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나님께만 충성하자).

작성자봉서방|작성시간11.08.23|조회수106 목록 댓글 0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나님께만 충성하자).


오광만 목사(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사람들은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는 것을 소원합니다. 얼마 전에 TV에 노예 할아버지가 소개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던 그 할아버지가 20대쯤에 한 부자가 그를 보고는 자기 집에 들어오게 하여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하는데, 정작 TV에 소개된 할아버지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차고에 살면서 곰팡이가 슬어 개밥보다 못한 밥을 먹으면서 연명하고 있었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고 먹는 시간 이외에는 부자의 밭에서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글자 그대로 그 부자에게 극진히 충성하며 섬겼습니다. 이런 할아버지나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은 아마도 따뜻한 집에서 먹을 것 맘껏 먹고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란 우리를 만드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답에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묻고 고백하기를 기대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대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어찌 보면 무척 강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까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데,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니” 하나님께만 충성하라고 말입니다.

충성은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살았던 충신으로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어 비극으로 생을 마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몽주입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설 무렵 이성계의 둘째 아들인 이방원은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려고 하면서, 조선의 초대 왕에 (자기 아버지인) 이성계를 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권력이 필요해 학문이 뛰어난 정몽주를 (자기편을 만들려고) 그에게 “하여가”를 보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

이방원은 “하여가”로써 서로 다른 두 집단이지만 친하게 조화를 이루어 오래 살자고 정몽주에게 제안하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계에 입문하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이며 부와 권력을 보장받는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정몽주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고,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일종의 정치적인 스카웃을 제의한 셈입니다.

그러나 고려의 왕을 모셨던 정몽주로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정몽주는 한 번 고려의 신하는 영원한 고려의 신하라고 생각하여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하여 “단심가”를 보내 이방원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임을 향한 하나의 마음을 고수했고, 결국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철퇴로 맞아 선죽교에서 죽었습니다. 정계에 입문하여 부와 권력과 생활의 안정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정몽주는 의연히 거절하고 한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정몽주가 선택한 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를 떠나 한 주를 섬기려는 것은 의와 충을 중요시하는 곳에서는 늘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정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을까요?

마태복음 6장 24절은 내용상 앞 단락의 단일함(singleness) 문제의 연속으로서 “두” (two) 주인의 문제를 대조하면서 “단일한” 마음을 소유하기를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두 눈을 가지는 것과 관련이 있고(6:22-23), 보물을 하늘과 땅에 동시에 쌓아놓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실제적인 생활의 예로써 설명하는 것입니다(6:19-21).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이며 단일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가르친 예수님은 좀 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지속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선언은 한 노예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이 경험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윤리적으로도 허용될 수 없던 시절에 노예법에 따른 격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에도 한 노예가 두 주인을 섬기는 경우가 있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행 16:16. 비교. 롬 6:16). 하지만 자기는 얼마든지 들키지 않고 이중간첩 노릇을 할 수도 있고 양다리를 걸칠 수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본문의 핵심은 단지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동일하게 섬길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늘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교차대구법이라는 독특한 어법을 사용하여 이 문제의 핵심을 말합니다. 여기서 강조는 가운데 부분(사랑의 문제)에 있습니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랑과 미움, 충성과 불충성의 대비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두 주인에게 똑같이 충성하고, 동일하게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느냐(cf. 창 29:30, 33)의 문제입니다. 현실적으로 각각의 주인에게 알맞은 대우를 하면서 같은 비중으로 사랑하고 비중 있게 섬기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심 주제는 섬기는 대상에 대한 동일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 주인을 미워하고 다른 주인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미워한다”는 단어는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의 비중을 강조하는 셈족어적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신 21:15; 말 1:2-3; 마 5:43; 눅 14:26; 요 12:25). 말하자면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을 싫어한다는 말과 반대말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에 마음을 주는 것보다 더 마음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비중의 문제, 우선순위에 의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했으면 다른 것은 늘 두 번째 위치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은 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자신에게 종속되기를 바라는 두 주인(하나님과 재물)에 대하여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부분은 감정적인 “사랑하고” “미워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것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선택하기를 포기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은 “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집중하고 다른 사람은 멸시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행에서 부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연에서는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다” “관심을 갖다”는 뜻을 가진 단어 “중히 여기다”를 사용하셨고, 이와는 반대되는 개념을 전하기 위해 무척 강한 의미인 “멸시하다” “등한히 여기다”는 뜻의 단어인 “경히 여기다”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은 두 주인에 대해 반드시 이런 비중으로 마음이 편향되게 되어 있습니다. 둘을 동시에 동일한 비중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하나님과 재물(돈)에 적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두 주인을 동일한 비중으로 섬길 수 없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특히 그 주인이 하나님과 맘몬인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경배하는 사람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며(신 6:4-5),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견뎌하지 못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맘몬에게도 우리를 예속시킬 수 있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아니 맘몬 즉, 재물은 우리에게 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 자기만을 사랑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맘몬에게 동일하게 마음을 두거나 시선을 고정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능력과 소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맘몬이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전적인 예속을 요구할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이 우리를 편하게 해주고, 미래를 보장하고, 그래서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돈은 자기를 신으로 삼으라고 요구합니다. 배금숭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맘몬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예속케 합니다. 재물에게는 우리를 재물을 섬기게 하려는 요구가 너무 커서, 우리는 질투하며 자신만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행복과 편리함을 주어 자신을 섬기게 하는 재물을 섬길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돈을 벌고 안 벌고, 돈을 소유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맘몬을 섬기는 것, 즉 맘몬에게 예속되는 것입니다. 맘몬에게 예속되는 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예속은 돈과 소유를 자기 파멸의 덫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은 “섬기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누구에게 예속됨을 나타내는 “종살이하다” 또는 “예속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내용상 앞의 교훈(6:19-23)에 이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전적인 충성을 가르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주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량한 땅에서 농사를 잘 지으려면 비가 적당히 내려야 하는데, 바알은 폭풍을 비롯하여 날씨를 관장하는 신이었습니다. 아스다롯은 나무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니 경제적인 안정과 풍요로움을 위해 날씨의 신을 떠받드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이라는 이름이 “주인님”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부를 때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하나님과 동일한 명칭으로 바알을 향해서도 주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두 주인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위력은 동일합니다. 돈과 관련한 속담은 돈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서양 속담에 “Money makes mare go”라는 속담과 “Money talks”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재물의 위력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갖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불안해하고, 돈을 가지려고 안달하고, 돈이 있으면 그것을 지키려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재물이 우리의 염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켜주지 못합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은 우리를 자기에게 예속시켜 참 주인이신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빼돌리는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를 재물이신 주인님께 마음을 쏟게 하고 우리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재물은 하나님처럼 자신만을 섬기게 합니다. 재물에게 굉장한 힘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보다도, 하늘에 있는 것보다도 현재 우리에게 직접 관련이 있는 땅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마음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유년주일학교와 청년부 두 부서를 맡은 교육전도사였습니다.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제가 지도하는 청년부 회원들 중 절반 이상이 주일학교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홍선생이라는 여자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일 예배만 잠깐 드리고 일요일에도, 청년부가 모이는 토요일에도 교회를 오지 않는 것입니다. 안타까움에 저는 주일 낮 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홍선생을 불러서 면담을 했습니다. 홍선생은 일주일 중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부모님 가게를 돌봐야 하기에 주일학교 학생도 지도하지 못하고 청년부 모임에도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선생은 아쉬움의 빛을 띠고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엿새 동안 열심히 돈 벌어라. 그러나 주일에는 쉬면서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고 맡은 주일학교 선생님 역할을 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홍 선생이 내게 해준 말이 30년이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직 내 귀에 쟁쟁합니다. “전도사님은 아직 돈을 안 벌어보셔서 모르실테지만, 한 번 돈 독이 올라보세요.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전 그 시절에 총각이었으며, 집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그리고 교회에서 전도사 사례금이라고 주는 돈으로 공부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돈을 벌고 있는 중인데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다른 일에는 무척 열심을 내는 사람이 주일날 가게문을 왜 여는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상품에 대해 과장해서 설명해 가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재물을 섬기는 구체적인 예입니다. 자기가 입으로 “돈이 나의 신입니다”라고 외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놓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일입니다.

제가 아마 아직도 돈 독이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제가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정말로 재물에는 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독은 우리의 혈관을 타고 온 몸 구석구석까지 퍼집니다. 우리의 생각, 사고방식, 세계관, 행동 등을 오염시키고, 심지어 우리의 신앙까지 잠식합니다. 이를 테면 돈독은 우리 위에 군림하여 마침내 신이 되는 것입니다. 맘몬은 절대로 만만하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도 팽개치고 열심히 돈만 벌게 만듭니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면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가난한 사람이나 불우이웃 돕기에 성금이나 구제금을 많이 내는 것으로 자기가 한 일을 다하게 할지언정, 절대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돈이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돈이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돈에 대한 노예근성으로 돈의 권력에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면에서 잠언 저자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뼛속 깊이 간직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입니다(잠 30:7-9).

요즘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내리신 복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가 충격적인 기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를 드린 신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과 누리는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며, 자기의 삶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시간과 힘과 관심사를 좀 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말씀도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씀입니다(골 3:1-2). 마태복음 6장 24절의 내용과 관련시켜, 이 구절은 이렇게 의역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맘몬을 섬기지 말아라. 너희는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에게만 예속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재물은 처음에 우리에게 [하여가]로 유혹합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 서로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자고” 말입니다. 그 후에 재물은 우리에게 자기를 섬기게 강요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재물이 우리에게 주인 노릇을 합니다.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써서 당대 종교인들에게 외형적인 종교행위보다 도덕으로 채우기를 촉구했습니다. 아마 그가 현대에 살면서 다시 책을 쓴다면 온통 재물로 채워져 있는 종교인들을 겨냥하면서 도덕으로 채우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돈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아무튼 현대에 사람들을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에게서 떼어놓고 자기를 섬기려고 유혹하는 재물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의 “하여가”에 대하여 “단심가”로 대답해야 합니다. 이 몸이 죽을 때까지 우리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가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나뉘지 않는 철저한 헌신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