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리(田里) 마을
연산3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지금의 도시철도 3호선 배산역 5번 출구로 나와서 금련산쪽에 있던 마을이다. 큰 도로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배산 쪽으로 오르다 보면 연산3동 주민센터(연산3동 1799-73번지)가 나오는데 그 주변 일대에 마을이 있었다. 신리 남동쪽에 있던 마을로, 이곳이 지리적으로 금련산의 중턱이다 보니 밭이 많아서 마을 이름을 전리(田里)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금련산의 마하사골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쌍미천을 중심으로 연산6동과 경계를 이루며 연제중학교 부근은 배산(盃山)의 서쪽 사면이 된다. 이곳 금련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쌍미천․마곡천의 수자원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이었다. 전리마을 뒤쪽 골짜기를 까치가 많이 서식했다고 하여 까치골이 라고 부른다. 마하사 오른쪽 계곡의 넓다란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주위에 함박꽃이 많았다고 하여 함박꽃샘으로 부르고 있다.
연산3동에서 망미동고개를 넘어가는 고개 주변에는 과수원과 탱자나무가 많은 동네라 하여 방(坊)을 넣어 탱자방이라 하였다. 탱자나무는 운향과로 낙엽활엽관목이다. 5㎝ 내외의 예리한 가시가 많아 예부터 울타리용으로 심는 경우가 많았다. 5월에는 백색 꽃이 피며 가을에는 샛노란 열매가 열리는데 감귤처럼 향기가 진하다.
또한 중경아파트 부근에는 밤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율곡(栗谷)이라 하였다. 마하사 부근은 깊은 골짜기였으나, 지금은 산자락과 계곡을 따라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한독맨션․중경맨션․현대아파트 등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섰다. 마을 아랫쪽은 마하사에서 흘러내리는 내를 복개하였는데, 이 지역은 아기들 무덤이 많았던 곳이라 하여, 애씨등, 애씨터라 불렀다.
전리 마을이 있었던 연산3동 전경(주광빌딩에서 바라 봄) 1960년까지만 해도 이곳 전리마을 주변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지금의 망미동으로 넘어가는 망미고개 입구쯤 되었다. 지금과 같이 주택지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게 된 것은 1964년 부산항 초량부두 매축지의 철거민들을 이주시키면서 지금과 같은 주택지가 조성되게 되었다. 지금도 당시 이주지역을 고로들은 1공구, 2공구, 3공구로 부르고 있다.
지금은 자연 지명처럼 되어버린 공구(工區)는 이주단지 공사 시공 단위를 구분하는 공사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1964년 당시 철거민들을 시간차에 따라 순서대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주시킬 당시 이주 순서에 따라 1공구, 2공구, 3공구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가장 먼저 이주단지인 1공구는 연산3동 811번지 일대로 연산3동 주민센터 부근이며, 2공구는 연산6동 1941번지 마하사 입구 우측 일대이고, 3공구는 연산6동 1876번지 일대이다.
전리 마을이 있었던 이곳 연산3동 일대는 철거민들이 이주해 온 1공구 지역이라서 그런지 집들이 발간벽돌로 된 2~3층 집으로 골목길이 좁다. 이주 당시에는 벽돌불럭에 슬레이트 지붕이었으나, 이후 증개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산지역 대부분의 이주지역이 그러하듯 이주 당시에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주단지 조성된 것 아니라, 단순한 이주에 초점을 맞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대부분의 세대에서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으나, 공용주차장은 전무한 편이다. 주차공간의 부족으로 골목길 여기저기에는 자가용들이 주차되어 있어 화재 발생시 소방차의 통로 확보에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전리 마을이 있었던 곳의 골목길(연산3동 주민센터 주변) 전리마을 위쪽 마하사골에는 유명한 마하사(摩訶寺)가 있다. 1500여년
마하사의 명칭의 유래는 불경 중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따온 절의 이름이다. 이 절에는 말사로 반야암(般若庵)과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가 있었는데, 옛 사찰은 폐사되어 마하사 입구와 그 앞의 언덕에 축대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1740년에 편찬한『동래부지』에서 보면, “마하사는 동래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산 아래 수영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하사의 창건 연대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이 절에 대한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그 역사가 짧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