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를 소망하는 이유
by D.L. Moody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집이 왜 좋습니까? 너무너무 멋진 건물이라서요? 잔디가 훌륭해서? 아니면 정원수가 너무 수려해서요? 벽에 칠해놓은 페인트 빛깔이 황홀할 정도로 이뻐서? 가구가 품위 있는 것들이라서? 그런 것들 때문이 그토록 집에 가고 싶어지고 집이 아름다워보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집에 그토록 좋은 이유는 집에 가면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저는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어서 아무도 모르게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어디 가시고 안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집이 집 같지가 않더군요. 저는 이 방 저 방 둘러봤지만, 어머니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구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어디 계세요?"
그러자 말하길, 어디 외출을 나가셨다고 하더군요. 아, 정말이지 집이 집 같지가 않아지더군요. 집이 좋았던 건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집이란 곳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자꾸 가보고 싶은 곳이 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어야 가능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가 거기 계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같이 살았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그분과 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그들과 나란히 서게 되겠죠.)
마태복음 18장 10절을 한 번 보십시오. 천사들의 이야기가 나오죠? 어린 아이들 중 어느 누구라고 하찮게 여기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나라에서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을 뵙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천사들이 늘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주님께 속해 있고 버림받은 일이 전혀 없는 이들 말입니다. 그들은 죄가 뭔지도 모르고 불순종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세상이 창조되던 아침부터 지금까지 주님께 온전한 순종을 바친 존재들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사카랴를 찾아와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카랴는 그를 의심합니다. 전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던 그가 말입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그의 의심을 보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마 1:19).
그리고 사카랴는 말을 빼앗깁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죠? 하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얼굴들을 보게 될 것이란 거. 그리고 또 하나는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는 것. 그리고 세 번째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우리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
한 가난한 여인이 Rowland Hill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으며 쉽고 간단하다고 말했습니다. 세 발짝만 떼면 된다고 말했죠. 그게 뭔지 아시죠? 우선 자아로부터 한 발 물러나 그리스도께도 다가가서 그분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간단합니다. 그냥 자아에서 한 발 물러나 그리스도께로 가면 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것이 되죠. 죽은 사람이 상속을 받을 수 없듯이 죽은 혼도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혼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만날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성격과 취미 그리고 기질을 소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집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다양한 집들이 있을 겁니다. 하늘나라에는 문도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북쪽에만 문이 있는 게 아니라 동쪽에도 세 개가 있고, 서쪽에 세 개, 그리고 남쪽에도 세 개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 교파에서, 또 저 이교의 땅에 속한 자들 가운데서, 또 저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양한 성격의 인종들이, 자기들의 말로 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성경의 여러 다양한 구절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회심을 해서 지친 걸음들을 이끌고 하늘의 도시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만나겠죠. 생명의 강가에서 말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생명의 나무와 나무에 달린 열매들을 볼 것인데, 열매는 똑같지가 않고 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며, 그걸 먹는 이들의 성격도 가지각색이겠죠. 순교자들이 먹을 열매가 따로 있고 주님을 위해 활발하게 일한 종들의 열매가 따로 있을 것이며, 거룩하고 겸손하면서 사색적인 이들이 먹을 열매가 있고, 또 이제는 완벽하게 된 의로운 영들이 먹을 열매도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그리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더라.』(계 22:2)
스코들랜드 사람이나 영국 사람뿐만 아니라 "민족들"을 위한 열매입니다. - 독일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등등도 포함된단 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열매로부터 멀리 추방되게 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한 저명한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저는 하늘 나라를 생각하면, 아주 큰 벽들과 둥근 천장, 그리고 뾰족한 첨답들이 있는 거대하고 빛나는 도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안엔 흰 옷을 입은 천사들을 포함해 온통 처음 보는 얼굴들뿐일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전 생각했죠. 큰 돔 천장들과 뾰족한 탑들이 있는 그 거대한 도시에 얼굴도 모르는 천사들 말고 꼭 한 명은 아는 사람이 있겠군, 하구요. 그는 제가 하늘나라에 가면 알아볼 유일한 얼굴이었죠. 그런데 또 다른 형제가 죽었습니다. 그제는 두명이 됐죠. 얼굴 아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 뒤로는 제가 아는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더군요. 그리고 그런 사람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 중 하나가 하늘 아버지가 계신 하늘 나라에 갔을 땐, 그곳이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하더군요. 둘, 셋, 그리고 네 명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되자 이제는 하늘 나라에 가면 반갑게 인사할 사람이 너무 많아지더군요. 그래서 더 이상 벽이나 둥근 천장, 뾰족한 첨탑 따위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더군요. 저는 그 거룩한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지구상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보다 저 하늘 나라에 얼굴을 아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을 보십시오.
『누구나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라오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의 종도 거기에 있으리니...』
저는 바울이 무덤속에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가, 질투할 정도로 사랑했던 그가, 그분과 떨어져서 의식불명인 상태에 놓여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시여, 내가 바라오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셔서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셔서 그들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믿는 순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수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36).
죽을 때 가질 것이란 말이 아닙니다. 믿는 그 순간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었다면 지금 영생을 가진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돈 주고 사는 게 아닙니다. 장의사가 아무리 무덤을 깊게 파도 영원한 생명을 묻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관을 크게 튼튼하게 짜도 영원한 생명을 관 속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한다고 했을 때, 무슨 비유나 은유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은 뒤 1800년 동안 결코 그분과 떨어져 있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회심한 순간 그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본성을 얻었습니다. 그건 무덤 속에 뉘여져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육신이 부활할 때까지는 온전히 만족할 수는 없겠지요. 여러분, 우리의 몸도 결국은 부활할 것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겨져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일으켜지고, 수치로 심겨져 영광된 것으로 일으켜지며, 약한 것으로 심겨져 능력 있는 것으로 일으켜지고, 육신의 타고난 몸으로 심겨져 영적인 몸으로 일이켜진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썩어질 육신이 불사의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아침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을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라.』
그는 이 땅의 흙으로 지은 성전을 떠나가게 될 수도 있지만, 떠나게 되면 오히려 하늘에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으나 육신에 남아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필요하리라.』
죽음도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사실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사슬에 묶여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일단 영원한 생명을 가지면, 죽음은 더 이상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껍질은 어떻게 할 수 있겠지요. 내 용모를 바뀌게 하고 육신을 저 무덤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원한 생명은 조금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이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없앨 것처럼 생각하는 걸 봅니다.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죠.
얼마전 런던에 사는 친구에게서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저는 편지를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이 편지를 읽어줘야겠어. 그래서 이 친구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면서 다른 이들도 이런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했으면 좋겠군. 그는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부고장을 보낼 때, 가장자리를 검게 칠합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검은색 대신 금색을 칠했더군요. 그는 검은 색은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황금 도시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그렇게 금색으로 테두리를 두른 것입니다. 저는 검정색 보다 그렇게 금색으로 칠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죽을 때도 검은색 대신 금색을 칠하는 게 훨씬 좋을 듯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죽음은 곧 생명입니다. 혹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죠.
"아직 산자의 땅에 남아 계시는군요."
그러자 그는 기발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아니요. 여기는 죽어가는 자들의 땅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땅으로 갈 겁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다시는 죽지 않을 사람들이죠."
여기는 죄와 죽음과 눈물의 땅입니다. 그러나 저 위에 가면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거기는 영원한 땅이고, 즐거움이 끝나지 않는 땅입니다.
"죽음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이 말은 Hannah More가 죽어가는 침상에서 한 간증입니다. 그녀는 친구도 유별나게 많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잊어버렸을 만큼 많은 나이도 아니었으며, 또 인내와 끊기로 세웠다 할 수 있는 선교 학교가 몹시도 그리웠을 텐데도 그녀는 저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예전 친구들을 알아볼 수 있을 지 알고 싶어합니다. 마태복음 8장 11절을 보십시오.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천국에 앉으려니와』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이 누굽니까?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수백 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오게 될 때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하나님의 왕국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아, 아브라함이구나, 하고 알아 볼 수 있고, 이삭과 야곱도 그렇게 아, 이삭이구나, 아, 야곱이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로 돌아가보면 모세가 등장합니다. 그 땅을 떠난 지 1500년이나 지난 사람이 말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변화산상에서 그를 보고, 아, 저사람 모세구나, 하고 딱 알아봤습니다. 그는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아무개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가서도 우리의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봅시다.
『나는 의 가운데서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내가 깨면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이다.』
거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뭐뭐했으면 하는 마음이 그득하지만, 저기에서는 오직 만족함만 있을 뿐입니다. 온 세상을 다 둘러보십시오. 만족하고 사는 사람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 가면 부족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써 놓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
그리고 하늘 나라에 가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경솔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롯이 소돔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불에 의해 구원을 받은 것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면류관을 하나도 못 받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지는 못합니다. 많은 이들이 결코 하늘 나라에 가지 못할 것입니다. 회심한 적도 없으면서 하늘나라로 갈 거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거기로 갈거라고 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하늘 나라에 갈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린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란 걸 믿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의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만일 거듭나서 새롭게 되지 못한 사람들도 하늘나라로 간다면 하늘나라도 여기 이 땅과 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 죄악된 세상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지옥 같아지고 말 것입니다. 이 나라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땅에 살았던 몇몇 인간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 남아서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죄와 반역 가운데서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거부한 자들을 하늘 나라에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분의 구원을 거절한 자들을 주님께서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그분의 왕국에 그냥 받아주신다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