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누가복음9:13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한마디로 넘기자면 한없이 간단한 문장이요
심각하게 생각하자면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문제이기도하다.
먹을 것 !!
절대적 의미의 먹을 것이 무엇인가?
얻어먹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먹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육신의 양식과 생명의 떡을!!」
육신의 양식은 그냥 육신의 양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통해 수고하므로 얻어지는 양식이다.
그 대가를 수고하므로 얻으려하는 자는 노동자요 농사꾼이고 그것을 그냥 얻으려하는 자는
거지일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지들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도 아니시고 더더욱 그런 아버지도 아니시다.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미리 예비해 두신 것이다.「너희의 식물이 되리라」고.
생명의 떡은 생명을 가진 떡이다.
산다는 말은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생명의 약동이 사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을 공급해주는 것이 생명의 떡이다.
그러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삶에 있어서 절대로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오래 사는 것만이 장수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이지 왜 사느냐가 아니다.
사람들은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시작부터가 양질의 삶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떠한 삶이 양질의 삶인가?
"육신의 양식적 삶"이 아닌 「생명的 삶」이다.
원래 생명이란 삶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삶이란 생명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생명적 삶』이 아닌 것은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육신적 삶을 삶이라 칭해주지 못하고 죽음, 또는 사망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멸망이기도한 것이다.
멸망이란 심판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멸망 그 자체가 심판의 결과인 것이다.
인류의 심판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졌고 그 이후로는 멸망의 상태가
지속되어 온 것뿐이다.
신앙적인 입장에서 육신적 삶에 어떤 가치성이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한복음3:16을 원문으로 의역하면
"멸망치 않고"가 미래시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사용하여
『멸망된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신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무엇을 먹을 것으로 누구에게 왜 주어야하는가?
무엇이 목회며 무엇이 전도며 무엇이 구원이며 무엇이 생명인가?
목회는 실질적이고 사실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결국 제자들은 오천 명 무리에게 자신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주님이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 떡을 받아서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것이 한마디로 목회요 전도요 구원사역이요 봉사다. 받아서 준 것뿐이다.
주실 분과 줄 떡이 있고 그것이 필요한 대상들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절차나 방법이나 자격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아니 있을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주실 분과 줄 떡을 만나지 못했고 발견하지 못했다는 그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 필요 없는 절차가 생겨나고 방법을 사용하며 자격을 요구하고
이유를 다는 것뿐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차이점은 나눠주면서 저도 얻어먹는 사람인가 아니면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인가 이다.
제자 그 자체가 위대하고 존경받을만한 명칭이 아니라 그 역할이 앉아서 받아먹는 자와
조금 다를 뿐이다.
한 떡에 동참했다는 면에서는 동등이요 주고받았다는 점에서만이 다른 것뿐이다.
목사는 일꾼 냄새가 나야지 목사 냄새가 나면 안 된다.
장로는 섬김의 냄새가 나야 참 장로다.
장로라는 직함이나 권위나 외형의 냄새가 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일꾼은 다만 성실과 진실의 땀 냄새로 족한 것이다.
주실 분과 떡을 만나지 못하면 할 수 없이 목사의 냄새로 한 몫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은 그런 목사들 자신과 그런 목사들에 의해 미혹을 당하고 있을 대상들을 위해
쓰고 있고 쓸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은 내버려두어도 좋고 반면에 나쁜 일만 막으면 나쁜 일이 그치던지
아니면 좋아질 것 두 가지뿐이다.
공기를 오염시키는 일만 막으면 자연히 서울 장안의 공기는 맑아지게 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교회의 정화와 혁신을 바라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그러한 체제와 방법론에 젖어서 푹 담가져있고, 또 그러고 싶어 한다.
한 대 한 대의 자가용 운전자들 스스로가 운행을 자제하려는 의지와 노력 없이
정책이나 행정으로 서울 교통질서가 바르게 되길 바라는 경우와 똑같은 우를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범하고 있는 것이다.
주실 분과 줄 떡을 만나지 못한 자들이 절대 대다수이다 보니
그것이 상식화, 보편화, 정당화 내지는 정통이 되어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현실이기에,
그것이 잘 못된 정통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려들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 속에 완전히 빠져있는 경우나 마찬가지 아닌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심부름을 좀 해달라는 말씀이다.
떡을 만들라는 말씀도, 사오라는 말씀도 아니시다. 그럴 수도, 그러하지도 못할 줄을 누구보다도
주님 자신이 잘 아신다. 그러하신 주님이 무리한 부탁이나 짐을 지우실 분이 아니시다.
다만 당신 자신이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해 보기 위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그 결과 무슨 말이 나왔는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이들에게는 부족하리이다」
그렇다. 方法論이다. 方法論의 첫째는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었다.
그래서 오늘날도 교회는 곧 돈이다. 떡이 아니라 돈인 것이다.
떡으로는 교회를 세울 수 없어도 돈만 있으면 교회가 된다. 방법론의 성공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떡이 무슨 떡이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떡이 무슨 떡인가?
돈이 없으면 살수 없는 떡이 있는가하는 반면에
이사야는 외쳐 말하기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다.
돈 가지고 살수 없는 떡, 아니 돈 없어야만 살수 있는 떡이 있다는 사실과 그 떡이어야만
참 떡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돈 가지고 떡 살려고 덤비지 말라는 말이다.
돈으로 살수 없는 떡을 돈 없이 사려고 하라 그 말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 기도문 가지고「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었나이다」로
해석하지 말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무조건 줄려고만 덤비지 말고, 먹을 것이 무엇이며 그 먹을 것이 있는가를 살펴보라.
분명히『받아서 주는 것』이것이 양식이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은『나』라고 하셨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반죽해서 만들 수도, 빵집에서 사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떡집(베들레헴=뻬에트;집, 레헴;떡)의 먹을 것이 담겨져 있는 구유 즉 밥통 안에
먹을 것으로 나신 것이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Ά-με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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