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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훈 목사

'고향에서 배척 당한 예수'

작성자fewa99|작성시간21.07.04|조회수191 목록 댓글 0

오늘 교회력 복음서 말씀은 막 6:1-13입니다. 여기에는 두 덩어리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환영받아야 할 고향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배척당했다는 것이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열두 제자 파송 기사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한 쌍의 이야기입니다.

배경
그럼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 막 6:1 말씀부터 살펴봅시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거기”라는 장소는 바로 앞 장인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렸다는 이야기와 혈루병 여인을 치유해 주었다는 사건이 언급됩니다.

모두 ‘열둘’이라는 숫자와 연관되어있지요. 야이로의 딸은 열두 살이고, 혈루병 걸린 여인은 열두 해 동안 이 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막 5장에 나온 두 이야기는 ‘완전히 치유할 수 없는 사람’을 예수님이 치유했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힘으로 치유할 수 없는 이를 예수님이 치료했다는 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 즉 예수가 ‘하나님 아들의 능력을 가졌다’라는 걸 뜻합니다. 막 5장이 말하려는 메시지입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의 열두 살 적 에피소드와 연결해서 설명해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룰 내용도 아니고 그렇게 했다간 설교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이 정도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오늘 복음서 본문의 시작입니다. 이어지는 막 6:2을 보니, 때는 안식일이고 장소는 회당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2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자 고향 사람들이 놀라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6:2-3).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는 것인데,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보면, 칭찬이나 경탄이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내용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우선 여기 단어 하나 설명하고 넘어갑시다. ‘목수’라는 말이 나오는데 보통 나무로 가구나 건축일을 하는 그런 직업 목수를 상상하시겠지만, 엄밀히 말해 그런 목수는 아닙니다. 원어로 ‘테크네’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1세기엔 나무나 돌을 이용해 뭔가를 만들거나 농기구를 만들고 수리하거나 또는 손재주가 있어서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용직 종사자를 통칭하던 말입니다. 전문직이 아닙니다.

시대적으로보면, 1세기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 시대였기에 서민들은 자기 땅과 자기 재산을 빼앗기고, 각종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면서 살던 때입니다. 서민들은 죽어라 일해도 땅 한 평 얻을 수 없어서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자유 노예로 남의 집 종살이로 들어가던 때입니다. 다행히 손재주가 있어서 농기구를 만들거나 이것저것 잡일을 할 수 있으면 그나마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런 사람을 통칭하는 헬라어가 ‘테크네’입니다.

그런데 16세기 초 영국의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라는 분이 헬라어 성경을 영어로 옮기면서 카펜터스 Carpenters로 번역하는 바람에 우리는 예수님의 직업을 ‘목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손재주로 먹고살던 일용직 노동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고향 사람들이 회당에서 유창하게 연설하고 있는 예수를 보고 ‘저거 목수쟁이 아니야?’라고 하는 건 분명히 칭찬이 아닙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이것도 문제예요.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없이 모친의 이름만 언급되는데, 이것도 그리 좋은 뉘앙스로 볼 수 없습니다. 최소한 칭찬은 아닙니다.

배척
지금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서 마가복음은 6:3 끝에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 ‘배척’이라는 단어는 ‘거절한다’는 뜻인데, 단순히 사람이 싫어서 거절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 그분의 지혜와 권능을 알고 있고 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거절하는 의미가 바로 ‘배척했다’라는 단어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일용직 예수로만 알고 있었지, 그가 나타나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떤 신비한 기적을 행하든지 그건 다 자기들과 상관없다면서 냉랭하게 대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예수님이 이미 설명한 적이 있어요. 막 4장에 보면, 네 가지 씨앗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막 4:12), 즉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막 6장에 나오는 나사렛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이지요.

고향 사람들의 불신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이유는 바로 앞장인 마가복음 5장 때문입니다. 거기엔 앞서 언급했듯, 타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 해 혈루병 앓던 여인, 심지어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조차 예수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치유 받았다는 사실 때문일 겁니다. 이 사람들과 비교해 고향 사람들의 반응과 믿음은 형편없습니다.

단순히 고향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지요. 4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친척, 가장 가까운 가족도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구절은 친숙하고 익숙한 것이 오히려 예수의 복음을 배척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낯선 것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이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건 이미 마가복음 3:20 이하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믿지 못했다는 건 무척 서글픈 역설인 것 같습니다. 사실 자기 가족에게조차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지요.

그런데 그 비극의 당사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믿지 못한 이들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이어지는 구절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5~6절을 제가 읽어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타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예수님의 권능이 고향에선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었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고향이냐 타지냐라는 것을 문제삼는 건 아닙니다. 이 상황을 잘 보면, ‘믿음의 자리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불신의 자리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해 봅시다. ‘믿음의 자리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불신의 자리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권능’은 무엇인가요? 권능은 병 고침, 죽은 자를 살림, 귀신 쫓음 같은 신비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비한 일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의 기준이 뭐라고요? 믿음! 네, 믿음이 중요하다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지 못했다.’ 이것이 막 6:5 말씀에서 건질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다만’: 주님이 일하신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서의 설명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도 끝까지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참 놀라운 것은 믿음과 기적은 그렇게 간단한 공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5절 중간에 ‘다만’이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거기 무슨 말이 걸려 있냐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

어찌 보면 참 이상한 구절이예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믿음이 없는 곳에선 권능을 행할 수 없으니, 불신자나 불신자의 땅에선 예수님이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과 믿음 없는 장소에서도 여전히 안수하고 고치십니다. 여전히 예수님은 하나님이 맡긴 일을 해 나가십니다.

왜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묵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절에서, 믿음이 없는 곳에서도 치유 받은 사람이 있다는 건 ‘기적이란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에게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믿음 없다고 기적이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적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있고 없고를 떠나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시는 자비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이 구절이 알려 줍니다.

5절 말씀을 종합해 보면, 어떤 사람이 신비한 능력으로 치유 받았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의 신앙을 보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반대로, 불신자에게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다만, 치유든 기적이든 우리에게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같이 믿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주님은 일하시며, 당신의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자비이고, 값없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빈약한 자원 열악한 상황
주님이 일하시는 상황을 다시 돌아봅시다. 주님은 고향과 친척과 가족에게 거절당하고 배척당합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뭔가 일의 성과를 얻어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일의 성과를 내기엔 최악의 상황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환경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묵묵히 병자를 안수하고 고치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맡겨진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구약의 말씀으로 읽은 에스겔 2장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선지자로 소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겔 2:3-5)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늘 일하기 좋은 환경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환경을 만들려는 순수한 노력하는 대신,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불평하기도 하고, 좀 힘이 있는 사람 곁에 붙어 아부하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속한 기관에 떼를 쓰면서 드러눕기도 합니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뭐라도 더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되니, 더 큰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 결정권자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귀찮게 요구하면 뭐라도 얻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기도 합니다.

네. 물론, 좋은 환경을 위해 뭐라도 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을 탓하기만 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까지 불평불만과 남 탓만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영혼을 깎아 먹는 일이고, 반기독교적인 행동입니다.

에스겔에게 들려준 하나님의 소명 기사와 나사렛에서 겪은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 복음의 소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막 6:7-17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송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자들을 보내실 때 주신 것이라곤 오직 하나 귀신 제어하는 능력 하나, 즉 영적인 능력, 좀 더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가지 능력만 주십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여행을 위해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말고, 양식이나 배낭이나 돈도 구하지 말라 하십니다. 심지어 옷도 두 벌 이상 챙기지 말라 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런 식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인물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자원은 늘 빈약하고, 환경은 열악하다는 것, 그것을 명심하고 길을 떠나라는 것,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맡긴 일을 묵묵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 본을 보이신 것이지요.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권능을 사용할 수 없어도 맡겨진 소명을 묵묵히 수행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분명해지는 것은 하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반대로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막 6:11을 보면,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설마 이 구절로 ‘목사는 교회에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되고, 그 말을 안 따르는 교인과 절교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은 없길 바랍니다. 이 구절은 그런 무익한 말과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 때 거절당하고, 배척당하고, 마음 상할 일도 당할 수 있으니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놀라운 건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배척과 거절당함이 오히려 새로운 역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본문에선, 나사렛에서 거절당함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단초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새가족을 만날 기회가 되었으며, 거절당한 제자들이 주님께 돌아와 그분의 말씀을 더욱 깊게 듣고 더 강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복음의 힘으로 강화됩니다. 기독교 역사가 바로 그런 역사입니다.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성장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박해와 순교라는 시련 속에서 교회는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믿음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오늘 말씀은 분명히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비밀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예수님은 환경과 처지가 어떠하든 우리를 찾아오시고, 안수하고, 고치시며 그분의 자비와 권능을 부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신뢰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시대는 혼란의 연속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서로가 자유롭게 만나거나 얼굴을 맞대고 웃을 수 없는 시대이고, 전쟁과 죽음의 소식이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인간의 탐욕이 지구의 환경과 생태를 황폐하게 만드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선 모두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아우성만 가득한 시대를 삽니다. 온통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천지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분명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신실하게 일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시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고, 그분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 복된 소식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에 가득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교회의 기도
하나님,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하게 일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보이는 것, 익숙한 것에서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세계 너머의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지금 우리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살아 있어도 죽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발견하게 하시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와 보호를 발견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당신 안에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셔서 죽음과 모든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소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죽음도 죽었으니 그분이 부활하셨듯 우리도 생명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은 우리가 연약하여 수많은 위험 앞에 흔들린다는 것을 잘 아시는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강건케 하사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는 모든 죄악을 이겨내도록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주님 오실 그날에 함께 영원한 생명 주심을 기쁨으로 노래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껏 그 길을 인내로 걸어온 교회의 모든 식구들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또한, 앞으로 걸어갈 그 길도 주님 동행하여 주옵소서. 또한, 기도하는 것은 멀리 미얀마에 벌어지는 참상이 끝나고 평화가 깃들길 기도합니다. 약한 자의 눈물과 탄원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미얀마에 불의와 부정을 제거하고, 평화와 기쁨의 시대가 도래하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기도하오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병으로 고통당하는 교우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찾아 교회의 문턱을 넘는 이들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주님의 자비로운 뜻 가운데 응답되게 하소서. 코로나로 인해 현장에 오지 못하고, 예배 처소를 그리워하며 기도하는 모든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성령님 함께 하셔서, 이 예배의 은사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력설교)20210704 성령강림일 후 여섯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막 6:1-13 나사렛에서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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