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복음6) 율법으로부터 자유 (1)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4)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7:6)
율법의 저주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케 된 자를 일컫는다.
반대로 비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매여 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 생소한 것 같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율법'에 대해 무지한 지,
하나 하나 살펴보면
정말 기가막힐 정도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이 '율법'의 문제를 다룰 때이면
정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생각만 해도
한숨과 탄식이 절로 나온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율법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율법에서 자유케 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율법에서의 자유'를
선포하기는 커녕
더욱 더 율법으로
성도들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아래 있는 비참한 한국교회
내가
율법에 관한 말씀을 다룰 때마다
한국교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내 자신이 그동안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자라고 성장하여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면서
절망 중에 십자가를 만나기까지
율법아래 있었음을 몰랐었기 때문이다.
이 율법의 문제는
내 존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지만
42세가 되어 그것을 인식하기까지
수많은 세월을
율법의 종으로 살아오며
아픔과 눈물을 흘렸지만,
그것이 율법에 매인 삶인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
율법'에 대해 언급하지만
'율법이 무엇이냐?'고
되묻는 사람이 상당수였고,
단지 목회자들만이
율법에 대한 성경 지식을 조금 말해 보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케 된 자를 말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이 율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목회자들조차 지식적인 차원에
있는 상황이다.
나는 한국교회를 말하지 않고
율법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한국교회들이
율법의 저주아래 있고
율법에
종노릇하는 교인들은 비참하다.
율법적 삶과 그 결과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인가?
율법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지켜야 할 말씀이다.
그러면
율법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지켜야 할 율법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저주'는 무엇인가?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주어지는
보응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이다.
크게는 가난과 질병과 죽음 등이며,
작게는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잘 지켜도 계속 지키며
살아야 하는 끊임없는 긴장이며,
잘 지키지 못해도
양심의 가책이 따르며,
때로는 잘 지키지 못한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거짓과 속임으로
2차적인 양심의 가책이 더해진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무거운 짐과 같은 것이다.
이같은 율법적 삶 때문에
체면이나 형식, 외적 삶이 중요시 되어
겉으로 아름답고 흠없이 보이려는
꾸밈과 거짓된 삶으로 발전된다.
자신의 형편에 맞는 삶 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겉치레를 중요시 여기고,
이에 따라 의식이나 예의, 도덕 등이
발달하여 그에 따라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둔
의복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확장된 율법적 삶
사람들은 확장된 율법적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율법적 삶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강박의식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란
하나님이 세우신 삶의 기준이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 외에
수많은 규칙과
삶의 기준을 세우며 살아간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도 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도 있고,
가정에서 세운 것도 있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나라에서 세운 것도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온통 지켜야 할
법칙들로 둘러 싸여 살고 있다.
하다 못해 가정에서조차 TV를 보는 시간,
자야 할 시간, 식사하는 방식,
식사 후에 그릇을 처리하는 방식,
청소하는 날, 옷을 갈아입는 시기,
물건을 정리 정돈하는 법,
어느 때에 손을 씻어야 하고,
어떻게 인사해야 하며,
신발을 신는 방식까지 정해져 있다.
만일 지켜야 할 법칙을
어겼을 경우에는
비난과 욕설을 듣든지 혹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포기치 못하는 율법적 삶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난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을 경우,
얼마간 상당한 불편을 겪는다.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이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이는 서로의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그 방식을 고집하느라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혼의 아픔을 경험한다.
이는 부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서로 지켜야 할 법칙과
자신의 삶의 방식 사이에
많은 갈등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한다.
심지어는 살인까지 일어난다.
이것이 율법의 저주이다.
율법적 삶이 가져다주는 저주
사람들은
굳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수많은 율법을 스스로 만들고,
그 율법 때문에 힘들어 하고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며
아픔과 미움과 저주와 죽음까지 경험한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와같은 법과 기준으로 둘러싸여 있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성은 이기적이다.
사람마다 그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별다르지 않다.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그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양보를 잘 한다.
그의 내면은 억울해서
늘 울고 있을 때가 많다.
모질지 못한 자신을 탓하느라
더욱 아파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과 기준들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지키며 살아간다.
이는
다른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피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불꽃이 튀는 삶을 살게 된다.
율법적 삶은 인간의 본성
율법적 삶은
인간의 삶 자체이다.
사람은 아담이
선악과를 취했던 영향을 받아
늘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분별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곧 율법이다
.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부터 율법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율법적 삶'이란
사람의 본성이며 생명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율법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종교들은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터득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율법적 삶을 고집하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느라
다른 사람과의 갈등과 미움의 관계가 되고,
자신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실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적인 이기심을 가진
자기 자신을 비워버리면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으므로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같은 경지를 해탈이라고 한다.
그러나 율법적 삶은 해탈을 통해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존재가
죽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단지 노력과 함께 마찰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다.
율법적 삶은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죽기 전에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결국 헛수고이다.
비운다고 해서 자신의 본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에 대해 죽음으로써 자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바로 율법적 삶에서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
(롬7:4)
사람이 어떻게 해서
율법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율법적 삶에 대하여
죽어버렸음을 인식함으로써이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다시는
율법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람에게 '율법에서의 자유'를
선포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율법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교회는
여전히 율법적 삶을 가르치거나
강조하고 있으며,
실제로 더 많은 율법을 만들어
스스로 그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 교회가 세운 대표적인 율법들
많은 한국교회가
율법적 삶을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주일 성수', '십일조', '성경 읽기',
'구역 모임', '기도의 열심', '전도하기',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 봉사하기',
'제자 훈련', '성경 공부', '성경 쓰기',
'모든 공예배 참여하기', '일천번제 헌금',
'작정 새벽기도', '릴레이 기도',
'총동원 전도 주일'...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도 매년마다 목표를 바꿔가면서
교인들을
그 목표에 도달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행사가 많은 교회일수록
교인들은 교회에서 녹초가 되어간다.
주일새벽기도회, 주일학교 봉사, 성가대,
각 부서 모임, 각 부서 행사,
각 부서 발표회, 오후 예배, 저녁예배,
그것도 직분자들은 거의 참석해야 한다.
모든 모임에 참여하는
발군의 열심을 보여야
그 이상의 직분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율법에 대해 죽음을 가져다 주셨고,
더 이상 그같은 것들을
우리 스스로 지키지 않게 하셨다.
이것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랑'보다 우선시 되는 율법
한국교회는 유난히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한다.
따라서 이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교인들은
주일 성수하지 않으면
죄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출장을 갔을 때도,
회사의 친목 모임이나 연수 때에도,
주일에 국가 고시를 치를 때에도,
오랜 만에 뿔뿔히 흩어진 가족들이
모일 때에도, 주말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문제로
대단히 갈등한다.
어떤 사람은 무슨 불이익이 있어도
'주일 예배'를 참여하는데,
교회는 그것을 대단히 믿음 좋은
사람인 것처럼 치켜 세운다.
담임목회자도
주일 예배에 누가 오고
누가 오지 않았는가에 대해
대단히 예민하다.
그래서 주일 예배 참석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기대했던 사람이
주일예배에 불참할 경우,
어떤 사정인지를 알아보기도 전에
앙심(?)부터 품는 경우가 많다.
추구해야 할 '사랑'은
온데 간데 없다.
'사랑'의 조건은 주일예배이다.
주일성수는 '사랑'보다 우선시 되고 있다.
물론 이는 율법적이다.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든 안 받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일예배는 교인의 철저한 '의무'이다.
'십일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율법주의적인 한국교회의 현주소
한국교회는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교인의 생명처럼 여긴다.
그들이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상관없이 살더라도
두 가지만 잘하면 최고로 삼는다.
한국교회는 복음이 없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그같은 올가미와 같은 율법으로
묶어 두지 않으면
교회나 신앙생활과
멀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도 자신들이
그 두가지를 잘 하지 않으면
늘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비극이다.
율법주의가 가져다 준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 부흥사들이
교회부흥을 빌미삼아
한국교회 전체에 뿌려놓은
유행성 전염병 같은 율법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은
누룩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차례 이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미 누룩에
점령 당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과
'복음 전파'라는 미명하에
율법을 휘둘러 왔고
지금은 교회마다 그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교회 성장과 관련된 세미나는
언제나 문전성시인데,
그것은 얼마나 한국교회가
복음의 삶이 목표가 아닌
교회 성장에 목매달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율법적 한국교회의 과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에서 자유'케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마땅히 율법에서
자유케 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한국교회는
여전히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적 삶의
염증을 견디다 못해
한국 교회를 떠나고 있다.
많은 율법적 한국교회들은
복음을 회복하고
율법주의를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인들의 교회
이탈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