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십자가복음5) 죄로부터의 자유

작성자참복음|작성시간24.08.29|조회수20 목록 댓글 0

(십자가복음5)   죄로부터의 자유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0-14)

 

 

 

사람들의 오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믿는 자로 하여금

죄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서였다.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은

죄책감으로부터나

 

죄의 결과로부터의

자유함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죄책감이나

 

죄의 결과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을 자유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의 죄를 짓지 않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하니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말씀이나 예배를 통한 은혜와

교회를 섬기는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남들이 술마시며 무질서하게 생활할 때나

세상 즐거움에 취해 살 때에

 

자신들은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또는 교회에서나

 

믿는 자들의 모임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죄에서 자유를 얻은 삶'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세상 사람들처럼

기분내키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런 삶을

 

죄에서 자유를 얻은 삶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의 도덕적 성향은

본성을 감춘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성향을 띤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선과 악에 대한

 

타고난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그 차이는

대단히 두드러진다.

 

도덕과 질서와

예의와 체면과 교양이나

 

자신의 목적 의식에 따라

도덕적 성향은 크게 달라진다.

 

또한 자신이

어느 특별한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는

도덕의식은 더욱 높아진다.

 

괜히 흠을 보여서

손해보는 일이 없어야 겠고,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겨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같은 도덕적 성향들은

자신의 본성을 얼마든지

 

감출 수 있는

가면으로 작용한다.

 

 

 

교회답지 못한 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한다.

 

이는

깨끗하고 도덕적이며

 

교양을 추구하는

사회나 단체일수록 더욱 심하다.

 

일반적인 사회적 단체인

직장에서도 그러하겠지만

 

교회는

더욱 심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종교단체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에 따라서 교회에서는

 

옷을 잘 입어야

(수수하고 단정하게 그러나

천박스럽지 않게)

된다는 사람도 있고,

 

얼굴 화장이나 악세사리 등도

권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다.

교회는 가장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다 드러난 사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 본연의

타락한 성품을 그대로 인정하고

 

구원받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찾고 바라고 섬기는 곳이므로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꾸미거나

가면을 써서는 안된다.

 

일부러 아무렇게나

행동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가식없이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교회가 사람들과

세상에 멋지게 보이고 싶어할 때,

 

이미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세상과 연합하여

 

타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이

 

좋은 직장이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부끄러워하고 자존심 상해한다.

 

교회를 자기 자랑과 자존심을

세우는 곳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하거나 가난해지면

 

교회를 조용히 떠나거나

옮기는 사람도 있다.

 

정신나간 사람이다.

아니, 그런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 바른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음이

더욱 한탄스러운 현실이다.

 

 

 

죄란 거룩하지 않은 것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를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만한

나쁜 행동쯤으로 알고 있다면 잘못이다.

 

만일 그같은

행동이 없는 사람들은

 

죄를 안짓고 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쁜 행동을 안하고 사는 것이

죄에서 자유로운 삶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죄'의 성경적 개념은

거룩하지 않은 것이다.

 

천지를 통털어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예수님이 죄없다는 것은,

그분은

 

처음부터 스스로 살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이기 때문에

 

거룩한 삶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이다.

 

다시 말해 나쁜 짓 안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거룩하게 살지 않고 있다면,

죄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예배나 기도나 말씀 중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결과가 아니라면

그 조차도 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고난

죄인이

 

자기 생명으로 사는 것이

'죄'이다.

 

 

 

죄를 지을 수 없는 삶

 

 

그러면 죄에서

자유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죄 안짓는 삶'이 아니라,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고,

 

자신의 생명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다른 사람이 나를 오해하여

 

욕설을 쏟아붓고

폭력까지 행사했다고 하자.

 

당신은

기가막힐 것이다.

 

자기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이에 대항하든지,

 

아니면 훌륭한 인품을 소유하여

오해가 풀릴 때까지 참고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이기적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는

충격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마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하듯이

 

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생명으로

그리스도처럼 대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는

거짓된 행동이다.

 

그런 사람은 겉보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했을지라도

 

마음 중심에 남게될

앙금은 속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인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은

 

자기 속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이 죄로부터 자유한

거룩한 삶인 것이다.

 

 

 

잘못된 인식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기 때문에

죄의 고백만 하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죄의 행위로 인해

천국가는 것이 취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죄의 결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이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이론적으로만 알기 때문이다.

 

또는 설교자들로부터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주간동안 죄 가운데 살고서도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지난 한 주간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

 

죄책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복음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같은 죄의 행위가 있었음에도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확신하는 것도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국내에서 '구원파'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같은 가르침으로 죄짓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양심마저도 마비시켜서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들은

실제 삶에서

 

죄짓고 살아도

양심의 가책조차도 받지 않는다.

 

일반 교회들도

죄책감을 가진 사람이

 

'죄의 고백'을

하고 난 후에

 

'죄에서 자유케 됨'을

확신하는 것도

 

문자적으로는 맞을지 모르나

복음의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으로

 

여전히 기뻐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럴 것이다.

얼마나 은혜스러운가?

 

죄 짓고도 마음 편하게 산다는 것이...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식과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인

웃지 못할 결과이다.

 

 

 

믿음은 삶으로 나타나는 실제이다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은

 

지식적인 믿음이나

문자적인 말씀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과는 다른,

삶에서 드러나는 실제이다.

 

믿음이란,

죄인의 생명을 가진 자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버렸음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생명으로

살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복음의 내용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어도

 

아직 자기 속에 하나님의 생명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성령)

이 임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죄(육신의 삶)에서

자유케 된 자가 아니다.

 

사람이 지식으로

복음의 내용에 동의해도

 

아직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오지 않을 수 있다.

 

그같은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로 각 사람에게 임한다.

 

계시로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결과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그의 속에 하나님의 생명,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명의 성령이

임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이 버려지고 대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같은 실제를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은

그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른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

죄에서 자유케 된' 사람이

 

아직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때로는 육신의 삶을 선택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

 

이 때의 고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일1:9절의 '사죄의 확신'이다.

 

따라서 그는 잠간 동안의

잘못된 선택에 의한 죄였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은 변치 않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고자 하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을 버린 적이 없는

사람의 '죄의 고백'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계속 '죄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그는 구원받은 적도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의 믿음은 문자적 성경말씀에 대한

지식적인 동의 뿐이므로

 

아직,

진정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자이다.

 

 

 

죄로부터의 자유한 삶

 

 

죄로부터의 자유란,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죄란

 

인간의 타락한 생명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자기 생명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당신이 만일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면 까무라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같은 경험은 전혀

다른 생명에 속한 삶이기 때문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동반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삶에 커다란 개혁이 일어난다.

여기서 '개혁'이란

 

말씀을 깨닫고

성령을 체험한,

 

새로운 느낌이나 감격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 못가서

자신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음을

곧 알게 되지만,

 

진정한 '죄에서의 자유'를

체험한 사람은

 

얼마 안가서 자신의 말하는 습관이나

태도 또는 자세까지도 바뀌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을 주관하기 때문에

 

그는 마치

그리스도처럼 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그처럼

성숙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죄와 멀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곧 죄에서의 자유이다

 

 

죄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 찾아와도

 

믿음만 지킨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유지하고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자체가

곧 '죄로부터의 자유한 삶'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습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같은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믿는 자가 믿음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이해할 수 없을 지 모르나,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죄)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요일4:2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고

 

말했다.

 

믿는 자(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자)는

범죄치 못한다.

 

죄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복음을 회복해야 할 교회들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바탕을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은

'죄에서 자유케 된 자'가 아니다.

 

기성 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믿고 구원받은 자신이

 

죄의 삶을

끊지 못한 것에 대해 곤혹스러워 한다.

 

헛된 믿음으로

아직 양심이

 

마비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 말이다.

 

이들이 구원파나

이단의 헛된 가르침에

 

속아

얼마나 빠져나가는 지 모른다.

 

그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더 잘 믿어보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복음을 알면

그럴 일이 없을 텐데...

 

아니,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이

바르게 선포된다면

 

아무리 외부에서 미혹한다 할지라도

넘어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성 교회들은

십자가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부정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을 알고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회를 비롯하여

든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용기있는 목회자들은

극소수일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단정적인 주장에 돌을 던져도 괜찮다.

그러나 사실이다.

 

 

 

어렵지 않은 거룩한 삶

 

 

신약의 성경말씀은 곳곳에서

거룩한 삶을 명령하고 있다.

 

이같은 명령들은

순종할 수 있는 바탕이

 

이미 갖추어진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들임을 기억하라.

 

신약의 사도들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주는 말씀이 아니다.

 

십자가 없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흉내만 낼 뿐,

결코 거룩한 삶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통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명령일지라도 지킬 수 있는 것은

단지 선택일 뿐이기 때문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해서 죽고,

 

'죄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