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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

<하나님께 솔직히>

작성자fewa99|작성시간22.01.18|조회수54 목록 댓글 0

[1] 제자 전도사님 페북에 어제 올라온 내용이다. 아는 집사님 자녀가 큐티한 노트에 적어놓은 글인데, 읽어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졌다. 거기 이런 질문이 나온다.
“약하고 부족한 나를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대답할 말을 적어보세요.”
아이의 답이 적혀 있다.

[2] “딴 사람 시키세요.”(아래 사진)
너무도 진솔한 답이다. 몇 살인지는 모르나 역시 아이들은 순수한 그 자체다.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속에 있는 그대로 답할 뿐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이런 모습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존심을 내세우려 할 때가 많다.

[3] 모세를 보라. 하나님이 그를 출애굽의 주역으로 부르셨다. 하지만 모세는 거듭거듭 거부한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라 답했다.
아이가 쓴 “딴 사람 시키세요”나 별 차이 없다.
아이들은 자기 감정이나 약점 같은 것들을 감추어두거나 과장해서 표현하질 못한다. 속에 있는 그대로 밖으로 표출하기 마련이다.

[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에 문제가 많음을 절감한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존심 세우며 기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신앙의 연륜이 높고 교회에서의 직분이 높은 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그 중에서도 나 같은 목회자와 교수들은 요주의 인물들이라 생각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위한 기도는 거의 못해봤다.

[5] 자식들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했으나 나를 위해서는 기도할 생각을 못했단 말이다. 이유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게 해주셨는데 달라는 기도를 어떻게 하겠냐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수년 전, 히 11:6절을 읽고 난 뒤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회개했다. 수도 없이 읽은 말씀이나 그날따라 처음으로 그 말씀이 내 가슴을 찔러버렸다.

[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의 존재뿐 아니라 그가 상 주시는 이심도 믿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상 받으려고 예수 믿나?”

[7]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을 게다. 소위 엘리트 기독교인들 가운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교만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존심 세우려는 발상 자체가 교만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나님께 통회하며 자복했다.
여전히 나를 위해 주십사 기도하는 게 거북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걸 깨야 한다. 하나님 앞에선 목사고 교수고 가릴 것 없다.

[8] 그저 어린 아이처럼 ‘달라!’고 구해야 한다. 물론 이기적인 욕심으로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만, 꼭 요긴하고 주시마 약속하신 말씀을 가지고선 뜨겁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조지 뮬러처럼 말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부모 입장에선 기특해서 뭔가를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9] ‘상’(prize), ‘선물’(gift) 같은 거 말이다. 우리의 아빠 되시는 하나님은 대가를 지불해 주시는 ‘보상자’(rewarder or recompenser)이시기 때문이다. 히 11:6절에 나오는 원어 ‘μισθαποδότης’(one who pays wages)는 바로 ‘잘했다고 보상하고 배상해 주시는 분’이란 뜻이다.
부모 자식 간에 무슨 보상을 해주느냐고 따질 사람이 있겠는가? 부모가 되어보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10] 대학교 졸업반인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형과 누나는 엄마나 아빠에게 피아노나 태권도 배우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용돈을 요구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막내 녀석은 자신이 그런 요청을 하기는커녕 그런 요구를 하는 형과 누나들에게 언제나 호통을 치곤했다.
마트에 가면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서도 시식코너에 있는 건 잘 먹는데 사주려고 하면 기겁을 하며 거절해왔다. 철부지 막내의 행동으로선 이해가 가질 않는 모습이었다.

[11] 그게 너무 심각하게 느껴져서 도대체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막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돈 없으면 거지 되잖아!”
충격적이었다. 엄마 아빠한테 돈이 다 떨어지면 가족 전체가 거지가 될까봐서 그간 그런 행동을 해왔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엄청 화가 났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12] “야 이놈아! 네가 몇 백만 원 짜리 사달라 하면 몰라도 몇 천 원이나 몇 만 원짜리 정도의 음식이나 물건 사달라 하면 엄마 아빠가 그거 사줄 능력이 있거든! 그런데 왜 너는 형과 누나처럼 막내가 돼 가지고 뭐 사달라 얘기 안하고 그래? 그러면 엄마 아빠 기분이 좋겠니? 다음부턴 필요한 거 있으면 막 사달라고 해 알았지?”
그때 난 하나님 아빠의 마음도 꼭 같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

[13] 하나님이야 우리보다 더 부자시니 더 말해 무엇하랴!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와 대화를 뜻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 속에 있는 진솔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바꾸어주신다. 모세의 경우처럼 말이다. 모세가 합당한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설득하시어 마침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지도자로 삼으셨다.

[14] 초등학생 아이의 큐티노트에 나오는 한 마디를 통해 많은 걸 깨닫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체면치레 하거나 자존심 내세우려 하지 말고, 진실 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룀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어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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