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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해방8-5)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작성자참복음|작성시간26.06.14|조회수6 목록 댓글 0

【 이글은

죄사함을 받으신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

 

 

(율법해방8-5)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로마서 6장은

"죄의 몸"을,

 

로마서 7장은

"이 사망의 몸"을 다루고 있다. (롬 6:6, 7:24).

 

6장에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전 문제가

 

"죄"인데 반해서,

 

7장에서

우리 앞에 있는 전 문제는

 

"사망"이다.

 

죄의 몸과

사망의 몸은 어떻게 다른가?

 

죄와 관련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은

모두 죄이다)

 

나는

죄의 몸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실제로

죄를 짓고 있는 몸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해서 말할 때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율법이다)

 

나는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다.

 

죄에 관련되어 있는

나의 활동은

 

내 몸을

죄의 몸으로 만든다.

 

악하고 세속적이고

사탄적인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본질상

전적으로 적극적이다.

 

그러나 거룩함과 하늘나라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소극적이다.

 

당신은

생활 가운데서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일이 있는가?

 

단순히 로마서 6장과 7장에서

그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관련해서

 

방해물 밖에 되지 않는,

생명이 없는 몸을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이 있는가?

 

당신은 세상에 관한 일을

얘기할 때는 천상유수다.

 

그러나 주님을 증거할 때는

혀가 떨어지지 않는다.

 

기도하려고 하면 졸리고,

주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려고 노력할 때는

기분이 좋지 않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무슨 일이든 잘한다.

 

이 몸에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을

실례로 들어 보자.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 11:30)

 

죽음은

약함의 극한 상태이다.

 

즉 약함, 병,

죽음이다.

 

죽음은

"완전한 약함" 을 의미한다.

 

죽음은

더 이상 연약해질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관련해서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극도로

연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완전히 연약해서

몹시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바울은 외쳤다.

 

그리고 누구든지

바울처럼 그렇게 외칠 수 있다.

 

주님의 귀에

이보다 더 음악적인 것은 없다.

 

이것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신령하고

가장 성서적인 외침이다.

 

바울은

자기가 아무 일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와 같이

외쳤으며,

 

그 이상의 결심들도

포기한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는 실수를 할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며

거듭 거듭 그의 의지력을 강화해 왔다.

 

그는 결심하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 가운데서 외친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

불타는 집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의 외침은

 

이제 도움을 구하는

외침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포자기하는 지점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포자기해 본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성경을 더 많이 읽고

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성경 읽기나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금하신다.

 

그러나

승리의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도움은

성경 읽기와 기도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뢰는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

 

다행히

"곤고한 사람"은

 

단지 곤고함만을

한탄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누가?"

 

지금까지 그는

어떤 "것"을 찾아 왔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소망은

한 인격 안에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자기 안에서 찾아 왔는데,

 

이제 자기 자신을 떠나

한 구주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이제 그의 모든 기대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가?

 

성경을 읽음으로,

기도함으로,

 

구제함으로

죄사함을 받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공로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을 받은 것도

이 원칙에 근거한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제도

 

그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사함을 얻게 되고,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앙망할 때.

 

죄로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분이

이루신 것을 의지할 때

 

우리는

첫 번째의 것을 얻게 되고,

 

이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하심을 의지할 때

 

두 번째의 것을 얻게 된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에게

만유가 되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의지할 분이시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살인자는

 

매우 특별하고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형벌을 받았다.

 

그 방법은

 

바로 죽은 사람의 시체와

죄수의 몸을

 

손은 손과

발은 발과

 

함께 묶어 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인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묶어 놓는다.

 

죄수는

자기의 원대로

 

아무 데나 갈 수 있지만

그가 어디로 가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끌고 다녀야 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있겠는가?

 

바울은 바로

이런 형벌을 예증으로 삼았다.

 

그는

 

죽은 시체에 묶인 사람 같이

자유함이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는 이 무서운 짐의

속박을 받았다.

 

결국에는

그는 참지 못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

건져내랴" 고 외쳤다.

 

그런 다음 그는

갑자가 깨어나서

 

절망 가운데서의

부르짖음이

 

찬송의 시가로

변해 버렸다.

 

그는 이미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전히

주님을 의지하여야만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죄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면

 

아무 성과가

없을까봐 두려워한다.

 

구원 받은 후

우리의

 

'무언가 하려는' 낡은 습관이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의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신선하게 말씀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이미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받도록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이 두 가지 일 모두

그분이 역사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죄로부터 해방받는 사람의

첫 마디는 매우 귀하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원문 참조)라고 했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물 한 컵을 준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당신에게

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할 것이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하였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 스스로

해방받았다면 아마

 

"바울에게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곤고한 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필요를

 

만족케

하실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얻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역사를

이루셔야 한다.

 

만일 우리도

무언가를 했다면

 

약간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영광이

 

그분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시종 모든 것을 이루신다.

 

마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가만히 앉아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삶인 것처럼,

 

만일 우리가 이 지점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이 장에서 이야기한 것이

소극적이며

 

비실제적인 것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참으로 율법에서

해방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임을 안다.

 

또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원칙 아래

사는데,

 

이 원칙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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