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6 09:41ㅣ최종 업데이트 26.06.06 11:52
- 동북아의 미래는 한강이 아니라 두만강에서 다시 쓰일 것-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두만강 하면 많은 이들이 먼저 떠올리는 노래가 있다. 바로 가수 김정구가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하는 정서를 담은 이 노래는 한때 온 국민이 따라 부르던 애창곡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두만강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그런데 최근 이 잊혀 가던 두만강이 다시 국제정치의 중심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지역 개발 사업이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체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지정학적 변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국내에서는 지방선거가 치러지며 정치권의 관심이 온통 선거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베이징에서는 향후 수십 년간 동북아 질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국제적 이벤트들이 연이어 진행되었다.
먼저 5월 14일 트럼프대통령과 시진핑주석의 미중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무너지는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갈등과 경쟁을 이어가면서도 관계의 전면적 충돌은 피하자는 데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2018년 이후 관세전쟁, 반도체 전쟁, 공급망 전쟁으로 이어졌던 양국 관계가 타협과 공존의 규칙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미·중 경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경쟁의 방식이 무력 충돌이 아닌 관리 가능한 전략 경쟁으로 조정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방중 당시와 비교하면 중국의 자신감과 전략적 여유는 훨씬 커진 모습이다.
더 중요한 장면은 그 직후 펼쳐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귀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두 정상은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대응하기 위한 포괄적 전략 협력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두만강을 통한 동해 진출 문제에 관한 3자 협의를 지속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단순한 외교적 수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결코 가볍지 않다. 이는 사실상 북·중·러 3국이 두만강 공동개발과 동해 출해권 확보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 두만강개발은 오랜 숙원사업이다. 중국 동북 3성 가운데 특히 지린성은 거대한 산업 기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가는 출구가 제한되어 있다. 만약 두만강을 통해 동해로 직접 진출할 수 있다면 물류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고, 침체된 동북지역 경제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러시아 역시 이해관계가 분명하다. 러시아는 극동 개발 정책과 북극항로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안정적인 물류망이 필요하다. 북한을 통과하는 교통·물류 회랑은 러시아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다.
북한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더욱 직접적이다. 나선항을 비롯한 항만 시설 현대화, 철도와 도로망 확충, 물류산업 육성, 관광과 교역 확대 등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나선경제무역지대는 오랫동안 잠재력에 비해 활용도가 낮았는데, 북·중·러 협력이 본격화된다면 그 가치가 크게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나진항 개발과 함께 이미 합의되어 있는 청진항까지 그 사업이 확장될 가능성도 대단히 크다.
사실 이러한 구상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두만강 개발계획(Tumen River Area Development Programme)이 논의되었다. 이후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으로 확대되면서 북한, 중국, 러시아뿐 아니라 한국, 일본, 몽골까지 참여하는 동북아 협력 구상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북한 핵 문제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가 본격화되면서 상당수 사업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거창한 청사진은 남았지만 실제 사업은 진척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의 30년 동안 잠자고 있던 이 프로젝트가 서서히 현실로 등장하려는 것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는 6월 8일 예정된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이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상회담은 갑작스럽게 열리는 행사가 아니다. 이미 물밑에서 충분한 협의와 조율이 진행된 뒤 양국 최고지도자가 이를 최종 확인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중러 양국의 지도자가 이미 합의한 두만강 개발과 출해권 문제는 이번 회담의 중요한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물론 가장 큰 장애물은 국제제재다. 북한과의 대규모 경제협력은 유엔 안보리 제재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두만강 공동개발이 현실화되기 어렵다고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북·중·러는 우회 가능한 영역부터 접근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항만 현대화, 철도 연결, 도로 보수, 교량 건설, 물류단지 조성, 통관체계 개선, 세관 현대화 등은 상대적으로 추진 여지가 존재한다. 실제로 세 나라가 가장 먼저 추진할 사업도 산업단지나 광산개발보다 물류회랑 구축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낮은 물류·인프라 사업은 제재 해석의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나선항을 중심으로 훈춘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물류 회랑 구축이다. 중국의 자본과 화물, 러시아의 철도망과 에너지, 북한의 항만과 지정학적 위치가 결합한다면 동북아 북부를 관통하는 새로운 경제축이 형성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항만 개발 사업이 아니라 중국의 동북진흥 전략, 러시아의 극동 개발 전략, 북한의 경제개발 전략이 만나는 거대한 접점이 된다. 더 나아가 이는 미국 중심의 해양 질서에 대응하는 새로운 대륙형 경제권 형성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제재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미국과 일본의 견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투자 안정성과 사업성, 정치적 리스크 역시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정세 특히 힘의 역관계를 고려할때 핵을 보유한 전략국가들인 북 중 러가 가려는 그 길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두만강은 더 이상 변방의 강이 아니다. 오랫동안 역사와 국제정치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던 두만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길을 따라 중국의 동북진흥 전략, 러시아의 극동 개발 전략, 북한의 경제 재편 전략이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고 있다.
과거의 두만강이 이별과 망향의 강이었다면, 오늘의 두만강은 동북아 지정학과 경제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전략의 강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다. 두만강을 둘러싼 새로운 변화가 한반도와 동북아에 어떤 기회를 만들고 어떤 도전을 가져올 것인지 냉정하게 분석하고 준비하는 일이다. 어쩌면 앞으로 동북아의 미래는 한강이 아니라 두만강에서부터 다시 쓰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