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은 몇 년 전부터 10살된 아들과 "함께 자는 날" 로 약속한 날이다. 지난 주는 수요예배 후 밀린 업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보니 먼저 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약속을 지키지 안았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약속을 안지킨 아빠에 대한 '갈굼'이 시작됐다. 한 두번 경험은 아니지만 참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그 다음 날 밤은 아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은 나라이름대기, 꽃 이름대기, 성경인물이름대기 등 게임을 하면서 함께 하였는데 그 날 밤은 "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서로 하면서 마음의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바람이 없다는 아이가 아빠의 바람을 이야기하다보니 100가지 이상의 소원을 말하였다. 아이와 나의 바람은 비슷했다. " 갖고 싶다, 놀고 싶다, 잘하고 싶다."
현실요법의 창시자 윌리암 글래서의 5가지 욕구를 말한다.
첫째,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이다. 이 욕구가 충족이 안될 때 사람들은 외로움, 불안의 증세가 나타난다. 왕따는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가 충족이 안된 가장 가슴아픈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을 때는 마치 내 마음 깊은 곳에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셨던 따듯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우리는 그 경험의 세계를 질적인 세계(Quality World)라 부른다. 남편이자 목사인 나에게도 첫사랑에 대한 질적인 세계가 있다. 이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 기억을 계속해서 느낄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죄가 아니다. 나의 소원이 있다. 목사요 영혼을 돌보고자 하는 나의 존재가 나를 만나는 모든 장병들의 질적인 세계 속에 자리잡은 좋은 엘범(그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대가 있다. 나의 미소가 나의 한 마디의 말이 장병들이 언제든지 달려오면 환영해 줄 것 같은 아버지의 품과 같은 따듯함으로 기억되고 싶다.
둘째, 힘에 대한 욕구 즉 영향력 즉 자신이 중요한 존재이고 싶어하는 마음, 인정의 욕구이다. 학생은 좋은 성적을 통해서 직장인은 승진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끼치며 적어도 어느 정도 환경(사람, 제도)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나는 최근에 인정욕구가 충족된 경험이 있었다. 서울 부대에서 마지막 송별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예배 중 성가대에서 찬양했던 그 노래를 지금도 가끔 들을 때면 내 마음의 질적인 세계가 노란색으로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을 느껴진다. 나의 설교와 삶을 통해서 장병들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안에 힘의 욕구가 충족된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영향력의 욕구가 충족되어서 행복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2년 동안 나는 강단을 통해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축복의 멧세지를 전달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이 멧세지에 대하여 응답한 노랫말이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것 ...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 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세째, 즐거움의 욕구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움(만족)을 느끼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오토바이 탈 때, 일할 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배우는 것도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구충족의 활동, 예배드릴 때, 운동할 때 등이 있을 것이다. 교인들이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이유, 헌금(십일조)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즐겁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다면 노동일 것이다. 물론 노동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노동이 아니라 즐겁게 노는 것이라면 더욱 풍성한 삶을 살지 않을까?
나는 장병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힘들지 않다. 나는 듣는 것을 즐기고 있다. 이 즐거움이 장병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지면 그들도 그들의 아픔을 말하는 순간 즐거워하지 않을까?
넷째, 자유의 욕구이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장병들이 군대에 있다는 것은 자유의 욕구를 제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대한 거부할 수 없는 '군대' 의 현실 앞에서 자유의 욕구는 상당히 제한 된 것임이 틀림없다. 요즈음에 가끔 장병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은 내 자유를 배앗은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주일 아침에 편안하게 쉬고 싶은데 교회에 나가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행위라고 까지 한다. 나도 이해한다. 처음 군에 들어와서 훈련받을 때 교회에 나가는 것 자체는 나에게 자유함을 경험하기에 충분했다. 눈물도 흘리고 따듯한 커피도 마시면서 작은 나만의 시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힘든 훈련을 하다보니 목사인 나도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더 났던 것은 사실이다. 장병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에 나가는 자유를 선택했다. 내 몸과 마음의 소리는 쉬고 싶었지만....의지를 가지고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 교회에 나갔다. 어떤 사람에게는 교회에 나가고 싶다는 마음의 선택을 함에도 불구하고 고참들의 눈치 때문에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자유의 욕구가 제한되는 것이다.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마음으로 문장을 완성해보자. 대부분의 장병들은 군복을 벗어야 한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부대를 둘러산 저 산이 쇼생크감옥처럼, 빠삐용이 탈출하고자 했던 저주의 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군대에서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없단 말인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신분이라 생각하는가? 군인이기 때문에, 계급이 낮기 때문에, 지금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 자녀가 말을 안듣기 때문에... 정말 그럴까?
나는 머무는 자유를 선책할 것이다. 꼭 해야만 하는 자유가 아니라 안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죄를 짓지 않을 자유,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자유로운 선택! 성령께서 온전히 내 마음을 주장해주시기를 소원한다.
다섯 번 째, 생존의 욕구가 있다.
나는 생존의 욕구가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혼시절부터 그리고 아내가 아이를 낳고 힘들어하는 시기에도 아내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아침을 목숨걸고 먹었다. 배가 불러도 식사끼니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밤을 세우지는 않는다. 피곤하면 목욕을 한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이다. 이것도 분명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인의 눈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욕구가 충족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에게 한가지 묻고 싶다. 이제까지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여러분은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를 묻고 싶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행복을 얻기 위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싶다.
성경에 나타나는 소경 바디매오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행복해질 수 없는 조건이었다. 바디매오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겉옷 한 장과 빈 깡통이었다. 아마도 그의 유일한 재산과 마지막 자존심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있었을 것이다. " 너는 거지 아니냐! 네 주제에 인생이 바뀌겠느냐? "그는 행복한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변하고 싶다는 거룩한 소원!
예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여정에 예수님은 길에서 소리치는 거지요 소경인 바디매오의 소리를 외면치 않으셨다. 그리고 그 길을 멈추어 서셔서 한마디 물으셨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을 꿰뚤어보신 것이다. "보기를 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는 변했다. 성경은 인생이 변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삭개오, 남편 다섯 있는 여인, 정신 나간 미친 청년, 38년 된 병자등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상담 현장가운데,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운데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기도한다. 나를 연필로 사용해주십시오.
현실요법의 창시자 윌리암 글래서의 5가지 욕구를 말한다.
첫째,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이다. 이 욕구가 충족이 안될 때 사람들은 외로움, 불안의 증세가 나타난다. 왕따는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가 충족이 안된 가장 가슴아픈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을 때는 마치 내 마음 깊은 곳에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셨던 따듯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우리는 그 경험의 세계를 질적인 세계(Quality World)라 부른다. 남편이자 목사인 나에게도 첫사랑에 대한 질적인 세계가 있다. 이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 기억을 계속해서 느낄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죄가 아니다. 나의 소원이 있다. 목사요 영혼을 돌보고자 하는 나의 존재가 나를 만나는 모든 장병들의 질적인 세계 속에 자리잡은 좋은 엘범(그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대가 있다. 나의 미소가 나의 한 마디의 말이 장병들이 언제든지 달려오면 환영해 줄 것 같은 아버지의 품과 같은 따듯함으로 기억되고 싶다.
둘째, 힘에 대한 욕구 즉 영향력 즉 자신이 중요한 존재이고 싶어하는 마음, 인정의 욕구이다. 학생은 좋은 성적을 통해서 직장인은 승진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끼치며 적어도 어느 정도 환경(사람, 제도)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나는 최근에 인정욕구가 충족된 경험이 있었다. 서울 부대에서 마지막 송별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예배 중 성가대에서 찬양했던 그 노래를 지금도 가끔 들을 때면 내 마음의 질적인 세계가 노란색으로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을 느껴진다. 나의 설교와 삶을 통해서 장병들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안에 힘의 욕구가 충족된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영향력의 욕구가 충족되어서 행복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2년 동안 나는 강단을 통해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축복의 멧세지를 전달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이 멧세지에 대하여 응답한 노랫말이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것 ...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 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세째, 즐거움의 욕구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움(만족)을 느끼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오토바이 탈 때, 일할 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배우는 것도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구충족의 활동, 예배드릴 때, 운동할 때 등이 있을 것이다. 교인들이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이유, 헌금(십일조)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즐겁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다면 노동일 것이다. 물론 노동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노동이 아니라 즐겁게 노는 것이라면 더욱 풍성한 삶을 살지 않을까?
나는 장병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힘들지 않다. 나는 듣는 것을 즐기고 있다. 이 즐거움이 장병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지면 그들도 그들의 아픔을 말하는 순간 즐거워하지 않을까?
넷째, 자유의 욕구이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장병들이 군대에 있다는 것은 자유의 욕구를 제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대한 거부할 수 없는 '군대' 의 현실 앞에서 자유의 욕구는 상당히 제한 된 것임이 틀림없다. 요즈음에 가끔 장병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은 내 자유를 배앗은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주일 아침에 편안하게 쉬고 싶은데 교회에 나가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행위라고 까지 한다. 나도 이해한다. 처음 군에 들어와서 훈련받을 때 교회에 나가는 것 자체는 나에게 자유함을 경험하기에 충분했다. 눈물도 흘리고 따듯한 커피도 마시면서 작은 나만의 시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힘든 훈련을 하다보니 목사인 나도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더 났던 것은 사실이다. 장병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에 나가는 자유를 선택했다. 내 몸과 마음의 소리는 쉬고 싶었지만....의지를 가지고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 교회에 나갔다. 어떤 사람에게는 교회에 나가고 싶다는 마음의 선택을 함에도 불구하고 고참들의 눈치 때문에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자유의 욕구가 제한되는 것이다.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마음으로 문장을 완성해보자. 대부분의 장병들은 군복을 벗어야 한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부대를 둘러산 저 산이 쇼생크감옥처럼, 빠삐용이 탈출하고자 했던 저주의 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군대에서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없단 말인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신분이라 생각하는가? 군인이기 때문에, 계급이 낮기 때문에, 지금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 자녀가 말을 안듣기 때문에... 정말 그럴까?
나는 머무는 자유를 선책할 것이다. 꼭 해야만 하는 자유가 아니라 안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죄를 짓지 않을 자유,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자유로운 선택! 성령께서 온전히 내 마음을 주장해주시기를 소원한다.
다섯 번 째, 생존의 욕구가 있다.
나는 생존의 욕구가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혼시절부터 그리고 아내가 아이를 낳고 힘들어하는 시기에도 아내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아침을 목숨걸고 먹었다. 배가 불러도 식사끼니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밤을 세우지는 않는다. 피곤하면 목욕을 한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이다. 이것도 분명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인의 눈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욕구가 충족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에게 한가지 묻고 싶다. 이제까지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여러분은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를 묻고 싶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행복을 얻기 위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싶다.
성경에 나타나는 소경 바디매오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행복해질 수 없는 조건이었다. 바디매오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겉옷 한 장과 빈 깡통이었다. 아마도 그의 유일한 재산과 마지막 자존심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있었을 것이다. " 너는 거지 아니냐! 네 주제에 인생이 바뀌겠느냐? "그는 행복한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변하고 싶다는 거룩한 소원!
예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여정에 예수님은 길에서 소리치는 거지요 소경인 바디매오의 소리를 외면치 않으셨다. 그리고 그 길을 멈추어 서셔서 한마디 물으셨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을 꿰뚤어보신 것이다. "보기를 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는 변했다. 성경은 인생이 변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삭개오, 남편 다섯 있는 여인, 정신 나간 미친 청년, 38년 된 병자등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상담 현장가운데,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운데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기도한다. 나를 연필로 사용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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