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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지성의 회복

작성자봉서방|작성시간26.06.10|조회수48 목록 댓글 0

한국교회와 지성의 회복         

박 만 (부산장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 지 이미 오래다.

교세가 눈에 띄게 감소했고,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바닥을 치며, 목회자와 교인들의 헌신과 열정이 이전 같지 않다.

물 론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코로나는 교회의 실 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 문제 는

오래 전부터 우리 내부에 들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신약학자 김준우는 한국 교회 약화의 이유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1)

첫째,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 보다 교회성 장에 더 집중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적 연관성을

상실하였 다.

둘째, 교회내의 반지성적 분위기와 비민주적인 구조로 인해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인을 키워내는 데 어려움이 있 었다.

셋째, 기복적이고 내세 지향적이며 개인의 영혼 구 원에 치중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책임과 공동체적 의무를 충실히

감당치 못하였다.

넷째,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교리를 내세워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요구할 뿐 성 서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믿음 없는 태도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로 인해 개 방적이며 주체적인 신앙을 갖고자 하는

젊은 층과 고학력 자들이 머물 수 있는 풍토를 만들지 못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이해될 뿐 세상 속에서 따라

살 아가야 할 삶의 모델로 여겨지지 않음으로 인해 기독교적 인 사회변혁의 기준과 동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다.

여섯째, 지난 30년 간 교인들의 지적인 기대수준은 아주 높아졌지만 아직도 교회 문턱에서 이성을 벗어 놓고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교리 수호라는 이 름 아래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와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이 횡행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영성 운동 역시 개인주의적이 며 비이성적이며 비역사적인 성서 해석에 기초함으로써 성 서와 기독교의 진리를

그 역사적 맥락과 단절시켰고 우리 의 신앙도 역사적 현실로부터 도피하도록 만들고 있다.

생각 깊은 분들은 대부분 위의 비판에 동의할 것 같다.

동시에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것 이다.

1. 오직 성서(sola scriptura)의 위기

2)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책의 종교’이다.

교회는 성경이 하나 님의 말씀이고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기준이라고 고백 한다.

특히 한국교회는 성경을 사랑하고 많이 읽기로 유명 한 교회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성서 중심주의가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온라인상에는 성경에 대한 갖가지 부정적 인 평가와 이론이 가득하다.

유튜브에는 고대 바빌론이나 수메르 신화를 성경의 기록과 비교하면서 성경이 이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고대문서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이한 것은 이전에는 전문 성 경학자나 알던 사실이 일반인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는

점 이다. 성경은 해부되고, 그 권위는 추락하고 있다. 이런 공격은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다.

교회 내의 젊은 층과 지 식인들이 거기에 많이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큰 이유 하나는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성경관이 축자무오 영감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오류가 하나도 없는 ‘사실만을 담은’ 책으로 여기다 보니 성경에 대한 약간의 비평적 접근에도 제대로 된

응답을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자주의적이고 폐쇄주의적 성경 이해가 계속 통할 것인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해 온, 이미 연세 많으신 분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젊은 세대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이런 교 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점점 고령화 되 다가, 결국 문을 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 님의 구원 사건을 증언하는 책이다.

구약은 예수의 오심을 예고하고 있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을 증언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증언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이로 인해 그 시대의 문화, 관습, 사회의식, 학문 수준의 영향이 들어 있다.

따라서 성경 안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낯설고 비도덕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한계와 약점을 뚫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계시 말씀을 듣는 것을 뜻한다. 신학자 에밀 브 룬너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칙칙거리는 잡음을 들 으려고 (LP)레코드를 사는 사람은 없다.

그 칙직거리는 소 리를 뚫고 들려오는 거장 카루소의 음성을 듣기 위해 사 람들은 레코드를 산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도 이와 같다. 그렇다. 모든 교회는 이 음성을 듣고 이 음성에 복종해야 한다.”

2. 설교의 위기

성경의 위기는 곧 설교의 위기로 연결된다. 설교자는 성 경에 근거해서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지 11 제1부『기독교 인문학』 아닌지 모호해지면 설교는 더욱 모호해 질 수 밖에 없다.

여기에다가 시대가 급변하면서 목회자의 설교가 전혀 시대 적 연관이 없거나 아니면 이미 사라져 버린 지난 시대의 정신을 반영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 신학자 칼 바르트 는 설교자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 어야 한다고 했는데 오늘날은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신문 을 제대로 읽는 것도 너무 어려워졌다. 먼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보수적 복 음주의 설교자들은 성경이 모든 문제의 답이기 때문에 성 경 강해만 충실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설교는

시간이 갈수록 외면 받기 쉽다. 실상 성서의 고대적 세계 관이나 성차별 같은 성서의 윤리관을 그대로 설교할 때 생각 깊은 사람들은 설교자가 시대착오적인 설교를 한다고 느끼고 교회를 떠날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결국 공부뿐이다.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이와 아울러 우리 시대와 연 관하여 설교를 하는 것 역시 아주 어렵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빅데이터, 인공지능, 과학 혁명 같은 주제들과 연관 하여 설교 할 수 있으나 제대로 된 연구 없이 하게 되면

피상적이 되고 이미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가진 청중들 앞 에서 설교와 설교자의 권위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정치현 실에 대해서도

설교해야 하지만 이는 더 어려울 수 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 앞에서 예수의 길을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이나 이념과 연계된 설교 역시 아주 위험할 수 있다.

교인들이 불필요한 편 가르기를 하게 만들 수 있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복음 이 특정 정당이나 이념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아무튼 성경과 시대에 대한 넓고 깊은 공부와 사색, 기도 없이는 제대로 된 설교를 하기가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3. 세속화의 위기

1) 행복과 향락추구의 문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소비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생각 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 덕적인 어떤 가치에 마음을 두고 거기에 헌신하기보다 지 금 여기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나와 가족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방해하는 것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 교회 안에 그들이 찾는 기쁨이나 행복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 교회 안에 진 정한 행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예수께서 가져오신 복음은 ‘기쁘고 행복한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순간 예식주의, 율법주의, 공로주의, 잘못된 피안주의 등으 로 바뀌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의 기쁨을 다시 발견해야 하고 ‘기쁨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욕망의 추구와 충 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에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아 금하기만 하는 기독교의 자리는 거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 안에서의 진정한 기쁨, 진정한 축복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다스림을 꿈꾸고, 함께

형제 자매가 모여 서로 사랑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그런 기쁨의 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2) 과학적 세계관의 도전과 사라져 가는 기적과 초월 세속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 하나는 초월이 배제된 과학적 세계관이다.

그리고 과학의 세계에서 초월과 기적을 얘기 하는 것은 과학이 과학 되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흔히 여 겨진다.

문제는 오늘날 사람들이 과학을 최고의 진리와 권 위를 가진 것으로 보고 종교적 진리는 유사 진리 내지는 사이비 진리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암 환자에게 의사 의 말은 거의 절대적이지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목 사의 말은 덕담 정도로 인식되기 쉽다.

목사가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해서 암에서 해방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의 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현대인들은 기적과 초월을 거의 믿지 않는다.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는 권위를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의

약화이다. 이 현상은 앞으로 더욱 깊어질 것이고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과학에 권위를 두고 기독교의 기적과 초월을 부인하는 현 상은 이미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해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기도의 신학’을 강화해야 하고, 교회가 기도의 능력과 성 령의 기적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령이 역사 하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기쁨의 역사가 나타 난다.

과학을 사용하시는 분도 성령이시고 과학을 넘어서는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교회 안에 기적과 이적이 없으면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세속화 시대에 세속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기적과 초월에 대한 경험이

교회에 있어야 한 다. 이 중요한 영역을 상실하면 교회는 교회됨을 멈추고 그저 모호한 종교성이나 추구하는 집단으로

전락할 것이 다.

3) 진화론의 도전과 위기

앞의 창조론 진화론은 오늘의 기독교에 가장 심각한 도전 중의 하나 이다.

리처드 도킨스와 다니엘 데넷, 크리스포트 히친스 등이 이끄는 진화생물학은 기독교 창조론의 근원을 붕괴시 킬 정도로 심각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이들의 영향으로 수 많은 지성인들과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렇게 심각한 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는 이들의 공격에 대해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 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창조과학’은 나 름 응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구 역사가 6000년이라 고 주장하는 수준에 머무른다면 결코

진화과학에 근거한 무신론과 유물론을 이겨낼 수 없다.

또 다른 응답으로는 ‘지적설계론’과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이 있 다.

이 두 가지 응답은 나름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으 나 상당히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이 주제는 이미 많 이 연구되었으나 앞으로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4. 다원주의의 확장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절대성의 위기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자이고 다원주의자이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며 더 나아가 절대적 진리 주장 이면에 어떤 불순하고 왜곡된 권력의지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러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오늘 한국 기독교는 곧잘 편협하고 무 례한 종교로 보인다.

그런데 왜 기독교가 무례한 종교, 더 나아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 하나는 예 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전도하는 배타주의적 전도 가 타종교와 마찰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적으로 설득되 기 어려운 주장이기 때문이다.

교회 밖의 모든 사람이 지 옥으로 간다는 지극히 무례한 말은 공자도 석가모니도 지 옥 갔다는 말이고, 이 땅에서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 모 든 사람도 지옥 갔다는 말이고, 태어나서 3일 만에 죽은 아이도 지옥 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한 지옥 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도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주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주장이다.

우리는 예수의 주되심을 전해야 하고, 예 수 믿으라고 권해야 한다. 다만 이는 철저히 겸손하고, 사 랑하고, 더 나아가 삶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한 다. 실상 진리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진리 역 시 배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배타성이다.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복음을 가장 큰 사랑의 삶으로 드러 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오늘 한국 교회의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과 직면한 도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를 둘러싼 문제가 크고 다층적이다 보니 이 모두를 한 번에 해결하는 묘안 같은 것은 없다.

그래도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넘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 믿음이 중요하 다.

기도의 힘, 말씀 묵상의 힘, 순종과 헌신의 삶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이와 함께 교회가 놓쳐 버린 상 식과 지성, 그리고 신앙에 기반한 인문학적 통찰과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시대야 말로 기독교적 지성, 혹은 ‘지성적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1980년 가을, 저명한 학 자이자 경건한 정치가였던 찰스 말리크(Charles Malik)는 휘튼신학대학교의 빌리 그래함 기념 센터

준공식에서 ‘복 음 전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직무들’이란 제목의 강연을 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우리가 복음 전도에 있어서 직면 한 두 가지 의무는 영혼을 구하는 것과 지성을 구하는 것 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미국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이

반지성주의입니다. 지성의 넓이와 깊이가 충분하게 고려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학을 서둘러 졸업한 뒤, 돈을 벌거나 혹은 교회를 섬기거나 혹은 복음을 설교 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지난 과거의 위대한

지성들과 영 혼들과 대화하는 여가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고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창조적 사고라는 경기장은 텅 비게 되었고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주의를 잘 증 거하기 위해서, 복음주의자들은 더 이상 무책임한 지성의 변두리 영역에서 살아선 안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신앙적 열정’ 뿐 아니라 ‘신앙적 지성’을 회복하여 성숙한 삶과 신앙 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18 제1부『기독교 인문학』 02 기독교인들에게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

이상규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교회사학) 1.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인문학이 왜 필요할까?

이런 질문 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리해 두어야겠다.

우리가 인문학(人文學, Studia Humanitatis) 이라고 할 때 이 말은 문사철, 곧 문학과 역사, 철학을 의 미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인문 학이라는 말은 흔히 자연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 다.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 학을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할 때 인문학이란 문학이 나 역사나 철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그 광범위한 의미란 바로 인간을 위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19 제1부『기독교 인문학』 인문학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포괄하는 보다 광의의 인간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 은 사람들이 인문학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과학적 지식이 필요하지 만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없다.

과학이나 기 술이 장인(匠人) 혹은 기술인(技術人)을 양성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전 공에 앞서 인문학 관련 강좌를 듣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공과대학이 짧은 기간에 전문적인 기술인을 양성한 다는

목표아래 학부 1학년 때부터 자연과학 분야만으로 구성된 교과를 운영한 바 있으나 몇 년이 못가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과학’이 되기 위해 서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공과목을 가르치기 전에 인문 혹은 사회과학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교과를 개편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 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의사가 과학과 의료 기술로만 무장되어 있다면 로봇과 같은 의료인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기에 의 과대학에도 의무적으로 인문학교실을 두게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대학교육은 물론이지만 인간 교 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 제1부『기독교 인문학』

2.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그런데 근년에 와서 인문학이 천대를 받고 있다.

문학이 나 역사나 철학을 공부해도 취업에 어렵고 실용적이지 못 하다는 이유이다.

사회전체로 볼 때 자연과학이나 공학이 나 의학이 발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 인문학적 토대가 없으면 건실한 사회가 될 수 없고

어쩌면 인간 상실의 심 각한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인간 없는 과학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문대학은 인기가 없어 폐과되거나 다른 학과와 통폐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인문학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런 점에서 고전이 강조되고 고전 읽기도 권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두 가지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성경을 바르게 이해 하고 해석하고 설교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런 말이 있 다. “성경만 아는 사람은 성경도 모른다.” 성경과 성경이 기록된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 문화, 역사, 사상, 종 교 등 인문학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칼빈은 1559년 6 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교했을 때 신학예비과정을 개설했다.

성경과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인문 학적 소양을 터득하게 하기 위해 신학예과를 설치한 것이 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신학 예과 과정에서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등 성경 언어만이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했고,

중급과정에서는 호머, 키케로, 버질, 크세 노폰, 폴리비우스 등의 작품을 읽게 했고, 고급과정에서는 키케로나 데모스테네스의

웅변술 등 수사학을 공부하게 했 다. 즉 고전과 고전어, 철학과 변증, 논리학과 수사학을 공부하게 한 것이다.

이런 인문학적 바탕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바르고 풍요롭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인문적 소양의 무지 때문에 성 경을 왜곡하거나 곡해하고, 독단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 거나 비 논리적이거나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대체적 으로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만 아 는 사람은 성경도 모르게 된다.

1830년대 인도로 갔던 서구 선교사들이 직면했던 문제 는 성경과 기독교를 가르치기 전에 문자와 언어, 기초교육 이 없이는

인도에 건실한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세워 먼저 글자와 문자 부터 가르쳤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으면 인간과 사회, 성 경과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근대의 선교학교(mission school)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무지와 억지,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문학은 인간, 혹은 존재 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그 리고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문학은 구 원받아야 할 전도(선교)의 대상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22 제1부『기독교 인문학』 깨닫게 만들어 준다.

인문학의 대상은 인간이고, 인문학의 본질은 그러한 인간성을 탐구하는 데 있다.

인문학은 도대 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 왔기 때문에 인문학 (人文學)은 사실은 인간학(人問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과 인간의 본질, 인간 삶의 환경에 대한 폭넓은 지 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지식이지만 특히 목회 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하지만 그 대상은 인간 곧 ‘사람’이다.

따라서 목회를 잘 하려면 사람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목회자가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쉽 지만 전도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인문주의자였던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서두 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De cognitione Dei)은 우리(인 간)를 아는

지식(De cognitione hominis)과 연결되어 있 다고 하는 이른바 이중지식을 다루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고, 우리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 에 의하여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인간에 대해 사유하고 질문하면서 인간다움 삶을 살게 하는데 유용한데, 인간이 추구하는 삶 의 의미와 목적은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게서만 찾 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인문학을 통해 인간이 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해 주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의존적 존재라는 점을

알게 해 준다는 점이다.

3. 기독교와 인문학 기독교와 인문학을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5세 기 이후의 인문학(인문주의) 운동은 종교적인 운동이 아니 었으나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기의 인문주의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 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과 기독 교를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개혁사상의 토대를 형성했던 사람들은 다 르네상스

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인문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루터도 그러했 고 칼빈도 그러했다.

인문주의 교육이 개혁운동의 바탕이 된 것이다. 인문주의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 츠 빙글리였다.

그는 사실상 종교개혁자이기에 앞서 인문주의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혹은 인문학과 기독교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가진 이들 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인문주의를 서구에서 휴머니즘 (humanism)이라고 하는데, 이를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해 석한다면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인본주의는 인간중심주의 로서 신중심주의와 대조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르네 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인문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문주의, 곧 휴머니즘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리 스와 로마의 언어와 문학에 강조점을 둔 교육의 형태였다. 곧 지금의 인문학이었다. 이 시대의 인문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라틴어 ‘ad fotes,’ 곧 ‘원천에서’ 혹은 ‘원천으로부터’

였다. 즉 인문주의란 “원래의 자료들로 돌아 가자(go back to the original sources)”는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는 문화 운동이었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은 그 ‘원천’을 ‘성경’으로 보아 오직 성경, 곧 성 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이다.

정리하면 인문학(humanities)을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 주의(人本主義, humanism)나 인도주의(人道主義)로 보아 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취급하며 사색하고

질문한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적 소양 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과 사회를 건실하게 성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1. 말문을 열면서

기후 위기로 지구촌이 들끓고 있다.

그 동안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해온 인간의 욕망이 저지른 쓴맛을 서서 히 맛보고 있는 셈이다.

그 쓴맛의 강도가 해마다 짙어지 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이 지구 종말을 심심 찮게 논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지구

생태계의 파괴가 빚고 있는 기후 위기도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지구촌에 살고 있는 인간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정신적

가치관의 해체는 더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이를 이미 사도 바울은 잘 예언해두고 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 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 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 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타락한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 유로울 수 없는 자기애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가지 부정적 인 성향과 태도로 살아가는 자들을 흔히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고, 이를 경계하고 돌아서라고 주문하고 있다.

1세기 때도 그랬지만, 그 예언과 다르지 않게 오늘 날 이 시대 사람들도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이익과 쾌락 만 추구하며,

자기 자신의 뜻만을 이루는 데 몰두하고 있 다. 이러한 성향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일부 사람들 은 자기 외에는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는 극도로 이기 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만 관심하기에 선을 사랑하지 않고 그럴 역량도 없다.

각자도 생의 삶의 방식에 길들여지고 있어 갈수록 공동체는 해체 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결과로 자신이 가진 것이나 남들이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 지 않고 살고 있다.

이기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인간들의 삶의 성향은 이제 보편화 되어가고 있고, 시대적 흐름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시대 풍조가 일상화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정신적, 감정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 과 사람 사이에 정상적으로

형성되어야 할 사회적 생태계 가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소위 인문학은 어떤 역 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2. 인문학은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가?

일반적으로 사전적인 의미의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 은 자연과학(自然科學, natural science)의 상대적인 개념 으로 주로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 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지칭되어왔다.

자연과학 이 객관적인 자연현상을 다루는 학문인 것에 반해 인문학 은 인간의 가치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연구의 영역으로 삼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인문과학에 대한 범주를 살펴 보면, 미국 국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인문학이란 언어·언 어학

(言語學,linguistics)·문학(文學, literature) ·역사·법률· 철학·고고학·예술사·비평·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 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 다. 이러한 인문학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인문과학이라는 개념은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anitas)’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후마니타스는 문자 그대로 해석 하면 ‘인간다움’이라는 뜻이며, 기원전 55년에 키케로가 마련한 웅변가 양성 과정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중세 초기 성직자들은 후마니타스를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육 과정으 로 채택하여 교양과목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15세기 이탈 28 제1부『기독교 인문학』 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세속적인 문예·학술 활동을 가리켜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 개념이 확대되던 인문과학이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인문학은 신의 영역과 선을 긋기보다는 오히려 발달하고 있는 자연과학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에는 인문과 학을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과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편 된 대학의 학제에서는 일반 교양과목을 인문과학·사회과 학·자연과학으로 나누었는데,

다루는 학문분야는 각 나라 에 따라 다르다. 미국에서는 좁은 뜻의 과학, 즉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용 어로 사회과학(사회학)·

법학·정치학·경제학 등을 제외한 철 학·문학·역사나 예술 일반을 뜻하며, 심리학은 사회과학 또는 자연과학 속에 넣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사회과학을 포함한 이른바 법문제의 여러 학과를 뜻하는 광범위한 것 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학술적 중심은

사회학과 사학이며 때로는 철학도 포함시키고 있다. 독일에서는 정신과학, 사 적(史的) 문화과학 등이 이에 해당되며,

모두 인과율에 기 초한 법칙 정립적 자연과학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정신·문 화·역사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과학을 널리 인간 및 인간적 사상 일반에 관 한 과학적 연구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자연과학·사회과 학·인문과학의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미국에 서는 환경적응·창조성·의사결정, 또는 인간성의 문제로부터 언어·예술·종교·국민성·

사회변혁, 또는 도시화의 문제 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간 및 인간적 사상에 관한 형 태과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적 의미의 인문학은 단순히 전통적인 문학, 역사, 철 학의 범주를 넘어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데 필요한

모든 영역은 인문학의 범주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합적인 인간 이해를 위해서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영역 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문학은 그 논의의 범위가 무한에 가깝 다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관련 된 모든 영역은 인문학의 범주 속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문학의 영역을 넓게 범주화하면 너무 광 범위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급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는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전 통적인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의 영역에

속하는 모든 분야 에 대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이 시대에 맞는 온전 한 인문학 공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위 인공지 능 시대로 진입한 현 시점에서는 이런 차원에서의 인문학 공부의 대상과 범주는 끝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학문의 통섭과 융합이 강조되는 시대로 변하면서 이제는 전통적인 인문학에 고착하기보다는 모든 영역을 인문학적 사유로

접 근해야 하는 필요성이 요청되는 시대로 바뀌어 나가고 있 는 형국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해버린 시대 에 이제 인간은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에 대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제의 해결 30 제1부『기독교 인문학』 은 전통적인 인문학 영역의 공부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인문학적 사유로 사회과학을, 인문학적 사유로 자연과학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야 하는 시대로 변했다.

여기에 현재 인문학 공부의 과제와 어려움이 있 다. 그러면 왜 신자들에게 이런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한 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쌓아온 인류 문화사적으로 축적된 모든 결과물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인간으로서의 온당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안목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3.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만들 어 나갈 수가 있다.

마 4:17에서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 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 선포가 펼쳐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 도가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 를 전파하기 위해서다.

달리 말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 라를 새롭게 세워나가는 일이었다.

이 일의 출발은 타락한 인간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의 거듭남에서 시작된 다.

이 경험은 우선 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지만, 한 개인 에 그쳐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켜나갈 수는 없다.

거듭남을 경험한 개개인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 전체 가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어져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는 신자들만이 집단을 이루어 별천지를 이루고 살았던 기록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 션에 비추어보면 온전한 형태는 아니다.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 안에서 거듭남을 경험한 소위 신자가 회 심 이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이 땅에 하나 님의 나라를

실현시켜 나가려고 하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소위 비신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 이다.

비신자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서 그들에게 태생적으 로 주어진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지 않 은 그들의 삶이란 전통적으로 인류 문화사가 그들에게 학 습시킨, 소위 일반은총으로 주어진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 다. 소위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 삶을 유지하고 있다. 그 리고 이들의 삶의 방식은 일반적인 문화적 가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가치관에 의해 형성 된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여기에 신자와 비신자의 삶 사이에서 빚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 구조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소위 기독교 세계관과 일반 세계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신자의 삶이란 것이 단순히 거듭나서 교회 생활만 유지 하는 선이라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킬 수가 없다.

교회 생활을 넘어 비신자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이 세상 속에서의 일상적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바뀌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일상의 삶이란 바로 그 시대의 삶의 문화를 말한다.

일반 삶의 문화의 내용과 특성을 제대 로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신자가 이 땅에 온전한 하 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려면 개인의 거듭남을 넘어 문화 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는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 땅에 어떻게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라는 과제가

현실적 으로 제기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문화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펼쳐 나갈 것인지를 고민해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헨리 반틸의 『칼빈주의 문화관』, 폴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

아부라함 카이퍼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 - 문화 변혁의 기독교 세계관 선언서』, 클라스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 고 재수의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신국원의 『신국원의 문 화 이야기』 등이 주요 저작물이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창조와 함께 첫 아담에게 “동산을 관리하고 충만하고 번성 하라”는 문화적 사명을 주었다.

이 문화적 사명은 모든 연 속적인 시간 속에서 그리고 모든 지리적 공간 안에서 문 화적 활동을 할 의무를 인간이 졌다는 말이다.

또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도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 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잘 인식하고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부산물로서 문화적 인간이 되라는 뜻이다

그런데 첫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이후로 이러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이 땅을 새롭게 회복하는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그리 스도로 옷 입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문화를

새롭게 펼쳐 나갈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문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문화 를 편만하게 확산해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현실에 직면해 있다.

문화 상대주의와 문화의 다양성 시대로의 전 환은 그리스도의 문화 양상은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형국 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사회 속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는 상황의 심화는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 땅에 정착시켜나가는 데 더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의 전락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그 근본적인 원인은 그리스도 의 문화로 이 땅의 문화를 변혁시켜내지 못한 결과이다.

타락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 땅의 문화를 그리스도로 옷 입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문화로 변화시켜내야 하는데 이 일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이 땅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 땅의 문화를 그리스도의 문화로 변혁시켜내 지 못하고 있는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문화가 뿌리를 내 리고 성장해가기 위해서는 이 땅의 문화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이와 피 흘리는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이 땅에 그리스도의 문화를 심어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의 상대 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유불선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아직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어 이들 문화에 대한 뿌리와 흐름 그리고 전개되 어온 역사를 온전히 알아야 한다.

문화 전쟁의 상대가 되 는 문화적 특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전통문화뿐만 아니 라 현재의 문화상황에 대한 인식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1 세기를 훨씬 넘긴 한국기독교가 여전히 그리스도의 문화가 이 땅의 문화 저변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 문 화 전쟁을 제대로 치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문화를 접목시켜려고 해왔기에 어설픈 형태의

혼합주의적인 양상이 소위 그리스도의 문화 속에 내재해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이다.

풍성한 인문학적 소양과 공부는 이 땅의 문화를 제대로 알아가는 지름길임과 동시에 이 땅의 문화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이 힘이 내장되어야 이 땅의 문화를 그리스도의 문화로 전환시켜낼 수 있는 역량이 생겨날 수 있다.

즉 이 땅의 문화 현상을 그리스도의 문화로 변혁시 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 땅의 문화가 지닌 특성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뿌리를 이해해야 이 문화를 그리스도 의 문화로 전환시킬 수가 있는데 그 기초적 작업이 인문 학 공부라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이 땅의 문화가 지닌 총체적인 면모를 이해할 수 있게 하며, 그 문화가 지닌 문 제와 한계를 읽어내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문화가 지향해야 할 본질과 방 향을 제대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 땅의 문화를 변화시킬까 하는

전략을 세워야 하는데, 그 기초작업으로 인문학 공부는 필수적이란 말이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히 이론적인 문화적 전략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과 정이기에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는 치열하고도 힘든 문화적 전쟁이다. 돌이켜보면 한국기 독교는 이 전쟁을 제대로 치루어 오지 못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선한 영 향력을 미친 것은 그 때의 문화 전쟁이 그만큼 치열하고

성공적이었기에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독교 역사는 이 치열한 문화 전쟁을 이후 지속적이고도 치열하게 감당 해 오지를 못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동했지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한국교회가 신앙의 핵심으로 믿 음은 강조해왔지만, 그 믿음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문 화를 이 땅에 펼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켜나가야 한다 는 천국 복음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 땅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공부가 필 요했는데 이러한 공부에 게을렀다는 점이다.

이를 단적으 로 보여주는 것이 교안들의 너무 낮은 독서률이다. 이 세 상을 직접 경험으로 다 알 수는 없기에 인간 삶의 문화를

기록하고 정리해 놓은 책들을 통해 우리는 이해하고 알아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책 읽기를 거의 포기하고 있는 현실이

한국 기독교인들이란 점에서 인문학 공부의 수준을 쉽게 예단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 상태이다. 교인의 수가 줄어들어 서 위기가 아니다. 이 땅의 문화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려고 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 기 위한 전쟁을 포기한 삶 때문이다.

세상 문화와의 치열 한 전쟁을 포기했기에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 땅에 펼쳐나 간다는 의식은 많이 변질되어 있다

치열한 전투를 통해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 땅에 창조적으로 생산해 나가기보다 는 이 땅에 유행하는 문화적 흐름에 편승해서

그것이 진 정한 그리스도의 문화인 양 치부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 실이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러한 현재 한국교회가 놓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문화 실현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 해진 현주소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자세로 는 근본적으로 한국사회를 그리스도의 온전한 문화로 바꾸 어 나갈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더욱 고통하는 시 대로 몰아갈 뿐이다.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이 땅의 모든 문화적 병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돌아서는 전쟁을 치루어야 한 다. 이 전쟁은 전방위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 전쟁에 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 주를 입어야 한다.

여기에는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과 같은 신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적을 제대로 알기 위한 인문학적 소 양과 공부가 더욱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주소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조금 이라도 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과거의 화려한 부흥 이나 지금 내가 속한 지역교회의 긍정적인 모습에만 안주 하지 않고 한국교회 전체의 미래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높았던 성장률은 먼 과거의 일 이고 이미 오래전부터 감소세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목회 데이터연구소에서 올해에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 현황과 의식’에 의하면, 10년 전 전체 인구의 22.5%를 차지했던 개신교는

현재는 15%로 감소했고, 앞으로 10년 뒤에는 10%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통계 안에 이단들도 포함되어 있기에, 순수한 개신교는 앞으로 이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축될 것이다.

이처럼 예측되는 교회의 미래를 놓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처방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전도 운동을 벌이고, 기존 교인들에 대한 신앙 교육과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 교

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하고 교회 내의 왜곡된 시스템이 변화되어야 한다, 등등 다 맞는 말이고 필요한 조치들이다.

그런데 위의 조사에 따르면 과거 개신교였다가 현재 무 종교인이 된 사람들의 이유가 10명 중 3명꼴로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라 답했다.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 이처럼 교회 자체에 대한 불신과 실망을 가졌다고 할 때, 전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기 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올해 발표한 ‘한국교회의 사 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면,

4명 중 3명꼴로 ‘한국교회 와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고 이는 3년 전 코로나 팬데믹 이전보다 10%나 증가한 것이다.

이 여론조사 대상 에 포함된 개신교인들을 제외한다면 더 불편한 결과가 나 올 것이다.

교회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의 원인을 외부 세력 즉 교회를 공격하는 정치권이나 언론, 안티기독교 세력 등 으로 돌리면서

자위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진정 교회를 위한다면 보다 겸손히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위 기윤실의 조사에 따르면, 교회가 교회 밖의 비판 여론을 수용할 준 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답한 사람이 80%에

이르고, 개신 교인들만 따로 조사한 결과 55.3%가 이에 동의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교인들조차 사회 속에서 39 제1부『기독교 인문학』 교회의 고립과 소통 부재를 염려하고

있다. 지금 교회가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교회가 교회 울타리에 갇혀있어서 세상 속에서의 자기모습을 보지 못하고

공적인 영역에서의 올바른 역할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리그에 몰두하고 자기 논리로 스스 로 합리화하면서

교회를 향한 외부의 비판에는 귀를 막고 더 나아가 이를 마귀의 공격으로 영화(靈化)시켜버린다.

그 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게토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소통되지 못하면서 점차로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주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우신 교회가 ‘말 아래 둔 등불’ (마 5:15)처럼 자기 세계에 갇혀 세상을 전혀 밝히지 못하 고 있고,

더 나아가 짠맛을 잃고 버려지고 발로 밟히는 소 금처럼 세상으로부터 비방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 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처한 이러한 심각한 문제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정교분리의 한계

150년 역사의 한국 개신교는 국가라고 하는 공적영역에 서의 교회의 역할 즉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 로 다루지 못했다.

물론 기독교인이 다수가 되어 일제에 저항한 105인회 사건이나 3.1운동처럼 국가의 현실을 신 앙의 문제를 끌어안았던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개신교 인 중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러한 사회운동들은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토대 위에

서라기 40 제1부『기독교 인문학』 보다는, 국가가 처한 누란의 위기라는 상황에 대한 응답의 행동들이었다.

이와는 달리 선교 초기부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일관된 가르침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수된 이른바 ‘정교분리’였다.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 서 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 단순한 교리는, 한편으로는 교회 에 대한 국가의 간섭, 교회의

무분별한 정치화를 막는 데 는 좋은 사회윤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반 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공적영역에서의

자리매김을 왜곡시 키고 방해하는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2.1 독일과 미국교회의 정교분리 이런 ‘정교분리’의 신학적인 근원은

개신교 교부인 마틴 루터의 ‘두왕국설’(two kingdoms doctrine)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신학의 문제점은 20세기 독일교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400년의 역사를 간과한 채 루터의 신학을 교조 적으로 받아들인 신루터주의 신학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 은

독일교회는, 권위적인 황제체제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하 다가, 1차대전 후 민주주의를 앞세우며 자유주의나 사회주 의 등 다양한

정치운동을 수용한 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해서 는 노골적으로 저항하였다.

반면에 그들은 민족주의를 앞 세우며 독일 사회를 옛 권위주의로 회귀시킨 히틀러는 하 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로 추켜세우면서

나치 정권의 후견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고 이로 인해 역사 속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18세기 미국의 ‘정교분리’는 뿌리 깊은 국교 제도를 없 애고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역사

속에서 두 가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 러냈다. 하나는 교회가 국가 정치의 문제를 믿음의 일에서 제외하면서 신앙을 개인화

내면화시켰고, 이것은 두 차례 의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발전된 복음주의의 성격이 되었 다.

이 복음주의 아래서 복음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경 건 훈련,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데는 열정을 가졌지만, 교회 밖의 사

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졌고, 그러다 보니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정치에 무지하 고 분별력이 없는 시민이 되어갔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 가 정치에 대해서 갖는 이중성이다. 장로교나 침례교와 같 은 주류교회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회정치적인

영향력 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정치적인 힘을 갖고 교회들은 앞으로는 정교분리를 앞세우며 정치에 대한 중립을 표방하 면서도, 뒤로는 주로 보수정치를 뒷받침하는 후원 세력이 되었다. 20세기 들어와 사회 각 분야에서 거세게 밀어닥친 세속 화, 현대화의

물결은 공적영역에서 교회의 자리를 더욱 위 축시켰다. 세속주의자들은 사회 각 영역에서 종교적인 요 소를 몰아내면서 교회가

더 이상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했고, 교회는 교회대로 정교분리를 표방하 면서 사회 문제에서 물러나 교회 울타리

안으로 침잠해갔다. 그러다가 이에 대한 반동으로 근본주의자 제시 폴웰 목사가 1979년부터 ‘도덕적 다수’ 운동을 통해 목회자들을 적극적으로 정치의 장으로 불러들여 보수정치로 무장시켰 고, 그 뒤를 이어 1987년 팻 로버트슨 목사에 의해 세워 진 ‘미국 기독교

연합’은 미국에서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는 레이건과 조지 W. 부시 그리고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극우적인 정치집단으로 그 정치적인 세력 을 넓혀가고 있다.

 

2.2 한국교회의 정교분리

한국교회 역시 이와 유사한 과정을 밟게 되었다.

3.1운 동의 실패를 통해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한 교회는 이후 급격하게 교회 울타리 안으로 물러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돌아갔다. ‘이신칭의’를 복음의 전부인 양 강조하 면서 신앙의 본질과 목표는 개인 구원과 내면적이고 내세 적인 신앙에 치우쳐졌다. 그 결과 탈사회적이고 몰역사적 이 된 교회는 공적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서서히 총독부의 통치에 순응하게 되었 고,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하는 것을 신앙적인 미덕으로 여 기게 되었다.

3.1운동 이전과는 정반대로 기독교 지도자들 이 오히려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과 황국신민화정책, 전쟁 정책에 적극 앞장서면서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 고 마지막에 가서는 소수의 저항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목회자와 교인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미명 하에 신사 참배에 참여함으로 신앙의 본질에서마저 타락하는 수치스 러운 역사를 갖게 되었다.

순수복음을 강조하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거슬러 가다 보면, 교회가 사회 와 유리된 채 교회 울타리 안에만 갇히는 이원론적인 신 앙에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고 그 밑바닥에

숨겨진 ‘정교분 리’를 보게 될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어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상실하면, 도리어 세상의

거 대한 권력과 정치이념이 교회를 점령하게 되고 결국은 신 앙의 근본마저 훼손되는 수치를 겪게 되는 것이다.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로 교단이 갈라지는 아픔까지 겪 었으나, 그 근원이 된 이원론적인 신앙에 대한 반성은 제 대로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한국교회는 여전히 국가와의 문제에서 성경적인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 을 보여왔다.

기독교인인 이승만 정부에서는 많은 목회자 가 정권에 직접 가담하거나 선거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후 장기간 지속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교회는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앞세워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반민주 반인권 적인

행태는 외면하면서, 뒤로는 ‘정교분리’와 위배 되게 공공연히 반공과 국가의 안위를 앞세우면서 조찬기도회를 비롯해서 여러

방향으로 독재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커다 란 뒷받침이 되었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노태우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북 방정책을

추진하여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중국과 수교하였고 남북한 동시 유엔에 가입을 통해 상호 주권 국가 로 인정하는 등 남북

관계에 근본 변화가 일어나고, 이를 이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 북한과의 평화 관계를 지 향하면서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사업을

추진해가자, 오랫동 안 반공 이념에 앞장섰던 한국교회는 서서히 저항 세력으 로 변모해갔다.

과거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정치참여를 독 려한 민중신학에 대해서는 ‘정교분리’를 앞세우며 날카롭 게 비판했던 교회들이,

이제는 그 ‘정교분리’를 내던지고 공공연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며 대규모 정치집회에 앞장서 고 심지어는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면서 미국교회와 유사하게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거 민중신학이 그들의 정치이념 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과 전통 신학을 왜곡했는데, 그것 을 비판했던

보수교회들 역시 오늘날 그들이 옳다고 추구 하는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과 신앙의 본질을 왜곡해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반공 주의 심지어 친미주의 등이 마치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 양 절대시하면서 세속사회의

정치이념을 신앙의 가르침과 뒤섞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 설교에서나 신 앙집회에서 이러한 정치이념을 마치

신앙교육인 양 대놓고 말하고 가르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3. 공적영역에서 교회의 건강한 역할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은 두 가지의 극단적인 성향 사 이에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요청받고 있다.

그 한쪽은 교회 안에 정교분리를 앞세우면서 개인의 신앙과 사회적인 책임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신앙인들이다.

공적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을 없애려 하면서 기독교를 교회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세속주의자들 역시 이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다른 한쪽은 역사성을 간과한 가운데 성경을 문자 그대 로 해석해 사회 전 영역에 적용하려는 ‘종교전체주의’의

시도이다. 이것이 과거 기독교 역사에서는 신정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세상의 특 정한 정치이념을 성경적인 가르침과 동일시하면서 정치를 종교화하고 그 결과 교회를 정치화하는 근본주의의 모습으 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양극단은 결국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귀결된 다. 공적영역에서의 교회의 건강한 역할을 도외시하면서 그것을 설교나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지 않은 결과이다. 만 약에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일을 개인과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만 한정하는

‘소시민적 신앙’에 머무른다면, 자연히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고 무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갖는 복잡성을 간 과하면서 정치를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들은 기독교 교리나 첨예화한 윤리적인 문 제, 또는 기독교와 이해관계가 얽혀진 몇몇 사안만을 갖고 정치 전체를 판단하고

선택하게 된다. 특별히 정치가 양극 화되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이런 사고틀에 갇혀 있는 교인들은 선동정치에

휩쓸리게 되고 교회는 왜곡된 정치화의 위기에 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다. 동성애나 낙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면서, 공평과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진보적인 관점을 지지한다는 칼 트루먼 교 수(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진보 보수 기독교인’에서 이렇 게 말한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일차적인 이유는, 미국 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보수적 정당 정치와 기독교적 충성 을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험을 초래 하게 되었다는 나의 확신

때문이다.” 주님께 대한 신앙적 인 헌신과 충성을 보수정당의 정치를 지지하는 것과 밀접 하게 연결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것은 정 치문제 이전에 우리의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킬 수 있는 정치화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실제 미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이런 왜곡 된 정치화의 현상은 미국교회를 닮으려고 하는 한국교회에 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고, 그 결과 미국교회와 마찬가지 로 한국교회 역시 이러한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젊은이들 로 하여금 교회에서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복음 위에 서려고 하는 교회들은 이제 통전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신칭의’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면서 동시에 하늘과 땅의 주권을

가지신 ‘세상의 주’이심을 고백해야 한다. 세상 어느 곳에도 그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기에, 모든 영역 즉 교회 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더 나아가, 국가라 는 공적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통치의 대리자 로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허락하신 국가의 올바른 모습이 어떠 해야 하는지, 그가 세상을 보존하기 위해 사역자로 세우신 통치자들(롬13:4)은 어떻게 국민을 섬겨야 하는지 성경은 자세히 가르치고 있다.

특히 구약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 나님이 원하시는 국가의 구체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 다.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한 비판적인 안목을 갖도록 교육해야 하며,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대 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개인의 경 건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경건이 그 근본에서부터 사회와 국가, 지구촌과

환경의 문 제를 담지 할 때, 죄로 왜곡된 세상 가치와 이념에 경도되 지 않는 건강한 경건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인적인 경건과 이웃에 대한 친절 과 자선으로는 사회구조적인 악을 결코 쫓아낼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신앙 속에는 경건과 자선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받아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의 저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참된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한다.

“성 도는 자기가 몸담은 세계의 사회 구조에 대해 책임이 있 다. 그 구조는 자연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이 결정한 것이므로

로 협력해서 바꿀 수 있다. 아니, 그것은 개혁 이 필요한 타락한 구조이기에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자기 가 몸담은 사회 질서의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주 예 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 가운데 하나이 다.

그것은 신앙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 아니라 기독교 영 성에서 당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제 이런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공공성을 담지한 통전적인 신앙으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지 금과 미래에 올

교회 위기를 잘 극복하고 다시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05 교회 성장의 새로운 시도로서의 기독교 인문학 고시영 목사(전 서울장신대학교 이사장)

1. 기독교 인문학의 정의

최근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교회에도 불고 있다. 다행 한 일이다.

인문학이란 문학, 철학, 역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심리학이나 사회학, 정치학 등도 인간 본질을 규명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상당 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문학, 철학 역사는 비교적 사람들에게 친 숙하고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이나 역사 시간을 통해

상식적인 접근들을 해보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용이하다. 인간이 한 세상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 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산다. 나도 인간 이고, 내 주변에 있는 자들도 인간이다. 따지고 보면 신앙 도 신과 연결된 인간의

생각과 행위가 그 본질이다. 그래서 개혁교회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칼뱅은 하나님을 알려 면 인간을 알아야 하고 인간을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명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인문학이라도 기독 교 인문학은 그 내용이 약간 다르다.

문학, 철학, 역사를 텍스트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기독교 인문학은 기독교적 입장 즉 성경적 진리를 가지고 인문학을 이해, 비판, 수용 하는 것을 뜻한다. 실존주의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 론적 실존주의가 있듯이 인문학에도 단순한 인문학과 기독 교

인문학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2. 기독교 인문학을 하게 된 동기 25년 전, 53세에 필자는 교회를 개척했다.

성전을 건축 했으나 전도가 잘 되지 않았다. 기존의 전도 방법을 총동 원하여 전도를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고심하는 나 에게 당시 메이저 신문에 서울대학교가 논술시험을 잘 치 르려면 100권의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세 계 고전 100권을 추천했다. 나는 목사가 되기 전에 고동 학교 국어 교사로 일했기 때문에 그 백 권 중 상당수의 고전을 이미 알고

었다. 필자는 교회에서 서울대학교 추 천도서 100권을 강의하기로 결심을 했다.

전도를 하려면 먼저 세상과 고급스러운 소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다.

일 년에 한 번, 가을에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여 주민들을 부담 없이 초청했고, 매주 수요일 아침 11시에 서울대학교

추천도서 100권을 한 권 씩 강의를 했다. 전도는 세상을 섬기는 일로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 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주변에는 아 파트가 많아 30대 후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교 회가 부흥회나 신앙 강연이 아닌

고전 강의를 한다는 홍 보에 의아심을 갖고 그것이 호기심으로 변하면서 불신 여 성둘이 강의를 들으러 오면서 결국 아이들,

마지막에는 남 편들이 등록을 하면서 개척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개척 12년 만에 건평 560평의 성전을 헌당하게 되었다.

그 후, 전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윤 세억 집사가 장년부장이 되면서 남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매월 마지막 주일 오후 예배는 인문학 강의 시간으로 배 정하여 지난 8년 동안 서울대학교 추천 도서 100권 중 70여 권을 강의해

오다가 코로나 사태로 일시 중단이 되 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전도는 지금까지 해온 방법으로 는 어렵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 필자의 경험으 로 인문학 강의는 세상과 소통하는 고급 방법이고, 일단 이런 방법으로 교회의

차별화를 이루어, 교회의 문화적 수 준을 높이면 전도에 큰 도움이 된다 생각한다. 필자는 기 독교 인문학을 통해 전도도 하고,

교회 개척에 성공했으며 은퇴 후에는 설교보다는 인문학 강사로 유명하게 되었고 급기야 이 일로 인해 한남대학교에서 주는

인돈 문화상까 지 수상하게 되었다.

 

3. 기독교 인문학의 유익함 왜 기독교 인문학을 교회가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 해 필자는 경험을 통해 확실한 답변을 할 수가 있다.

첫 째, 교인들의 교양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 오늘날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보다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 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간은 구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통해 어떤 결정을 하게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신자들에게는 추상적인 존재이다. 구체성도 적고, 감각적이지도 않다.

그리스도의 교훈도 그들에게는 관념적이다. 불신자들이 감각적으로 구체적으로 직적 만나 는 사람들은 교인들이다.

교인들을 보고 불신자들은 그리 스도를 만난다. 교인은 일종의 그리스도에게로 그들을 인 도하는 통로이다

그런데 이 통로가 지저분하고, 막히고, 무식하고, 교양이 없고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하면 그 어떤 불신자가 그런 교인들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가 있 단 말인가? 교인들의 고급 교인들이 되어야 한다. 필자가 말하는 고급 교인이란 교양 있는 교인을 뜻한다.

둘째, 교 회의 차별화를 할 수가 있다. 현대는 차별화 시대이다 특 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차별화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교회 시설로 차별화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목사의 설교를 통해 차별화하려면

목사 선택이 그만큼 어렵다. 목사들은 비슷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교회가 하는 일은 그저 그렇다는 통념을 가자고 있어 더욱 차별화는 어렵다

그런데 기독교 인문학은 평신도들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할 수 가 있고, 불신자들이나 초급 교인들도 편하게 참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불신자들이 보기에 교회가 인문학을 강의한다는 그 자체가 충격이요, 호기심을 유발시켜 교회 의 차별화에 도움이 된다. 불신자들은 특화된 교회를 찾는 다.

셋째, 고급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교인들이 갖 게 된다.

설교에 고급과 저급이 있느냐 반문하겠지만 필자 가 보기에는 분명 저급 설교와 고급 설교는 있다.

필자의 주관적 생각이기는 하지만. 저급 설교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자기 생각이나 자기 자랑을 하거나 예화 중심, 지나 친

주관적인 간증 설교, 되풀이하는 설교를 지칭하고, 고 급 설교는 깊은 주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자각, 깨달음, 듣기가 어려운 설교

등을 지칭한다. 그런데 고급 설교를 들으려면 교인들이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높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기독교 인문학이 활성화 되면 교인들은 어떤 고급 설교도 소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목사도 설교의 영역을 넓힐 수가 있고 교인들도 다양한 설교를 들으면서 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

넷째, 평화로운 교회를 만들 수가 있다. 현대는 갈등의 시대이다. 심지어 교회도 갈등을 속으로 침몰하고 있다.

교회 갈등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인간 이해를 잘못하는 데서 온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면 서로 용납하게 되 고, 용서하게 되면서 사랑하게 된다.

기독교 인문학의 목 적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인간을 기계적으로, 율법 적으로, 신앙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 사이를 오고 가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고 괴테는 말하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 인문학적 인간 이해가 가능하 게 되면 교회는 평화로운 교회가 된다.

혹자는 신앙적인 교인들이 모아면 평화로운 교회가 된다고 주장하겠지만 이 는 정답이기는 하지만 정답으로 가는 길은 험하다.

신앙과 동시에 인문학적 인간 이해가 필수적이다.

4. 기독교 인문학을 교회에서 적용하는 방법.

기독교 인문학은 단계적으로 교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필자가 교회에서 추구했던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린이 인문학 교실 토요일, 또는 주일 한 시간 정도 자원하는 학생들로 구성 을 하되 역사 인물을 중심으로 하면 서 줄거리,

그리고, 토론을 통해 배울 점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면 된다.

전기물이 만화 형식으로 출판된 것들도 많아 4, 5학년을 중심으로 쉽게 운영할 수 있다.

물론 만화가 아닌 글자 중 심의 책을 가끔 혼용하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도서 지 도가 학습능력 배양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학부형들도 적극 호응할 것이다.

2) 중학생 인문학 교실 역시 주말이나 주일 학생 예배를 마친 후 자원하는 학생 중심으로 운영하되 문학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이

좋다.. 문학은 역사보다 어려워서 주관적일 수가 있고, 상징과 생략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기 쉬 우며.

문장 독해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경우 는 아무나 지도할 수가 없어 가능하면 교인 중, 국어교사 를 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3) 고등학생 인문학 교실 고등학생들은 대학 진학을 위해 논술 준비를 해야 하기 위해 철학 중심으로 인문학 교실을 운영하는 것이

좋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 다 고 3은 아무래도 입시 준시에 바쁘기 때문에 인문학 공부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4) 대학생 인문학 교실 가장 수준 높은 인문학 방으로 운영하면 좋을 것이다. 문 학, 역사, 철학 중에 난해한 것들이 많다.

기초가 잡힌 사 람들에게는 충분히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과 체험을 할 수가 있으며 그것을 자기 삶에 적용할 능력을

배양할 수 가 있다.

5) 평신도 인문학 교실 운영 인문학은 삶의 기록이고 경험을 축적한 것이기 때문에 평 신도들에게는 어떤 각도로도 적용할 수가 있다. 필자가 한 그대로 매월 1회, 전문가를 초청해서 정기적으로 꾸준히 하고, 이때 불신자들로 초청해서 함께 듣는 것이 좋다.

인 문학 강의를 할 때,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 이 좋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다시는 오지 않을 확률이 높 기 때문이다.

5. 참고할 사항들.

1) 도서 선택 아무래도 서울대학교 추천도서 100권을 중심으로 하는 것 이 좋다.

신중하게 선택한 고전들이고 상당한 자료들이 시 중에 나와 있어 교인들이 참고하기도 좋다.

추천한 학교에 대한 호감도 좋다, 물론 화제의 책이 나오면 그것을 일시 적으로 선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2) 인문학 지도 방법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일차적으로 작품과 작가에 대한 해 설, 평가, 기독교적인 비판과 수용, , 적용 등으로

지도가 되어야 하고 질의응답은 필수적이다. 가금 주제를 정해 토 론회도 해 볼 수도 있다

3) 동기 부여 강화 꾸준히 인문학 강의를 하려면 동기 부여가 매우 중요하다.

교회 사정에 따라 간식도 가끔 주고, 연 1회 대외적인 행 사도 헤야 한다.

김 유정 , 박 두진, 이 효석 등의 생가나 박물관 등을 탐방하기도 하고 해외 문학 유적지 예를 들 면 톨스토이 생가, 또스또엡프스키

박물관 등도 한 번 여 행해 볼 가치가 있다. 동남아 여행이나 동유럽 여행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

6. 맺는 말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인문학 강의를 해왔지만 이렇 게 기독교 인문학에 대한 종합적인 내 견해를 밝힌 적은 처음이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본격적으로 기독교 인문학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마 필자가 처음일 것이다.

최근에 내가 섬기는 서울장신대학교 안에 기독교인문학연 구소를 설치하여 《수수께끼 - ‘인간 그 100개의 가면’》 이라는 책이

출판되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 이를 보급하려고 했는데 이제 교회나 목사들도 기독교 인 문학에 관심을 조금씩

갖는 것을 볼 때, 참으로 다행이라 고 생각한다. 기독교 인문학은 전도나 신앙 성숙에 큰 도 움이 되고, 특히 학생들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지면 상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목사들 도 기독교 인문학을 해야 한다.

교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특히 설교를 다양하게, 깊이 있게, 신선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가 교회에서 강의한 서울대학교 추천도서 100권 중 50권에 대한 기독교 인문학적 접근을 저술한 책,

《인간, 신이 만 든 수수께끼- 인간 100개의 가면》이라는 책이 시중에 나 와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01 팬데믹시대의 루터의 재발견 「루터」의 저자 이길용 교수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북 콘서트 서울신학대학 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 종교학 박사, 저서로는 「루터」, 「이야기 종교학」,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

등이 있다. 지난 1000년동안 세계를 빛낸 위인 목록에서 루터는 늘 상위권에 있었다.

미국의 역사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인 히스 토리 채널의 <1000년을 빛낸 세계의 위인 100인>이라는 특별방송에서 루터는

당당히 3위에 올랐다. 히스토리 채널은 이 종교개혁의 영웅을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인간이 직접 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말은 종교개혁의 모토이기도 하다.

루터가 그토록 힘주어 외쳤던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의 정신이 바로 이 한 문장

안에 모두 들어 있다. 루터는 신앙을 신과 인간 사이의 문제로 보았다. 이때 인간은 집단이 아닌 ‘단독자’다.

중세라는 견고한 성벽을 흔든 위대한 개혁가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진정한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인간, 신과 단독으로 만나다 김길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해 기획한 「루터」란 책이 뒤늦게 나왔어요?

이길용 지난 2017년에 출간할 계획으로 집필도 끝났는데, 마지막 교정을 앞두고 어머니 병세가 악화되어 미뤄졌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지난 2020년 12월에야 세상에 빛 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요.

왜냐하면 루터 역시 팬데믹을 겪었던 사람이기 때 문입니다.

루터 바로 전 시대 유럽은 페스트라는 무서운 감염병으로 당시 인구 3분의 1이 절멸하는 참담한 상황이 었어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루터와 그의 생 애는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길구 「루터」란 책은 아르테 출판사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하나로 출판되었는데… 읽어보니 쉽고 재미있었 습니다.

책을 쓰시게 된 계기는? 이길용 도서출판 아르테에서 세계를 빛낸 사상가, 문학가, 예술가 각 100명씩을 선정하여 그 방면의

전문가를 필자 로 선정, 그들이 나고 자란 지역과 연결하여 그 일대기를 독자에게 소개하는 기행문 식의 평전을 내기로 했습니다.

루터는 사상가 편의 하나로 기획되었지요. 김길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책의 첫머리가 기억이 납 니다.

‘인간, 신과 단독으로 만나다’인데요, 루터는 과연 어떤 인물입니까? 이길용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15세기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에 새롭게 설립된 대학의 교수였던 루터는 후에 유럽 전반을 뒤흔드는 개혁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루터의 개혁운동이

지향하고 있는 지점은 신을 찾는 한 ‘개인’, 즉 ‘주체적 개인’입니다. 바로 그것이 중세와 근대를 가르 는 새로운 사조의 시작이라고도 하겠죠. 김길구 지금 우리는 비대면이 일상화된 팬데믹의 시대를 겪고 있습니다.

팬데믹이 루터의 신앙과 신학에 어떤 영향 을 끼쳤나요? 이길용 루터, 그리고 그의 종교개혁은 그의 신앙과 더불어 페스트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결과물입니다. 이 시대적 상황이 없었다면 루터의 개혁운동도 실패했을 겁니다.

루터는 페스트와 전쟁이 훑고 지나간 바로 다음 세대의 청년이었습니다.

그 역시 두 명의 동생을 페스트로 잃었고요. 그러다 보니 매 순간 죽음의 공포가 그를 흔들었 고, 루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앙의 길을 선택합니다. 루터가 얼마나 절실하게 이 죽음의 공포와 싸웠던 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도 신부를 찾아가 고해를

했다는 것 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지도 신부가 지나친 고해성사보다는 기도와 성서 암송에 시간을 투자하라고

했 을까요. 이후 루터는 신부의 지침대로 기도와 성서 암송에 집중하여 그가 속해있던 수도원에서 인정받아 사제가 되고 신학을

공부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대학의 교수까지 되었 지만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는 그를 떠나지 않았고, 성서 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그를 계속 괴롭혔죠. 김길구 평신도도 잘 알고 있듯이, 루터의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 데, 교수님의 얘기를 들으니 죽음의 공포와 팬데믹의 관계 가 이해가 됩니다.

이길용 전집 서문에 적힌 당시 루터의 심정이 그때의 마음 을 잘 드러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라 는 개념을 법리적으로만 이해하고, 또 그렇게 배웠다.

‘의’ 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양자간 맺어진 약속과 계약을 성실 히 수행해야만 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 에 합당한 삶을 살겠는가. 그래서 난 의를 생각할 때마다 괴롭고 너무 힘들었다.

난 이런 의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하나님을 저주해 마지않았다.” 독일어로 그의 전집을 읽으 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루터가 ‘저주했다’라는 단 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절절히 불안과 공 포에 떨었으면 하나님을 저주한다는 말까지 했을까요?

김길구 이러한 신앙의 갈등에서 루터가 찾은 결론은 무엇 인가요? 이길용 그런 루터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성서를 읽으 면서… 성서학 박사였던 루터는 성서를 원어로 읽으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시작합니다.

성서 속 하나님은 무섭 고 두렵고, 높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지리 같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견고한 위계질서 속 에 위압적으로 묘사된 신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 루터에게 읽힌 겁니다. 그래서 루터는 분연히 일어나 ‘성서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게 됩니다.

김길구 교회를 갱신하려던 종교개혁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 어 사회개혁으로 확산하게 된 폭발력은 어디서 왔나요?

이길용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이란 제도와 조직을 바꾸 는 운동이 아닙니다.

루터는 가톨릭이 독점했던 성서와 하 나님의 은총에 대한 해석권을 개인에게 돌려주려 했던 것 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무엇보다 절실했던 것은 성서의 번 역입니다. 성서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가득한데, 라틴어로 된 성서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누구 든 성서를 읽고 그곳에서 신의 사랑을 발견하여 참된 ‘의’ 를 획득하기를 바랐던 루터는 성서를

가장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마저 읽지 못하는 이들이 생길 것 같아 교회 를 세우는 곳마다 함께 학교를 세워 공교육의 기치를

높 이 들었습니다. 루터의 학교 남녀의 제한은 없었습니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공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사 람이 바로 루터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은 독서혁명 김길구 교수님은 얘기를 들으니 이 책에서 종교개혁이 독 서혁명이었음을 강조하셨는데

바로 이 점에서 루터의 종교 개혁은 성서의 해석학적 운동이며, 독서혁명이 된다는 말 에 공감이 됩니다.

이길용 그렇습니다. 구원은 읽음에 있고, 읽는 것이 혁명 이 됩니다.

실제로 루터 번역 성서는 한 집 건너 한 권씩 구입하게 되고, 이제 지역마다 루터의 성서를 읽는 독서 모임이 생겨납니다.

신부의 강론을 통해서, 그것도 라틴어 로만 맛을 보던 성서를 집마다 ‘소유’하고 읽게 되니 사람 들의 지적 수준도 한 단계 올라서게

되고, 결국 이것이 유 럽 사회 전체를 한 단계 성장하게 됩니다. 김길구 루터가 살던 당시의 중세 유럽의 14~15세기의 사 회 경제적

상황은 어떠했나요? 이길용 한 예를 들어보죠. 당시 성서 가격이 얼마쯤 될 것 같아요?

그때 성서는 대강 5백 굴렌 정도였다고 합니다. 1굴덴은 건장한 장정이 2주 정도 일한 급여라고 하니 편 하게 지금의 1백만 원

정도라 한다면, 5백 굴덴은 5억 정 도입니다. 성서가 이 정도 가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양피지에 전문 필경사에 의해 제작되어서입니다. 성서 한 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양의 숫자가 200~300마리입니 다. 그러니 5억이란 가격이 나오겠죠.

그런데 루터의 성서 는 1.5굴덴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 하면 바로 구텐 베르크 덕분입니다.

그가 만든 금속활자인쇄설은 기존의 양피지 수작업보다 수십 배 빠른 속도로 책을 펴낼 수 있 었고, 당시 중국에서 중동을 거쳐

들어오기 시작한 제지술 덕분에 양피지보다 8분이 1 정도 가격의 종이로 책을 만 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덕분에 루터의 성서는 적당 한 가격에 팔릴 수 있었고, 전에는 성당이나 대학 도서관 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완전한 성서’를

이제 웬만한 가정이 면 하나씩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 경제적 요인들이 겹치면서 종교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요원의

불길처럼 타 65 제2부『북 콘서트Ⅰ』 올라 근대의 빗장을 열어젖힌 것입니다.

김길구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루터의 종교개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길용 진정한 혁명의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촉발되는 신앙이 아닌, 스스로 읽고 하나님 을 만나는 주체적 개인의 발견. 이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지금 신앙인도 루터 못지않게 주체적 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증언은 성서에 가득하니, 직접 읽고 직접 신을 만날 수 있어야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어가는 것이라

하겠 습니다. 근대를 연 마지막 중세인 김길구 부제를 ‘근대를 연 마지막 중세인’이라고 하셨는데, 루터가 근대인이 되지 못한

이유와 그 한계는 무엇입니까? 이길용 루터가 시대적 영웅이기는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습 니다.

주체적 개인이라는 근대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점 은 분명하나, 그는 여전히 중세적 가치관에도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는 누구보다 뚜렷하게 ‘주체’ 를 외치고 독립적 판단과 주장을 했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당시 시대상을

제대로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당시 고통에 시달리던 농민군에 대해 그가 취했던 태 도나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언설 등은

그 역시 중세의 편 66 제2부『북 콘서트Ⅰ』 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건 루터의 한계 이자 동시에 시대의 한계라고 봐야겠지요. 김길구 당시의 정치·종교적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종교개 혁이라고 하는 것도 루터 혼자의 힘만으로는 성공하기 어 려웠을 것인데, 당시에 무슨 일들이 있었나요?

이길용 말씀하신 대로 사실 당시 독일지역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의 영주들이 돕지 않았다면 루터의 개혁운동은 실패했 을 가능성이

크지요. 신성로마제국시대 독일 쪽 영주들은 성물 수집을 통해 쏠쏠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 다.

성물 숭배는 위대한 신앙 영웅의 유골이나 유품에 대 해 가지는 신도의 숭앙심 입니다.

성서적이지는 않지만, 당시 문맹률이 80~90%에 이르러 배우지 못했던 당시 많 은 일반 신자들은 자신의 신심을 성서 속 인물의

유골이 나 유품을 통해 확인받고 싶어했죠. 그래서 유력한 교회나 귀족들은 어떻게든 성물을 모우고, 기회가 되는 대로 이를

사람들에게 공개했습니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영주로서 선 제후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3세는 대단한 성물 수집가였 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물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 신의 영지를 찾아 숙식하고 식당을 찾아 돈을 썼어요.

즉 짭짤한 관광수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뒤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벌부를 남발하게 되면서 상황이 묘하게 꼬여 버렸 습니다. 면벌부를 팔게 되니 독일의 부가 로마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는 성물을 볼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면벌부를 사게 되면 연옥을 탈출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 신심을 강화하기 위해 굳이 돈을 내고 성물을 보 러 다닐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영주 입장에서는 참 불편 하고 괘씸한 일이었겠죠.

그렇다고 가톨릭 중심 국가에서 교황에게 저항할 수도 없었겠고, 그런 와중에 루터가 등장 하여 나서서 싸워주니 얼마나

고마웠겠어요. 이는 프리드 리히가 루터를 도우면서도 자신은 계속 가톨릭 신자로 남 은 것을 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지요.

김길구 그러니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오직 신앙적 동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죠. 이런 여러 요인들이 종교 개혁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왔군요. 이길용 루터의 올곧은 신앙심에 권력자의 이권 챙기기가 교묘히 연결되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가톨릭과 개신교가 화해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결론이 “그의 왕 국에 그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였지요.

즉, 그 지역의 종교는 그곳 통치자의 것을 따르면 된다는 겁 니다. 거기에 개인의 선택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그토록 주창한 주체적 개인의 선택은 이 화약에는 빠져있 던 셈이죠. 통독, 다시 루터를 소환하다 김길구 외신에

의하면 통독 후 루터가 다시 부상한다는 보 도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길용 루터는 소통 지향적이어서 당시 종교와 관련된

많 은 것을 독일어로 바꿉니다. 성서 번역은 물론이고, 예배 68 제2부『북 콘서트Ⅰ』 도 찬송가도 모두 독일어로 바꾸어 버립니다.

특히 찬송가 도 전문가 중심의 가톨릭과는 달리 ‘회중 찬송’의 길을 연 것이 바로 루터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지 천오백여 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들이 부르는 예배 찬양의 길이 루터 때문에 시작된 것이죠.

루터의 성서 번역은 이후 근대 독 일어의 표본이 되었고, 루터의 학교는 독일 공교육의 시초 가 되었고, 루터의 회중 찬송은

음악을 비롯한 독일의 예 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으니, 지금의 독일다움의 시 작이 바로 루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일의 민족주의가 일어서는 곳마다 루터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 습니다. 그러니 통독된 이후 갈라졌던 동서독

사람의 마음 을 묶고 이어지는데 루터 같은 좋은 영웅도 없겠죠. 그런 점에서 루터는 독일 민족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 다.

김길구 지금 한국 교회가 루터의 개혁운동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이길용 바로 소통입니다.

루터 성서 번역의 기준은 시장 바닥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벽 쌓고 담으로 막으면 신앙의 확산은

기대할 수 없습니 다. 루터는 탑 속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세상 속에 들어 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그 들이 스스로 성서를 읽고 복음의 기적에 동참하기를 원했 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도 그러한 루터의 바람에 따라 성서를 읽으며 개혁운동에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루터의 개혁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면, 다시 성서로 돌아가는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누군 가가 떠먹여주는 성서가 아니라, 스스로 읽어내는 그래서 깨닫고 공감하는 자립적 성서 운동이 일어나야 하지요.

김길구 교수님이 강조하신 루터의 개혁운동은 해석학적 운 동이요 독서혁명이라는 말씀과 함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 가

새로워지기 위하여서는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가 성서 를 스스로 읽고 깨우치고 행동하여야 함을 일깨워주는 귀 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교양으로 읽는 종교개혁이야기》 이상규 / 영음사 / 2017 《루터의 종교개혁》 김균진 /

새물결플러스 / 2018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학이야기》 김주환 / 대한기독교서회 / 2015 70 제2부『북 콘서트Ⅱ』

02 ‘호통판사’ 천종호의 《선, 정의, 법》 공동체의 정의는 하나님의 선을 통해서 온전해 진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에 앞서 정의부터 세워야 천종호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청소년범의 대부로 호통판사의 애칭이 더 어울리는

저자가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위기의 때에 《선, 정의, 법》이란 책으로 찾아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작년에 출간된 이래 1년이 안 돼 6쇄를 넘어섰다. 각주만 봐도 12장에 달하는 공들인 책이다.

현직판사인 저자는 윤리학, 정치철학, 법철학은 물론 신학을 넘나들며 우리의 생활과 떨래야 뗄 수 없는 가깝고도 먼 법의

이야기를 통 하여 하나님의 선이 어떻게 공동체에 구현되는가를 친절하 게 그리고 꼼꼼하게 풀어놓았다.

저자는 법의 목적인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 기 위하여 정의로운 공동체를 넘어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한다.

‘도덕성의 회복은 선의 회복이며, 선의 회복은 정의로운 신의 귀환’으로 도덕 불감증에 빠진 크리스천의 도덕성을 묻고 있다.

『북 콘서트Ⅱ』 사랑은 정의의 최대화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공동체’에 발붙이고,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정의의 공동체를 무시한 채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할 수 없다. 정의는 사랑의 최소 화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화이다.”

김길구 오늘 북 콘서트에는 ‘호통판사’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선, 정의, 법》의 저자 천종호 판사님을 모셨습니다.

함께 토론해 주실 분은 부산복지개발원장이신 박영규 장로 님, 북 칼럼니스트이신 기쁨의 집 김현호 대표님을 모셨습 니다.

작년에 펴낸 책이 이 불황 속에서도 6쇄를 거듭했어 요. 읽기 쉬운 책도 아닌데… 박영규 저자의 대중적 인기도 한몫했을 거예요.

요즘처럼 도덕적으로 교계가 비난받던 때도 없었잖아요. 우리를 돌 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현호 이 책에서도 언급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 가」란 책이 당시 영미권에서는 10만 부밖에 팔리지 않았 는데

우리나라에선 200만부가 넘게 팔려 화제가 되었습니 다.

법조인으로서 공동체주의자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 문 제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이 열광하나요?

천종호 우리 사회는 선이 없는 정의론인 ‘자유주의적 정의 론’에 크게 치우쳐 있어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마이클 샌델이 인기가

많다는 것이 저에겐 의외였습니다. 우리 사 회가 공정과 공평을 다루는 ‘정의’ 문제에 심한 갈증을 느 끼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북 콘서트Ⅱ』 김현호 알 수 있는 통계가 있어요.

‘우리 사회가 불공정합 니까?’란 물음에 미국인들은 30%, 한국인들은 70%가 그 렇다고 답했습니다.

최근에 논란이 되는 것만 봐도 유명인 들의 자녀입시 특혜, 인천공항 비정규직 전환, 의대생 국 시 재응시 문제, LH 사태 등에서

보여준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지지율뿐만 아니라 선거의 결과에도 큰 영향을 주 었습니다.

천종호 공정성 여부는 객관적 데이터보다 국민의 정서와 관련이 깊겠죠.

우리 사회 정의의 수준이 국민의 정서를 어루만져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의미죠.

언급한 사 례들은 이런 감정을 증폭시킨 예라고 봅니다. ‘같은 것은 같게’라는 공평과 ‘다른 것을 다르게’라는 공정이 우리 사 회에

빨리 뿌리 내려야겠습니다. 정의와 공의 김현호 성서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구분하고 있어요.

사회 에서 쓰는 개념과 성서가 말하는 개념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천종호 사회나 학계에서는 ‘정의’라는 단어 하나만 쓰는데 비해 성서에서는 ‘공의’(체다카)와 ‘정의’(미쉬파트)라는 단 어를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의와 정의를 묶어 ‘정의’라는 한 단 어를 활용하여

정의의 개념을 우선 말해보겠습니다. 정의 는 동태적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일을 하고 급여를 받았습니다.

이를 ‘분배적 정의’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 돈으로 휴대폰을 사서 자녀에게 준다 고 해도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지요. 이를 ‘향유적 정의’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자녀가 휴대폰 을 이른바 일진에게 빼앗겼는데, 이를 그냥 두지 않고, 다 시 돌려받았다면 이를 ‘시정적 정의’라고 합니다. 그에 머 물지 않고 휴대폰을 빼앗은 아이에게 형사법상의 조치(형 벌 또는 소년보호처분)가 이루어졌다면, 이것도 시정적 정 의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아이의 딱한 사 정이 밝혀졌는데, 형편이 어려워 아무도 휴대폰을 사 줄 사람이 없어 저지른

일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그 아이로 하여금 재범을 방지하려고 휴대폰을 사 주 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것을 ‘재분배적 정의’라고 합니다. 조금 길어졌는데 이 네 가지 정의를 다시 두 가지로 압축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배분적 정의(분배와 재분배)’와 ‘시정적 정의(향유와 시정)’로 나눌 수 있습니 다.

배분적 정의를 이루려면 사회제도가 구축되거나, 그렇 지 못한 경우에는 개인이라도 선의(호의)를 베풀어야 합니 다.

이렇게 국가나 사회가 하지 않는 일을 개인이 선의를 다해 정의를 이루는 것을 성경에서는 ‘공의(체다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정의(미쉬파트)는 주로 법정에서 어긋난 정의를 시정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김길구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구약 특히 아모스, 이사 야, 예레미야 등의 예언서에는 ‘정의와 공의’라는 단어를 쌍으로 같이

쓰고 있다는 거예요. 이를 두고 어떤 분은 ‘정의의 무자비함과 정의 없는 사랑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공감이

가더군요. 박영규 판사님도 비행청소년들의 아버지로 명성이 높으신 데 1900년 캐나다에서 비행청소년들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교정복지 프로그램으로 ‘회복적 정의운동’을 시작하 여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시는 사역과 비 교해 보면? 천종호 회복적 정의는 크게 세 가지로 접근해야 합니다.

피해자와의 관계 회복, 재비행을 막기 위한 공동체(가정)의 회복, 전과자라는 낙인효과 방지를 위한 사회와의 회복입 니다.

제가 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로, 가정의 문제로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에게 대안가정인 ‘청소년회복 센터’를 제공한 다음

재비행을 막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있어서는 회복적 정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 는데, 첫 번째, 세 번째의 것은

저 혼자만으로는 벅차요.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지요.

기독교공동체는 성품의 공동체 김길구 순서가 바꿨습니다만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데 ‘선’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어요? 천종호 줄여 얘기 드리면 기독교에서 선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이고, 본래적 선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선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저는 로마서 8장 28-30에서 그 답 을 찾았습니다.

‘선을 이루느니라’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 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 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75 제2부『북 콘서트Ⅱ』 영화롭게 하다’와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종적으로 영화롭게 되기까지의 단계{미리 아심, 미리 정하 심, 부르심, (중생) (회심) 칭의, (성화) (견인) 영화}를

보 여줍니다. 그 중 ‘미리 아심에서 칭의’까지의 단계는 잃었 던 생명을 회복하는 구속(속량)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성화에서 영화에까지 이르는 단계는 성품과 인격 의 완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이 룬다는 것은, 생명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박영규 영화 ‘밀양’에서 보듯 크리스천들이 행위 없는 값 싼 믿음으로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예가 많잖아요?

천종호 좋은 지적이신데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선은 구속의 확신을 나날이 더해 가는 것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공동체를 ‘성품의 공동체’라고 하였 습니다.

그리고 성품의 공동체가 이루어 내는 선을 ‘공동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이 없는 정의론’에서는 ‘공 동선’이라는 개념보다는 ‘공익’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정의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 지만,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정의로운 성품이 필요합니다.

김길구 ‘정의는 사랑의 최소화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화 이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가 발 딛는 곳에서 공의와 정의를 세우며,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을 실현해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천판사님의 열정이 돋보인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덕의 상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 문예출판사 /1997 《정의론》 존 롤스 / 서광사 / 2010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 김영사 / 2010 《회복적 정의는 무엇인가》 하워드 제어 / KAP / 2015 《하나님 나라와 공동선》

천종호 / 두란노 / 2022 ◇ 저자소개 천 종 호∥ 부산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 하고 석·박사를 마쳤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97년 부산 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26년간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고, 현재는 대 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다. 가정의 문제로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에게 대안가정인 ‘청소년지원센터’를 제공하여 재비행을

줄이 는데 기여한 공로로 2020년 ‘옥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이 아이에게도 아버지가 필요 합니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등이 있다.

【 정리 : 김길구 】

03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 한국교회의 위기는 영적 구원을 위한 조직체로 제한한 것 조직신학자

박 만교수의 《인생의 질문 신앙의 답변》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가벼움이 판치는 불확실성의 시 대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제거할 수 있다’ 고 감히 나선 이 시대 기독교 변증가 조직신학자 박만교 수의 600쪽 대작 변증서이다.

저명한 C.S 루이스와 팀 켈러에 빚진 바 있다는 그는 시대를 넘나들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들에게

도전장을 내 민다.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도 이해할 수 있게 쓰여진 이 책은 신앙인이라면 물어볼 수밖에 없는 10가지의 인생의

질문과 17가지 의 교리에 대한 변증을 20쪽 내외로 요약 정리하여 답하고 있다.

각 장이 끝 나면 내용을 정리한 세 줄 요약과 주제를 서로 나눌 수 있는 토론문제를 두 어 묵상과 그룹별 성경공부가 가능하다.

좀 더 진지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분 께 이 책을 권한다.

『북 콘서트Ⅲ』

기독교 변증가가 말하는 인생의 질문과 신앙의 답변- 그리스도인을 위한 가이드북 “신학자 더글라스 존 홀은 ‘참다운 기독교

변증은 신앙에 이르는 지적인 오해를 제거함으로써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 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성령 외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를 알고 믿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제거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 으로써 하나님이 일하시게끔 도울 수는 있다.”(서문 중에서) 김길구 2020년 사단법인 디아코니아부산 이사회에서는

법 인 프로그램의 하나로 「디아코니아 기독교인문학 포럼」을 부산지역 교계신문들과 함께 일종의 기독교 교양 캠페인의 일환으로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결의한 지 얼마 안 되어 서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를 맞게 되어 비대면이

일상화되는 초유의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을 때 언론사와의 지상포럼은 유용한 탈출구가 되었습니다. 곧 끝날 것 같던 팬데믹이 3년 반 동안 계속되자 포럼의 횟수는 점차 늘어 나게 되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류지원 이 프로그램은 특별기고 형식의 지상포럼과 저자와 의 만남을 통한 북 콘서트와 책 리뷰 등의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고,

그중에 일부를 발췌하여 1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토록 하였습니다.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설의 변증서 김길구 오늘 저자와의 만남은 올 6월에 새물결플러스에서 출간한 《인생의 질문 신앙의 답변》의 저자이신 박만교수님 의 부산장신대학교 캠퍼스가 있는

김해시 구산동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우선 책에 대한 소개부터… 박 만 신앙인이라면 알아야 할 주제 27가지를 선정하고 각 장 20쪽 내외의 설명과 논문 3편을 더해

총 30장을 하루 1장씩 한 달에 다 읽도록 한 기독교 변증서입니다. 사실 주제 하나하나 를 놓고 보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겠지만

핵심사항들을 요약 정리해서 목회자들의 설교나 강의를 준비하는데 참고자료용으로 나 좀 더 진지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평신도들이 볼 수 있도록 한 기독교 안내서입니다. 류지원 책을 들면서 600쪽의 두께와 자칫 지루할 수도 있 는 묵직한 신학적 주제들의

무게에 주눅이 들었는데 막상 읽다 보니 동과 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인생의 질문과 신앙의 답변을 신학과 철학, 사회, 경제 등을

넘나드는 통 섭적인 학문의 깊이와 높이로 독자들을 설득하되 평신도들 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책의 장점 같아요.

C.S. 루이스와 팀 켈러에 영향 커 김길구 이 책의 서문에 C.S 루이스와 팀 켈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두 분의 어떤 점에

영향을 받았습니까? 80 제2부『북 콘서트Ⅲ』 박 만두 분 다 정통적인 복음주의자요 저명한 베스트셀 러 작가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수준 높은 지성과 논리를 무기로 기독교를 옹호한 거장들입니다.

C.S 루이스는 1, 2차 세계대전과 세속주의의 등장, 자유주의의 거센 파고로 유럽이 정통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 때 신앙의

합리성 과 도덕성을 명료하게 변론했다면, 작년에 별세한 팀 켈러 는 자본주의의 심장 뉴욕 맨해튼의 리디머교회를 통해서 도시의

젊은이들과 지성인에게 복음, 도시, 문화, 사회정의 와 교회개척 중심의 목회로 교인 평균연령이 29세인 역동 성 있는 교회로

성장시켜 도시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 했다는 혁신성 때문이지요.

류지원 교수님 책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주제들 을 평신도들도 비교적 이해하기 쉽도록 한국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들이

가득해 좋았습니다. 박 만 개인의 취향과 환경의 차이겠지요?

사실 변증서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 편지〉, 판타지소설의 거 장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는 너무

압축해서 제 가 봐도 어려운 경우가 있기는 해요. 60여 년 전이라는 시대의 간극과 당시의 영국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경험해 봐야

믿는 영국사람 특유의 심성에 루이스의 호소력 있는 설교와 작품들이 맞아떨어진 결과 많은 감동을 주지 않았 나 생각합니다.

‘나의 책 매 페이지 마다 루이스의 영향을 볼 수 밖에 없다’고 술회했던 팀 켈러는 이 시대의 가장 핫한 첨단의 도시 뉴욕 맨해튼에서 세속주의화 된 뉴요커 들에게 정통적인 신앙을 카페에서 마주보고 ‘그래 우리 한번 따져 보자’는 식의 쉬우면서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변증으로 젊은이들을 매료시켰지요. 교회설립 당시 복음화 율이 1%에 불과한 뉴욕시를 5%까지 끌어올려 도시 전체 에

영향을 준 그의 목회 경험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많은 시사점을 줘요.

‘그리스도인을 포위된 소수에서 확신 에 찬 소수로 이끌어 내었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 그의 도 시목회에서 저는 한국교회의 희망을

봅니다. 김길구 본문으로 들어가 보죠. 1부 인간편에는 고통의 문제부터 빈곤과 죽음에 대한 문제 등 10장의 주제들이 있고,

2부에서는 성경, 구원에서부터 기독교의 절대성 등의 교리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 등 일상에서 부딪 치는 현실적인 문제도 다루고 있어요. 다 다룰 수는 없고 그중 에서 3꼭지만 다뤄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과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 그리고 성경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입니다.

성경은 보는 두가지 관점 김현호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지?에 대한 물 음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케빈 벤후저의 하나님의 화행으 로서의 성경론을 소개하셨는데 간략하게 말씀해주신다면? 박 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이면서

교수인 캐빈 벤후 저는 ‘성경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정통적 성경관을 가진 복음주의자입니다.

성경관에 대한 논란은 장로교 안에서도 조금씩 입장이 달라요. 보수주의 입장에 선 찰스 하지, 위필드 등은 ‘성경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82 제2부『북 콘서트Ⅲ』 말씀’ 이라는 입장이죠. 이 주장은 성경이 쓰여진 특정한 시대 안에서의 제약과 문화적인

옷으로 입고 나타난 부분 을 제대로 반영치 못하는 한계가 있어요. 이에 반해 칼 바 르트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 도 말씀하신다며 그런 점에서 성경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 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도구 내지 수단이요 증인’

이라는 입장입니다. 케빈 밴후처는 이 두 진영의 입장을 다 같이 받아들여서 화행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지요.

하나님의 ‘화행’(언어 행위, speech-acts)으로서의 성경론 박 만 ‘말씀이 행하게 하는 것’이란 뜻이죠. 쉽게 예를 들 어보죠.

“야 비 온다”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그 말이 단순히 비가 온다는 사실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게 보수적 장로교 회의 문자주의적

입장이라면 “야 비 온다”란 말을 들었을 때 그러면 어떻게 하지? 라고 묻고 행동하는 것이 칼 바 르트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에 영국의 언어론자 의 영향을 받은 캐빈 밴후처는 “야 비온다”란 말의 의미에 는 문을 닫고, 빨래 걷고, 비 안 젖도록 하라는

의미를 포 함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도 그런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캐 빈 밴후처는 이 두 입장을 다 수용해서 문자적인 것 중 진리인 것은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갖고 오는 결과도 열린 자세로

받아 주자는 입장입니다. 저도 이 견해에 동 의합니다. 특히 한국장로교가 합동, 고신, 통합, 기장으로 분열된 이유 중에 하나가

성경관의 차이도 있는 만큼 한 국교회의 갈등을 극복하자는 차원에서도 좋을 것 같아요.

자본주의 어떻게 볼 것인가? 김현호 소련의 붕괴와 동구권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는 오 늘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정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 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가능한지, 그리고 그리스 도인이 자본주의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박 만저 역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물 질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제 가 그렇게 살고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여기 니까 말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 단순하게 말해서 자본 주의가 주는 달콤함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주는 행 복을 우리 교회가 더 붙잡을 때 자본주의의 유혹에서 벗 어날 수 있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주는 개인 의 자유, 주체성, 창의력 등의 강점과 극심한 경쟁에서 오 는 인간소외와 물신숭배, 개인주의, 이에 따른 부의 불평 등, 환경 파괴 등의 폐해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변할 수 없는 절 대의 가치가 아니라 장점은 늘이되 단점은 줄여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고

이를 추구하는 정책을 지지하여 정치에 반영하게 하는 노력도 함께 해야 합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류지원 한국교회가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해법으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집중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박 만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 구원을 위한 조 직체 정도로 제한하여, 성령의 능력 아래서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해방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위부대라는 자각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흔히 공관복음서라고 불리는 마태, 마 가, 누가복음에 보면은

모두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의 건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김길구 예수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 입 니까? 박 만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져오는

전혀 새로운 나라이고, 모든 인위적 차별을 극복 하고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세계이며, 물질이 아 니라 사랑과 생명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곳이고, 기쁨 과 행복이 있는 곳이며, 모두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적 공 동체이자 진리와 사랑과 상호 이해에 근거하여 폭력과 차 이를 해결하는 곳’ 입니다.

류지원 교수님께서 한국교회의 위기의 해법이 하나님 나라 의 선포에 있다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기존 교회라는 공동 체가 하나님의 나라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김현호 제가 감명받은 이 책의 마지막 단락을 읽어드리겠 습니다. 20세기 초반 무너져 가고 있던 중국사회를 안타 깝게 바라보던

루쉰은 그의 단편 소설 「고향」에서 이런 말 을 남겼다. “희망은 과연 있는가? 희망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길과 같다. 길은 처음에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 길을 가고, 또 다른 사람 이 그 길을 가다 보면 길은 어느새 만들어진다.” 우리 역 시 그렇게 걸어갈 뿐이다. 김길구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몰입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600쪽의 대작을 읽으시느라. 수고하셨는데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집에서 다시 한번 하루에 한 장씩 정독 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 홍성사 / 2018 《팀 켈러의 센터처치》 팀 켈러 / 두란노 / 2016 《예수와 하나님 나라》

김균진 / 새물결플라스 / 2016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서인석 / 분도출판사 / 1982 86 제 3 부 『 참고도서 목록 』

제3부『참고도서 목록』 기독교인문학 단행본 도서 목록 김수성 관장 작은도서관「꿈여울」

I. 들어가면서

1. ‘기독교 인문학’인가, ‘기독교인문학’인가? ‘기독교 인문학’은 한마디로 상반되는 두 단어가 합쳐졌기 에 정의하기가 까다롭다.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 교’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학’을 붙여놓은 낱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동안 기독교 인문학을 표방한 책의 대 부분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기독교에 우선해 인문 학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문학적 관점으로 기독교 또는 기독 교회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인문학’으로 써야 할지, ‘기독교인문 학’으로 표기해야 할지에 관한 문제도 명확하지 않다.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기독교에 인문학을 접목하였다는 의미에 서는 ‘기독교인문학’으로 표기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기독 교적 인문학 또는 인문학적 기독교라는 입장에서는 ‘기독교 88 제3부『참고도서 목록』 인문학’으로 써야 할 것도 같다.

필자는 이에 대해 어느 것이 옳다고 주장할 만큼 깊이 연 구하지 않은 입장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특별한 의미 없이 단순하게 ‘기독교인문학’으로 통일하여 표기하고자 한다.

이 글은 무언가를 밝히기보다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기 독교인문학’과 관련된 단행본의 목록을 출간일 순으로 소개하 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만 2008년 백석대학교 기독교인문 학연구소에서 발행한 학술지 《기독교와 인문학 10권》에 게재된

최태연(백석대 교수・기독교철학)의 ‘기독교인문학 과 철학’의 일부분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이 연구소는 2004년 기독교철학연구소로 출범해 학술지 《기독교철학 연구》라는 제하의 학술지를 펴냈다.

2008년에는 기독교인 문학연구소로 개명, 학술지 10권에서 기독교인문학 특집을 하면서 세 편의 논문을 게재하고,

이를 《기독교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하의 단행본으로 발간하였던 것 같다.

최태연은 기독교인문학의 역사적 모델을 르네상스 인문 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인 간성’에 대한 기독교의 이상을 그리스・로마의 고전과의 만남을 통해 재해석했고, 오늘날의

기독교인문학 역시 성 경과 역사적 기독교의 인간이해를 일반 인문학과의 대화 내지 대결을 통해 시대에 적합하게 해석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제를 구체적인 학문 원리로 제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며, 기독교인문학의 통합 적 원리로서 기독교세계관적

접근과 인격주의적 접근, 두 가지를 소개한다. 89 제3부『참고도서 목록』 기독교세계관적 접근방식은 말 그대로 인문학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해석하는 접근방법이다. 이 방법은 네덜 란드의 신칼빈주의자-카이퍼(Kuyper), 바빙크(Bavinck),

도예 베르트(Dooyeweered)-에 의해 제시된 방법으로서, 모든 학문의 내용을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틀 안에서 재해석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관점 자체가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론의 장에서 일반 학문과의 대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인격주의적 접근 은 과학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의 ‘인격 적 지식’에 근거한다.

그는 모든 지식의 근저에는 암묵적 이고 인격적인 믿음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른 모든 지식 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강영안은 여기 서 더 나아가 인문학은 객관적 지식을 산출자의 역할이 아닌, 인간의 인격적 내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변화시키는 인문학이 되어 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앎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으로는 만족될 수 없고 인간의 인격성의 추구를 통해서만 기독교유신론에 합치하 는 통합적이고 일관된

인문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단행본 선정 기준 이 자료는 2023년 4월 30일 현재, 학술연구정보서비스 (RISS)에 등재된

단행본 중 키워드 ‘기독교 인문학’으로 검색, 등록된 395권의 책 중에서 외국인 저서와 ‘기독교인문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도서,

e북 등 중복 도서는 제외하고서 정 리하였다. 이때 기독교철학, 기독교문학, 기독교문화, 기독교 역사학, 기독교페미니즘 등과 같이

별도로 분류할 수 있는 도 서도 제외하였다. 종교인문학과 관련된 책 중에서는 내용상 전반적으로 기독교 또는 성서를 중심으로

서술한 도서만 포 함시켰다. 가끔 애매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신앙만을 강조 하는 내용의 도서는 제외하였다.

다음으로 인터넷서점 알라딘과 교보문고 등에서 ‘기독교 인 문학’으로 검색하여 RISS에 등재되지 않은 단행본을 추가하 였다.

 

간혹 기독교인문학으로 검색되지 않는 도서 중에서도, 그동안 어느 정도 일반에게 알려졌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기 독교인문학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도서도 포함시켰다. 앞 서 언급한대로 ‘기독교인문학’에 대해서는 학자는 물론, 목회 자들 간에도

시각차가 뚜렷하다. 내용상 학술적으로 집필한 책이 있는가 하면, 설교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정리한 수필집 같은 책도 있다.

그러나 이들 책 모두를 필자가 읽고 완전히 분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다 저렇다 쉽게 판단할 수 없으 므로,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책은 여기에 포함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여기에 정리한 도서는 우선 ‘기독교인문 학’을 제목이나 부제에

내세웠거나, ‘기독교 인문학’ 또는 ‘기 독교인문학’을 검색어로 올린 도서 중에서 나름대로 정한 기 준에 적합한 도서를 출간일자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일일이 내용에 대해 언급할 수 없으므로, 이 책이 어떤 관점으로 무 엇에 관해 서술한 책인가를

대충이나마 알 수 있게끔 목록에 간략한 저자 소개와 목차를 함께 정리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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