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죄사함을 받으신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
(율법해방8-4)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이제 문제의 교리적인 면은 해결되었으니, 소극적인 면을 좀더 살펴봄으로써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어야겠다. 적극적인 면은 다음 장에서 논의하도록 보류해 두자. 율법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좀 과장된 말일지 모르나, 그 말은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하여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내가 다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교리야! 무슨 이런 무서운 이성이 있어!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없소!" 라고 당신은 고함을 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일 내가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즉시 나는 나 자신을 율법 아래 두는 것이다. 나는 율법을 범하였다. 율법은 사형을 언도하였다. 그리고 그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제 죽음으로써 나, 즉 육신의 "나"는 (롬 7:14) 율법의 모든 요구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이 있다. 이제는 사실상 "새 계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옛 계명보다 훨씬 더 엄격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하라! 그 요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요구를 이루고 계신 분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하나님께 참 기쁨이 되는 일을 이루고 계신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다(마 5:17) 이와 같이 바울은 부활을 근거로 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율법으로부터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무법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 정반대이다. 그 말은 우리가 그 뜻을 우리의 힘으로 행하는 것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 뜻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할 때에 우리는 옛사람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마침내 우리가 완전한 절망의 지점에 도달할 때 노력하는 것까지도 중단하게 되고, 주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도록 주님을 의지하게 된다. 내가 우리 나라에서 목격한 일을 가지고 실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짐꾼들이 120Kg의 소금을 질 수 있고, 몇몇 짐꾼들은 250Kg이나 되는 소금을 질 수 있다. 그런데 120Kg까지밖에 지지 못하는 사람에게 250Kg이나 되는 짐을 지라고 해보라! 그 사람은 자기가 그 짐을 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 그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것을 만지지도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해보겠다는 유혹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짐을 도저히 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이와 같은 사람들이 명이나 스무 명쯤 와서 자기들이 그 짐을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져 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결국 그는 노력하던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질 수 있는 사람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도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유익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일을 독점하고 있다면 성령님이 역사하실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나는 그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 일을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강한 능력으로 그 일을 해내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1923년에 나는 유명한 캐나다 전도자 한 사람을 만난 일이 있다. 내가 위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고 난 후에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마서 7장에 관한 내용은 오늘날 좀처럼 듣기 힘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시금 들어보니 기쁨니다. 내가 율법에서 구원받은 날은 땅위에서의 천국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이 우주 가운데서 가장 큰 요구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요구들 중 가장 작은 것도 이룰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로마서 7장을 읽을 때 빛이 비춰 나는 죄로부터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도 구원받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은 정말 나에게 아무 일도 요구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더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요구를 이룰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라! 하나님은 보좌 위에서 율법을 주시고 내 마음 가운데서 그 율법을 지키시는 분이다. 율법을 주신 그분 자신이 그것을 지키신다. 하나님은 요구를 하시지만 또한 그 요구를 이루신다. 그 친구는 자기가 아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벌떡 일어나 소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발견을 하는 자는 모두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우리가 무엇이든 해보려고 노력할 때에 하나님은 아무일도 하실 수가 없다. 우리가 실패를 거듭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실망과 환멸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승리하는 생활을 위해 발버둥이를 치며 애쓰고 있던 한 형제가어느 날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가 왜 그렇게 악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할 만큼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일을 다 포기할 만큼 연약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완전히 연약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력해질 때까지 낮아져서, 자신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그 때에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지점에 이를 필요가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약 이십여 명의 형제들과 같이 중국의 어느 곳에서 머무르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머물던 집에서는 목욕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강으로 목욕을 갔다. 한번은 한 형제가 한쪽 다리에 쥐가 나서 갑자기 물 속으로 뻐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수영 잘하는 다른 형제에게 손짓을 하여 빨리 그를 구조하러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필사적으로 "저 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소?"라고 고함을 질렀다. 다른 형제들도 거의 나처럼 당황해서 격렬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 수영 잘하는 형제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달갑지 않은 구조 작업을 지연시키면서 침착하고 태연하게 자기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는 동안 물에 빠져 들어가는 불쌍한 형제의 음성은 점점 쇠약해져 갔고 그의 힘은 소진되어 갔다. 나는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런 사람은 정말 싫어! 한 형제가 자기 목전에서 물에 빠져 들어가는데 구조하려고 하지도 않고 보고만 있다니!" 그러나 물에 빠진 형제가 실제로 가라앉아 가고 있을 때 그 수영 잘하는 형제는 서너 번 손을 재빨리 휘두르더니 벌써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를 잡고 나와 두 사람은 무사히 땅으로 올라 올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회가 생기자 나의 견해를 늘어 놓았다. "나는 당신처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한번도 만나 본 일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자신을 조금 덜 생각하고 그를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그 형제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수영 잘하는 형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더 일찍 그를 구원하러 들어갔더라면 그는 나를 너무 꼭 붙잡았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스스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최소의 노력도 하지 않을 때까지는 구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핵심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떤 일을 단념할 때에 하나님은 그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다하여 스스로 아무 일도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정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육은 무익하다! 하나님은 육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선언하셨다. 우리가 진실로 그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육적인 노력들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판정을 확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우리의 완전한 무력함을 말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언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오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급의 원천에 대한 오해이다. 우리는 율법을 보면서 우리가 그 요구들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는 정당한 것이지만 만일 그것이 잘못된 사람에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이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이 장에서 "나"라는 단어의 반복된 사용은 실패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9) 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는 그것을 지켜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고 계시지 않았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던 일과 정반대의 일을 행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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