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사회와 축구
이영석 (광주대)
1. 축구의 양면성
우리 나라와 일본이 공동 주최하는 월드컵 경기가 열릴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세대 전이나 지금이나 축구의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아니, 매스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축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흥분을 자아내는 것 같다. 축구는 다른 구기종목에 비해 원시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별다른 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선수들은 몸을 직접 부딪치며 거칠게 싸운다. 현대 사회에서 원시적이고 단순한 운동이 전세계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 신기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4년마다 되풀이되는 월드컵을 구경하다보면, 이 경기가 분명 전지구적 규모로 확대된 자본주의 세계에 걸맞는 이벤트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좌파 사회이론가 안토니오 네그리는 세계화와 함께 전지구적 차원에서 경제 및 문화의 교환을 매개하는 새로운 권력기구를 가리켜 네트워크 권력이라 부른다. 이것은 ‘견고한 근대성’을 표현하는 어떤 분명한 실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종래의 권력기구와는 달리 세계은행에서 국가권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도들로 구성된 복합체일 뿐이다. 거기에는 권력의 공간적 중심이 없다. 항상 유동하고 보이지 않으며 모든 곳에 편재한다.1) 월드컵과 같은 세계적 규모의 경기와 이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또한 네트워크 권력에 해당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 축구의 이미지와 축구를 둘러싼 사회적 성격은 근래에 생성된 것이다. 전통적인 민중 놀이에서 진화한 축구는 19세기 영국에서 근대적인 경기로 탈바꿈했고, 19세기 말 이후 영국의 경계를 넘어 다른 나라로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의 하나로 발전하였다.2)
이 글에서는 오늘날 월드컵 경기 또는 유럽 및 남미 각국의 프로 리그로 대변되는 현대 축구가 19세기에 어떻게 영국에서 제도화되는가를 살피려고 한다. 이 제도화과정에서 축구는 노동계급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축구는 노동계급의 삶과 열망을 반영하면서, 그와 동시에 사회통합의 요소로 자리잡았던 것처럼 보인다.
2. 민중문화의 유산
사람은 일하면서 동시에 놀이를 즐기는 존재이다. 도구인(homo faber)과 유희인(homo ludens)은 사람 본성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전산업사회에서 일과 놀이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노동은 다음의 휴식을 수반하며, 휴식과 놀이는 새로운 노동의 전제이기도 했다. 리크리에이션이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한다. 물론 전산업사회에서도 지배계급의 경우 그 나름의 개인적인 여가 형태를 발전시켰고, 특히 중세적 경허(敬虛)가 사라진 이후 이러한 경향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어느 나라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영국의 전통 지배세력 사이에는 중세 후기부터 여가 자체를 즐기는 다양한 관행이 뿌리를 내렸다. 그 시대에 귀족이 여가를 소비하는 전형적인 형태는 사냥이었다. 15세기에 귀족 못지 않은 부를 축적한 젠트리(gentry)층이 대두하는데, 그들은 귀족 차남의 후손이나 도시의 상인과 법률가들, 또는 부농 출신으로 상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축적의 비밀은 생산 및 유통과정에서 합리적 경영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데에 있었다. 당시 젠트리의 호칭은 ‘마스터’(Mr)였으며 귀족을 가리키는 ‘로드’(Lord)와 달랐다.
젠트리의 여가문화는 전통적인 귀족 문화를 답습하면서도 노력과 경쟁이라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포함한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수렵은 영지를 가진 귀족만의 특권이었다. 젠트리는 이러한 특권에 도전하여 그들 자신의 수렵 방식을 게임으로 만들어 즐겼는데, 이것이 승마와 사격이다. 승마의 경우 서민의 수렵을 금지한 법령 때문에 주로 젠트리의 넓은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젠트리는 산이며 시내며 골짜기며 각종 장애물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서 얼마나 능숙한 솜씨로 말을 다루는가를 평가하는 새로운 놀이를 즐겼다. 사격도 실제 사냥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는가, 그 능력을 테스트하는 놀이로 발전하였다
언뜻 보면 이들의 새로운 경기는 귀족문화를 모방하려는 속물근성(snobbism)의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전통적인 귀족 놀이와 다르게 보는 것은 그 속에 노력을 통한 능력의 과시 또는 경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 스포츠란 합리적 여가 소비의 형태이다. 스포츠라는 말 자체가 ‘방향전환’ 또는 ‘오락’이라는 뜻을 가진 중세 영어 ‘sporten’에서 비롯한다. 근대 스포츠는 경쟁, 신체활동, 제도화된 규칙의 지배를 받는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국에서 근대 스포츠의 기원은 젠트리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를 포함한 새로운 여가 소비는 일반적으로 18세기에 더욱 더 발전한다. ‘소비자혁명’을 강조하는 역사가들은 이 시기 영국 사회에서 이미 '여가의 상업화'(commercialization of leisure)가 광범하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여가 소비에 돈을 쓰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늘어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승마와 사격, 책읽기, 예술품 감상, 공연물, 상금을 내건 경기 등은 이와 같은 추세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이 상업화의 주도세력은 물론 중간계급이었다. 그들은 기존 젠트리 문화의 대중화와 확대를 통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전통적인 축구가 언제부터 비롯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문화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앵글로색슨 시대에 축구는 수확이 끝난 경포(耕圃)에서 마을 사람들이 떼를 지어 공놀이를 한 데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쥐잡기라고 알려진 이 놀이는 일종의 수확제로서 마을 사람들의 축제였다. 공은 돼지와 같은 가축의 방광을 부풀려 사용했다.
축구 경기는 중세 이래 여러 지역에서 특정한 역사적 경험과 사건을 상징하는 의식이 가미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로마군대의 퇴각을 상징하는 놀이, 또는 데인(Dane)족의 침입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놀이로 즐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축구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촌락 공동체의 수확제(收穫祭)와 관련된 민중문화에서 비롯했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근대 스포츠로서 축구는 역설적으로 민중문화와 유리된 이후에 나타났다. 물론 노동사가들에 따르면, 영국의 민중문화는 산업화 초기에도 뿌리깊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이 시기의 민중이 부르주아 문화와는 다른 그들 나름의 전통적인 놀이문화를 견지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노동자들은 민중문화를 억압하고 근절하려는 자본측과 중간계급 출신 개혁가들의 공세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노동사가들에 따르면, 민중문화에서 놀이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 따라서 그만큼 자본주의적 레저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레슬링․몽둥이치기․종치기․개싸움․황소지분대기․오소리놀리기 등은 노동자들의 삶, 특히 축제와 철야제와 성 월요일과 일상의 작업장에서 널리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대부분 고단한 삶과 노동을 일시적으로 이완시키는, 말 그대로 레크리에이션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노동계급의 놀이문화는 외부의 압력과 함께 급속하게 쇠퇴한다. 이 시기에 노동계급의 놀이와 레크리에이션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그들의 놀이는 거칠고 조야하고 즉흥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조잡한 문화는 합리적으로 여가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레크리에이션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던 것 같다. 1820년대만 하더라도 버밍엄의 공장노동자들, 심지어는 공장주들도 철야제(徹夜祭)에서 황소 지분대기, 개싸움, 닭싸움, 권투와 같은 놀이를 즐겼다. 같은 세기 중엽에도 나이 지긋한 노동자들은 아직도 전통적인 놀이를 회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40년대에 버밍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황소 지분대기는 고리던지기며 족구와 함께 인기를 잃었다.
19세기 전반에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과 산업부르주아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공격의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일반 민중의 레크리에이션을 위해서 쓰여졌던 공간의 위축이라는 시대적 추세가 있었다. 농촌에서 공동지(共同地)의 축소, 도시공간의 확대, 작업장과 공장에서 새로운 노동규율의 보급이 그러한 추세에 해당한다. 인클로저(enclosure)는 토지소유권을 절대화하고 공동지를 없앰으로써 전통놀이 공간을 위축시켰다. 이제 수확제 이후에 경포에서 벌어지던 축구 놀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도시의 거리도 이전과는 달리 도시민의 놀이 공간으로 사용하는 데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새로운 건물들을 세울 때에 그러한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없었다. 도시 공한지의 축구 놀이도 점차로 사라졌다.
공간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시간적 제약 또한 민중문화를 위축시켰다. 성 월요일이나 또는 작업 사이에 낀 여흥의 시간, 심지어는 도시의 철야제까지도 공장주들에게 이제는 제거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놀이문화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교육운동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감리교회의 활동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여가시간의 합리적 소비야말로 노동계급이 지녀야 할 새로운 태도가 되었던 것이다.
3. 사립중학교의 경쟁과 근대 축구
18세기 후반 도시에 몰려든 이농민이나 공업지대의 노동자들은 아직도 민중문화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전통은 중간계급 출신 개혁가들의 비판과 더불어 점차 쇠퇴한다. 그러나 축구는 개혁가들의 활동이 일기 이전에 이미 노동자들의 놀이 목록에서 빠져 있었다. 이는 아마도 공간의 제약 때문이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축구는 명문 사립중학교의 교내경기로 그 전통을 이어갔는데, 다음 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더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원래 중등교육은 중간계급에 대한 사회화의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법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대륙의 프랑스나 프로이센에 비해 중등교육에 대한 국가의 관심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영국의 중등교육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기부금으로 운영하는 사립문법학교(grammer school)를 가리킨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은 대체로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문법학교 가운데 평판이 높은 학교의 경우 다른 지방의 학생들이 값비싼 기숙사비를 내고 입학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지방에 한정되지는 않는다는 뜻에서 ‘퍼블릭’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다.3) 산업혁명기에 ‘퍼블릭’이라는 말은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산업화 이후 공적 영역에 필요한 새로운 인력은 주로 이들 학교 출신으로 충원되었다. 이들 사립학교는 국가에 종속되지 않았으면서도 공적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떠맡은 셈이다. 특히 19세기 중엽 퍼블릭 스쿨은 사회적 평판에 따라 옥스-브리지 장학생 정원을 배정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따라 더 많은 정원을 얻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국의 중등교육은 1860년대에 중등교육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조사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하면서 확대되었다. 1862년 왕립위원회(Clarendon Commission)는 이튼(Eton), 해로우(Harrow)를 비롯한 9개 명문 사립학교의 실태를 조사했는데, 그 후 이들 학교는 ‘클러랜든 스쿨’(Clarendon School) 또는 ‘그레이트 스쿨’이라 불렸다.4) 한편 1864년 왕립위원회(Taunton Commission)는 클러랜든 위원회가 제외한 다른 사립중학교의 실태를 조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내세웠다. 즉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중간계급 자녀를 제도교육에 유인하면서 그와 함께 그들을 기존의 사회적 위계구조 안에서 재편성하기 위해 중학교 서열을 공식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톤튼 위원회가 제시한 중학교 서열은 기존의 사회적 평판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3분제의 구조 아래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우선 클러랜든 스쿨을 선두로 하고, 이들 학교를 선례로 삼아 따라갈 능력이 있는 1류 학교군이 있다. 클러랜든 스쿨은 옥스-브리지 진학에 가장 유리한 특권을 지니고 대학 진학을 위해 18세까지 재학한다. 이들 학교는 대부분 기숙학교 전통을 유지하며 희랍어 및 라틴어 고전교육을 중시한다. 1류 학교는 대부분 전일제 주간학교 형태로서 라틴어 고전을 학습하며 16세에 졸업한다. 2류 학교는 라틴어 기초만을 공부하고 14세에 졸업한다. 이러한 위계구조는 19세기 중엽의 사회변화에 대응하면서도 그 변화를 기존의 엘리트 지배구조 안에서 받아들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5)
19세기 중엽 퍼블릭 스쿨의 사회적 평판은 옥스-브리지 장학생 할당 정원 및 입학생 수, 고전교육의 정도, 재학생 연령 등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었다. 이러한 위계구조 아래서 클러랜든 스쿨과 그 다음 반열의 사립학교들은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 학교는 고전 교육, 옥스-브리지 입학시험은 물론이고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갖가지 문화적 상징물을 내세웠다.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활동 또한 이러한 상징에 해당한다. 경쟁을 위한 ‘문화적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사립학교에서 명맥을 이어온 축구가 19세기 중엽에 통일된 규칙을 가진 근대 스포츠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사립학교들의 경쟁과 문화적 스타일이라는 맥락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축구는 사립학교 기숙사생끼리 경기하는 겨울철 스포츠에 지나지 않았다. 학교마다 핸들링 허용 여부에 대한 규칙이 달랐기 때문에 학교간 대항전은 드물었다. 따라서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옛 동창들만으로 축구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후 1843년 경기규칙을 명문화하고 학교간의 차이점을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이루어졌으며, 1846년에는 사립학교 대부분이 케임브리지 규칙을 공동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원래 케임브리지대학 팀과 대학 졸업후에 축구 클럽을 결성한 선수들이 적용한 규칙이었다. 이 무렵에 라이벌 사립학교간의 정기 대항전이 자주 열렸는데, 이것은 선수의 경기와 관중의 응원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종의 축제였다. 운동의 열기를 통해서 이들 학교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독특한 문화적 스타일을 만들었다. 근대 스포츠로서 축구의 발전은 사립중학교 사이의 경쟁이라고 하는 그 시대 분위기 아래서 가능한 것이었다.
케임브리지 규칙 제정 이후 축구는 좀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성장을 계속했다. 이제 사립학교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여러 축구 클럽이 결성되어 서로 경기를 치르는 관행이 뿌리를 내렸고, 1863년에는 런던 인근 지방의 사립학교 대표와 클럽 관계자들이 수 차례 모여 마침내 영국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를 결성하였다. 물론 새로운 규칙이 널리 적용되는 데에는 좀더 시일이 필요했다. 축구협회에 가입한 클럽들도 지역에 따라 제각기 독자적인 경기규칙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6) 그러나 축구협회 소속 클럽의 대항전이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공통의 경기규칙이 뿌리를 내렸다. 1871년에는 축구협회에 소속된 15개 클럽이 모두 참가한 컵 쟁탈전(Cup competition)이 열렸고, 1885년 협회가 직업선수들의 참가를 인정하면서 축구는 영국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요컨대 민중문화의 유산을 간직한 축구가 근대 스포츠로 발돋움한 것은 중간계급의 후원과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사립중학교 운영자와 교사들은 학교간 경쟁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축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필요성뿐만 아니라 도전적이고 팀 단위로 이루어지는 축구 자체의 특성에 가치를 부여하기도 했다. 사립학교 운영자들은 축구 경기장(field)과 전장(battle of war)의 이미지를 일치시켰다. ‘집단 정신’(team spirit)이란 위기의 시기에 국민이 단합하는 표식이기도 했다. 1890년대 로레토(Loretto) 학교 교장을 지낸 허친슨 올모드(H. Hutchinson Almode)는 이렇게 말한다. “승부가 많은 사람들의 결집에 달려 있고 또한 용기와 인내를 길러주는 이 경기야말로 퍼블릭 스쿨이 가진 활력의 원천이다.” 그는 축구를 예찬하면서, 당대에 개인적이고 자기 탐닉적인 새로운 스포츠가 유행하는 것에 대해, 퍼블릭 스쿨이 이제 영국 국민에 봉사하는 뛰어난 인물을 길러낸다고 하는 그 고유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7)
4. 노동계급, 축구, 국민정체성
축구가 근대 스포츠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중간계급의 적극적인 관심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것이 본격적인 대중 스포츠로 발돋움한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참여에 힘입은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축구는 노동자들이 가장 애호한 스포츠였다. 이에 비해 럭비나 크리켓과 같은 경기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었다. 그 시대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전거에 대한 열광을 제외하면 축구에 필적할 만한 경기는 없었다. 노동자가 축구 관중의 주류로 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노동계급의 여가 소비를 살펴야 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시간의 단축 추세와 온건한 노동운동의 정착이다.
먼저 노동시간은 어떻게 변했는가. 산업화 초기에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전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였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도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이었다. 이 같은 장시간 노동은 사람의 신체적 한계에 근접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생산 증가와 이윤 확대를 위해서는 노동 착취에 의존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830년대에 이르러 장시간 노동은 점차로 단축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과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노동자들의 육체적 황폐화는 장기적으로 자본가의 자본축적을 가로막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다음으로, 기술혁신으로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마지막으로, 중간계급 출신 개혁가와 노동계급이 주도한 시간단축운동이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1847년에 10시간노동법이 통과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토요일 노동시간이 더 이전보다 더 짧아졌으며, 이것이야말로 여가가 노동자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온건한 노동운동은 차티스트운동의 좌절 이후 숙련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850년대에 몇몇 숙련직종에서 전국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갖춘 노동조합이 나타났다. 이들 조직은 파업이나 실업중인 회원들의 구호를 위한 보험제도를 갖추었고, 조직의 업무를 전담하는 노동자들을 따로 두었다. 이 숙련공 중심의 노동조합은 흔히 신형조합(New Model Union)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19세기 중엽 이후 노동운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일련의 합법적인 개혁을 이끌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 운동의 특징은 확고한 조직과 온건노선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이다.
숙련노동자들은 자조와 체통이라는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그들의 여가 소비에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독서나 강연과 같은 문화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이와 함께 극장공연, 여행, 소풍, 음주 등 다양한 형태로 여가시간을 소비했다. 축구는 토요일 오후 시간에 가장 적절한 운동이었다. 노동자들은 경기장에 나와 스스로 선수로 뛰거나 또는 클럽내 경기를 구경하면서 탄성과 아쉬움, 흥분과 실망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냈다.8)
축구협회에서는 경기규칙이나 프로축구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지역적으로는 북부 공업지대와 런던지역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노동계급(북부)과 중간계급(남부) 사이의 계급관계가 반영되어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다. 컵 쟁탈전이 정기적으로 거행되던 시기에 축구의 중심은 북부지역이었다. 1880년대 중반에 런던 및 동남부의 축구 클럽은 중간계급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직업선수 문제에 거부감을 지녔다. 축구협회가 직업선수의 출전을 허용하자, 이들 클럽은 컵 쟁탈전 참가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시기의 컵 쟁탈전은 사실상 북부 및 미들랜드 클럽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예컨대 1892-3년 시즌에 1부 및 2부 리그에 속한 28개 클럽의 지역별 분포를 살펴보면 랭커셔 10곳, 스태퍼드셔 6곳, 워릭셔․요크셔․링컨셔․체셔․노팅엄셔 각 2곳, 더럼과 더비셔 각 1곳으로 나타난다. 런던 및 동납부 클럽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9) 이들 지역에서 프로축구가 성행한 것은 1894년에 남부리그(Southern League)가 결성된 이후의 일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축구가 노동계급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발전했다는 사실은 거꾸로 그것이 노동계급을 기존의 사회구조 안에 끌어들이고 사회적 통합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축구는 넓게 보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지역 정체성은 물론, 대브리튼 국민이라는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1860년대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 연맹조직이 나타났고, 프로 리그 또한 1890년경에 결성되었다.
축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정기전을 통해 지역 대항전의 성격을 갖기에 이르렀다. 1872년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1879년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즈가 정기전을 치렀고, 그 다음부터 세 지역의 클럽 대표팀이 우승을 놓고 다투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 자체가 각 지역 정체성을 되살리고 흥분을 자아내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와 함께 대 브리튼(Great Britain) 국민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강화하는 기회도 아울러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내세운 성 조지, 성 앤드류, 의 십자가는 아일랜드 수호신 성 패트릭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19세기에 ‘유니언 잭’이라는 기치 아래 통합되어 있었다. 경기 때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지역 팀을 응원하며 승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들이 흔드는 깃발은 모두가 유니언 잭이었다.
19세기 후반 근대 축구의 발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상업화 문제이다. 직업축구가 상업화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상업화는 무엇보다도 축구에 대한 노동계급의 열띤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매 경기마다 많은 유료 관중을 동원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관중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 노동시간 단축, 교통수단 발전과 맞물려 증가하였다.
1873-94년의 시기는 경제사에서 대불황(Great Depression)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기불황 아래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악화되지 않았다. 1871-5년간 도매물가 지수를 100으로 하면, 1891-5년간의 지수는 68에 지나지 않는다.10) 이 시기에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상승했는데, 이러한 상승의 결정적인 요인은 물가하락이었다. 물론 불안정한 미숙련 노동자들은 실업의 고통을 겪었겠지만, 숙련노동자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누렸던 것이다. 노동시간 또한 19세기 후반에 지속적으로 단축된다. 토요일의 경우 4시간으로 줄었고, 1880년대 8시간 노동운동이 전개되면서 대단위 작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시간이 점진적으로 짧아졌다. 노동계급에게 여가소비의 제도화가 가능해진 것은 이러한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편 이 시기에 철도망의 확충 또한 축구경기의 상업화에 도움을 주었다. 1836년 런던에 처음 철도가 깔린 이래 영국의 철도망은 런던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방으로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각 방향의 철로 개설과 운영은 독립된 개별 회사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따라서 런던은 후발 산업국가의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중앙역(Hauftbahnhof)이 없다. 각 노선의 터미널 역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을 분이다. 19세기 말 런던에는 브라이튼 방향의 빅토리아 역, 콘월 방향의 워털루 역, 도버 방향의 채링크로스 역, 브리스톨 방향의 패딩턴 역, 버밍엄․맨체스터 쪽의 유스턴 역 등 모두 15개 터미널 역이 있었다. 이러한 철도망은 런던을 중심으로 영국의 각 지역을 긴밀하게 연결해주었다. 축구협회가 주최하는 컵 쟁탈전 결승전에는 1893년 4만5,000명, 1897년 6만5,000명, 1901년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모여들었는데, 이와 같은 관중 동원은 철도망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5. 맺음말
영국 축구의 역사는 기묘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민중문화의 유산을 간직한 이 민중적 놀이는 중간계급의 후원과 관심 속에서 근대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다시 근대 스포츠로서 축구가 성장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적극적인 참여에 힘입었던 것이다. 축구가 특정한 계층과 지역을 넘어 영국의 국민적 스포츠로 자리잡은 것은 역시 19세기 영국의 경제적 번영과 이를 토대로 한 사회 안정 때문이었다.
축구는 역사적으로 신분적 구별과 차이가 강한 영국 사회를 하나의 국가로 만든 사회적 접착제 중의 한 요소였다. 그것은 또한 여러 지역과 민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나라(Great Britain)가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어느 정도 기여한 것처럼 보인다. 축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사람들에게 각기 지역 정체성을 환기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대 브리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사회적 의식(儀式)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축구라는 한 문화적 현상을 통해서도 우리는 특정한 시대의 사회상과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