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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감상 ★

[펌]<인생은 아름다워>/ 평론가 백문임의 글

작성자산책시간|작성시간02.08.05|조회수300 목록 댓글 0

엄혹한 현실의 '희극'적 변주---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백문임

낯선 이딸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상반기 극장가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깐느영화제 특별대상 수상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같은 경력이 지명도를 높여주기도 했지만 낯익은 배우 하나 출연하지 않은 이 영화에 관객들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순수하게 '입소문' 덕분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폭소와 진한 눈물을 동시에 터뜨리는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이 영화의 매력을 꾸준히 전달했던 것이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코믹 로맨스와 이들이 이룬 행복한 가정이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하는 슬픈 이야기가 결합된 「인생은 아름다워」는 한마디로 탁월한 이야기꾼인 주인공 귀도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린 영화이다. 연인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 이야기꾼은 파시즘 시기의 이딸리아에서 놀랍게도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동화를 상상하는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 동화를 현실로 가져다놓는 능력도 지녔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詩)는 불가능하다"라며 비탄에 잠겼던 아도르노(T. Adorno)가 맞닥뜨렸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그러한 인물인 것이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유태인 귀도가 상류층 여성 도라와 맺어지기까지의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이들이 아들과 함께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가 고생을 겪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 전체를 일관하는 것은 귀도가 창조해내는 동화의 세계가 갖는 어떤 힘이다.

고장난 자동차로 질주하는 귀도가 국왕으로 오인되는 유쾌한 첫장면 이후 귀도는 자신이 왕자가 되고 아리따운 도라가 공주가 되는 한편의 동화를 만들어낸다. 주변의 상황들을 재치있게 활용한 완벽한 플롯으로 도라의 마음을 사로잡아 말 그대로 백마를 타고 그녀를 데려오는 데 성공하기까지, 관객들은 마음놓고 웃으며 이 앙증맞은 로맨스를 즐길 수 있다. 게다가 곳곳에는 점차 경직화하는 파시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섞여 있다. 다른 남자와 도라의 약혼식장에 귀도가 타고 들어간 멋진 백마의 배에는 '더러운 유태인의 말'이라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써놓은 끔찍한 낙서가 있다. 귀도는 상류층의 잔치가 벌어지는 한복판에 바로 그 말을 타고 들어가 유유히 도라를 태워 데리고 나오는데, 이를 축하이벤트로 알고 박수를 치는 상류층 하객들이나 파쇼 경례를 붙이는 관료는 여지없이 조롱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5년이 지나 아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뒷부분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이들은 끔찍한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간다. 앞부분의 동화가 귀도의 '현실의 소원(도라와의 결혼)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라면, 이제 천진난만한 아들과 수용소에 끌려간 그에게 필요한 것은 홀로코스트라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창조되는 완벽한 플롯이다. 귀도는 아들에게 수용소는 거대한 놀이공간이며 독일군인은 놀이 도우미이자 경쟁자이고 이 모든 넌쎈스는 1000점을 먼저 따면 탱크를 선물받는 놀이를 위한 트릭이라고 꾸며댄다. 이 상황은 재난이 아니라 "모든 게 스케줄대로" 진행되는 한바탕의 게임이라며 아들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들이 홀로코스트의 광기를 경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외국의 평자들 중엔 이러한 선의의 거짓말이 홀로코스트를 희화화한 것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귀도의 거짓말은, 진지하고 엄숙하게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일종의 우스꽝스런 '놀이'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예리한 통찰의 소산이라 보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귀도의 말을 진짜라고 믿고 수용소 생활과 독일군인들을 바라보는 아들의 눈에는 그 모든 노동과 학살과 엄숙주의가 일종의 '놀이'로 보인다. 그래서 파시즘이라는 것과 '놀이' 즉 허구적 법칙성이라는 것이 실은 유사한 것 아니겠냐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은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유태인을 몰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파시즘의 비합리적인 내러티브에 놀이 혹은 게임이라는 내러티브로 대항하는 전략이며, 악몽에 저항하는 아름다운 백일몽 전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구에 허구로 맞서는 일종의 동종요법이면서 또 나쁜 꿈을 좋은 꿈으로 치환하는 치유법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귀도는 매우 능동적인 이야기꾼이자 백일몽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형상이랄 수도 있겠다.

이딸리아 최고의 희극배우 로베르또 베니니(Roberto Benigni)가 연기하는 귀도라는 인물은 흑백 무성영화 시대의 채플린과는 달리 시종일관 떠들어대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능동적으로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데 전념한다. 채플린이 넘어지고 엎어지는 행동으로 웃음을 자아냈다면 귀도는 주변의 우연적인 상황들을 필연으로 끌고가는 기지로 웃음을 끌어낸다. 즉 자신의 실수나 부도덕성이 아니라 계산되고 의도된 연출로 희극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베르그쏭은 웃음이란 사회의 관습과 질서를 유연하게 따라가지 못하는 인물의 비사회성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채플린에게라면 몰라도 베니니의 귀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채플린은 대개 자본주의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형상으로 연민과 웃음을 유발하지만 귀도는 오히려 상황의 변화를 민감하게 인식하고서 그것을 전복할 논리와 상황을 만들어가는 인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귀도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지적인 마술사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희극성은 그래서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활기넘치고 낙천적이고 재기발랄한 재주꾼이 촘촘하게 짜가는 이야기의 그물에 빠져들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유쾌한 어떤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속이고, 아들을 속인다. 그러나 그 속임은 악의가 아니라 따스하고 선한 동기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무엇보다도 매우 아름다운 짜임을 가졌기 때문에 유쾌하다. 더욱이 자신이 짜낸 이야기를 완성시키면서 희생을 감수하는 순간엔, 이 어릿광대에게서 어떤 숭고미까지도 발견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찌 보면, 파시즘이라는 현실과 이야기꾼-예술가-아버지의 팽팽한 대결은 '놀이'의 주인공이던 아들의 미래에서 승패를 가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의 끝을 게임종료로만 알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꾸며냈고 또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아주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을 아들은, 어느 순간 분명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 순간이란, 꿈을 꿀 능력이 있는 사람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아버지가 가르쳐주었음을 불현듯 깨달은 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白文任/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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