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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나심1.

작성자천향|작성시간23.10.08|조회수49 목록 댓글 0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1(마1:18-25)

 

각 복음서의 구조와 내용의 차이는 주제의 차이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족보와 출생기사가 언급된다.

그래서 두 복음서를 대조하면 서로가 말하는 강조점 파악에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가?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말씀의 일꾼이 된 자들이 전하여 들은 바를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다(눅1:1-4).

이러한 복음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제사장 사가랴를 통해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사가랴의 기도에 답하셔서 세례 요한을 잉태케 하신다.

세례 요한은 천국 왕 앞에 세워진 전령이다.

임금의 행차 앞에서

    “쉬이, 물러서거라.

     상감마마의 행차이시다”

라고 외치는 내시와 같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천국 왕의 행차를 알린다.

그때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친다(마3:1-2).

왕의 임함은 나라의 임함이다.

천국 왕의 오심은 천국의 임함이다.

그래서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에게 세례요한을, 

마리아의 몸에 그 아들을 잉태케 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시는가?

이에 대하여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한다(갈4:4-5).

천국 왕의 오심은 다윗왕국과는 다른 나라의 임함이다.

이는 율법 아래와는 다른 구원과 생명을 누리는 나라의 시작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신다.

이것이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내용이다.

 

마태는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으로 시작한다.

왕통을 중시한 마태의 계보와 혈통을 중시한 누가의 계보가 다른 것처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출생 기사도 다르다.

마태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의 나심은 이러하다고 시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한다.

족보를 기록한 후에는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로 시작하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였으며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로 마친다.

시작하는 말과 종결하는 말 사이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서는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천사의 고지와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임마누엘 언약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해설이 덧붙여 있다.

이러한 내용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나심’이다.

본문의 중심내용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소에서 계셨다.

이전의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께서는 휘장으로 가리고 임마누엘을 하셨다.

그러나 종말에는 사람으로 임마누엘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동류가 되셔서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람 중보자를 그리스도로 세우셨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삼손과 같은 자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이는 구약의 사람 구원자들이 주지 못하는 구원,

율법이 주지 못하는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과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면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과 비교하면 알 수가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 아들을 배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말한다(눅1:35-37).

이처럼 누가복음은 늙은 여성 엘리사벳의 불임과 처녀 마리아의 잉태를 연결하여 말한다.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의 능력은 구원의 말씀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율법 아래에서 엘리사벳의 불임은 제사장 가문의 저주이며 죽음이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에서 끊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의 사망 선고이기도 하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나아감은 곧 백성들의 나아감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성전 식사 곧 제물과 떡을 먹고 마심은

성전 밖에 있는 백성들의 하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엘리사벳에게 잉태케 하시고 마리아에게 그 아들을 잉태케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셔서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갈4:4-5).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전 작업을 하신다.

먼저 엘리사벳의 태를 여셔서 세례 요한이 태어나게 하시고(눅5-25)

마리아에게 하나님 아들을 잉태케 하신다(눅1:26-38).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행하신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엘리사벳에게 복음의 선구자를 잉태하게 하시고

처녀 마리아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케 하신다.

구약에서 불임은 죽은 자와 늙은 여인과 같고 처녀의 태는 아무것도 없는 흙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창조를 통해서 자신의 나라를 시작하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태초의 흙으로 사람으로 지으셨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넣으셔서 하나님의 상속자로 지으셨다.

이제 종말에는 처녀 마리아의 태에 성령이 임하게 하셔서 그 아들을 잉태케 하셨다.

이는 창조로부터 시작된 옛 언약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하늘에 속한 나라를 개설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율법 아래에서 작고 나중 된 자들인 제자들과 여자들,

죄인의 표상인 세리 마태와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위로부터 난 자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새 백성이다.

이는 새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신 일이다.

이것이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은 마태복음 기록의 단순함을 보충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각 복음서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차이점에서 마태가 강조하는 바를 파악할 수가 있다.

각 성경은 그 책의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성경의 병행 구절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만일 각 성경의 내용을 서로 보충하고 조화시킨다면

각 성경 문맥의 의미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 파괴된다.

이는 성경의 완전한 영감을 훼손하는 일이다.

우리는 사도들이 기록한 신약성경을 전승받았다.

따라서 사도들이 기록한 대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기록된 성경을 편집할 권리가 없다.

마태는 복음서에서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고 기록한다.

마태는 누가처럼 그리스도의 잉태를 성령의 능력과 연계하지 않고

잉태와 무관한 동거 전과 연계한다.

이는 성령의 잉태가 사람과 무관한 사역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정통 개혁신학에서는

    “구원자는 죄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담의 원죄와 무관하게

     인간의 아버지가 없이 처녀의 몸에 잉태케 하셨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몸에서 인격화되지 않은 무죄한 인성을 입으셨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과 상관이 없는 철학적인 논리이며 궤변일 뿐이다.

이는 본문이 말하는 의미와 관점과 맞지 않는다.

 

끝맺는 말은 시작하는 말과 서로 상응한다.

시작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이다(마1:18).

끝맺는 말은

    “천사의 명령대로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다(마1:25).

끝맺는 말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끝맺는 말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으로 마리아의 태가 더럽히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이는 요셉과 마리아도 율법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휘장 밖의 영역 죄 아래에 세워진 자이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새것을 사용하시며 그것은 거룩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가 없다.

예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에 계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몸을 성소로 삼아서 사람으로 오셨다.

부활 이후에는 우리의 몸을 성소로 삼고 함께 사신다.

이러한 모든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이다.

이처럼 본문의 시작하는 말과 끝맺는 말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동거 전 처녀 잉태를 설명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처녀 잉태를 성령에 의한 새 생명의 출생으로 설명하지만,

마태는 처녀 잉태를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말한다.

그래서 마태는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고 기록한다(마1:22-23).

이러한 언급은 이사야서 7장 14절에 있다.

이사야서의 문맥은 메시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 아니다.

임박한 커다란 위기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의 징조가 처녀 잉태라고 말한다.

국가의 위기 시에 하나님께서는 왕위를 이를 아들을 젊은 여자에게서 출생케 하고

그 아이가 장성할 때쯤에는 유다가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임마누엘,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름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대로 대대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며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게 하실 것을 확증하시는 내용이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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