저 높은 학점을 받아 보수가 높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데만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배움의 열정으로 충만한 학생을 가르칠 때 자신의 사고와 감정이 일깨워지는 것을 느껴본 교사라면 누구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정말로 그들의 교사에게서 말을 불러일으킨다. 돈만이 배움의 목적인 학생들은, 돈만이 목적인 가르침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엄연히 공정한 일이다...가르치는 일에는 바로 이와 같은 자기 분열의 위험이 따른다. 자신은 삶 속에서 따르지 않는 거창하고 힘있는 말들을 하는 말꿈이 되어 버릴 위험 말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교사로서의 진정한 말들을 잃어버리고 만다...

말들이 떠나기 시작했던 거슨 바로 내가 삶 속에서 그것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받은 진리를 육화하지 못했고, 따라서 육신을 갖지 못한 말들은 생명력도 재생력도 없는 해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서 언급했던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전에 글로 썼던 공동체 비전을 직접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의 말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진리에 따라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서 진리를 말하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진리 전체에 순종해야 한다. 자신이 진리대로 사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는 진실도 포함해서 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또 서로에 대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진리의 말들은 계속해서 주어질 것이고 우리는 그 말들을 더 온전히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엄하고 호된 사랑에 근거를 둔 진리 개념으로써 응답할 줄 아는 교사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p.119

4장.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인격적이다

그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제시하셨다...전에는 추상적이고 원리적이고 명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던 진리는, 예수님을 통해 돌연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모양을 갖게 된다... 이 진리로의 부르심은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그분과의 공동체,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창조 세계와 창조주의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진리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 침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방식 중 하나로 "예수님을 안다"는 말을 해 왔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만 있으면 물리학이나 심리학이나 영문학 같은 다른 모든 영역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신자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오로지 '종교'라 불리는 영역으로만 한정시키고는, 서로 완전히 무관한 것들인 양 다른 형태의 앎을 추구하는 신자들이 있다...

예수님 안에서 인격적 진리의 패러다임을 발견하기 위해 반드시 그분을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진리는 인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 개인의 심장부에 있는 진리의 형상을 긍정하는 것이다...오늘날 기독교의 도덕적 다수파 혹은 이술람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몇몇 분파주의 운동들이 공동체에 가하는 위협은, 자신의 편이 아닌 사람들 모두를 가능하면 개종의 대상으로, 필요하다면 제거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객관주의로부터 유래한다.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

관계의 질에 강조점을 두는 기독교의 인격적 진리는, 인식론 즉 앎에 대한 접근법이 아니라 흔히 윤리 즉 삶에 대한 접근법으로 여겨진다...이제 나는 어떻게 기독교의 인격주의(personalism) 윤리가 참여와 책임성의 인식론이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왜 우리는 감각과 이성을 인간 자아와 세계 사이의 유일한 상응 지점으로 가정해야 하는가? 인간의 자아에는 직관, 공감, 감정, 신앙 등 그 밖의 다른 역량들도 풍부한데 말이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실재의 일부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 양식이 다양하다는 것은 실재의 본질도 마찬가지로 다양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다이쿠아티오'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감각과 이성을 넘어 전인(全人)의 실재로까지 나아간다...인간이 바깥 세계를 아는 도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분명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인간 전체가 단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아다이쿠아티오'의 위대한 진리는, 인지도구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면 살재를 편협하고 빈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자아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적이며, 그 공동체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의지한다. 실재의 구조는 경험주의나 이성주의의 원칙만 가지고는 다 파악할 수 없다.,.관계-사실이나 이성이 아니라-가 실재를 여는 열쇠다. 지식 탐구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사물들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변경시키는 데 있지 않다. 가장 깊은 소명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유기적 공동체에 이격적으로 참여하는 것, 진리의 다른 이름인 돌봄과 책임성의 관계망에 참여하는 것이다.

관찰하기와 관계 맺기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관계는 언제나 쌍방적(two-ways)이라는 데 있다. 인간적 도구 전체를 사용하여 실재를 알 때, 우리는 또한 우리가 앎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한다....우리는 우리가 변화의 주체인 동시에 변화의 대상이 되는, 사호적 앎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된다.

알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 배후에 자리하는 가장 참된 열정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를 다시 엮어 내려는 갈망, 그 안에서 자신의 합당한 자리를 찾으려는 갈망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 전체를 가지고 우리와 세계를 본래의 사랑의 형상으로 재형성시켜 주는 관계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리를 안다는 것은, 창조 세계 전체와의 상호성의 관계로 우리의 인격 전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앎의 주체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앎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런 관계들 속으로 말이다.

 

진리는 공동체적이다

진리가 인격적이라는 말은 신중한 정의와 조건 아래서 주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객관주의에 대항하다가, 마찬가지로 위험스러운 주관주의(subjectivism)로 빠지기 쉽다... "너에게는 너의 진리가 있고 나에게는 나의 진리가 있으며 그 둘의 다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는 것이 요즈음 객관줒의의 폭정에 저항하는 많은 이들이 내거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표어다... 만약 나의 개인적인 지각이 진리의 척도라면, 만약 나의 진리가 다른 사람의 지각에 의해 도전받거나 확장될 수 없다면, 이것은 그저 타자를 객관화시키고 멀찍이 둠으로써 인격적인 변화의 도전을 회피하려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자아를 고립시키고, 인식 주체들의 수만큼 많은 세계를 만들어 내며, 공동체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종국적으로는 타자를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주관주의의 배후에 자리한 충동은 반객관주의적이긴 하나, 그것은 결국 우리를 같은 종착지로 데려간다. 진리가 우리와 우리 세계를 책임성과 상호 변화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로 엮을 기회를 갖지 못하는 곳으로 말이다...

기독교적 이해에서는, 진리는 '저쪽 바깥'이나 '여기 안쪽'에 있지 않고 둘 모두에 있다. 진리는 우리 사이에 있고 관계 안에 있으며, 독립적이지만 책임적인 자아로 이해되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대화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대화는 인격적 진리를 주관주의에서 구해 준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는, 타자 안에는 나의 지각과 필요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온전함이 있음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인격적 진리는 우리를 개인주의가 아니라 관계와 대화와 상호 변화의 공동체로 이끈다...우리는 인격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인격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 각자는 축소판 공동체다. 즉, 우리 각자의 인격성은 수많은 자아들-가족과 친구들과 동료들과 낯선 이들-의 내적 상호 운동을 통해 형성된다. 만일 인격으로서 성장하고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생겨나는 공동체에 의식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들에 대한 우리의 요구일 뿐 아니라 타자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인격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며 오직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인격이 되어 갈 수 있다.

 

p.136

진리의 상호성

인격적 앎에서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관계는, 관찰 주체와 고나찰 대상의 관계에 나타나는 경직된 규약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두 인격 사이의 공명(共鳴)과 더 유사하다.... "사랑 자체가 지식이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된다." ...'알다'를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신약 성경 단어도 성관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모든 지식은 인식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인격적 참여를 수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내가 대상을 알기를 추구할 때, 또한 그 대상이 나를 알기를 추구한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논리다...위대한 소설을 읽는 도중 문득 그 소설이 자신을 읽고 있음을 발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에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진리를 밝히 드러낸다. 그러나 진리 또한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해 준다... 진리의 핵심에 가장 신속하게 도달하는 인식주체는, 섹계와 만날 때마다 "저기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뿐만 아니라 "이 만남이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 보여 주는가?"라고도 묻는 사람이다.

 

p.142

모든 것을 아는 지식

인격적 진리라는 은유는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 주는가?... 우리가 연구하는 주제에 의해 오히려 우리 자신이 '발견되고 이해된다'는 느낌을 갖는 것, 진리는 그 주체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가 진리를 찾을 때 진리가 우리를 찾아온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생태학적 인식론은 물질 세계 안의 비인간 구성원들을 진리의 공동체 안에 우리와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는 존재들로 인식한다...추상적 개념들의 인격적 뿌리를 회상하고 되찾을 필요는 있다...우리의 지적 전통의 위대한 추상적 개념들은 본디 인식 대상인 세계에 대한 인식 주체의 열정적 참여로부터 비롯되었다. 형상과 질료에 대한 플라톤의 고나념으로부터, 노동과 가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E=mc²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러한 추상적 개념들의 배후에서 세계로 하여금 비범한 깊이로 자신에게 말하도록 허락한 인격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어떤 관념을 연구할 떄, 우리는 그것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소리로 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첫 질문은 "그 사상이 얼마나 논리적인가""가 아니라 "그 뒤에 누구의 목소리가 잇느가? 그 사상을 출현시킨 인격적 실재는 무엇인가? 어떻게 나느 그 사상가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들어가 거기에 응답할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노리와 비판적 지성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앎은 육체 없는(disembodied) 지성으로 데이터를 평가하는 일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반드시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인격적인 대화, 즉 인식 주체가 세계에 순종으로 귀기울이는 대화가 필요하다...이제 우리는 인식 대상을 우리의 그릇된 지배나 파멸적 통제를 받는 무력한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대화해야 할 살아 있는 자아로 대하는 지혜를 발견할 준비가 된 것 같다.

 

p.150

진리에 대한 순종

진리의 공동체를 묶어 주는 기본적인 끈은 무엇인가?  진리는 어떤 종류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가? 아바 펠릭스 이야기가 보여 주듯 여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순종'이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노예적 신봉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아들이 서로 대화 속에서 주의 깊게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성경 전반에 걸쳐 앎과 순종적 듣기(obedient listening)는 함께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말씀하신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진리라고 불리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듣고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여기서 예수님은 진리를 아는 것과 순종을 연결지으실 뿐 아니라, 순종과 자유를 연결지으신다. 이러한 연결은 단순히 기독교의 경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자유는 진리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취된다는 이 사상은, 지식을 통해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교양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의 영적 전통과 세속 전통 모두,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자유는 오직 진리에 대한 순종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확언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유와 순종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는 자유를, 자기를 추구하는 자아 즉 전통과 공동체의 유대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의 자율인 양 여긴다...

객관주의 자체가 순종에 대한 의심을 품도록 만들어 왔다. 객관주의가 보기에는, 순종이란 주관적 편견을 증대시키고 세계의 자율적 대상들의 독자적인 온전함을 왜곡시키는 헌신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객관주의 논리는 권위주의적 인물의 등장과 전체주의 사회의 발흥 그리고 부자유의 증가에 기여해왔다...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박약한 교리의 다원주의와, 진리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상에 찬동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우리를 대화로 부르지는 않다. 그러기에 그것은 각자를 격리시키며, 그것이 저항하고자 했던 객관주의만큼이나 강력하게 공동체를 파괴한다. 결국 이러한 상대주의 이론은 만인이 만인을 대항해 싸우는 전쟁, 진리가 아니라 힘이 이기는 전쟁으로 우리를 이끈다...

바로 여기서 순종-존중하는 들음과 충실한 응답-의 끈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진리는 우리에게 순종 안에서 서로 귀기울일 것을, 들은 말에 응답할 것을, 언약 공동체의 끈들을 인정하고 재창조할 것을 요구한다.

어원을 살펴보면, '순종(obedience)은 단순히 '듣기'를 의미할 뿐 아니라 '아래로부터 듣기'를 의미한다...진리 안에서의 삶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 공동체에 속한 것이 된다...객관주의자가 '사실'을 갖고 있으면, 더 이상 어떠한 듣기나 어떠한 다른 관점도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진리를 인격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는 객관적 제국주의나 주관적 상대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진리는 우리가 다원적 실재에 순종할 때, 또 대화나 합의나 인격적 대화에서처럼 당사자 모두가 인내심을 갖고 공동체적 언약의 끈에 자신을 복종시킬 때 발견된다.

 

p.157

5장.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공간의 의미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p.160

개방성, 경계 그리고 환대

무지하기에 교육을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자주 우리로 하여금 투사와 허세로, 배움의 공간을 가득 메우도록 만든다...

첫째, 우리는 무지는 진리를 향해 가는 첫 단계라는 것, 무지가 일으키는 불안에는 즉각적인 대답이 아니라 미지로의 모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진리를 찾으려 애쓸 뿐만 아니라 또한 진리가 우리를 찾으려 애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간의 개방성은 그 경계들의 견고함에 의해 만들어진다. 배움의 공간이 무한히 개방될 수는 없다... 도시의 확장, 광야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쉴새없이 세계 뉴스를 들려주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미디어에 의해, 우리는 사막의 지식을 박탈당하고 있다. 열린 배움의 공간을 창조하기 원하는 교산느 그 경계를 신중하게 정해서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 낸 구조물들이 허물어질 때 찾아오는 황량함과 대면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배움의 공간은 고통스런 장소일 수 잇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또 다른 특징인 환대(hospitality)가 있어야 한다. 환대란 우리가 서로를, 서로의 갈등을, 서로의 새로운 생각을 개방적이고 주의 깊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낯선 이를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낯설음을 경험하도록 하신다. 따라서 안정을 깨뜨린다는 이유로 낯선 이나 낯선 사상을 박대하는(inhospitable) 것은 진리의 가능성에 대해 대적하는 것이다. 환대는 윤리적 덕목일 뿐 아니라 인식론적 덕목이기도 하다.

배우는 공간에 환대가 필요한 이유는, 배움에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움에 따르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무지의 폭로, 잠정적 가설ㄹ에 대한 검증, 거짓되고 치우친 정보에 대한 문제 지기, 서로의 사상에 대한 비판 같은 고통스러운 일들 없이는 어떠한 배움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p.167

물리적, 개념적, 극적 공간

개방성, 경계, 환대. 이러한 특질들을 갖춘 배움의 공간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가장 눈에 쉽게 띄는 것으로 교실의 물리적 배치를 들 수 있다. 의자가 강단을 향해 줄지어 배치되어 있을 때, 배움의 공간은 각 학생과 교사 사이에 시선과 주의가 오고 가는 좁다란 길로 한정되어 버린다...그러나 의자를 원형으로 배치함으로써 우리 사이에 열린 공간을 만들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면, 무언가 다른 메시지가 전달된다...

우리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수백 쪽 분량의 텍스트를 주고 '속독하는' 법을 익히라고 다그치지만, 수도사들은 한 쪽이나 한 구절, 혹은 한 줄에 대해 여러 시간, 여러 날을 들여 깊이 숙고한다. 그들은 그런 독서를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즉 '거룩한 독서라고 부르며, 관상 기도를 하듯 책을 읽는다...좋은 텍스트는 그것이 주는 대답만큼이나 많은 질문을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적은 분량의 텍스트는 집중 탐구를 위한 장이 될 수 있다. 역사적 문헌에서 뽑은 한 구절, 소설의 한 장면, 시 한 편, 혹은 음악 한 곡이 이런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열쇠는 학생들을 텍스트의 경계 내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즉 그들이 근거 없는 견해나 희망 사항에 불과한 환상이나 아무 관련 없는 사실들 속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를 우리의 수도원 암자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그는 첫번째 수업에서, 그 날 다루어야 할 시대의 중요 사건들을 개괄하는 자세한 강의를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쯤 엄청난 양의 정보에 짓눌려 있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오늘 필기한 노트를 모두 찢어 버려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말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은 사실이 아니기 떄문입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여려분이 마땅히 의심했어야 할 만큼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강의 중에 가끔식 더 많은 거짓말을 슬쩍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그것들을 알아채고 바로잡도록 나에게 도전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나는 내가 한 거짓말을 쓰 시험 답안은 오답으로 처리할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한 말이라도 그것들은 틀린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수업 끝."

...진리는 권위 있는 선언의 결과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협동적인 분별의 결과임을 배우는 공간, 오류를 발견하기 위해 학생들이 서로 의존하는 공간, 학생들을 그들 자신과 서로의 교육에 참여하도록 초청할 뿐 아니라 강권하는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배움의 공간을 여는 데 드라마(drama)가 하는 역할을 보여 준다...지금 나는 관객들을 연극 아능로 끌어들일 줄 아는 교사, 학생들과 교사와 주제를 모두 진리의 드라마 속으로 인도해 들이는 공간을 창조할 줄 아는 교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과 말

종종 나는 침묵의 시간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겨우 몇 분에 불과하지만, 그 시간은 우리에게 자신을 가라앉히고 중심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우리의 지성과 감정을 흐트러뜨려 진리를 회피하게 하는 것들을 물리칠 수 잇느 기회를 준다. 나느 이 활동을 '기도'라고 부르진 않지만, 사실 그것은 기도다. 그 시간에 우리는 우리가 서로와 또 세계와 본성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만큼 고요한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때때로 침묵이 얼마나 새롤운 명료함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 시간 동안의 대화 시간 중에 한 학생이 두 번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결과는 상당히 놀랄 만하다. 대화가 자주 끊어지고 느릿느릿 진행되기에, 보통의 자유 토론 때보다 훨씬 더 만흔 사람들이 말을 하게 된다. 적극적이고 말이 많은 학생들(보통 때는 대화의 80%를 지배하는 20%의 학생들)은 제어와 규제를 받게 된다. 그들은 꼭 해야 할 말을 신중하게 선별해야 한다. 반면, 조용하고 내향적인 학생들에게는 전과 달리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또한 그들은 말해야 하는 책임을 느끼게 된다. 이제 더 이상 토론의 짐을 열성적인 학생들에게 전부 맡겨 벌리 수 없기 떄문이다. 나는 빠르게 진행되는 토론에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 학생들 중 많은 이들이 실은 깊은 통찰력의 소유자인 것을 발견한다. 아마 그들은 삶의 대부분을 조용히 사색하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만남을 갖는 대부분의 장소에서, 침묵은 위협적인 경험이다. 침묵은 우리를 당혹스럽고 어색하게 만든다. 침묵은 일종의 실패처럼 느껴진다...

나는 나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 혹은 수업중에 생기는 긴장의 순간간을 해소하기 위해 성급하게 반응한다. 나는 긴장이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잊는다...나는 진정한 해결책과 진정한 해답은 오직 학생들 자신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잊는다...

침묵이 우리에게 질문하기를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 있는 말에 귀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경험, 상대방과 다루고 있는 주제에 귀 기울일 공간을 열어 주는 질문들을 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관습적 교육을 넘어 '명료화 모임'(clearness committee)이라 불리는 퀘이커교도들의 과습에서, 질문을 통한 교육의 모델을 발견한다. 퀘이커교도들은 진리가 우리를 찾아온다는 믿음에 입각하여 침묵 속에 잠겨들어가는 영성을 갖고 있다...

이 과정은 먼저 도움을 받고자 하는 커플이나 개인이 당면한 질문이나 문제를 배경 지식과 더불어 종이에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뒤 그들은 대여섯 명의 사람을 위원으로 선발하고 그들에게 그 종이를 보여준 뒤 함께 대화히기 위해 모여 앉는다. 그러나 이 대화에는 한 가지 확고한 규칙이 있다. 위원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그들 자신의 대답이나 해결책을 제공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질문만 할 수 있다...모임이 진행될수록 질문과 대답 모두 깊이가 더해 간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충고나 해답을 주려는 버릇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듣는 법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이미 학습자 속에 있던 진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p.181

감정을 위한 공간 만들기

교사들은 교실에서 감정적 공간, 즉 감정이 생겨나고 다루어지도록 하는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감정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종류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다...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낯설음, 무지를 드러내야 하는 것, 교실 밖에서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급우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자존감과 정력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는 실패의 가능성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교사들 또한 두려움을 갖고 교실에 들어간다...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것에 대해, 나 자신의 무지가 폭로될 것에 대해, 흐릿한 눈과 따분해하는 표정들을 만날 것에 대해 나는 두려워한다... 그들이 나의 긍정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나 역시 그들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먼저 교사가 감정을 위한 공간을 여는 일에 나서야 한다... 가르치는 일이나 배우는 일이나 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우리는 배움의 과정에서 인간적 감정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감추어진 감정이 배움에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감정은 전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지성보다 감정이 진리에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성은 사물을 분석하고 분리하려 하는 반면, 감정은 관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소개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교실에서는 교사와 연구 주제만이 자신을 알릴 기회를 가질 뿐 학생의 주관적 경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을 번한느 분명한 표지다...

학기 내내, 나는 학생들의 감정에 민감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반응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질문을 격려했다. 나는 그가 '질문은 사고의 경건한 행위'라고 했던 하이데거의 말에 동의했으리라 생각한다....그래서 나는 질문을 했는데, 그는 내 질문을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주어 나를 놀라게 했다."

학기 말에 나는 10분이나 15부 정도를 들여, 그간의 수업에 대해 공동 평가 시간을 갖는다. ..이런 평가는 배움의 공간을 깨긋이 치우는 데 도움이 된다. 때때로 그것은 우리에게 인식과 관련된 문제들을 지적해 준다. 어떤 문제에 대해 절반의 학생들만이 이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감정들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감정이 정직하게 표현되는 배움의 공간,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몇몇 다순한 기술을 사용할 줄 아는 교사에 의해 창조되는 공간에서는, 진리의 공동체가 우리 가운데 잘 자랄 수 있고 우리도 그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다.

 

p.189

6장.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

진리의 규칙

교실을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장소로 만든다는 것은 교실과(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이는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탐구에 질서를 부여하고, 우리 모두-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를 상호 순종적인 언약 관계로 인도해 줄 수 있는 규칙 말이다.

 

순종의 복합성

순종이란 분별하여 듣고, 그렇게 들은 말에 내포된 인격적 의미에 신실하게 응답한다는 의미다...상대의 본성이 우리의 응답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본성은 무지나 편견, 탐욕으로 인해 어두워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부합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 진리에 대한 충실 혹은 순종으로 서로에게 응답해야 한다...

각 사람이 외적 요구에 대한 부합이 아니라 내적 진리에 대한 충실 안에서 말하는 대화의 과정은 우리의 공동체적 관계를 점검하고 비판하며 정화해 준다...

교실이 어떻게든 학생들의 삶 속에 있는 관계와 갈등을 포용해 줄 수 없다면, 학생들은 계속 교사에게 '거짓말'을 할 것이고, 배움의 과정을 나머지 삶으로부터 계속 떼어 놓을 것이다.

 

합의에 의한 학습

그룹 점수는 거의 언제나 개인 점수의 평균보다 높다. 이는 합의 도달하는 과정이 그 그룹의 지식을 구성원들의 평균 지식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룹 점수가 종종 그룹 내 개인 최고 점수보다 높다는 것이다...

먼저 이 규칙은 서로에게 순종하도록 만든다...

합의의 과정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이 점수가 종종 보여 주듯이, 우리는 혼자서 생각할 때보다 공동으로 생각할 때 더 똑똑해진다는 단순한 가정에 기초한다. 핳ㅂ의는 개인의 단편적 지식을 더 온전한 지식으로 변화시켜 주며, 이는 학생들이 서로 및 당면 주제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다...

훌륭한 합의 과정이란 무엇인가?...

1. 자신의 판단을 관철시키려고 논쟁을 벌이는 일은 피하라. 최대한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당신의 입장을 제시하고, 그런 뒤에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 전에 먼저 다른 구성원들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주의 깊게 생각하라.

2. 토론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꼭 승자와 패자를 가리려고 하지 말라. 대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차선책을 찾으라.

3. 단순히 갈등을 피하고 일치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바꾸지는 말라. 합의가 너무 빨리 쉽게 이루어질 때, 오히려 의심을 품으라. 합의가 이루어진 이유들을 자세히 살피고,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유사한 혹은 보완적 이유로 그 해결책을 받아들이는지 확인하라.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기초를 가진 입장만 받아들이라.

4. 다수결투표, 평균 내기, 동전 던지기, 흥정 등 갈등을 줄이기 위한 수단을 피하라. 당신과 다른 의견을 가졌던 구성원이 결국 당신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해서, 다음 번에는 그의 의견에 동의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5. 의견 차이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찾아내고, 결정 과정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려고 노력하라. 정보와 의견의 범위가 광범위한 만큼 타당한 해답에 도달할 기회 역시 커지는 것이므로, 의견 차이는 오히려 귿르의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의 창조적 역할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들은 자신의 확신에 대해 용기를 가지고 말하지만, 또한 교정과 변화의 가능성도 열어놓는다...구성원들이 서로를 편안하게 느낄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환대가 있는 학습공간은 배움의 고통스런 부분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는 나의 주장에 대한 확증인 셈이다...

그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사실들을 수집하고 지식을 서로 나누며 상충되는 해석을 제시하고 검토한다. 그러한 자료와 해석의 갈등으로부터 더 온전한 지식이 생겨난다...

나는 큰 규모의 학급에서는 학생들이 소그룹 토의를 '잡담'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법을 훈련시킨다. 우선 우리는 합의를 도출하는 규칙들에 대해 토의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다음 나는 한 소그룹의 학생들로 하여금 전체 학급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규칙들을 사용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토의하게 한다. 그들이 토의를 다 마치면, 나는 나머지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켜본 그 그룹 과정에 대해 논평하도록 한다. 규칙들을 잘 준수했는가? 규칙들을 잘못 적용하거나 어긴 적은 없는가? 그럴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뒤, 나는 또 다른 소그룹을 선택해 같은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훈련을 심화시킨다. 이런 방법을 통해 학생들은 합의 과정을 진행시키는 능력을 얻게 되고, 소그룹으로 나누어져도 충분한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

 

주제의 목소리

주제 자체가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써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타자의 목소리에 순종으로 귀기울이면,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더욱 분명해지고 더욱 정직해진다...

기독교의 중심은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라 한 인격이다...당신은 그저 상대와 함께 있다는 데서 행복감을 느끼며 편안하게 쉬게 된다...자연스러운 우정의 발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격적 사귐이다.

토라를 배우는 사람은 마치 아버지로부터의 편지를 받는 아들과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며, 간절한 열망을 갖고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우리는 아돌프 히틀러의 말을 이와 같은 명상적인 방식으로 읽을 때, 악과의 관계로 들어간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악은 단순히 '저쪽 바깥', 즉 타자들이나 비인격적 사건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이런 형태의 독서와 그 열매를 학생들이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해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의 내적 대화를 종이에 적도록 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우정

당면 주제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교사에게, 학생들을 동등한 동반자로 여기고 그 관계로 초대할 줄 아는 교사에게 달려 있다. 주제와 풍성한 우정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학생들도 그 우정의 유익을 얻기를 바라는 교사가 베푸는 환대, 이것이 바로 이와 같은 가르침에 필요한 가장 넓은 의미의 환대다.

종종 학생들은, 비록 가르치는 기술 면에서는 능통하지 못하더라도 가르치는 주제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는 교사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열정이 전염되는 것 이상의 문제다. 그러한 교사들은 그 주제와 자신이 맺고 있는 우정 관계를 보여 줌으로써, 학생들이 그 낯선 존재-주제-를 만나는 일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을 없애 준다...

우정의 은유가 교실은 언제가 즐겁고 편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정의 진정한 시금석은 갈등을 견딜 수 있는 능력, 긴장을 관계의 창조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역량이다... 교사는 마치 연인처럼 그 주제와 사랑싸움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상대 및 그 관계를 긴장시키기도 하고 시험하기도 해야 한다...

문제는 교사의 불안과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우리는 먼저 자신의 내면에 진리를 위한 공간을 열어 놓아야 한다.

 

p.219

7장. 가르치는 이의 영성 형성

내적 변화

아바 펠릭스처럼 나는 그러한 세력들을 거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진리에 대한 순종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영성 형성 훈련을 통해서 말이다...

교육은, 이익과 힘을 얻기 위해 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마음까지 지배하고 조작하려 하는 경제 제도의 노예로 저락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려는 교사들은 수많은 외부의 적과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영적 덕목들

겸손은 '타자'에 주목하게 하는 덕목으로서, 학생이든 주제든 타자의 정체성과 목소리는 진리 안에서 알고 가르치는 일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 죄로서, 체스터톤(G. K. Chesterton)은 그것을 "우주에 비해 자신을 터무니없이 크게 생각하느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칼 도이취(Karl Deutsch)에 따르면, 겸손이란 "자기 바깥의 사실과 메시지에 대한 태도로서... 비판 및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며...타자들의 필요와 욕구에 대한 민감성과 반응성이다."

순종이 진리의 공동체에 대한 상호 복종을 의미할진대, '우주에 비해 자신을 터무니없이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

믿음이란 우리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겸손과 믿음...이 둘 사이의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들을 때와 말할 때, 받아들일 때와 거절할 때, 공동체적 요구를 따를 때와 공동체적 요구가 따라오도록 만들 때를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도이취는 "숭상이란 큰 것보다 작은 것을, 큰 맥락보다 작은 맥락을 더 중요시하기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라고 말한다.

겸손과 믿음, 우상숭배 아닌 숭상 등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가르칠 수 있게 하는 역설적인 자질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속에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계명은 사랑과 반대되는 두 상극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기 비하와 자기 우상화다.

교육에서 어떻게 우리는 자유와 훈련이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요구를 화해시킬 수 있을까?..

흔히 '우연한 깨달음' 혹은 '번뜩이는 통찰'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사실상 그것은 바로 은혜다.

 

학문의 훈련

이 교사들의 광범위한 관심사는 그들이 가르치는 전문 분야에 대한 그들의 접근에서도 넓은 공간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낯선 미지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참험하는 교사에게는, 겸손과 은혜에 대한 개방성이 자라난다. 계속해서 그 교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며, 그 결과 나타나는 지성의 개방성은 학생들과 주제가 신선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한다...

교사들은 다시 학생이 됨으로써, 전문 분야를 벗어나는 훈련을 심화시킬 수 있다. 교사가 다른 이의 교실에서 학생이 되어 본다는 것은 사실 이것을 훨씬 넘어서는 일이다. 그들은 바로 '자리 바꾸기'라 불리는 영성 훈련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역량의 확장, 학생들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의 확장이다...

사실과 감정이 모두 표현되고 응답될 수 있는 순종적 듣기의 분위기를 확립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침묵 속에서

침묵 속에 있으면 이성적 지성은 전략을 다해 진리를 찾아가는 일에 지치게 되고, 대신 우리를 찾아오는 진리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게 된다...

우리는 침묵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대상이 아니시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다른 자아들, 모든 피조물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고독 속에서

침묵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이라면, 고독은 우리 자신을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준다...

고독이란 일상적인 일, 의존하는 대상, 여러가지 역할로부터 가능한 한 거리를 둔다는 의미다...

고독과 공동체는 영적 삶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역설의 양극으로서 공존한다...공동체에는 그 공동체의 유대를 새롭게 해주는 고독이 필요하다...우리는 참으로 홀로 있는 경우도 드물며, 다른 사람들과 참으로 함께하는 때도 드물다. 바로 이것이 대중 사회와 대중 교육의 공허함이다...

공동체란, 각자 자신의 정체성과 독자적인 온전함을 가진 개별적 인격들, 고독한 자아들 사이의 관계의 그물망이다...만일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들여오기 원한다면, 파괴적 망상과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적 진리를 들여오고자 한다면, 고독 훈련은 필수적이다. ..

우리가 자아 정체성과 활력을 위해 얼마나 외적 요인에 의존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생명 자체를, 우리가 하는 일, 역할,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어내는 반응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고독에 의해 제거되자, 우리의 생동감도 함게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그 상실을 지루함으로 경험하는 것이다...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군중 속에 있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바쁘고 정신 없는 상태로 지낼 수 있으며, 내면의 어둠을 회피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해버릴 수 있다...

자유와 치유를 가져오는 고독 훈련은, 그저 끈기를 가질 것을, 인내를 가지고 자신과 대면할 것을, 자신이 세계에 투사했던 것들을 거두어 그 원천을 자신 안에서 발견할 때 찾아오는 고통을 견뎌낼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고독은 결국 평온한 은혜의 선물이자, 우리가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늘 찾아오는 선물, 즉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은혜를 제공한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탄식 자체가 기도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말이 동이 날 때도 여전히 말씀(the Word)이 주어지며, 지식이 동이 날 때도 여전히 누구나가 우리를 안다는 것을 배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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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슴의 발 | 작성시간 12.03.06 감사합니다
  • 작성자스포츠포토 | 작성시간 12.03.0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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