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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떻게 죄사함을 얻을까

작성자참복음|작성시간26.06.09|조회수6 목록 댓글 0
6. 어떻게 죄사함을 얻을까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장 10-25절)


 

우리 죄를 씻는 것은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씻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자기 죄를 씻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노력하거나 애를 써서

죄를 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려고'하지 아니하고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죄를 사함받고 거듭나는 일은

 

인간의 한계 밖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죄를 해결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는,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우리의 죄가

어떻게 씻어지는가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히브리서 10장 10절 말씀을 보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 을 얻었노라."

 

사람은 누구나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죄도 짓고 실수도 하고

우리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가

부끄럽고 부담스럽다.

 

기도 잘하고 십일조 잘 내고 믿음의 생활을 잘 했다면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가 자유로운데,

 

실수하고 죄 짓고 부족하며 거룩하게 살지 못한 것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가려고 하기만 하면 마음에 부담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첫째로 많이는 못 읽더라도

매일 성경책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우리 마음을 차분하게 거룩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나면 마음이 훨씬 더 편안해진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두 번째, 우리는 읽은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서

매일 기도를 드려야 한다.

 

가족들이나 친척들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범위만큼 기도하면,

 

우리 삶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하게 변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면

주일 예배에 참석을 해야 한다.

 

예배를 참석하기 전에는 마음이 뒤숭숭하다가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고 평안해질 것이다.

 

그리고 연보도 정성을 들여서 해야 한다.

기왕이면 돈이라도 좀 깨끗하고 빠닥빠닥한 돈,

 

그리고 많은 돈보다도 정성을 모아서

일주일 동안 모아 둔 돈,

 

그냥 예배당에 가서 주머니에 있는 돈 한 푼 꺼내서 쑥 집어넣지 말고,

 봉투에 넣어서 정성껏 연보를 드리면 우리 삶은 훨씬 더 거룩해질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갈 때는

다른 곳에 갈 때보다 옷도 좀 깨끗하게 갈아입고,

 

가능하면 머리도 감고 목욕도 하고 신발도 좀 깨끗하게 해서 교회를 가게 되면

우리 삶이 훨씬 더 거룩해질 것이다.

 

그 다음에도 거룩해지기 위한 조건이 몇 가지 있는데,

음욕을 품으면 거룩해질 수가 없으므로 가능하면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고,

여자는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돈은 일만 악의 뿌리이므로

탐심을 가지면 안 된다.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 만족하고,

적지만 알뜰하게 살아야 거룩한 삶을 살수가 있다.

 

그리고 직장에서 어떤 부정에 개입하면 거룩한 삶이 깨어진다.

불의한 일이나 부정한 일에 결코 개입하지 말고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

 

 

만약 우리가 이렇게만 살면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거룩해져서

 

결국 성화 단계에 이르러서

거룩한 성도가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성경은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찾아 보자.

히브리서 10장 10절을 보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 을 얻었노라."

 

성경은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과 다르다.

 

첫째, 우리는

지금 우리 행위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날마다 거룩해지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이미 거룩해졌다고 증거하고 있다.

 

둘째,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려면,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고 십일조도 내며

 

예배에 참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불의를 행치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다만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경의 차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구원 받았으니까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도 해야 하고,

 

주일을 지켜야 하며,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연보나 구제도 해야 하고,

남의 물건은 탐내지 말아야 하며,

 

불의에 젖지 않고 살면,

우리는 점점 더 거룩해져서

 

성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돌부처가 살이 찌고 안 찌는 것은 석수장이의 손에 달려 있다고.

좀 더 깎으면 깡말라 버리고 좀 덜 깎으면 살찌고 그렇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깨끗해지고 깨끗해지지 않는 것은

아이 엄마가

 

얼마나 깨끗한 성품을 가졌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얼마나 죄를 적게 지었느냐,

우리가 얼마나 도둑질을 덜 했느냐,

 

우리가 얼마나 열심으로 기도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깨끗하게 했느냐 안 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깨끗해지려고 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했다.

 

누가 수고함으로 우리가 거룩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했느냐 안 했느냐에 달려 있다.

 

나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에 상관이 있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엄마 몰래 배설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우리 엄마가 나를 낳으시느라고 수고하셨는데

기저귀에다 이렇게 해 놨으니 어떻게 하지 하면서

 

냄새를 안 내려고 애를 쓰고 자기 모습을 숨기면

그 아이가 정상이라고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웃음거리 밖에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함을 입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 하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보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18절에서

 

"내 속

곧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하였다.

 

우리 속에는

선이 없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의(義)를 의지해서 나가야 하는데,

 

우리 인간에겐 의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떤 인간 속에서도

의나 선(善)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인간 속에서 나타나는 의는

전부 가짜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3:21)" 고 말하고 있다.

 

율법을 지키려고 수고하고 애써서 얻는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 의는

우리의 의(義)가 아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

죄인 중의 괴수에게 무슨 의가 있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어느 날,

'내가 의인이다. 의를 가졌다.'라고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8절을 보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바울이

의를 가지고 있다면 의인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했다.

 

율법의 십계명을 잘 지켜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을 보자.

 

"이 뜻을 좇아" 이 뜻은 앞 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노력

우리의 방법으로는 죄를 못 씻으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죄를 사하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는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기로 정하셨고

 

그 뜻이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육신은 그 잔이 옮겨지기를,

십자가를 지지 않기를 원하셨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한 마디가 '다 이루었다.' 였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보고 교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인간은 성경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성경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요한복음 19장 28절은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고 하사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 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받을 죄에 대한 벌을 다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받아야 할 저주를 다 받았다는 말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100% 이루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서

여러분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면,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짓밟고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우리 죄를 다 못 씻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증거를 불신하는 것이다.

 

지금도 내 죄를 사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실패했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에

 

실패하시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우리 죄는 씻겨져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죄를 사하는 일에 성공하셨는데도,

 

죄가 그냥 남아 있다고 한다면

실패한 것으로 믿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것을 믿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히브리서 1장 1-3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다 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끝내셨다.

 

마치셨고 다 이루셨다.

 

그래도 우리 죄가 덜 정결케 되었다고 믿는 것은

사단의 생각을 믿는 것이다.

 

'죄가 남아 있다.'는 소리는

사단의 음성이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해서는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 10:18)


 

분명히 죄를 위해서는

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를 위해서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아직 덜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는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를 대속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잔이

할 수만 있으면 옮겨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더욱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다. 아멘, 할렐루야!

 

 

 

단번에 드리심으로 얻은 구원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33년 동안 사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룟 유다에게 팔렸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예수님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가

아니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가.

 

성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가지고 가셨다고 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죄를 위해

양이나 염소,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려 왔지만,

 

양이나 소나 염소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영원히는 온전케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온 세상 만민의 모든 죄를 영원히 지고 가게 하셨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사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11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죄를 씻기 위하여

 

성막 안에서 제사장이

매일 양을 잡고 소를 잡아 속죄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는 '과거에 지은 죄'만 사했고,

우리의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영원히 씻지는 못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드려서

 

우리의 일생 동안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는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 12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영원한 제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의 제사의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에

200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3000년이 지나도 4000년이 지나도,

만년이 지나도 억년이 지나도 그 효력은 불변하는 것이다.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를 사하신 사실도 영원하다

.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삼 년 동안만 온전케 하셨느니라?'

 

여기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드린

제사의효력은 '영원히' 라는 것이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의

과거의 죄만 씻은 것도 원죄만을 씻은 것도 아니다.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골로새서 2장 13절을 보자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원죄를' 사하시고" 라고 되어 있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원죄를 사했다고 하지 않았다.

 

모든 죄를 사했다는 말과

원죄만 사했다는 말은 큰 차이가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원히 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 놈은 너무 버릇이 나쁘니까 과거의 죄만 좀 씻어 놓고

앞으로 짓는 죄는 그냥 놓아 두어야지라거나

 

'저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니 다 씻어 주자.'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조건을 보고 사하시는 게 아니고,

 

그의 긍휼하심과 은혜로, 값없이

우리 죄를 깨끗이 사해 주셨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에게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기억을 하든 말든

하나님은 기억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안 한다면 안 하는 분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도말하셨다.

 

그 사실, 그 증거, 그 말씀,

그 약속을 믿으면 의롭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추하고 악하고 가증스럽지만

 

우리는 실상인 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변하는 형편, 허상인 환경을 믿는 게 아니다.

 

자기를 보면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바꾸실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성경 이사야서 44장 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塗抹:피를 발라 죄를 완전히 없애버리다.)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救贖:건져내기 위해 값을 치르다.) 하였음이라.'

 

라고 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교회에 나오기도 전에, 기도하기도 전에,

 

죄를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십자가에서 도말해 놓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말(塗抹)'이란

'도(塗)' 字는 '칠을 한다'는 뜻이고,

 

'말(抹)' 字는 '말소시킨다.' 또는 '지워버린다.'

즉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완전히 씻어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못 박아버린 장소이다.

 

사람이 받아야 할

죄의 모든 심판과 형벌을 끝낸 곳이다.

 

 

 

문둥병이 걸린 나아만

 

 

열왕기하의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나아만 장군이 문둥이로 있다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죄를 가리키는데,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어떻게 씻어지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열왕기하 5장 1절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성경이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성경이 그냥 이야기 같지만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글이라는 뜻이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었다.

그는 나라를 구했고,

 

왕도 그를 굉장히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나아만은 재산도 있고, 권세도, 명예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군대장관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번쩍번쩍하는 훈장을 달고,칼을 차고, 말을 타고 올 때는

누가 봐도 존경할 만하고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나

 

그는 문둥병자였다.

 

겉으로 볼 때에는 화려하고 뛰어나도

속의 살은 썩어져 들어가는 문둥병자였다.

 

이 이야기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보시고 하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성실한 것으로,

선한 것으로,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아름다운 옷으로… 또, 어떤 사람은

얼굴에 각가지 화장품을 발라서 꾸민다.

 

겉으로 볼때는

괜찮은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은 죄로 썩어 들어가

악하고 음탕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열왕기하 5장 1절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다.

 

 

 

 

만물보다 더러운 사람의 마음

 

 

 

사람이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갈 때는

신령하고 거룩해 보이고 인자해 보인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심령은

 

문둥병으로 살이 썩어 들어가듯이

죄 때문에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한다'

 

고 하셨다.

 

여러분이 거울 앞에 서면

'내가 잘났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표현을 하든 하지 않든 사람들 가운데

99%는 자기가 잘났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울 앞에 서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자기의 외형만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자신은 깨끗하고 선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시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이야기하신다.

 

인간의 마음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밖으로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차고,

훈장을 달고, 말을 타고 달려나가지만,

 

속에는 썩어 들어가는 인간의 마음.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싶다.

 

다음 2절,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나아만의 집에 식구가

몇 사람인지 정확하게 잘 모르지만,

 

나아만과 그 아내가 있고,

그리고 계집종이 하나 있었다

.

이 계집종은 이스라엘 아이였는데,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드는 몸종이었다.

 

이 아이가 나아만의 집에 잡혀와서 종살이하면서

처음에는 힘들었기도 했겠지만,

 

하루하루 지내면서

나아만의 집에 점점 익숙해졌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의 집 형편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장군의 옷을 빨 때마다 옷에 고름이 묻어 있었다.

한번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그래서 결국 그 계집종은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아만이 개선장군이 되어서

열렬한 환영을 받을 때는 찬란하지만,

 

문둥병이 있기 때문에 집에만 들어오면

기가 푹 죽어서 고통속에 빠졌다.

 

여러분 중에도 밖에서는 훌륭한 대접을 받지만,

집에 들어오면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제 계집종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우리 주인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 앞에 가면 틀림 없이 나을 수 있는데,

 

이걸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그것이 고민이 되었다.

 

만일 섣불리 이야기를 해서 주인이 사마리아에 갔지만,

나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계집종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날부터 그 계집종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믿음이니 뭐니 해도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이 일로 말미암아 신변에 어떤 일이 오는가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 계집종도 '이야기를 해서 문둥병이 나으면 다행이지만,

낫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는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구원

 

 

 

그러다가,

이 계집종이 생각해 보았다.

 

'사마리아에 계신 하나님의 종 엘리사 선지자는

 이 문둥병을 틀림없이 고치실 것이다.

 

가지 않아서 그렇지

가기만 하면 분명히 나을거다.

 

낫겠다는 것에 대해 1%라도 의심이 생기면,

이 계집종은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계집종이

나아만 장군의 아내에게 가서 뭐라고 했는가?

 

3절에,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잘 보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아마'고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했는가?

 

'고치기 쉬울 거예요.' 고칠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계집종의 마음에 나아만 장군이

사마리아에 있는 하나님의 종에게 가면

 

문둥병을 고침 받는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0.1%도 의심이 없었다.

 

만일에 손끝만큼이라도 의심이 생겼다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이 계집종이

주인에게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은

 

100%의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기만 하면 고친다는 그것이 믿음이다.

 

가면 고칠는지 모른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 앞에 죄사함을 받는 것도 믿음이 있다면 그러할 것이다.

 

제가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빚이 백만원이 있다고 하자.

제 아내가 남편이 빚에 시달리는 것이 불쌍해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돈을 모아서

그 사람에게 100만원을 갚았다고 하자.

 

제 아내가 와서,

"여보! 당신 아무개에게 있는 빚 100만원

 

오늘 내가 다 갚았어요.

여기 영수증 보 세요."

 

"과연 사랑하는 내 아내로다.

고맙소 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후 다른 사람이

저에게 물었다.

 

아무개에게 빚이 있지요?"

라고 물으면

 

제 아내가 빚을 갚았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큰 소리 땅땅 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제 아내가 빚을 갚았다고 하지만,

확신이 없으면

 

'혹시 못 갚았을지도 몰라'

"아이구, 예, 예!" 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마음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확실하게 '문둥병이 나으리이다.' 그게 믿음이다.

나아만의 집에 있는 계집종은

 

엘리사 선지자가 확실하게

문둥병을 고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하고 말을 했다.

 

신기한 것은, 계집종은 다만 말을 했을 뿐이지만,

말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계집종의 마음에 있는 믿음이

나아만의 아내 마음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의 아내 마음에

믿음이 들어왔다.

 

내 남편이 사마리아의 선지자 앞에 가면 문둥병이 낫겠다.

나아만의 아내는 얼마나 기뻤겠는가.

 

문둥병이 다 나았는가. 아니다.

아직 낫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벌써 나은 것이다.

 

계집종의 믿음이

나아만의 아내에게 전달되었는데,

 

다시 나아만의 아내에게 있는 믿음이

나아만의 마음에 넘어가는 것이다.

 

나에게 있는 믿음을 남에게 증거해야 한다.

믿음은 생명이 있고, 역사가 있다.

 

계집종의 마음속에 있던 믿음이

나아만의 아내를 통하여

 

나아만에게 들어가서

그 마음속에서 역사를 했다.

 

잘났다고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도 아니고,

똑똑하거나 많이 배웠다고 역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을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다.

 

늘 임금님 앞에서 시무룩하게 가만히 있던 나아만이

말을 타고 왕궁으로 들어가 왕을 알현하고 사마리아로 떠나게 된다.

 

나아만 장군이 아내를 통해서 들은 계집종의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이다.

 

이제 나아만 장군에게 있던 믿음이 왕에게로 들어간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이다.

 

우리 마음 속에 올바른 믿음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삶과 생활을 바꾼다.

 

지금까지 우리가 힘이 없었던 것은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인 줄 알고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은 콩은 아무리 해도 싹이 나지 않는다.

삶은 달걀은 좋은 암탉이 품는다고 병아리가 되지 않는다.

 

죽어 있는 것을 붙잡고 앉아 있어서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속에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이 들어가면,

 

그것이 계집종의 말이든 왕의 말이든

상관하지 않고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못나고 못 배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해도, 키가 작아도 다만,

 

'여러분 속에 올바른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나아만 장군이 병거를 타고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다.

 

일국의 군대장관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적국에 알리면 좋겠는가?

 

물론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그것을 공개하러 지금 가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하는가?

 

믿음이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

 

 

 

나아만 장군이 사마리아에 가는데

병거를 타고 간 것이 아니고 믿음을 타고 갔다.

 

병거 바퀴가 돌았지만, 믿음에 끌려 간 것이다. 5절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나아만이 이스라엘 왕에게 갈 때

은 십달란트. 약 420㎏이면 봉고트럭에 반 트럭쯤 된다.

 

그 다음에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옷을 가져갔을 것이다.

 

병이 낫고 나면 예물로 주려고 가져갔다.

이미 떠날 대, 이들은 믿음을 가지고 갔다.

 

아람에서 이스라엘까지 적어도

하루나 이틀이 걸렸을 것인데

 

그 몸은 하루나 이틀이 걸려야 가지만,

마음은 벌써 이스라엘 나라까지 다 갔다.

 

몸은 문둥병자인데,

마음은 벌써 다 나은 것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형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갈 수 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형편이 연약해도,

그 마음은 연악한 곳에 있지 않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형편은 어려움 속에 있어도,

마음은 하늘나라 주님 곁에 가 있다.

 

그러니까 몸은 문둥병으로 고름이 줄줄 흐르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찌그러들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지만,

 

마음은 벌써 가서 다 나아 기뻐한다.

그게 믿음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형편에 매이지 않는다.

자기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주와 더불어 거하게 되고,

 

주님은 그 마음을 보시며

믿음 그대로 형편을 바꾸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은 허물이 많고 모든 것에 잘 매이지만,

믿음을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마음속에 임하면,

 

우리 마음이

더 이상 형편에 매이지 않는다.

 

그의 몸이 어디에 있든지

마음은 주와 더불어 거하게 된다.

 

어느 날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고 하셨다.

 

문둥병이 들었는데,

낫게 하실 것을 믿고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다 보니 나았다.

 

그 문둥병자들은 몸에 고름이 흘렀지만,

마음은 이미 나았다.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의 믿음에 따라 역사하신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형편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달려간다.

 

마음으로 달려나가는

그것이 믿음이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집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9∼12절 말씀을 보자.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 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 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나아만이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의 집까지 왔는데,

엘리사는 얼굴도 안 내민다.

 

그래도 자기는 군대장관이고,

자기 나라에서는 내노라 하는 사람인데,

 

엘리사는 보이지도 않고

종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당신, 나아만이지요 문둥병이 낫고 싶으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이소. 상황 끝!" 하고 들어가 버렸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은혜의 강

 

 

 

기가 막힌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 일인가?

 

우리 같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칠백 번, 칠천 번이라도 한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는 아주 쉽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난 후

어찌나 어려운지 애를 먹었다고 한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려워도,

자기 생각을 버린 사람은 구원처럼 쉬운 일이 없다.

 

요단강이 어딘지를 물어 일곱 번 목욕만 하면 되는데

'내 생각에는 …'하고, 자기 생각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래뵈도 군대장관인데,

그 선지자가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며

'오, 하나님-' 그렇게 해 주겠거니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으신다.

 

구원받기 싫은 사람은

계속 자기 생각을 가지고 가도록 버려둔다.

 

정말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자기 생각부터 내려놔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 생각대로 구원하지 않는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생각대로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쳤는가?

 

나아만은 선지자가 나와서 의자를 내놓고 앉게 하고는,

극진하게 할 줄 알았는데

 

종자 하나가 나와서 격식도 없이

조그만 문으로 내다보며,

 

 "당신, 나아만이오?

하나님의 사람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하면 낫는다 했구만요" 했으니

 

마음이 상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무슨 격식이 필요하고 방법이 필요한가?

 

나아만 장군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생각 때문에 큰일날 뻔했다.

 

마침 주위에 있는 좋은 사람들이

그 마음을 달랬으니 망정이다.

 

좀 뭐가 된 사람은

이 때문에 곤란하다.

 

나아만이 장군만 아니고

어린아이 같으면,

 

좀 못사는 사람 같으면

요단강에 목욕하라 하면 갔다 올텐데,

 

자기가 뭐 좀 알고, 지위도 있으니까

'내 생각에는' 하는 것이다. '

 

'내 생각'은 전쟁하는 데나 필요하지

죄사함 받는 데는 필요 없다.

 

'내 생각'은

세상에서는 필요한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하나님의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다.

 

마음이 푹 낮아져야 한다.

예수님이 복 주신 사람은 마음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다.

 

간음한 여자, 세리, 38년된 병자-

그런 사람은 마음이 밑바닥까지 낮아졌다.

 

그렇게 되니까

쉽게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은혜는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강물이 나으면 뭐하나?

문둥병도 못낫게 하는 강인데.

 

하나님께서 나아보이는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로 문둥병을 고치는게 아니었다.

 

요단강 물로 고친다고 하면

요단강 물로 와야한다.

 

자기 생각에 나은 것과

하나님이 보실 때 나은 것은 다르다.

 

마음이 꺾여져야 한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은

우리 죄를 사함받는 이야기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야기는

'내 생각에는'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죄사함 받는 데 가장 결정적인 방해꾼이

내 생각이라는 것이다.

 

나아만이 자기의 생각을 꺾었다.

주위 사람의 권유로 마음을 낮추었다.

 

그리고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했다.

그 살이 어린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그는 깨끗함을 받았다.

 

약속대로 문둥병이 나음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 마음의 죄가 씻어질 수 있다.

 

나아만처럼

좀 똑똑하다고, 직장의 장이고,

 

가장이라고, 성경을 안다고, 집사라고,

장로라고, 마음을 높이지 말고,

 

여러분이 집사든, 장로든, 목사든, 선교사든,

똑똑하든 거듭나야 한다.

 

성경 말씀대로 확실하게

죄사함을 받지 못하신 분은

 

마음을 낮추신다면,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을 줄로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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