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마태 13:31-35) - 겨자씨와 누룩 비유(쌍둥이 비유)] - 김명호교수(성경언어훈련학교. BLTS)
작성자fewa99작성시간18.10.04조회수376 목록 댓글 0<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천국”,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는, 항상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34v)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깨닫고, 깨닫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깨닫고 마음에 새길 뿐 만 아니라,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저와 여러분 안에 실제가 되고, 더 풍성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 복음을 향해 목마른 자들에게 진리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 진리로 인해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런데 예수님의 여러 비유들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실제 땅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이스라엘을 방문해 실제 그 땅을 보고 또 그 문화를 경험한 사람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때로 도움을 넘어 우리가 놓치기 쉬운 중요한 진리의 교훈을 발견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수님의 여러 비유는 공관복음서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마가복음 보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이 세 복음서 내에서도 성경을 기록한 저자 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를 연구했던 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마태, 마가는 꾸밈없이 진솔하게 보고, 그대로 사실적으로 기록한 반면, 누가는 생동감 있게 묘사를 했는데, 우리가 사진으로 비교해서 말한다면, 마태나 마가의 비유는 마치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하고, 누가의 비유는 칼라 사진을 보는 것 같다.”(J. Macarthur)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는 예수님의 비유를 복음서끼리 서로 비교해 가면서 볼 텐데, 우리가 자주 들어서 익히 아는 “아 그 비유, 그거 이런 의미 아니야!” 이렇게 말할 정도로 잘 아는, 그러나 어쩌면 중요한 교훈을 놓치고 있는,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함께 살펴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문 비교~
먼저, 마가 복음부터 보겠습니다.
마가 4:30-32,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마태 13:31-32,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가복음 보다 짧고 단순하게 묘사를 했습니다).
33절.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가 13:18-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21절.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대충 읽으면 다 같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세 복음서에 나타난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비유를 말씀하면서 서두에 마가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비유할까?" 누가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하나님 나라”로 표현을 했지만, 마태는 “하나님” 대신 “하늘”을 사용하여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 안에 질문이 생기겠지요? 왜 그랬을까? 바로 그것은 독자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천국)는 대부분 마태 복음에서만 사용되고 있는데, 당시 마태 복음의 독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였음을, 마태가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당시에 “하나님”이라는 신명(神名), 하나님의 이름을 읽는 것을 매우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출 20:7 말씀을 보면, 십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실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랜 세월 동안 읽지도 부르지도 않아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조차도,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름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성경에 번역된 “여호와”(יהוה)란 이름이 바로 그 이름에 해당 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호와”라 읽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아도나이”㈜로 바꾸어 읽습니다. 이름을 잃어 버려서 그렇게 읽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히브리어로 “엘로 힘”인데, 지금도 유대인들은 “엘로 킴”이라, “힘”을 “킴”으로 바꾸어 읽습니다. 심지어 영어로도,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God”라 쓰지 않고 “G-d”라고 쓴 것을 보면, 마태복음에 “하나님 나라”라고 쓰지 않고, “하늘나라”라고 바 꾸어 기록한 것을 충분히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하나님 나라”를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으로, “하늘”로 바꾸어서 “하늘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단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나 “하늘 나라”는 동일하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기 위해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그렇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마가, 마태는 바로 그 겨자씨 한 알이, 모든 씨보다 작은 씨앗이라 말했지만, 누가는 마태나 마가가 사용한 표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겨자씨가 식물의 씨앗 중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니었지만, 어떤 작은 것을 설명할 때 격언처럼 겨자씨에 견주어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마태 17:20절 말씀을 보면 겨자씨가 작다고 하는, 같은 문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이르시되 너희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음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능력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하신 말씀은, 문맥에서 분명히 그들의 작은 믿음을 빗대어,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없었음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마가는 겨자씨가 땅 위에 심겼다고 말하고, 마태는 자기 밭에 뿌리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땅 위에 심겨진 것하고 소유권이 분명한 자기 땅, 내 땅 위에 심겨진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무 땅이나 아무 밭이 아닌, 내 땅이어도 “자기 채소밭”이라 자상하게 표현을 했습니다. 마태의 자기 밭이라는 표현보다 훨씬 애착이 가는 표현입니다. 확실히 마태나 마가보다는 누가의 표현이 좀 회화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채소밭에 그것이 심기어졌다면, 그것을 심은 주인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그것을 보살폈을까? 주인의 마음을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본문을 보면 마가는 누가 심었는지 기록을 안 했지만, 마태와 누가는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씨앗이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씨앗이 저절로 떨어지지 않기에, 모두 다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씨앗을 갖다 심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았을 때 씨앗을 갖다 심은 사람, 그 주인의 마음 안에 이 겨자씨가 항상 있겠구나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면, 또 농사는 아니어도 조그마한 땅이 있어 작물을 가꾸어 본 사람이면, 심지어는 땅이 없어 베란다 화분에다 상추나 고추, 가지나 깻잎을 가꿔 보신 경험이라도 있으시면, 이 겨자씨를 갖다 심은 사람의 이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겨자씨 한 알을 심은 결과에 대해서는 “자란 후에 커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고, 특별한 차이 없이 세 복음서에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짧은 본문을 쭉 살펴보았는데, 역시 누가의 기록이 좀 자상하고 아기자기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짧은 비유인 누룩 비유는, 마가복음에는 없고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복음서에 나타난, 누룩 비유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동일하게, 누룩과 가루 서 말을 대조하여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 비유의 대상이 되는, 겨자씨와 누룩, 여러분 누룩은, 특히 주부들은 다 아시지요? 제가 어렸을 때는, 저희는 빵 문화가 아니어서 누룩을 넣어서 빵을 만드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술 문화여서 집에서 주로 술을 만들었는데, 발효시키기 위해서 어머니께서 한 말이 더 들어가는 큰 항아리에 누룩(덩어리)을 넣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물론 고대 성경 시대와 지금 누룩의 형태가 다르겠지만 슈퍼에 가면 누룩(이스트)을 팝니다. 누룩은 한국에서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겨자씨는 한국에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 어려운 겨자씨 비유를 중심으로 말씀을 보겠습니다.
~겨자씨란?
자 그렇다면, 그 겨자씨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을 가보지 않는 사람은 과연 이 겨자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 겨자씨를 굉장히 보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 오는 성지 순례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첫 번째 식물이 있다면,겨자씨일 것입니다. 겨자씨는 헬라어 “시나피”(σίναπι)이고, 히브리어는 “하르달”(חַרְדָּל)이라고 하는데, 검은 겨자와 흰색 겨자(חַרְדָּל, 샤코르/라반) 두 종류가 있습니다. 겨자씨는, 우리 들깨 씨앗 같은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어디에서 많이 파는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가 열렸던 교회 앞에서 팝니다.
사실 이 겨자는 이스라엘의 일년생 풀로, 볼품없는 잡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방에 흐드러지게 널려 있는 풀로 3월 중순에서 4월 초에 노란 꽃이 만개하는, 마치 제주도 유채꽃 풍경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겨자는 우리가 먹는 채소, 갓과 거의 비슷해서 저희는 IMF어려운 때 정말 겨자 풀을 많이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지도 않고, 먹지도 않습니다.
겨자는 1년생 흔한 풀로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말씀 드린 대로 잡초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2월에 겨자 풀을 보면 그 어느 누구도 그 풀이 자라 나무가 될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가르쳐주어도 관심도 없고 마음에 두지도 않고, 한 번 훌쩍 보고 지나갑니다. 또 관심이 있는 어떤 사람은, “아이고, 저게 겨자씨 나무라고?” 실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3-4월에 보면 광야에 피어나는 노란 꽃의 아름다움 때문에 눈에는 들어오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 겨자가 자라 커서 나무가 되어도, 감동이 되고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겨자 나무는 말씀 드린 대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일년 생 겨자 풀이 자라서 어떻게 나무가 되는가?~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새가 깃들일 정도로 커서 나무가 되니 참 신기합니다. 우리가 생각을 달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보는 풀과 나무의 개념과 유대인들이 보는 풀과 나무의 개념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싹이 나와서 바로 잎이 나면, 그것은 히브리어로 “체맠” “데세”, 풀이라 보았고, 지면에서 대가 나오고 가지가 생기고 잎이 나오면, 그것은 히브리어로 “에츠”,나무로 불렀습니다. 우리도 나무가 아닌 1 년생 식물들, 예를 들어 고추를 고추나무로, 토마토를 토마토 나무로 부릅니다. 고추가 식물인가요? 나무인가요? 사실은 나무가 아니지요? 1년 생은 아니지만 대나무 아시지요, “대”가 나무인가요?
고산 윤선도의 대나무에 빗대어 절개를 읊은 유명한 한시가 있습니다.“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저리하고도 사계절 늘 푸르니…”
실제로 하르달, 겨자씨 나무는 군집을 이루어서 자라는데 거의 2m.이상 자라고, 어떤 것은 3m.까지 자라 서로 얽혀 군집을 이루어 있어서 새가 와서 깃들인다고 합니다.
저는 이스라엘 살면서, 광야가 있는 곳(Jerusalem/Beersheva)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가 깃들여 있는 그렇게 큰 겨자 나무는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그 시기에 갈릴리에 살았다면, 또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갔다면 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분이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문장 끝에~)
~겨자씨 비유의 의미~
자 그렇다면 겨자씨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부분 겨자씨 비유를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작은」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커서」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다는 것과 그것이 싹을 내서 자라면 풀이 되고 심지어는 3m. 넘게 커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앉는다는 점에 주목을 합니다. 겨자씨 비유를 대단한 비유로, 겨자씨를 특별한 것으로 보고 우리 식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기대가 있기에 도대체 겨자씨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가? 겨자씨를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로 겨자씨 비유를 씨의 작음과 풀이 나무로 자란 크기에 강조점을 두면서 그 결과에만 주목하여, 하나님 나라는 양적으로 커져가는 것에, 주로 외적인 “큰 성장”에 관심을 두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겨자씨 큰 나무의 가지에 깃들이게 되는 모습만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라서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와서 평안과 쉼을 누리고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속성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이 이해한 것처럼,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의 목적이 이것만이 다라면, 더 좋은 대상을 가지고 와서 비유로 들어 예수님께서 설명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를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 17: 22-23)
얼마나 비유에 적합하고 좋은 말씀입니까!
우리가 결과만 본다면 겨자씨보다 훨씬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백향목이 얼마나 멋있는 나무인가요? 겨자씨하고 비교할 수도, 될 수도 없지요!
그래서 카슨(D.A. Carson)이 “겨자씨 비유에서 하나님이 정말 큰 것을 중시하시는 것만이 전부로 여기셨다면 세상에서 가장 작게 여겨지는 겨자씨를 예로 절대 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커멘트를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에서, 보다 중요한 초점을 놓치고, 한 방향만을 생각을 한다면, 현재는 미약하지만 그러나 나중은 그 끝은, 결과는 창대하리라, 마치 욥기 8:7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욥의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실제 우리의 삶에 적용에 있어서 이렇게 만 기대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끝이 크고 잘되는 것만이 다 성공인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는 문제가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 나라가 아닌가요?
말씀 준비하면서 어느 목사님의 고백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핍박 받고, 말씀대로 사업하다 망하고, 말씀대로 하다가 문 닫는 교회 좀 보았으면 좋겠다. 마치,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말씀처럼 말입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말1:10)
~겨자씨 비유의 보다 중요한 의미~
우리는 예수님의 매우 심플한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것 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교훈은, 이스라엘이라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의 모습을 잘 주의하여 볼 때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놓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참 의미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부분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커지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사실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비유 안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나누고 싶습니다.
마태 13:31-3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우리는 본문을 대부분 겨자씨 한 알을 두고 뒷부분에 강조를 두어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패턴을 바꾸어서, 거꾸로 앞부분을 강조해서 보면서,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의 농경 생활을 비교해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더 부각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거구나! 와우, 정말 신기하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마태 13:31절 만 다시 읽겠습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겨자씨 한 알”인데, 그것이 자라 나무가 된 겨자가 아니라 그 이전에 어느 누군가가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이 겨자씨를 따서 자기 집 채소밭으로 갖다가 심은 이 앞부분을 강조해서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채소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 문장에 머물러서, 다음으로 가지 말고, 전에는 넘어 갔는데, 넘어가지 말고 생각을 해봅시다.
'천국은 마치' 직유 표현인데요, 저는 가정법이 스며들어 있는 직유로 보고 생각을 하고 싶습니다. 가정법은 언제 사용하나요? 가능성이 희박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 가정법입니다. 다시 말해, 일단은 이스라엘이라는 배경을 고려하면 자기 채소 밭에 겨자씨를 갖다가 심을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방 지천에 널리 흐드러져 있는 식물이 겨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겨자가 사방에 지천인데, 누가 그것을 자기 집 채소밭에 땅을 애써 파서 수고해 심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우리나라 사방에 지천인 게 뭐지요? 쑥입니다. 누가 쑥을 갔다가 밭에 심을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필요하면, 나가서 자연산 좋은 쑥을 얼마나 캘 수 있는데…. 마찬가지입니다. 겨자 풀이 필요하면, 또 겨자씨가 필요하면 나가기만 하면 바로 얻을 수 있는데 누가 그것을 자기 집 채소밭에 애써 수고해서 심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겨자는 일종의 잡초라고 그랬지요? 먹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잡초는 있으면 오히려 뽑아주어야 할 성가신 풀입니다. 정원에 같다가 심어 놓으면 문제가 되고 일이 더 많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11년 살면서 정원에 하르달이 있는 걸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한다, 그 일을 행한 사람이면… ? 좀 특이하다 이거죠. 왜 저런 어리석은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가면 지천인데 왜 저런 수고를 하냐 이거죠.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자신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주님을 의미하겠지요? 우리 하나님은 밖에 있는 겨자씨를, 자신의 집 채소밭으로 가져와 심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지요? 우리의 상식이나 지혜를 초월하여 일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서 보았을 때 참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마치 바보 같은 행동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 하나님은 자기 채소밭에, 그것도 겨자씨 한 알을 갖다가 심으신 것일까? 나가면 사방에 지천인데… 왜 그 분은 그렇게 행동을 하시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왜 그러실까요? 우리도 사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요.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겨자씨 한 알은 자신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주인의 밭에 심기어져 있지만, 공간을 달리하여 허허 벌판 광야에서 주인의 아름다운 정원에 옮겨 심기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 주인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음이 확실합니다. 군집을 이룬, 셀 수 없는 수많은 겨자씨들 가운데 택함을 받아 주인의 아름다운 정원에 심기어진 한 알의 겨자씨는, 주인으로부터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자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출 19:4-6.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갈릴리 위쪽, 제 2의 맛사다 '감라') 날개로(날개 위로)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가 읽은 이 두 본문 가운데 나타난,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백성들을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이지요. “소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쎄굴라”라는 말입니다.
"내 소유, 그의 소유, 하나님의 소유”로 표현된 히브리어 “쎄굴라”는, 굉장히 귀하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단어입니다.해석하면, 하나님의 너무 귀한 값진 보물, “PRECIOUS TREASURE”, 하나님의 소유가운데 “하나님의 재산 보물1호”
란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에게 그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그런 존재입니다.
겨자씨는, 말할 수 없는 한량없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거죠, 아멘!
오늘 겨자씨 비유에 묘사된 하나님의 이와 같은 행동은, 우리 편에서 정말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 정말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사방 지천에 널리 흩어져 있는 셀 수없는 수많은 겨자씨들 가운데, 그 중에서 한 알을 따다가 밭을 파고 정성스럽게 심으셨다니, 찬송가 가사처럼 '웬 은혜'가 아닌가요.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을 잡초 같은 나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셀 수 없는 수많은 잡초가운데, 볼품없는 나를 특별히 택하신, 이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독생자이신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인 된 나를 흑암의 나라에서 구원하셨는데, 은혜를 잊어버릴 수도 그 은혜를 잊고 돌아설 수도 없습니다. 자기 아들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 값으로 계산될 수 없는 이 선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빼시?” '하나님 나라는 은혜 빼면 시체'입니다. 겨자씨가 겨자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었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고 심은 은혜가 주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머리 굴려서, 될 성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리 계산하고 저리 계산해 위 아래로 훑어보고, '아이고 너는 안 되겠다야,' 이렇게 우리를 골라서 택했다면, 겨자씨가 절대 겨자 나무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하나님의 바보스런, 우리에게는 은혜로운 주권적인 그 분의 행동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밖에 지천 인 겨자씨 한 알을 같다가 심은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며,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데 저걸 하나만 갖다가 달랑 심어놓았으니 그게 커도 가늘어서 넘어지기 쉽지, 제대로 지탱하기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자라나 커서 나무가 되어 가지 위에 새가 깃들을 수 있을까요? 그 특성상 참 가능성이 거의 희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 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인자한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싹을 내고, 대를 내고, 가지를 내고, 자라나 커서, 마침내 결국은 공중의 새들이 와서 앉아 쉼을 누립니다.
우리는 이런 비유를 묵상하면, 저렇게도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와우 하나님 나라가 저런 것인가 보네. 정말 은혜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정말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 100%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하셨습니다, God has done it,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가능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의 자리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바보 같은 하나님, 어리석은 것만 같은 우리 하나님을 닮아가고,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산 자로, 진짜 바보로, 은혜 입은 자로, 순도 100%의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고 말씀 앞에 먼저 서면서, 주님 앞에 섰다고 했지만, 그 동안의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정말 믿음으로 하기 보다는 나의 어떠함으로 나의 최선의 열심으로 달려온 제 모습이 어찌나 부끄럽든지, 목사인 저로서 참 회개가 되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 입은 자답게 우리 하나님처럼 정말 바보로,믿음으로, 살아가야겠구나, 다시 제 자신을 돌아보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다음 쌍둥이 비유인 누룩 비유에서, 이 비유가 바로 이런 의미였구나, 확실한 그 증거를 얻습니다.
33절을 볼까요.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σάτον)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 비유도 겨자씨와 같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로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적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 덩어리와 섞어졌을 때 결과로 나타나는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가루 서 말은 적은 양이 아니라 족히150명 이상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큰 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룩을, 가루 서 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양도 발효시킬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을 가진 의미로 이해하고, 이 비유를 그냥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만, 사실 가루 서 말에 이 많은 양의 밀가루에 적은 누룩을 넣어 발효를 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 누룩의 적음, 누룩의 양을 여기서는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 단수(ζύμη)로 기록되어 있고, 겨자씨 한 알과 병행되고 있어서, 문맥이 적음을 의미하기에, 사실 그 누룩의 크기로는 그 많은 양을 발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2) 누룩의 발효 효과, 성경 시대에는 먹다 남은 빵 조각을 이용하여 누룩을 만들었기에 누룩이 정상적으로 발효되기 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유대 문헌인 미쉬나라고 하는 자료에 보면, 약 3 일정도, 걸어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왕복하는 시간으로, 나와 있습니다. 누룩의 발효 효과가 느린 것이지요. 그런데 서 말이나 되는 그 많은 양의 밀가루에 작은 누룩으로 빵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완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때 듣는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저런 일을 누가 하지? 가루 서 말에 그 작은 누룩을 넣어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되지도 않을 일을, 겨자씨 보다 더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일은 정상적인 여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 여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부로서 초자일 것입니다.
유대적인 문화 배경에서 보면, 유대 배경이 아니라 그냥 생각해도 이 일을 행한 여인은 분명 어리석은 여인입니다.
왜? 상식을 벗어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고 이혼 사유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가 아니고 완전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어찌된 일인지 이 일을 “하나님의 나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맞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맞습니까? 우리의 통박이 맞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의 생활 풍습을 이해하고 좀 더 생각해본다면 비유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이 맞는 말이지만, 그 너머에는 겨자씨 한 알을 가져다 자기 채소밭에 심으시고, 또 가루 서 말에 작은 누룩을 넣으신 은혜의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을 누구도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없지만, 가루 서 말에 적은 누룩을 넣어 발효시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그 일을 주님이 행하셨다면 우리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이 옳고, 그 행동을 통해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이런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산 증인들을 종종 봅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이지만, 비록 적은 누룩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어떠한 은혜인지 알기에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은혜를 붙들며 살아가는 믿음의 산 증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있습니다. 저는 가까이서 함께 하는, 저희 사역의 현장에서 이 시대에, 말씀대로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며,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 완성을 꿈꾸며,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사모하며, 주님이 전부가 되어,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외치며 살아가는 믿음의 동역자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은혜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붙들린 바가 되면, 하나님이 저렇게도 일하시는구나! 참, 얼마나 감동적이고 힘이 되고 소망이 되는지 우리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오늘도 변함없이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성가 가사처럼 말입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 이네.”
여러분! 월드컵에서 2006 년에 우리 대한민국이 4강까지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월드컵을 보면서 모두가 “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실력인지, 홈그라운드 이점인지, 응원의 힘인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의 응답인지, 아무튼 기대를 넘어 4강에 오르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설마 어떻게 될까?”가 “진짜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저 일이 어떻게 잘 될까? 혹시나 실패하지 않을까?” “마치 불가능할 것 같은 역사”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분의 은혜로 인하여 확실히 되는 역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어떠함을 드러내고 입증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만약 겨자씨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에 심기어진 겨자씨 한 알을,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만 본다면, 어쩌면 겨자씨 비유의 진정한 의미가 없지 않을까 저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가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보잘 것 없고 연약한 한 죄인인 겨자씨와 누룩 같은 인간 위에, 끝의 크기에 상관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펼쳐지는지를 보여주는 주님의 은혜의 역사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 여기에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의 은혜로 거룩한 교회가 된 나를, 세상의 눈으로 세상의 기본 상식을 가지고 아무리 보아도 설명할 수 없고, 내가 나를 보아도, 내가 누구인지 너무 잘 알기에 놀랄 수밖에 없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바보스러운 우리 하나님은 한없는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은혜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드시고, 평생 이끌고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 말씀 몇 구절을 읽고 말씀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아래에서 겨자씨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