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 역사적 기원
예배에서의 찬미
성경적 조사
아주 옛날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과 성막 모두에서 그들의 경배를 고양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했다(레 25:9, 민 10:10, 왕상 1:34). 이런 음악은 트럼펫, 하프, 코넷 등을 동원한 오케스트라를 이용했다(삼하 6:5, 대상 23:5). 오케스트라를 동반한 대규모 합창단이 “주의 노래”, “거룩함을 노래하자”를 불렀다(대상 25:6, 대하 20:21). 사람들은 “큰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주께 찬양하기 위해” 권유 받았다(시 81:8, 95:1). 비록 마지막 날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부를 “노래를 얻게 될” 것이다(사 30:29).
신약시대의 교회가 “주님께” 노래할 때에 특별히 시편을 사용하였는데 야고보서 5:13에 일반적인 형태의 집회가 남아있다. 에베소서와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영적 노래와 “마음으로 주께 드릴 음률을 만들어 노래하는 것(교송식으로 노래함)에 대해 언급한” 것을 독자들이 상기하도록 하고 있다(엡 5:19). 여기에 찬송가 부르기, 시(구약의 시편과 신약의 성경노래), 찬미 그리고 노래들(기독교성곡) 의 그 원형을 가지고 있다. 비록 찬미가 경배의 유일한 성곡인지의 여부와 감사와 찬양 등을 올바르게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한 약간의 논란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주님께로” 향하고자 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서로 공감하기 위한 노래는 아니며, 오히려 주님 한분에게 향한 노래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관심사는 그의 독자들이 “영으로” 뿐만 아니라(감성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노래해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비록 선율과 반주는 우리들의 감성적 반응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하지만, 노래의 골자는 가사에 있으며, 진리는 가사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더욱 특별하다. 우리는 주님께 노래해야 할 것이다. 지적으로 혹은 더욱 정당하게 신학적으로 주님을 선포해야 한다(고전 14:15). 찬미의 노래는 신학을 노래하는 것임을 입증한다.
상당수의 초대교회의 찬미는 신약성경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골로세서 1:15~20이다. 이것들은 찬미에서 일반적으로 운율적이고 시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역사
우리는 초대교회의 교회 음악의 형태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동방교회는 교역자들에 의해 기본적으로 사용되어온 찬트 형태를 개발했다. 이 교회음악의 형태는 정교회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방찬트는 교회음악의 고전적 형태가 되었고 그레고리안 찬트로 표준화 되었다. “단선율 성가(그레고리오 성가)”로 알려진 노래의 이러한 형태는 두 가지 특별한 형태로 발전했다. 즉 응답성가와 교송성가이다. 첫째 밀레니엄 시대의 세속적인 음악은 세 가지 형태 가운데 한 가지를 표현하였다.
1)단선율 성가: 교회에 의해서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단선율 성가에서 운율에 의해 지배되는 가사라기 보다는 가사에 의해 지배를 받는 운율이다
. 초대교회에서 관심이 되는 것은 가사였다)
2)칸투스 피구라투스: 단선율 성가의 보다 더 화려한 형태.
3)칸투스 메주라투스: 운율적인 노래. 12세기에 교회 음악의 특징은 찬양대가 연주하는 다음(多音)적인 군집구성(팔레스틴 영국, 기봉, 들라쉬)을 이루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오르간이나 때로는 당시의 협연악기들을 가지고 연주하는 대성당 중심의 음악이 되었다. 비록 미사에서 계속 반복해서 가사를 구송하였기 때문에 귀에 익숙한 것이였지만 이 음악은 매우 복잡하고 가사는 듣기에 어려웠다. 중세 후반에 회중은 그들의 음악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더 이상 참여하지 못했고, 관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학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진실은 타협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종교개혁기에 교회 음악의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졌다. 음악이 회중에게 돌아갔다. 거기에는 후퇴가 있다. 1)질에서 후퇴와 2)주관주의의 시작(개인주의의 씨앗). 교회는 성가대에 솔로를 두기 시작했고, 그리고 만약 부유하다면 반주로 오르간을 구입했다. 공교회 안에 대량 구성으로서 단선율 찬미, 성가 등에 전례용 오르간 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단선율 성가가 시편 찬양이기는 하지만. 독일에서 찬미는 우리가 합창곡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이 개혁교회(영국을 포함해서)에서 개발되고 시도되었다. 자주 라틴어 보다는 당시에 통용되는 가사와 유행하는 운율을 사용하였다.
현대 찬미가를 개발하는데 말틴 루터가 중추적으로 기여했다. 전문가로서의 음악인들을 도와 그는 가사와 음악을 작곡했으며, 자주 객관적인 신학적 찬양 노래를 작곡해내는 데 당시의 대중적 멜로디를 끌어들였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 다가가기 위해서 대중적인 간단한 찬양(합창곡)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는 1524년에 8곡의 찬미곡을 남겼다. 그중 4곡은 그 자신이 작곡한 것이다. 그는 아직까지 전문화된 교회 음악을 지원하고 있으며, 찬양대의 사용을 격려하며, 특별히 남성 찬양대를 지지한다. 르네상스로 옮겨오면서 위대한 음악가들이 당시에 영을 뒤흔드는 오라토리오 칸타타를 작곡했다(바하, 하이든, 베토오벤, 슈벨트, 브라암스, 헨델, 쉬타이너...). 이들 작품들은 거대한 대성당에 한정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찬송가에서 다음으로 위대한 진보는 선교부흥의 시대에 일어났다. 특히 웨슬리안들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찬양을 사용했다. 선교를 위해서 찬양은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찬양곡을 부르는 것은 영국의 교구 교회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교구교회 목자의 단독 연출 중 하나가 스텐홀드와 홉킨스의 시인데 이는 교구 찬양대에 의해서 주로 인도되는 회중 찬미를 대신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시가집) 찬미집을 내도록 자극을 주었다. 마르텡 마당의 “시와 찬미”가 된 초기 작품들 중 하나이다. 찬미의 전통은 옥스퍼드 운동에까지 소급된다. 빅토리아 시대는 감성적인 찬미(개혁시대의 찬미곡인 “주님은 강한 성이요”라는 곡의 객관성에 비교해서 볼 때 “나를 가도록 버려두지 않을 사랑이여”라는 곡처럼) 를 만들어냈다.
20세기의 찬양은 주관적 작곡의 경향을 보여 왔으며, 르네상스 사고로 뿌려진 씨앗의 열매를 맺고 있다. 슬프게도 지난 반세기 동안 카리스마적 부흥을 일으켰던 합창 스타일의 찬양이 성장을 이끌어냈다. 합창 스타일의 음악에서 가사에 들어있어야 하는 성경에 대한 감각이나 성경적 진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합창은 후렴이나 2절이 없이 작곡되었고, 그러므로 합창은 마치 만트라처럼 자주 반복한다. 종종 가사에 거의 주제가 없다. 무게는 음악만에 실려 있고, 감정을 자극하는 기술에 의존한다. 아직 진리가 음악이 아닌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음악은 포스트 모던 사회의 산물이다.
경배를 위한 찬미
합창 형태를 지향하는 교회 음악인 찬송가 형태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으로 상당수의 새로운 작곡들이 줄어들고 있다. 아직 전통적인 방식의 삶이 존재하고 있고, 아직도 전통적인 찬양으로 부흥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찬미를 하나님에게 다가가기 위한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찬양은 오락이라기보다는 경배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찬송가의 다음과 같은 면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찬미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송이다. (비록 어떤 이는 감사, 고백, 기도, 선포 등을 부과하기도 하지만). 일부 현대 찬미는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주관적인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정말 이런 노래들은 “주님을 향한 노래”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런 노래들은 고무적이고,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확정하지만 그러나 아마도 예배에서 찬송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사용된다면 찬송을 부르는 일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찬미는 주님을 향한 (운율적) 노래이다.
2)찬미의 중심점은 가사이다. 찬미는 진실해야 하며,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에게 노래할 때 주님에게. 주님에 관하여, 주님의 진실을 노래하는 것이다. 강조점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거나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에 관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배를 위해서 고른 모든 찬양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불려지는 진실 속에 우주적인 것이 있는가 혹은 주관적인 느낌을 확정하고 있는가? 성경적 진리를 제대로 표현하는데 실패한 찬송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것은 그저 이교적일 뿐인 것도 있다. 가사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3)찬미가 진실을 선포할 경우 이는 교회 예배에서 절기적이거나 성경적 주제와 연관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선별된 찬양곡은 설교나 강독의 진실을 드높일 수 있다. 선곡이 빈약하면 내용이 엉망이 된다.
)음악(곡조, 멜로디, 화음)은 찬송가의 가사(진실)를 강화하는 역할만을 해야 한다. 노래는 가사를 높이며, 풍부하게 한다. 곡조는 그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가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곡의 가사를 가지고 새롭고 색다른 곡조에 사용한다면, 찬양자에게 상당히 혼란을 주게 된다. 반대로 새로운 곡조가 특별한 가사에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다. 이전 곡조에서 감추어진 가사의 특별한 면을 강조하거나 부각시킬 수 있다. 균형 면에서 아마도 이것은 예전 곡조에 가사가 살아있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찬양자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가사와 곡조를 뒤로 함으로써 영으로 주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5)늘상 그 곡이 찬양곡으로 올라와있을 때 회중은 틀에 박힌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인기있는 18번만 자주 반복하는 것은 회중을 틀 속에 가두는 결과가 된다. 새로운 곡을 소개하는 것, 옛곡과 새로운 곡 모두,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며, “주님에게 노래하는” 한계를 개발하는 것이 된다.
6)음악가는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면 거의 감사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음악가는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헌신을 하게 된다. 종종 음악가들은 선곡, 창작, 그 밖의 일 등에서 회중의 만족감을 방해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아마도 음악가들의 가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은사를 비판하기 보다는 북돋워 주고 있을 것이다.
7)교회가 사람들을 음악가로서 챙겨두지 않는 한 음악의 표준은 계속 추락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좋은 음악과 심지어는 위대한 음악을 원한다면, 그 세대에 맞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청소년들을 찬양대로서 그리고 음악성을 가진 세대로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8)교회는 세대를 초월해야 한다. 젊은이와 나이든 세대가 함께 주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음악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도록 유지해야 하는 가치를 언급한 것이다. 전통은 기독교 믿음에서 독특한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시작부터 교회 음악을 바르게 훈련시켜야 한다. 가장 기초적 수준에서 젊은이들이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의 경배에 협조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