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빵 이야기

작성자태석호|작성시간04.10.21|조회수465 목록 댓글 0

 

우리네 식단에서 밥이 중심을 차지하듯 서양에서는 빵이 그 자리에 있다.

빵은 곡기를 채우고, 접시에 남은 음식물을 아낌없이 훑어내는 역할도 한다. 이것저것 속을 채워 한 끼를 훌륭하게 때우는 간식거리가 되기도 하고, 묵은 빵은 아예 국물에 푹 잠겨 피렌체식의 스튜 요리가 되기도 한다. 아니면 아주 바삭하게 말린 후 가루내어 다양한 튀김이며 요리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빵 없는 서양 식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이탈리아는 빵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마도 소아시아나 아랍지역에서 들어왔을 빵 제조법이 로마시대에 비로소 오늘날의 빵의 모습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중세는 문화뿐만 아니라 빵에 있어서도 암흑기였다.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다시 빵은 화려한 제 모습을 찾게 된다.

이탈리아의 식사법은 다른 서양 나라에 비해 독특하다. 흔히 서양식을 먹게 되면 '메인 코스'라는 말을 쓰는데, 이탈리아에서는 따로 메인이 없다. 이탤리언 식당에 가서 '오늘 메인 요리가 뭐요?'하고 물으면 종업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님이 먹는 음식이 다 메인입죠’라는 답을 듣기 십상이다.

이탈리아 음식은 전채, 첫 번째 접시, 두 번째 접시, 디저트로 나뉜다. 좀 격식을 갖춰 먹으면 식전에 입맛을 돋우는 아페리티프가 추가되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식사에서는 생략되는 게 보통이다. 전채는 샐러드류나 간단한 먹거리이고, 첫 번째 접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파스타류가 나온다. 물론 쌀 요리를 먹기도 한다. 그리고는 생선이나 고기로 만든 요리가 나오는데 이것이 두 번째 접시다. 이런 식사 코스에는 빵이 빠질 수 없다. 보드랍고 달콤한 빵은 아침에 우유나 카푸치노, 카페라테 같은 음료와 함께 먹고 보통 식사에서는 단맛이 전혀 없는 거칠고 딱딱한 빵을 곁들인다. 단맛은 입맛을 떨구기 때문에 반드시 식사 중간에는 금기로 통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디저트를 아주 달게 먹곤한다.

이 거친 빵이 이탈리아 애들이 죽고 못사는 빠니노가 된다. 빠니노는 작은 롤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탤리언 샌드위치라는 뜻도 된다. 보통 '빠니노 하나 먹었다'고 할 때는 빠니노 샌드위치를 가리킨다. 빠니노는 한국에선 빠니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냥 빠니노다. 한국의 샌드위치집에서 '이탈리아식'이라고 이름붙여 파는 빠니노를 보면 도대체 국적이 없다. 아마도 뉴욕이나 동경 스타일로 한 바퀴 굴러 들어온 스타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식이란 그야말로 단순하기 그지없는 빵 조각이어야 정말 이탈리아식이라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요란한 소스며 들큰한 재료가 범벅이 된 소위 빠니노는 진짜라고 부르기 곤란하다.

왜 그럴까? 바로 이탈리아 음식의 핵심과 기본에 대해 이해가 없는 까닭이다. 이탈리아 요리가 세계적인 요리가 된 가장 큰 무기는 ‘간단한 조리법과 재료의 순수한 맛을 살리는 이데올로기’이다. 양념과 소스를 뒤집어쓴 음식은 뭔가 그 재료와 요리 솜씨에 대해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먹는 스파게티란 걸 보자. 이탈리아식은 소스를 적게 쓰고 올리는 고명도 거의 없다. ‘스파게티’의 구수한 맛을 잘 즐기기 위해 약간의 소스를 첨가하는 게 원칙이라고 믿는 때문이다.

그런 ‘원칙’에 따라 빠니노조차도 두어 가지 이상의 재료가 들어가는 법이 거의 없다. 이것저것 넣어 알맹이가 되는 재료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치즈 한 쪽만 달랑 넣거나 살라미나 살루미 같은 돼지고기 가공품을 얇게 썰어 넣고 그냥 먹는다. 살라미의 짭짤한 맛과 빵의 구수함이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낸다. 여기다 머스타드며 케첩, 심지어 핫 소스를 얹으면 무슨 맛이 날까. 주재료 맛 대신 소스가 먼저 튀어나오는 ‘주객전도’를 실감케 된다.

빠니노는 식사이기도 하고 간식이기도 하다. 가볍게 아침을 먹는 습관에따라 오전 11시 전후가 되면 배가 고프다. 이럴 때 간식 삼아 간단히 때울 때 파니노를 찾는다. 동네 어디든 파니노를 파는 바가 널려 있다. 어디서 받아다 파는 것이 아니고 주인네가 대충 집에서 만들어 가져온다. 이렇게 먹는 스타일을 ‘스푼티노’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간식이다.

아니면 나름대로 한 끼의 식사가 되기도 한다. 자그마한 소읍에 가면 오후 1시부터 슬슬 점심 시간이 된다. 이때 한 끼를 정식으로 먹고 싶다면 식당에 들를 일이지만, 그렇지 않고 토속적이고 값싼 식사를 하고 싶다면 시장 골목을 어정거려 보라. 반드시 시람들이 몰리는 빠니노집이 있을 것이다. 대개 빵집을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갓 구운 빵에 퉁퉁한 아주머니가 살라미며, 브레사올라(쇠고기 엉덩이살로 만든 가공품), 모차렐라 치즈, 토마토, 페코리노(양젖 치즈) 따위를 얹은 그 지방 고유 스타일의 빠니노를 만들어 판다. 입천장이 벗겨질 만큼 빵 거죽이 거칠고 딱딱해서 처음에는 먹기 힘들다. 보드라운 햄버거에 길들여진 우리가 먹기에는 약간의 고통(?)이 따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고 두어 입 씹어보라. 깊고 구수한 밀가루의 맛이 어떤지, 냉풍에 잘 말린 생 돼지고기 햄 맛이 어떤지 알게 된다. 이탈리아의 맛을 안다는 것은 빵으로부터 시작한다. 파스타와 고기 요리의 남은 소스를 닥닥 닦아먹는 거칠고 투박한 빵이 없다면 그 식사는 풍요롭다고 할 수 없을 테다.

 

                                                                ICIF 박찬일 선배님의 '이태리 빵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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