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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증: 1494. [역경의 열매] 석창우 (1-15) “주와 함께한 ‘팔 없는 36년의 삶’… 사고 전보다 행복”

작성자평안함|작성시간23.09.27|조회수97 목록 댓글 0

 

 

***간증: 1494. [역경의 열매] 석창우 (1-15) 주와 함께한 팔 없는 36년의 삶… 사고 전보다 행복

 

전기 점검 중 고압 전류에 감전, 절망한 순간 모든 걸 예비해오신 하나님… 붓 들게 하셔

 

석창우 화백이 지난달 14일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붓을 끼운 오른쪽 의수를 들어보이고 있다. 뒤편으로 그가 직접 쓴 요한3서 1장 2절 말씀과 경륜 선수 그림이 보인다. 

 

어느덧 두 팔로 살아온 시간보다 의수에 의지해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아졌다. 2015년 하나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의수에 붓을 끼운 채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난 그때부터 늘 사람들에게 말한다. 손이 있어 내 맘대로 살아온 30년보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손 없는 36년의 삶이 더 즐겁고 행복했다고.

 

1984년 10월 29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 하나님께선 당시 29살로 전기관리자였던 내 두 팔을 모두 가져가셨다. 당시 일터였던 공장 변전실에서 내부 전기설비 점검을 하다 2만 2900V 고압 전류에 감전됐다. 이 사고로 두 팔과 왼쪽 발가락 두 개를 잃었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잘린 두 팔 언저리엔 찌릿한 환상통이 찾아온다. 하지만 주님께선 지난 삶 모든 순간 나와 함께 계시며 내 고통과 함께하셨다. 역설적으로 두 팔이 온전했을 땐 상상도 못 했던 화가의 길을, 두 팔을 잃은 내게 넌지시 열어주시더니 지금까지 이끌어 주셨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하나님은 오히려 내 모든 걸 예비하시고 계셨다. 돌이켜보면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의 연속이었다. 평범한 전기기술자로 살았을지 모를 내 인생에 찾아오신 그분은 사고로 잃은 내 두 팔에 붓을 들게 하셨다. 2012년 런던올림픽 팀하우스코리아에서의 퍼모먼스를 시작으로 2014년 소치 동계장애인올림픽을 거쳐 2018 평창 동계장애인올림픽 폐막식 퍼포먼스까지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는 무대에 나를 기어이 세우시더니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위대함을 전 세계에 알리셨다.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부족한 날 세우고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학창시절 처음 만난 하나님은 내가 그를 잘 모를 때도 묵묵히 옆에서 나의 길을 예비해오고 계셨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선 사고 전과 후 학교와 병원에서 만난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계속 자신의 말씀과 뜻을 내게 전하시고자 하셨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사고 이후의 삶이 더 즐겁고 행복했노라고.

 

내겐 이름 앞에 붙는 호(號)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나중에 설명할 금곡(金曲)이고, 다른 하나는 유빙(流氷)이다. 빙산이 바다 위에서 유유자적하게 놀다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닷물과 동화되는 삶을 살겠다는 뜻을 담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흘러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다.

 

약력=1955년 5월 22일 경북 상주 출생. 명지대 전기공학과 졸업.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한국서예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회원. 수묵 크로키의 대가로 초·중 고 교과서 10곳에 작품 수록.

 

* [역경의 열매] 석창우 (1) "주와 함께한 '팔 없는 36년의 삶'… 사고 전보다 행복"

* [역경의 열매] 석창우 (2) 과제 때문에 참석한 교회… 하나님 존재 처음 알게 돼

* [역경의 열매] 석창우 (3) 공고 졸업 후 취업… 비전 없는 직장생활에 회의감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역경의 열매] 석창우 (2) 과제 때문에 참석한 교회… 하나님 존재 처음 알게 돼

 

종교수업 중 주일예배 참석 과제 받고 점수 잘 받을 생각만으로 교회 찾아가

 

석창우 화백이 고교시절 교회를 같이 다닌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었다. 맨 왼쪽 김인서군은 장로가 됐고 가운데 있는 윤주남군은 목사가 됐다.

 

내가 하나님이란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건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1971년 서울 영등포공고에 진학했다. 기독교 가치관으로 설립된 미션스쿨이었다. 하지만 고교 재학 시절 내게 교회는 그저 여러 종교기관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시엔 학교 수업 과목 중 하나로 종교 시간이 있었다. 하루는 성경을 가르치던 목사님이 집 근처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한 뒤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예배 참석 확인 도장을 받아오면 점수를 잘 주겠노라고 선포하셨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김인서 윤주남과 함께 신도림동 근처의 한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해보기로 했다. 오원식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셨던 새서울교회로 기억한다. 그렇게 난 그저 과제 점수를 잘 받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교회를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아니었을까 한다. 막연하게 그리고 조금은 불순한 의도로 찾았던 그 교회에서 우리 셋 모두 성가대까지 하게 됐으니 말이다.

 

학교에서 예배를 드릴 때였다. 한 찬송가가 내 마음을 울렸다. 박정보란 친구가 예배 전 찬양을 인도했는데 그는 찬양 인도를 할 때면 찬송가 죄 짐 맡은 우리 구주를 매번 부르곤 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란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어렴풋하게나마 우리 짐을 대신 짊어주시고, 우릴 위로해주시는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후에 주와 동행하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게 된 계기가 됐다.

 

시간이 지나 같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한 우리 셋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주남이는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 사업을 하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현재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인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그의 어머니 영향을 받아서인지 장로가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세상에 나가 맘껏 꿈을 펼쳐 보이고 싶었던 난 자연스레 교회와 거리가 멀어졌다. 감전사고 직후에는 병원을 찾은 지인을 따라 한동안 성당에 다니기도 했다. 하나님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근근이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의 계획하심 아래 이미 날 선택하셨던 하나님은 항상 내 손을 잡고 계셨다. 나는 사람들에게 고등학교 시절 처음 당신을 알게 하신 예수님은 이미 날 당신이 계획하신 프로그램 속에 찍어두셨고, 사고를 통해 날 다시 활용하신 것 같다고 종종 말한다.

 

사고 후 10년이 지나서야 기도하던 내게 예수님께선 몸소 찾아와 이를 알게 하셨으니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경의 열매] 석창우 (3) 공고 졸업 후 취업… 비전 없는 직장생활에 회의감

 

고졸 출신 한계로 직장생활 만족도 낮아… 공부와 일 병행하며 대학 등록금 마련

 

석창우 화백이 1982년 신혼여행지였던 전남 여수의 바닷가에서 아내 몰래 챙겨간 낚시도구로 낚시를 하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다. 아버지께선 취업이 쉬운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전기과였다. 전기과를 택한 것은 기름때 묻혀가며 일하는 기계과보단 좀 더 깨끗할 것이란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전기 관련 자격증만 딴 뒤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와 방향성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데다가 고졸 출신이 가진 한계로 난 점점 직장생활에 흥미가 떨어져만 갔다. 덩달아 직업 만족도도 낮아졌다. 그래서 대학에 가기로 하고 1년간 대학 예비고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1년 더 재수할까도 생각했지만, 국립 경기공업전문대학 전기과 입학을 선택했다.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에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빌딩의 변전실에 근무했다. 2년제인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 전기공학과에 편입했다. 이후 입대를 위해 휴학하고 육군 만기 전역 후에 다시 복학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1982년 당시 구로3공단 내에서 의류 수출입을 하던 한 무역회사로 이직했다. 회사 내 공장 변전실에서 책임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해 11월엔 이전 직장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녹록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이듬해인 1983년엔 첫째 딸까지 품에 안으며 평범하고도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출근할 때면 두 살 된 딸이 따라 나와 자기도 아빠 따라간다고 해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주고 집으로 돌려보낸 즐거운 기억도 있다.

 

당시엔 직장 생활이 잘 맞지 않아 무료하게만 흘러가는 일상이었다. 우연히 낚시를 취미로 삼게 돼 직장 생활의 무료함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매주 토요일이면 밤낚시를 즐겨 다녔다. 태풍이 온다는데도 낚시를 가서 강풍과 비로 밤새 고생했을 정도로 낚시에 미쳤다. 신혼여행 갈 때 가방을 싸며 낚싯대를 몰래 넣은 적도 있다. 결국, 아내에게 들켰다. 아내는 낚싯대를 빼지 않으면 신혼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빼 두었다가 새벽에 몰래 다시 신혼여행 가방 밑에 숨겨 놔 신혼여행지에서도 낚시한 기억이 있다. 하루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낚시하다가 문득 삶에 변화를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산업안전과 관련된 분야가 전망이 있는 것 같아 해당 분야 대학원에 가서 좀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거나 구체적인 꿈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더 나은 곳에 취업하고자 선택한 삶이었다. 대학원 원서를 구해 놓고 준비하던 중 회사에서 전기 설비 점검을 하던 난 2만2900V에 고압 전류에 감전사고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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