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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명시

작성자봉서방|작성시간25.07.04|조회수4,264 목록 댓글 2

좋은 시. 명시        

■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삶이란

- 민병도

풀꽃에게 삶을 물었다

흔들리는 일이라 했다

물에게 삶을 물었다

흐르는 일이라 했다

산에게 삶을 물었다

견디는 일이라 했다

■ 지금 하십시오

- 찰스 해든 스펄전

할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의 햇빛이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철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다면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렐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보여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 술한잔

-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 아직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더 많다

                      -  양광모

아직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더 많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아직은 가슴 뛰는 아침이

아직은 노래 부르고 싶은 밤이

아직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더 많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완성하는 것

아직은 떠나야 할 여행이

아직은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이

아직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직은 미워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 수련-뿌리에게

- 이승희

당신을 수면 아래 묻고

당신의 이름은 물속의 흙에

묻었습니다.

나는 물 위에 떠서

가만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여전히 한 몸인 당신의

이야기가 오늘 하루의 양식입니다

난 여전히 당신을 읽고

당신은 여전히 나를 읽습니다

땨로 당신은 자꾸만 나를 밀어

올리려 하지만

난 결코 이 물을 떠나지 못합니다

저 공중으로 가버릴 수가 없습니다

수면에 닿는 곳, 여기까지가

내가 당신을 버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난 당신으로 인해 꽃 피지만 당신은

나로 인해

당신의 이름을 말 할 수 있습니다

밤이 되어

달빛을 타고 당신에게 내려가

물속의 흰 방에서 잠들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이 꽃잎을 거두어

송이쨰 당신에게 지고 싶어집니다.

물속

몸의 알갱이들을 두드려 밟으며

달빛이 그러하듯

오랫동안

아주 느린

세월의 무게로

가라앉고 싶습니다

다시는 떠오르지 않고

다시는 저 공중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다시는 꽃 피우지 않으며

지고 싶습니다.

□ 긍지의 날

-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 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을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 충분히 슬퍼할 것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과 이별한다.

때론 소중한 사람과 이별하고

사랑받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과 이별하고

자신이 품었던 이상과 이별하고

젊음과 이별하며

자신이 믿어 온 한때의 진실과 이별한다.

이 모든 이별에는 길든 짧든 애도가 필요하다.

에도란 마음의 저항 없이 충분히 슬퍼하는 일이다.

김수현, 「충분히 슬퍼할 것」

□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

- 마샤 메데이로스(브라질. 1961~)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결코 일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옷 색깔을 바꾸지 않는 사람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열정을 피하는 사람

흑백의 구분을 좋아하는 사람

눈을 반짝이게 하고

하품을 미소로 바꾸고

실수와 슬픔 앞에서도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보다

분명히 구분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과 사랑에 행복하지 않을 때

상황을 역전시키기 않는 사람

꿈을 따르기 위해 확실성을 불확실성과 바꾸지 않는 사람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합리적인

조언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그곳을

에고로 채운 사람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나쁜 운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아는 것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우리, 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

살아있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늘 기억하면서

□ 고독하다는 것은

​ - 조병화 ​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로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

□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 번쯤은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산을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 시절인연 (時 節 因 緣)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고

무진장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사람이나 일이나 물건과의 만남도

더 나아가 깨달음과의 만남도

그 때가 있는 법이다 .

아무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혹은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시절 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바로 옆에 두고도 만날 수 없고 손에 넣을 수도 없는 법이다 .

그 반대로 만나고 싶지 않아도

갖고 싶지 않아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이 만날 수 밖에 없다 .

헤어짐도 마찬가지이다 .

헤어지는 것은 인연이 딱 거기 까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재물이든 내 품 안에 내 손 안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은 하나도 없다 .

□ 당신과 나의 인연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 이채 -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구슬이라도

가슴으로 품으면 보석이 될 것이고

흔하디흔한 물 한 잔도

마음으로 마시면 보약이 될 것입니다

이웃이 있는 자는

필시 사랑의 향기가 있을 것이고

이웃이 없는 자는

필시 마음의 가시가 있을 터

풀잎 같은 인연에도

잡초라고 여기는 자는

미련 없이 뽑을 것이고

꽃이라고 여기는 자는

알뜰히 가꿀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만남이

꽃잎이 햇살에 온 듯

나뭇잎이 바람에 춤추듯

일상의 잔잔한 기쁨으로

서로에게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다면

당신과 나의 인연이

설령 영원을 약속하지 못할지라도

먼 훗날 기억되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진실한 모습으로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 9월의 기도

- 서영림

9월은

당신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계절이 열리는 때,

벅찬 가슴으로 받아 안게 하소서

9월에는

지난 여름날

메말라 갈라진 내 세월의 강에

당신 자애의 비를 내려주소서

9월에는

내 작은 가슴에도

큰 열매를 맺게 하시어

이웃들과 함께하는 사랑이게 하소서

9월에는

뒤뜰 풀숲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풀벌레의 가녀린 울음도

겸허히 들을 수 있게 해주소서

9월에는

저 힘겹게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도

작은 바람조차 잠들게 하시어

아름다운 빛깔 잎새로 머물게 하소서

9월에는

강 너머 어둠의 저편에도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더 반짝이게 하소서.

□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 혜민스님

부족한 '나'라고 해도,

내가 나를 사랑해주세요.

이 세상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분투하는 내가

때때로 가엽지 않은가요?

친구는 위로해주면서

나 자신에게는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지.

내 가슴을 토닥이면서

스스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여.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치여 상처 받았던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남들 보기엔 좀 부족해 보일 수 있어도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나를

많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가지 않은 길

-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지금 하십시오

- 찰스 스펄전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루는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다면,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 🌷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

비로소 가만 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 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 싸여야 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주는 사람과

얘기 거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히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 날들은 아름다웠으니...

앞으로 절대로 초초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슴이

영원한 느낌을 채워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들의 추억과 재산이라고

우리만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이 못되어도,

일등이 못되어도,

출세하지 못해도,

고루 고루 갖춰놓고 달리지는 못해도

우정과 사랑은 내 것이었듯이

아니 나아가서 우리의 것이었듯이

앞으로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中에서 -

■ 사랑하는 별 하나

- 이 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 다 잊고 사는데도

- 원태연

다 잊고 산다

그러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가슴이 저려올 때가 있다

그 무언가 잊은 줄 알고 있던 기억을

간간히 건드리면

멍하니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그 무엇이 너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못다한 내사랑이라고는 한다

■ 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 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간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 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 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 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하루

- 천양희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 햇살에게

- 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서성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 목마(木馬)와 숙녀

​ - 박인환 / 시인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귀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 목메어 우는데ㅡ.

■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 헨리 나우엔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불가능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좋다.

다른 사람을 위해

호탕하게 웃길 줄 아는 사람이 좋고

화려한 옷차림이 아니더라도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

바쁜 가운데서도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떠한 형편에서든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린아이와 어른들에게

좋은 말벗이 되어줄 사람이 좋다.

책을 가까이 하여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이 좋다 .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잘 먹는 사람이 좋다.

철따라 자연을 벗삼아

여행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손수 커피 한잔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하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하루 일을 마치고 뒤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줄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때에 맞는 적절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녹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외모보다는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좋다.

친구의 잘못을 충고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고

새벽 공기를 좋아해 일찍 눈을 뜨는 사람이 좋다.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좋다.

항상 겸손하여 인사성이 바른 사람이 좋고

춥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다.

■ 두 번은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 마음에 두지 마라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흐르는것은 흘러가게 놔둬라.

바람도 담아두면 나를 흔들때가 있고,

햇살도 담아두면

마음을 새까맣게 태울때가 있다

아무리 영롱한 이슬도

마음에 담으면 눈물이 되고,

아무리 이쁜 사랑도

지나가고 나면 상처가 되니

그냥 흘러가게 놔둬라...

마음에 가두지마라

출렁이는 것은 반짝이면서 흐르게 놔둬라.

물도 가두면 넘칠때가 있고,

빗물도 가두면 소리내어 넘칠때가 있다.

아무리 즐거운 노래도

혼자서 부르면 눈물이 되고,

아무리 향기로운 꽃밭도

시들고나면 아픔이 되니

출렁이면서 피게 놔둬라.

- 김정원/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 中 -

■ 살다가 보면

- 이근배 / 시인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 인연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 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 다웠다고 말하리라

■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길

윤동주 / 시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푸르른 날

-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지는데

눈이 오면 어이 하리랴

봄리 또 오면 어이 하리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눈사람 여관

- 이병률

아픈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가지 않는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꺽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만남

- 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애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 이정하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거리

- 황경신

당신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당신과 나 사이에 바람이 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창문이 있어야

당신과 내가 눈빛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창밖에 서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나였으면

당신은 그저 다정한 불빛 아래서

행복해라

따뜻해라

■ 한 사람을 잊는다는 건

- 김종원

바람이 스쳐가면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파도가 지나가면

바다가 흔들리는데

하물며 당신이 스쳐갔는데

나 역시 흔들리지 않고

어찌 견디겠습니까..

■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 삶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날

- 용혜원

삶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날

한 잔의 커피에서

목을 축인다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

거품만 내며 살지는 말아야지

거칠게 몰아치더라도

파도쳐야지

겉돌지는 말아야지

가슴 한복판에 파고드는

멋진 사랑을 하며 ㅊ

살아가야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늘 조바심이 난다

가을이 오면

열매를 멋지게 맺는

사과나무같이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에

삶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날

한 잔의 커피와

친구 사이가 된다

■ 나하나 꽃피어

- 시인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이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 박태기나무 꽃

-임두고의 박태기나무 꽃 중

그리움은 젖을수록 가벼운 날개를 다는가

내 가슴은 지금

그 모순을 접어 만든 팔랑개비

누가 작은 바람끼만 건네도

천만 번 회오리치며 돌아버릴 것 같은

미쳐버릴 것 같은

가벼움 속으로......

나는 지금 그렇게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있다.

 

■ 언젠가

장용숙( 꿈꾸는 원덕사 중에서)

우리가 지나온

삶을 뒤돌아 봤을때

미련이 많아

질척이는 삶보다

쿨하게 후회없이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기를

언젠가

당신이 나를 떠올렸을때

그저 기억에서

지우고픈 한사람이 아니라

항상 그림자처럼

내 주위를 살펴준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우리는 잠시

하늘에서 소풍나온

순서를 기다리다

어렵게 나온

각자 부여받은

삶을 위해 사는거라네

무엇을 위해 살면 좋을까

묵묵히 지켜주는

사랑도 해보고

마음에 품은

큰 꿈을 이루면서

여한없이 삶을 만끽해야지

나를 위한 무대에서

한바탕 후회없이 놀아도 보자

남자라면 대범함을

여자라면 아름다움을

평생 추구하며 살기를

■ 길

- 정용철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마음이 가는 길아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걸을수록 지치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멈춤 때 지칩니다.

몸이 가는 길은 앞으로만 나 있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돌아가는 길도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젖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더 깨끗해집니다.

몸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사랑합니다.

오늘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섭니다.

 

■ 지금 알고 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킴벌리 커버커

지금 알고 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을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그리고 미소를

- 폴 엘뤼아르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 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꿐은 깨어나듯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고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 김준엽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도

나만이 있는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곳 흘러서

은밀한 내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 이해인

또 한 해를 맞이하는 희망으로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고

안팎으로 힘든 일이 많아

웃기 힘든 날들이지만

내가 먼저 웃을 수 있도록

웃는 연습부터 해야겠어요

우울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한 이들에게도

환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도록

아침부터 밝은 마음 지니도록 애쓰겠습니다

때때로 성격과 견해 차이로

쉽게 친해지지 않는 이들에게

사소한 오래로 사이가 서먹해진 벗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는 노력의 열매가 사랑이니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다가서서 해주는

겸손한 용기가 사랑임을 믿으니까요

차 한 잔으로 좋은 책으로 대화로

내가 먼저 마음 문을 연다면

나를 피했던 이들조차 벗이 될 것입니다

습관적인 불평의 말이 나오려 할 땐

의식적으로 고마운 일부터 챙겨보는

성실함을 잃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주는

소중한 밑거름이니까요

감사는 나를 살게 하는 힘

감사를 많이 할수록

행복도 커진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그 동안 감사를 소홀히 했습니다

해 아래 사는 이의 기쁨으로

다시 새해를 맞으며 새롭게 다짐합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그리하면 나의 삶은

평범하지만 진주처럼 영롱한

한 편의 詩가 될 것입니다.

■ 내가 만일 인생을 다시 산다면

- 나딘 스테어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를 거예여.

마음도 몸도 긴장을 풀고

그리고 더 바보같이 살 거예여

심각한 생각 따윈 하지않고

더 많은 모험을 할 거예여

더 자주 여행을 하고

더 자주 석양을 구경해야죠

■ 여자와 남자

 

ㅡ 로맨스 일러, 멜로우J

여자의 몸만 원하는 남자는 삼류다.

여자의 마음만 원하는 남자는 이류다.

여자의 몸과 마음을 원하는 남자는 일류다.

 

여자의 몸과

마음을 만족시키는 남자는 초일류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아끼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다.

여자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위해 옷을 입고

한 사람의 마음을 위해 옷을 벗는다.

남자는 시각과 촉각의 동물이다.

그녀의 볼륨 있는 몸매에 반하고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에 반하고

그녀의 오뚝한 콧날에 반하고

그녀의 입술에 반한다

하지만

여자는 청각과 후각의 동물이다.

그의 이쁘다는 말에 반하고

그의 상쾌한 스킨 향에 반하고

그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반하고

그의 익숙한 향기에 반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가 꾸미길 원하고

남자는 여자와 스킨십 하기를 원한다.

 

여자는 그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원하고

여자는 그에게서

다른 여자의 향이 사라지길 원한다.

■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작정하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푸른숲.1997)

■ 네가 가고 나서부터 비가 내렸다

 

- 여림

네가 가고 나서부터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비는 점점 장대비로 변해가고

그 빗속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에 앉아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을

너를 떠올리면서

조금씩 마음이 짓무르는 듯 했다

 

사람에게는

때로 어떠한 말로도

위안이 되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다

넋을 두고 앉아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본다거나

졸린 듯 눈을 감고 누웠어도

더욱 또렷해지는

의식의 어느 한 부분처럼

네가 가고 나서부터비가 내렸다

너를 보내는 길목마다

■ 가을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 한 말

못다 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 잎 두 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 속에

담아 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 민들레꽃

- 조지훈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는니.

■ 여행은 혼자 떠나라

- 박노해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사람들 속에서 문득 내가 사라질 떄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말을 잃어 갈 때

달려가도 멈춰 서도 앞이 안보일 때

그대 혼자서 여행을 떠나라

존재감이 사라질까 두려운가

떠날 수 있다는 용기가 충분한 존재감이다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함께 가도 혼자 떠나라

그러나 돌아올 땐 손잡고 오라

낯선 길에서 기다려 온 또 다른 나를 만나

돌아올 땐 둘이서 손잡고 오라.

■ 뒤적이다

- 이재무

 

망각에 익숙해진 나이

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거듭 동선을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 귀로(歸路)

- 이정하

돌아오는 길은 늘 혼자였다.

가는 겨울해가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내 마음도 무너져왔고, 소주 한 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시외버스를 타는 동안에

차창 밖엔 소리없이 눈이 내렸다.

그대를 향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다는 것,

그것은 정말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듯

어딘가에 쉽게 넣어 둘 일은 못 되었지만

나는 멍하니 차창에 어지러이 부딪쳐오는

눈발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 사랑이 언제쯤에나 순조로울는지,

오랫동안 우리가 기다려온 것은 무엇인지,

어디쯤 가야 우리 함께 길을 갈 수 있을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저 차창에 부서지는 한 송이 여린 눈발이었다.

무언가를 주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 것도

주지 못한 채 돌아섰지만 그대여,

나 지금은 슬퍼하지 않겠다. 폭설이 내려

길을 뒤덮는다 해도 기어이 다시 찾아올 이 길을.

문득 고개 들어보니 차창 너머

손을 흔들고 서 있는 그대.

그대 모습이 이토록 눈물겨운 것은

세상에 사랑보다 더한 기쁨이 없는 까닭이다.

버스는 출발했으나 내 마음은 출발하지 않았다.

비록 몸은 가고 있으나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 곁에 머물러 있다.

■ 자녀를위한 기도

- Douglas MacArthur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때에 자기를 돌아볼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생각 해야 할때에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주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자녀에게 유우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위대함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느날 나 아버지는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사랑이 존재다

- 나태주

세상 모든것들을 사랑해 주고

감격해 주는 사람의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있더라도

사랑해 주지 않고 감격해 주지 않으면

없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산이면 산 하늘이면 하늘

꽃이나 풀이나 나무 풀벌레 새소리

하나에 이르기까지 사랑해주고

감격해 주면 그 사람의 것이 된다

감격하자

사랑하자

사랑은 연습이고

감격도 학습이 필요하다

사랑해 주고 감격해 주면

세상 모든것들이 우리의 것이 된다

■ 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

- 나태주

 

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

아무 것에게나 함부로 맡기지 말아라

술한테 주고 잡담한테 주고 놀이한테

너무 많은 자기를 주지 않았나 돌아다 보아라

가장 나쁜 것은 슬픔한테 절망한테

자기를 맡기는 일이고

더욱 좋지 않은 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

자기를 던져버리는 일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끝장이다

그런 마음들을 거두어들여

기쁨에게 주고 아름다움에게 주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에게 주라

대번에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젊어지다 못해 어려질 것이고

싱싱해질 것이고 반짝이기 시작할 것이다

자기를 함부로 아무것에나 주지 말아라

부디 무가치하고 무익한 것들에게 자기를 맡기지 말아라

그것은 눈 감은 일이고 악덕이며

인생한테 죄 짓는 일이다

가장 아깝고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한테

주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날마다 가장 중요한

삶의 명제요 실천 강령이다

■ 겸손한 사람이 참 아름답다

- 허영자

겸손이란

참으로 자신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인격이다.

자신과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열등의식이나 비굴감은 있을지언정

겸손한 미덕을 갖추기 어렵다.

겸손은 자기를 투시할 줄 아는

맑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한계를 알고

한정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영원 무변성과를 대비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만이 겸손할 수가 있다.

또한 겸손은 생명 있는 모든 것,

혹은 무생물의 모든 것까지

애련히 여기는 마음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함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뜻,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모두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겸허함을 가진 이의 삶은 경건하다.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함부로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며,

운명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사랑함으로써 극복하는 이이다.

그런 사려 깊은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길을 물어

예까지 왔으니

눈이라도 한 번 맞춰주렴

적멸에까지 좆아온

끈질긴 그리움이다

잊고 지내려

무던히도 애썼는데

나도 모른다

왜 여기까지 달려 왔는지

널 보고 있으면

지금 막 돌고 있는

분주한 이 핏줄

이토록 사랑이 일어나는 봄 밤

결이 환한 네 꽃초롱 속에

나를 가두어 다오

-박이현 ‘섬초롱 꽃네야’ 모두

몸을 낮춘다는 건 사랑한다는 거

사랑은 허리 굽히며 엎드려야 된다는 거

조용히 가르쳐주고 있는 애기나리꽃

어디에 숨어 피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자주 보아 주고 자주 이름 불러줘야 하느니

그러나 빠르게 치닫는 사랑이 아니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금은 게으르게, 느린 발걸음으로

오래 허리 굽히고 엎드려야 하느니

그래야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김승기 ‘애기나리’ 부분

너무나 작은 우리는

모여 있어도

하나가 될 수 없는

하나 하나 각각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뭉치려 해도

뭉칠 수는 없지만

함께 모여 있다

우리는 서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하나 마음대로 흩어져 버리면

우리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용혜원 ‘모래알’ 모두

하늘은 뽀얀 살결을

황사에 살짝 감추고

산은 물 오른 젖가슴을

옷깃 사이로 슬며시 내 보인다

오월의 꽃 철쭉을 보고

환희라 하는데

정열이라 하는데

내가 너에게

빼앗긴 마음도 그랬을까

-김정호(美石) ‘오월이 오면’ 부분

내 몸은 빛을 흡수하는 검은 색 껍질로 싸고

그 속에 연한 빛 가득함을 아시는지요

잠긴 날들을 펴서 아득히 보내고 나면

삶을 부데끼며 가지마다 당신 생각은 없지요 세상이

파란 잎들 일상으로 무성히 돋을꺼예요

일 년을 참아 일시에 피었다 지는

마음 홀로 피고 지는 봄날이예요

당신 마음 단 삼일만 물들이고 꽃비 꽃비로 가요

아, 아니라고 그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사실은...

당신 잘 있지요 저 가요 좋은 날 되길

-권도중 ‘벚꽃 2’ 부분

자주는 말고 아주 가끔은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이고 싶어요.

바람결에 흩날리다 고개 떨군

들장미 넝쿨 위에 말없이 앉아

빨간 꽃잎으로 울고 싶어요.

자주는 말고 일년에 한번쯤은

한 송이 들꽃이고 싶어요

양지바른 산기슭에 나지막이 자리잡아

흙내음, 은방울 이슬 머금고

보랏빛 고운 향기로 피고 싶어요.

-김용수 ‘자주는 말고 아주 가끔은’ 부분

해마다 봄은 오고

또 봄은 갈 것이지만

내생에 봄날은 지금이다

난 어쩔 수 없는 봄의 향취 간직한 봄물이고

내 몸을 쥐어짜고 비틀면

쌀뜨물 같이 쏟아내는 봄꿈은

밥솥이 흘리는 눈물처럼 뜨거우리라

-최남균 ‘내 생애 봄날은’ 부분

어설픈 사랑 통하지 않는 세상

낙엽 지고 눈 내려 얼어붙고 나면

가슴 치고

통곡할 줄 알면서

왜 이렇게 무너지는지 몰라

다시 봄 오면

그렇게 꽃 피는 미친 사랑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바탕 잘 펼친 놀이판이라 여기면 되는데

왜 자꾸 응어리만 맺히는지 몰라

-김승기 ‘현호색에게’ 일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이준관 ‘구부러진 길’ 부분

가보고 싶은 길 다 걷고 나니

다시 걷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숲 바람 꽃과 동행하며

오롯이 걷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빈 가슴 하늘 한 자락 들여놓고

허리 굽혀 봄까치꽃과 눈맞춤하는

하늘 우러러 별빛 노래하는 그렇게

꿈을 파종하며 걷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낮아지며 어우러지며

흐르고 싶은 강이 있습니다

-이정자 ‘길’ 모두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은 져야만 하고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견뎌야 함을

입술 깨물며 되새깁니다

버려야 할 만큼 쌓은 것은 그리움 밖에 없는 봄

눈부신 푸르름의 그늘에서 바람 따라 꽃잎 흔들리듯

길들여지고만 싶은 야생화의 맑은 순종

끝까지 너를 들어 주고

눈물 글썽이며 작은 것에도 감격해 주는 것

너 뒤에 내가 말하고

마침내 내가 너에게 젖어드는 일

그것이 나의 사랑법입니다

네 가슴에 그렁그렁 매달려

비로소 눈 뜬 이 사랑을

목숨같이 지키고야 말 처절하게

붉은 금낭화를 당신은 아시나요.

-안수동 ‘금낭화’ 모두

친구를 따라 강남에 가서 살거나

애인을 따라 섬에 가서 살거나

이대로 서로의 경계선이 되어

석삼년 애간장을 태워도 오지 않을

엽신(葉信)을 기다리며 살아갈거나

기다림 하나만으로 일생의 안부를 묻고

내 것이 아닌 침잠의 슬픈 얼레도 풀다가

맨발 아래 차가운 물소리와 함께

한평생 고질병에 이를 갈며 살아갈거나

아아 내일이 되어도 아지 못할

이 징그러운 소망의 잔뿌리들이여

이제 나는 홀로 자유로워야 하겠네

-전연옥 ‘제비붓꽃’ 모두

■ 꽃자리

-구상-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 너의 의미

-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리움과 친해지다 보니 이제 그리움이 사랑 같다.

흘러가게만 되어 있는 삶의 무상함 속에서

인간적인 건 그리움을 갖는 일이고,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을

삶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며,

악인보다 더 곤란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리움이 있는 한 사람은 메마른 삶 속에서도

제 속의 깊은 물에 얼굴을 비쳐본다고.

사랑이 와서, 우리들 삶 속으로 사랑이 와서,

그리움이 되었다.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사라지고 멀어져버리는데도

사람들은 사랑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은 건

사랑의 잘못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의 위력이다.

시간의 위력 앞에 휘둘리면서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우리들의 내부에 사랑이 숨어살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아이였을 적이나 사춘기였을 때나 장년이었을 때나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해 지나간 이름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中 에서 -

 

 

■ 다른 길은 없다

- 마르타 스목(Martha Smock)

우리 삶이 가야할 길을 알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이곳 삶의 현장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빗나간 길들을 걸어 왔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영혼이 가파른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온 것도 알아야 한다.

그 상처, 그 방황, 그 두려움과

그 삶의 황무지들은 잊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우리가 지나온 그 길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길이며

그 외의 다른 길은 없었다는 것을.

내딛기 힘든 그 발걸음들이 없었다면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어렵게 버틴 그 발걸음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처럼 성장하지도 못했을 것임을.

삶의 여정은 굽이굽이 이어지고

우리는 여행자처럼

수많은 삶의 모퉁이를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인생은 끝이 없으며

우리는 그 영원 속에 언제까지나 머무르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 11월

-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겠습니다

□ 행복

- 나태주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것

힘들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것

외로울때

혼자서 부를노래가 있다는것

□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겨울 들녁에 서서

-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 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 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 첫사랑

- 석류정

아직도 나는 대결 중이다

맨 살 위에 꽂히는 바람 끝이 날카롭고

유혹하는 음흉한 웃음과

동전이 굴러 와도 구부리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

깨지기 쉽지 않다는 것을

다짐 또한 꼿꼿하여

헝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허락한 모든 시간은

아직도 유효하게 반듯하다는 것을

절벽과 대결 중이다

꽃 한 송이 찾아

사막을 건넜던

그 때 그 시간은 화석이 되었고

굶주려 죽은 미이라의 몸으로

한 만 년을 향해 헌납한 청춘까지

다른 질문은 허용하지 않은 채

잔해 없이 완벽하게 소멸한 나는

아직도 대결 중이다

□ 설야(雪夜)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 마음길

- 김재진

마음에도 길이 있어

아득하게 멀거나 좁을 대로 좁아져

숨 가쁜 모양이다.

갈 수 없는 곳과, 가고는 오지 않는 곳으로

그 길 끊어진 자리에 절벽 있어

가다가 뛰어내리고 싶을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열리거나 닫히거나 더러는 비틀릴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항아리 있어

그 안에 누군가를 담아두고

오래오래 익혀 먹고 싶은 모양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

달그락달그락 설거지 하고 있는 저녁

일어서지 못한 몸이 따라 문밖을 나서는데

마음에도 길이 있어 나뉘는 모양이다.

□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 양병우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바로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고독을 만나러 가는 것이고

자유를 느끼기 위해 가는 것이다

 

동굴 속에 머물러 지내다가

푸른 하늘을 보러 가는 것이다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갈매기 따라 날고 싶기 때문이다

 

시린 바닷바람 가슴 가득히 마셔

나를 씻어내고 싶어 가는 것이다

 

□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 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 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 거리는 모든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 금아연가(琴兒戀歌)

- 피천득

 

설움은 세월 따라

하루 이틀 가오리다

 

아름다운 기억만이

가슴속에 남으리다

 

엣 얼굴 떠오르거든

고이 웃어 주소서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려 아니하리

 

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려도 아니하리

 

어디서 다시 만나면

잘 사는가 하리라

□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 이정하

 

그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노라고 말하지 말라.

사랑은,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히 고이는 샘물 같은 것.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노라고 말하지 말고

마지막 남은 눈물마저 흘릴 일이다.

기어이 가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지 말라.

사랑은,보내 놓고 가슴 아파하는 우직한 사람이 하는 일.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떠나는 그의 앞길을 막아서지 말고

그를 위해 조용히 고개 끄덕여 줄 일이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그를 위해 나는 한 발짝 물러서는 일이다.

어떤 아픔도 나 혼자서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내 안에만 가둬 두지 않을 일이다

□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마음의 창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느림은 여유요, 안식이요, 성찰이요, 평화이며

빠름은 불안이자 위기이며,오만이자 이기이며, 무한경쟁이다.

땅속에 있는 금을 캐내 닦지 않으면

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마음속에 있는 정서의 창을 열고 닦지 앟으면

창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정호승의 《위안》중에서 -

□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너를 위하여

-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 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 커피를 내리며

- 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

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

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

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

하늘의 높이를 재려한 얄팍한 깊이로

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

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

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

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애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

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

눈물 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

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

걸러내어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서

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바위는 태어난 곳에 머물면 풍경이 되지만 자리를 빼앗기면 불행이 닥치기도 한다.

■ 화양연화 (花樣年華)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이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그대 강물 처럼 흘러가라

- 유인숙

그대, 강물처럼 흘러가라

거치는 돌 뿌리 깊게 박혀

발목을 붙들어도

가다 멈추지 말고 고요히 흐르거라

흐르고 또 흘러서

내 그리움의 강가에 이르거든

잠시 사랑의 몸짓으로

애틋하게 뒤척이다 이내

큰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라

고여 있는 것에는

순식간, 탁한 빛 감돌고

올무 감긴 물풀 어둡게 돋아나느니

내 삶의 날들이여,

푸른 그리움이여,

세상사 돋친 가시에 마음 다쳐

귀먹고 눈멀어

그 자리 주저앉고 싶을지라도

소망의 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며

말없이 흐르거라

울음조차 삼키는 속 깊은 강물처럼

그렇게 유유히 흘러가라

기억의 저편...

모든것은 흘러간다...

끊임없는 물결의 출렁임으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그렇게...유유히...

■ 노을 초상화

- 서정윤

내 삶의 쓸쓸함을 모아 태우면

이런 냄새가 날까

늘 너무 빨리 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돌아서 보면

지친 얼굴로 따라오는 그림자

길게 누워 바라보는 눈길이 멀다.

어둠이 익어가는 가지 끝

목숨길에 드리우던 노을 그림자

때때로 숨어 지켜보던 그 길을

이제는 걸음 걷고 있다.

잊어도 좋은

그래야만 할 기억을 하늘에 그리며

전설의 별에서 울려오는 얼굴이

아득하다.

별의 꿈이 떨어진 자리에

자라는 노을의 사랑

두 손에 하늘을 들고

그러고도 느끼는 허전함

을 그려내는 노을 초상화.

침묵해야 할 때가 되어져 있는

우리의 지친 발걸음

걸어야 한다면 사랑이 깨어져도,

그래도 걸어야 한다면

저 풀과 나무들 사이의 노을이.

■ 찔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월간문학>(1985)-

■ 풀밭에서

- 조지훈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즉히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곤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 집어 바람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살아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도 내 영혼이 바람속에 간다.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이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시집, 죽지 않는 도시, 고려원, 1994.

■ 바람편지

​― 천양희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 기도

- 정채봉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 시인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 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엔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결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나는 배웠다

- 샤를 드 푸코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은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삶에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한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배어 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가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 위로

- 조희선

누군가

괜찮다고

넌 잘하고 있는 거라고

지금 나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내 마음을 주어버릴 것 같다.

평생을 고마운 사람으로 기어할 것 같다.

때로

위로란 그렇게 절박한 것이다.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 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도록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 나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 나가겠습니다

■ 흰구름

- Hermann Hesse​

오, 보라!

오늘도 흰 구름은 흐른다

잊혀진 고운 노래의

나직한 멜로디처럼

푸른 하늘 저편으로 흘러만 간다

기나긴 방랑 끝에

온갖 슬픔과 기쁨을

사무치게 맛본 자만이

저 구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햇빛과 바다와 바람과 같이

가없이 맑은 것들을 난 사랑한다.

그것은 고향 떠난 나그네의

누이이며 천사이기에​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 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도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 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추운 것들과 함께

- 이기철

지고 가기엔 벅찬 것이 삶일지라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천인절벽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는 망아지처럼

건너온 세월, 그 물살들 헤어본다 한들

누가 제 버린 발자국, 쓰린 수저의 날들을

다 기억할 수 있는가

독충이 빨아먹어도 아직 수액은 남아 나무는 푸르다

누구의 생이든 생은 그런 것이다.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은

노오란 새의 부리를 검게 만드는 일뿐

상처가 없으면 언제 삶이 화끈거리리

지나와 보면 우리가 그토록 힐난하던 시대도

수레바퀴 같은 사회도 마침내 사랑하게 된다

계절을 이긴 나무들에게

너도 아프냐고 물으면

지는 잎이 파문으로 대답한다

너무 오래 내려다보아 등이 굽은 저녁이

지붕 위에 내려와 있다

여기저기 켜지는 불빛

세상의 온돌들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할 사람들도

오늘 늦가을 지붕을 인다

■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 시인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봄 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인연

- 도종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자리에 돌아오니

가을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

누군가 꽃 들고 기다리다가 문드러진 흔적 하나

내 걸어오던 길쪽을 향해 버려져 있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이 울릴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할 때인걸

■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 공선옥

생애의 어느 한때 한순간,

누구에게나 그 한순간이 있다.

가장 좋고 눈부신 한때 그것은

자두나무의 유월처럼 짧을 수도 있고

감나무의 가을처럼 조금 길 수도 있다.

짧든 길든, 그것은 그래도

누구에게나 한때, 한순간이 된다.

좋은 시절은 아무리 길어도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바람에게 묻다

- 김부조

뜬소문마저 그리운 오늘

창틈을 기웃거리는 바람에게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산다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라던

바로 당신의 안부를

기웃거리는 바람에게 묻는다

 

숨겨진 나의 아픔마저 몰래 떠안고

서둘러 떠나간 당신의 안에서

나는 또다시 아플 수 없겠지만

 

뜬소문마저 그리운 오늘,

산다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라던

바로 당신의 안부를

한 줌 기웃거리는 바람에게 묻는다

■ 해는 지는데

- 박이도

해는 지는데

아직 갈 길은 멀고

누구 하나 말벗이 없구나

 

서산에 불타는 해님은

뉘엿뉘엿 사라지며

네 가는 길의 끝은 어디냐고

조용히 묻고 있지 않는가

 

멧새들이 소곤대며

잠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나를 외롭게 한다

 

어느 토담집 아궁이 앞에서

희나리 지피며 눈물짓는

아낙네의 머리 수건에

하얗게 쌓이는 솔 내 향기가 나는 그립다

 

산 너머 마을에도 해가 지겠지,

이 저녁의 적막寂寞

찾아드는 어둠 속에서

나는 별을 보았다

내가 걸어온 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인연은 한번 밖에 오지 않는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탓으로

내 곁에서 사라지게 했던 사람들.

한때 서로 살아가는 이유를 깊이 공유했으나

무엇 때문인가로 서로를 저버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관계의 죽음에 의한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

사람은 외로워지고 쓸쓸해지고

황폐해지는 것은 아닌지.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신뢰,

서로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주변에 둘만 있어도

살아가는 일은 덜 막막하고 덜 불안할 것이다.

마음 평화롭게 살아가는 힘은

서른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내 아픔과 기쁨을 자기 아픔과 기쁨처럼

생각해주고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도 들어주며

있는 듯 없는 듯, 늘 함께 있는 사람의 소중함.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라는 생각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행복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인연은 한 번 밖에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난날 내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덜 주었을 것이다.

결국 이별할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해도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시의 한 구절 처럼

우리가 자주 만난 날들은 맑은 무지개 같았다고

말할 수 있게 이별했을 것이다.

진작, 인연은

한번 밖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라면.

-신경숙 ‘인연은 한번 밖에 오지 않는다’ -

■ 사람이 위안이다

- 박재화

살다보면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그런 날엔

혼자서 산을 오른다.

해거름까지 산에 오른다.

오르다 보면

작은 묏새 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서슬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떼 숨죽이는 것 보인다.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리웁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 박재화 시집, 먼지가 아름답다, 인간과 문학사, 2014

■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놓았거나, 혹은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울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 송년의 강

-백원기-

 

세상 존재하는 것은

앞으로만 가지 뒤로 가지 않는다

애타게 붙잡아도

속절없는 세월은

욕심껏 앞으로 가다가

기어이 해를 넘고 만다.

 

늦은 저녁 한숨일랑 걷어내고

내달리는 세월의 강에

흘려보낼 것은 보내고

씻을 것은 씻어야지

 

버려야 할 것들

잔뜩 껴안고 있으면 뭣하나

갈등속에 몸부림치다가

송년의 강에 띄워 보내는

근심 걱정 후회 실망...

그대신 너의 빈 자리를

사랑과 감사로 채워줄께.

■ 사랑에 답함

- 나태주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10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데

돌아보면 문득 나홀로 남아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데 이지상에는

외로운 목숨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여 네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한다

■ 중년의 가슴에 10월이 오면

- 이채 ​

내 인생에도 곧 10월이 오겠지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드높은 하늘처럼

황금빛 들녘처럼

나 그렇게 평화롭고 넉넉할 수 있을까

쌓은 덕이 있고

깨달은 뜻이 있다면

마땅히 어른 대접을 받겠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속절없이 나이만 먹은

한낱 늙은이에 불과하겠지

스스로를 충고하고

스스로를 가르치는

내가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면

갈고닦은 연륜의 지혜로

내가 나를 지배할 수 있다면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모든 푸른 잎은 떠나가도

나무는 살아있듯

모든 젊음은 떠나가도

내 안에 더 깊은 나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내 인생에도 곧 10월은 오겠지

그때 나는 어떤 빛깔일까

빨간 단풍잎일까

노란 은행잎일까

이 가을처럼 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 10월의 기도

- 이해인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 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 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 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 주소서

■ 이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별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아는 이별, 어두운

매정한 어떤 것. 아름다웠던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면서, 질질 끌며

찢어버리는 어떤 것

어떻게 아무 방어 없이

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그것을 쳐다볼 수 있었던가.

■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 바다의 미풍

- 스테판 말라르메 (1842~1898)

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노라

떠나버리자. 저 멀리 떠나버리자! 새들은 취한 듯

낯선 거품과 하늘로 나섰다!

그 무엇도, 눈매에 비친 해묵은 정원들도

바닷물에 젖은 이 마음을 붙들지 못하리.

■ 슬픔

- 알프레드 드 뮈세

푸른 나무들로 해서

풍경 전체가 생기를 얻는 6월

가로수 밑을 걷다 보면

모든 생생한 것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고

작은 풀잎과도 얘기하고 싶어진다

이 세상 모든 사물에 눈이 있다더니

저 나무들도 눈이 있어

탁한 세상을 푸르게 만들고 싶은 것일까 생각해 본다

그런 날은 우리 마을에서

나무들처럼 곧고 깨끗한 것은 없다고 혼자 중얼거려 본다

나는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가장 깊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 순간 그동안 내 마음 쪽의 몸은 고통의 장소였고

수난의 장소였던 것 같아 조금 슬퍼진다

그럴 땐 불 속에 잎을 넣으면 잎이 터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를 떠올리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들 생(生)은

슬픔을 영양으로 취한다는 말과

슬픔을 거쳐 충만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마음속에 와 박힌다

그 때문인지 슬픔도 때론 힘이 될 때가 있다

■ 소중한 만남을 위하여

- 나태주

옆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그대 숨소리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굳이 이름을 말씀해주실것도 없습니다

주소도 알려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굳이 나의 이름을

알려하지를 마십시오

주소를 묻지도 마십시오

이름 없이 주소 없이 이냥

곁에 앉아계신 따스함만으로도

그대와 나는 가득합니다

보이지않는

그대와 나는 가슴 울렁임만으로도

그대와 나는 가득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대와 나의 가슴 울렁임만으로도

우리는 황홀합니다

그리하여 인사없이 눈짓 없이

헤어지게 됨도

우리에겐 소중한 만남입니다.

■ 중년의 가슴에 8월이 오면

- 이채

한 줄기 바람도 없이

걸어가는 나그네가 어디 있으랴

한 방울 눈물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여름 소나기처럼

인생에도 소나기가 있고

태풍이 불고 해일이 일 듯

삶에도 그런 날이 있겠지만

인생이 짧든 길든

하늘은 다시 푸르고

구름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데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여,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물소리에서

흘러간 세월이 느껴지고

바람소리에서

삶의 고뇌가 묻어나는

중년의 가슴에 8월이 오면

녹음처럼 그 깊어감이 아름답노라

■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8월

8월은 분별을

일깨워 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맟춤 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 온 한 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처 입는다

쓰린 아픔속에서만

눈 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찿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달.

■ 8월 장마

- 오보영

너한테만 내리는 게 아니란다

너만 위해 내리는 건 더더욱 아니란다

아직 날 기다리는

나무들 있단다

반겨하며 맞이해줄

들꽃이 있단다

조금은 내게

불편할지 몰라도

너한테 다소

넘쳐날지 몰라도

■ 풀 꽃

- 나태주

뽑으려 하니 모두 잡초였지만

품으려 하니 모두 꽃이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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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두선 | 작성시간 25.07.04 시집 한 권을 몽땅 받았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봉서방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07.0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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