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철학]하이데거의 프락시스 해석:프락시스의 시간성을 중심으로

작성자산책시간|작성시간06.02.24|조회수697 목록 댓글 0

 

『한국정치학회보』, 한국정치학회
33집 1호 (1999. 7. 29), pp. 129-147


하이데거의 프락시스 해석:
프락시스의 시간성을 중심으로


이동수 (서울대)

 1. 서론
 2. 프락시스 개념의 역사적 변천
 3. 하이데거의 시간성
 4. 시간성 속에서의 프락시스
 5. 결론

 

I. 서론

 프락시스 (praxis) 개념은 서양 정치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적인 혹은 실천적인 철학을 강조한 이래 프락시스는 정치현상을 설명하는 주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고대로 부터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정치사상에서 프락시스 문제는 주로 프락시스-테오리아 (praxis-theoria)의 분석틀 속에서만 논의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록 그것이 praxis와 theoria의 일치를 지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학파 (Stoics)로 부터 헤겔 (G. W. F. Hegel)에 이르기까지 theoria의 우월성이 강조되거나 혹은 마르크스주의 (Marxism), 실존주의 (existentialism), 실용주의 (pragmatism), 분석철학 (analytic philosophy)과 같은 현대 정치철학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praxis의 우월성으로 귀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praxis-theoria 분석틀 속에서만 praxis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또한 강조하였던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 (poiesis)의 관계를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Praxis 개념을 보다 근본적 의미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praxis를 theoria와 비교할 뿐만 아니라 poiesis와의 비교 속에서 그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했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했던 praxis와 poiesis의 구별을 좀 더 명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식하지 못했던 보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밝힘으로써 praxis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의 praxis와 poiesis에 대한 구별은 목표 (goal)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먼저 theoria, praxis, poiesis의 관계를 살펴보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theoria, praxis, poiesis를 인간삶의 방식으로 구분한다. Theoria는 진리를 얻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고 그에서 비롯되는 앎을 기술하는 태도를 일컬으며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 Theoria의 목표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Poiesis는 인간이 사물을 생산 내지 제작하는 행위로서 그 목표는 가공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과 연관된 지성은 방법지 (techne) 이다. Praxis는 그 자체가 목적인 행동으로서 그 목표가 행동 외부의 그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 (heneka tinos) 행위가 아니라 그 행동 안에 내재되어 있는 (hou heneka) 것으로서 잘 행하는 것 (euprattein)을 지향한다. 이 가운데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theoria와 praxis에만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poiesis를 열등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theoria와 praxis의 차이에 보다 주목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theoria는 앎 그 자체와 연관된 행위이고, praxis는 인간의 윤리적, 정치적 행동과 연관된 행위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praxis와 poiesis의 차이를 강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프락시스적 지혜는 앎 (knowledge)도 아니고 기술적인 것 (art)도 아니다. 행해진 것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앎과는 다른 것이며, 행함 (action)은 만듦 (making)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점에서 기술과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게 좋거나 나쁜 것과 관련해서 행하는 진실되고 이성적인 능력상태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만듦 (making)은 그 외의 다른 목적 (end)을 갖고 있지만 행함 (action)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며, 좋은 행함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Aristotle 1987a, VI, 1140b)

Praxis는 행함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이고 poiesis는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행위이다. 목적에 관한 한 praxis는 poiesis의 최종 원인 (final cause) 이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정치행동은 일종의 praxis 행위이지 poiesis 행위가 아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 (zoon politikon) 이며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praxis로 이루어진다. <정치학 Politics>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인간의 삶의 방식은 생산하는 데 있지 않고 행동하는 데 있다. (Aristotle 1987b, 1254a)

인간의 존엄성은 정치적 공통체인 polis의 시민으로서의 행동 (politeuin)에 있는 것이지 한 사적 개인으로서 소비물을 생산하고 제작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 poiein, poiesis는 인간보다는 사물 (thing)과 관계되는 행위를 의미하고, prattein, praxis는 행동을 하는 사람 (agent)과 관계되는 행위를 지칭한다. 따라서 정치적 행동이 인간사를 다루는 한 그것은 praxis인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praxis는 삶의 영원성에 관계하는 행위도 아니고, 장인들이 어떤 요구에 의해 하는 작업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말과 행동을 공유하는데서 발생한다.
 이상에서 theoria, praxis, poiesis의 차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⑴ Poiesis는 theoria, praxis보다 열등하다.
⑵ Theoria는 변하지 않는 (atemporal) 것에 관한 것이며, praxis와 poiesis는 시간성 (temporality) 속에서의 행위이다.
⑶ Theoria와 praxis는 자유로 인도한다.
⑷ 정치행동은 poiesis적 행위가 아니라 praxis적 행동이다.

여기서 praxis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⑴ 위의 첫 번째, 두 번째 논의를 고려해 볼 때 praxis의 시간성과 poiesis의 시간성이 다를 가능성은 없는가?
⑵ 만일 시간성이 다르다면, praxis는 어떤 방식으로 poiesis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Praxis는 어떤 종류의 자유로 우리를 인도하는가? 그리고 praxis로서의 정치행동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하이데거의 논의를 바탕으로 praxis의 근본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이때 하이데거 철학이 제공해 주는 단초는 시간성의 차이이다. 즉 인간사에 관계되는 praxis는 인간 (하이데거 용어로는 Dasein)의 시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고, 사물과 연관되는 poiesis는 물리적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이러한 시간성의 차이를 통하여 praxis와 poiesis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praxis의 본래적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날 것이다.

II. 프락시스 개념의 역사적 변천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성의 차이로 위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답하기에 앞서 서양 정치사상에서 흔히 논의되어 온 praxis 개념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poiesis는 가치가 적은 것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게는 theoria, praxis, poiesis 중에서 theoria와 praxis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순수한 삶을 가능케 해준다. 그리스어로 theoria는 글자그대로 "지켜봄" (watching)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의 페스티발과 같은 경기를 구경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theoros와 연관된다. 따라서 theoria는 신성한 수행을 목도한다는 (witnessing) 것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Theoria가 갖는 신성함은 이 표현이 또다른 그리스어인 신을 뜻하는 단어 theos와 어원을 같이한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Theoria는 어원상 세속적인 "지켜봄" 뿐만 아니라 신의 관찰이라는 것에 이미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theorein은 후에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이미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한 혹은 신적인 어떤 행동을 의미하고, 이와 반대로 정치적 행위는 전형적으로 인간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theoria와 praxis 사이가 서로 반대 (opposition)의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은 praxis의 두 가지 형태 (form), 즉 이론가의 praxis적 삶의 형태와 실행가의 praxis적 삶의 형태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행위적이란 의미에서의 theoria와 행위적이라는 의미에서의 praxis를 대조 (contrast) 시키거나 그 둘을 반대되는 것으로 제기한 적이 결코 없다. Theoria와 praxis 모두 단지 생활을 지탱하는데 봉사하는 poiesis적 행위와는 아주 독립된 높은 수준의 여가를 전제해서 발생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praxis와 poiesis의 구별이 희석되어졌다. 왜냐하면 주된 관심이 theoria와 praxis의 차이를 밝히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스콜라주의자들에게 praxis는 actualitas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energeia라는 개념을 라틴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Actualitas는 중세의 essentia와 existentia의 구별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Essentia가 "실체" (substance) 혹은 "본질" (essence)로 인식되는 한, 실체의 실행 (actualization)으로서의 actualitas는 실재하는 (present) 어떤 것으로서 간주된다. 그 결과 actualitas는 인과적으로 실행되어지는 만듦 (making) 혹은 만들어짐 (being made) 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poiesis의 가치를 향상시켰으며 결과적으로 praxis와 poiesis의 차이를 없애는데 공헌하였다. 이런 것을 잘 나타내주는 한 예가 서양 최초의 외과수술 논문 제목에서 볼 수 있다. 그 제목은 Roger of Salermo의 "Practica chirurgica" 이다. "Mechanica" 혹은 "poietica"를 기대했던 곳에서 오늘날 의술을 "practice" 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practica" 라고 적고 있다. 중세부터 praxis는 poiesis와 혼동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혼동은 praxis를 그 행위자의 "목적적-의도적" (purposive-intentional) 행위로 파악하는 현대 정치철학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번스타인 (Richard J. Bernstein)에 의하면, 현대 정치철학에서 praxis 문제는 헤겔철학이 강조해온 "praxis에 대한 theoria의 우위" 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기되었는데 (Bernstein 1971, xi), 이 반작용은 또한 praxis를 poiesis로 해석하는 우를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현대 정치철학의 입장을 맑스 (Karl Marx),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실용주의자인 듀이 (John Dewey), 포스트-비트겐슈타인 분석철학자들 (post-Wittgenstein analytic philosophers)의 praxis에 관한 논의를 통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 반작용은 맑스에서 비롯된다. 맑스에 의하면, 헤겔이 원래 의도했던 theoria와 praxis의 통일은 이상주의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소외 (alienation)는 헤겔의 "정신" (Geist) 이라고 하는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 잠재되어 있는 소외이기 때문이다. 헤겔에 있어서 인간소외는 인간이 객관화됨 (objectified) 으로써 생기는 인식론적 소외로 변증법적 사유과정을 통해 극복된다. 이에 반해 맑스는 인간소외를 생산관계 속에서 노동의 분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체적, 물리적 소외로 본다. 인간의 소외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 속에서 "탈인간화되고" (dehumanized) "분리된" (separated) 실제 모순들로 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인간조건에 대한 극복은 요구되어질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소외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극복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소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의 개선으로 소외극복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praxis란 생산자의 주체성으로 부터 소외된 생산과정을 "자발적 생산" (spontaneous production)에 알맞은 것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물질생산과정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의 삶은 그 생산과정이 "정해진 계획에 따라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조절되어지는" (Marx 1954, 84) 자발적 생산과정을 지향한다. 여기서 praxis는 자발적 생산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praxis를 목적론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맑스에서 praxis와 poiesis의 구별은 사라진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사르트르 또한 praxis를 poiesis로 곡해한다. <존재와 무 Being and Nothingness> 에서 praxis는 인간이 즉자 (en soi)와 대자 (pour soi)로 근본적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즉자와 대자의 일치를 이룰 수는 없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그 일치를 향해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도록 자기 자신이 선택한 행위로 간주된다. 후기 사르트르는 맑시즘의 영향으로 공동계급이 완성하고자 하는 공동의 프로젝트를 행하는 것을 praxis로 본다. 초기와 후기 사르트르 모두 praxis를 개인이든 계급이든 인간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즉 인간의 의식적 행위로서의 선택이 프로젝트이고 praxis라는 것이다. "인간은 선택하기 위해 의식이 있어야 하며, 의식화되기 위해 선택을 해야만 한다" (Sartre 1994, 462). 이때 praxis는 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을 실현 내지 실행하는 구체적 행위 즉 수단으로 전락된다. 행위 자체보다는 그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해주었던 의식이 더 주가 되고 행위 그 자체는 의식의 실행자 내지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다.
 듀이의 실용주의는 praxis (그의 용어로는 action)를 그 행위를 실행하는 사람의 성장 (growth)을 향하여 종사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비록 듀이는 인간의 경험을 심리적 혹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주관주의적 해석을 피하고자 하지만, 인간은 자기 주변의 변화에 반응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자신의 행동을 재구성, 재진행시킨다고 주장함으로써 주관주의적 편견을 드러낸다. 즉 인간은 지성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으며 그러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듀이에게 있어서 행동의 목표는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성장을 이룩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성장과정 (growth-process) 그 자체이며 실제상황은 성장과정의 역사" (Dewey 1926, 275) 라고 주장한다. 듀이 역시 praxis의 목표를 praxis 자체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포스트-비트겐슈타인 분석철학자들 역시 praxis (그들 용어로는 action)를 목적론적 (teleological) 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 인식틀로써 설명하려는 초기 분석철학의 환원론자들 (reductionalists)에 반대하고 그 대신 행위자의 주관적 의미차원을 밝힘으로써 행동 (action)을 행위 (behavior)와 구별하려 한다. 인간의 행동은 그것의 시발점인 행위자의 주관적 의미차원에 주목하지 않고는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테일러 (Charles Taylor)는 인간의 행동은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주체자의 "그 행동에 상응하는 의도와 목적 때문에 발생한다" (Taylor 1964, 33)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의미차원이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의 경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 진다고 생각하는데 비해 포스트-비트겐슈타인 분석철학자들은 주체 행위자의 의도와 목적에 praxis의 원인을 배타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praxis를 수단화시킨다.
 이와 같은 현대 정치철학들 -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 분석철학 - 모두praxis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실제적 (practical) 요소를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praxis를 무엇보다도 그 행위를 실행하는 행위자 (혹은 주체)의 "목적적-의도적" (purposive-intentional) 행위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단순히 반작용적이며 인과적으로 귀납되는 "행태" (behavior)와 목적적-의도적인 "행동" (action)을 구별하는 베버 (Max Weber)의 행위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베버의 논의를 좇아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행위하는 각자가 자신의 행태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 주관적 의미가 타인의 행태를 설명하고 그럼으로써 그 과정에 지향되어 있는 한" (Weber 1968, 4) praxis 혹은 행동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praxis는 집단적인 목적론적 행위로 해석되고, 사르트르의 praxis 개념은 개인의 혹은 집단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순수하게 내부지향적인 "결정" (decision) 혹은 프로젝트로 정의된다. 실용주의자들과 포스트-비트겐슈타인 분석철학자들 또한 인간의 행위를 의도적 행동과 순수하게 반작용적이며 인과적인 행태로 양분시킨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논의들이 "주관주의적 오류" (subjectivistic error)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논의들은 행위자의 의도 (intention), 동기 (motive), 목적 (purpose), 이성 (reason), 목적론적 설명 (teleological explanation)을 강조함으로써 praxis 자체보다 그 행위자를 강조하여 praxis의 선험성 (a priority)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행위자가 자기의 의사에 따라 시발되어지는 행위의 주관적 의미에만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praxis와 poiesis의 구별을 전자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미에 따라 행해지며 후자는 생산자의 주관적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객관적 생산행위라는 의미로 구분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래 논의를 살펴보면 praxis는 인간의 주관적 의도 속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praxis는 인간의 소유물 (possession or property)이 아니라 목적 (end)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raxis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Aristotle 1987a, VI, 1140b). Praxis가 행위자의 주관적 행위로만 해석되어지면 더 이상 목적으로 간주되지 않고 그것을 통해 행위자의 주관적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전락된다. 행위자의 주관적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praxis를 수단으로 간주하고 그 결과 praxis와 poiesis의 차이는 모호해지게 되었다.

III. 하이데거의 시간성

 이러한 모호함은, 필자의 견해로는, praxis와 poiesis의 근본적 시간성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는 praxis와 poiesis 모두 시간성 속에서 행해지는 행위로 보았다. 여기서 poiesis가 praxis 보다 저차원의 행위라면 praxis의 시간성이 poiesis의 시간성과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필자는 이러한 시간성의 차이가 praxis와 poiesis의 차이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praxis가 인간과 관련되고 poiesis가 사물과 관련된 행위라고 할 때 praxis의 시간성은 인간의 의미작용이 일어나는 곳이고 poiesis의 시간성은 현재 순간들 (now-points)의 물리적 흐름을 의미하는 실재(presence)의 시간성 속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잘못은 praxis의 특징을 인간의 의미에 촛점맞춘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미가 발생되고 잉태되는, 보다 더 큰 의미가 형성되는 차원 즉 시간성의 차원을 주목하지 못한데 있다. Praxis는 인간과 밀접히 관계가 있다. 그러나 praxis가 인간과 관계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소유물 혹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수단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의미 작용이 형성되는 차원과 연관되었음을 뜻한다. 현대 정치철학은 시간성의 차이를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praxis를 poiesis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미작용 형성에 대한 시간성의 차이를 잘 설명해 주고, 그에 따라 praxis와 poiesis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 바로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이다. 다른 현대 정치철학자들과 달리 하이데거는 praxis를 단순히 theoria와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poiesis와의 구분 속에서 파악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praxis는 poiesis와 달리 인간에 "의해" 행해진다기 보다는 존재자 (beings)와 존재론적 (ontological) 으로 다른 존재 (Being)를 감지하는 (sensing) 공간인 Dasein으로서의 인간을 "통해" 일어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속성을 Dasein과 Das Man으로 구분하는데, 후자는 인간이 존재자적인 (ontic) 일상생활을 단순히 살아가는 측면을 일컬으며 전자는 존재 (Being) 그 자체에 대한 질문 (questioning)이 일어나는 공간, 즉 여러 다른 존재자들 (beings)과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존재 (Being) 그 자체 속에 실존하는 측면을 지칭한다. Das Man의 존재자적인 생활은 다른 것에 의해 매개되어 진다는 의미에서 비순수한 (inauthentic)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것을 생산하거나 (producing) 만드는 (making) 행위를 하고, Dasein은 비매개적인 순수한 (authentic) 방법으로 수행하는 (performing) 행위를 한다. 즉 poiesis는 "일상생활의 가장 현실적인 주체" (Heidegger 1962, 166) 인 Das Man의 행위이고, praxis는 "Dasein 자체를 그 자체의 존재에 있어서 이슈화하는" (Heidegger 1962, 67) 존재로서의 Dasein을 통해 일어난다.
 Praxis가 시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poiesis가 생산되는 일상생활의 시간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Dasein의 시간성 속에서 발생한다. 존재자적 존재들의 시간 (Zeit)은 존재 그 자체의 시간 (Temporalit t)과 동일시 되는 Dasein의 시간 (Zeitlichkeit)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적 시간을 "일상적" 시간 (ordinary time)이라 부르고 Dasein의 시간을 "근원적" 시간 (original time)이라 부른다. 전자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시계상의 시간을 의미하며 "현재 순간들 (now-points)의 흐름으로 묘사되어 지는" (Heidegger 1962, 474) 실재 (presence)로 구성된다. 후자는 Dasein이 존재론적으로 머무르고 있는 근본적 시간을 의미하며 단순히 어느 현 시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과거 (no-longer)와 부재하는 미래 (not-yet)로 동시에 뻗치고 있는 (stretching out)" (Heidegger 1982, 248) 시간이다.
 먼저 일상적 시간이란 시간에 대한 "전통적," (traditional) "자연적" (natural) 개념이다 (Heidegger 1982, 231-232). 이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의 시간개념인데 하인쯔 (Marion Heinz)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Heinz 1986, 183): 첫째, 일상적 시간현상을 다루는 기본적 사유틀은 자연철학이다.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통일성에 의한 결정, 자연과정의 질서라는 맥락에서 다루어 진다. 둘째, 일상적 시간은 현순간들 (now-points)로 이해되어진다. 일상적 시간의 부분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재, 존재하는 현재,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현재로 이해되어 진다. 시간 그 자체는 이러한 현순간들의 이어짐이다. 이러한 시간은 역사의 과정, 자연현상의 발생 등이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간은 하나의 선으로 즉 현순간들의 연속으로 생각되어 질 수 없다. 왜냐하면, "각 현순간들에 그 양쪽에 있는, 비록 그 순간에는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다른 현순간들에 의아스럽게도 뻗치고 있음 (stretching out)이 시간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기" (Heidegger 1982, 248)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순간이라는 것이 하나의 순간으로 고정되어 질 수 없고 그것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다. 현재의 순간에는 더 이상 그 순간에 실재하지 않는 것, 아직 그 순간에 발생하지 않은 것에 모두 "근원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실재하지 않음, 아직 실재하지 않음은 현순간에 낯선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 현순간의 내용으로서 이미 그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의 내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순간은 그 자체 내에서 전이 (transition)의 성격을 갖는다. 현재 그 자체는 이미 전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란 이미 내재적으로 전이이다. 이러한 전이로서의 현재의 순간은 하나의 부분 (piece)으로 존재하는 단순한 실재 (presence)가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전이를 구성한다. 즉 현순간들이 하나의 부분으로 존재하고 그 부분적 현순간들의 총합이 시간인 것이 아니라 현순간들은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하나의 연속성 (continuum)인 것이다. 따라서 근원적 의미에서의 시간은 한순간, 한순간 등으로 파편화 될 수 없다. 이러한 시간을 하이데거는 "근원적" (original) 시간이라 부른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는 현순간들의 합으로 이해되어지는 일상적 시간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을 옹호해 준다. 메를로퐁티는 현순간들의 이어짐을 자기모순적이라고 비판한다. <지각현상학 Phenomenology of Perception> 에서 메를로퐁티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현재라는 말로서 그 이전, 그 이후와 다른 어떤 보이지 않는 순간을 지칭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 현재를 이어짐으로 종합해서 (synthesis) 설명해야 한다. 이 때 이러한 종합은 칸트적 의미의 해결 방법,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를 시간적이다라고 말할 때 이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timeless) 어떤 종합을 이미 전제한 것이다. 둘째, 현재는 주어진 실재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곧 닥쳐 올 미래로 부터의 압력으로 과거로 전락할 것을 느끼고 있음을 또한 언명하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가 이미 현재로서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이어짐은 순수한 현재들의 이어짐이 아니다. 시간의 종합이란 현재를 통해 과거의 의미와 미래의 구조를 보는 행위이지 현재 하나로 혹은 각각의 현재들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일 객관적 세계가 시간을 지탱할 수 없다면, 그것은 시간의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에 어느 정도의 과거와 미래를 더해 줄 필요가 있다. 과거와 미래는 분명히 세계에 존재하고 있고, 또한 현재 속에 존재하고 있다. 존재가 시간적 질서가 되기 위해서 결여하고 있는 것은 다른 곳, 어제, 내일이 부재하고 있음이다. (Merleau-Ponty 1962, 412)

메를로퐁티도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라는 한 순간 속에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공존하는 근원적 시간은 Dasein의 시간이기 때문에 Dasein의 실존 (Existenz)과 밀접히 연관된다. Dasein으로서의 인간은 세계-내-존재  (being-in-the-world) 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실존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존재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Dasein이 실존하는 양식은 자기 (selfhood) 혹은 주체 (subjectivity)로서가 아니라 "배려" (Sorge) 속에서이다. Dasein은 그 자체의 존재 (Being)를 이슈화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배려를 통해 이슈화한다. "Dasein의 존재는 배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Heidegger 1962, 227)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배려를 "Dasein의 구조적 전체의 형식적, 실존적 총체" (Heidegger 1962, 237) 라고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원초적 구조적 총체로서의 배려는 Dasein의 모든 사실적 태도와 상황에 앞서 놓여 있다. 그것은 실존적으로 선험적이다. 이것은 배려가 항상 그것들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Heidegger 1962, 238)

요컨대 Dasein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배려한다는 뜻이다.
 또한 하이데거에 의하면, "배려의 원초적 구조는 [Dasein의] 시간성 속에 있다" (Heidegger 1962, 375). 왜냐하면 배려는 시간성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전체의 통일성 (identity)이 아니라 의식의 지향성 (intentionality)이 시간성 속에서 움직이는 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려 구조는 시간의 세 가지 계기들과 상응하는 세 가지 계기들로 구성된다: 실제보다 앞에 있음 (being-ahead-of-itself), 이미 실제에 들어와 있음 (being-already-in-the-world), 실제에서 만나도록 허락되어 있음 (letting-oneself-be-encountered)이 그것이다. 이러한 계기들이 Dasein의 배려의 시간성의 통합구조를 형성한다.
 배려 속에서의 시간성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계기들의 통합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배려 속에서의 시간의 통합은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단선적인 (linear) 통합이 아니다. 각각의 계기들은 서로 얽혀서 그 순간 뿐만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해 항상 열려 있다. 통합적이라는 말은 각 계기들이 시간성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각 계기들이 서로 얽혀진 채 관계하고 있다는 점에서의 종합적 (synthetic) 이다. 따라서 근원적 시간은 현 시점들의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외연분열적으로" (ekstatically) 뻗치는 시간이다. 이때 "외연분열적" 이란 말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대체 (displacement)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자그대로 외연분열적이란 "외부" (ek)에 "서있는" (static) 것이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외연분열, 밖으로 나감이란 어느 정도의 파열 (raptus)을 의미한다. 이것은 Dasein이 미래에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존재자 (beings)를 차례차례 뛰어넘음으로써 점차 기대한데로 되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이러한 뛰어넘음이 점점 시간성 자체가 갖고 있는 파열됨에 의해 만들어지는 열려진 공간을 겪어 나간다는 뜻이다. (Heidegger 1984, 205)

따라서 외연분열적이란 항상 정체되지 않고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외연분열적 시간은 결코 즉자성 (immanence)을 갖지 못한다. 외연분열적 시간으로서의 근원적 시간은 어떤 순간이든지 이미 언제나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분리된 시간이다.
 근원적 시간 속에서 각 계기들은 과거, 현재, 혹은 미래로 정해질 수 없다. 외연분열적으로 통합된 시간성의 계기들은 이미 위의 계기들을 어느 의미에서 다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날 때에는 통합된 시간성의 어느 부분으로 규정되어서 드러난다. 즉 현실적, 일상적 시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된 계기들은 결코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갖고 있던 통합된 시간성을 결코 완전히 펼칠 수 없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분리된 계기들 중 항상 부분적으로만 현전하는 (presencing) 시간이다. 즉 부재하는 (absent) 계기들이 동시에 실재하는 (present) 계기와 더불어 존재론적으로 공존하고 있으며 다만 부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외연분열적 시간이란 실재와 부재가 존재론적 차이에 의해 분열된 상태로 나타나는 시간을 일컫는다. 이러한 종류의 시간은 "때에 맞지 않는" (untimely) 시간이며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화시키는" (temporalizing) 시간이다. 일상적 시간과 달리 그것의 근거를 이루는 근원적 시간은 규정되지 않은 채 자기자신으로 부터 벗어나서 자기자신을 시간화시키는 시간인 것이다.

IV. 시간성 속에서의 프락시스

 하이데거에 의하면, poiesis가 일상적 시간에서의 행위인 반면 praxis는 근원적 시간 즉 Dasein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그는 praxis의 지적 성향인 phronesis에 담겨있는 "현재적 순간에 대한 신중한 고려"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praxis의 시간성을 밝히고 있다.
 하이데거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sophia와 phronesis의 분리를 받아들인다. 그는 sophia를 "순수한, 관찰하는 이해"로 번역하고 phronesis를 "염려하는 신중함, 즉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복리까지 관심을 갖는 신중함" (Heidegger 1992, 377) 으로 해석한다. 두 가지 성향 모두 nous를 실현하는, 즉 진리적인 것을 담지하는 순수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Noein이 본다는 것에 의존하는 한 sophia와 phronesis 모두 본다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phronesis에 있어서의 "봄" (seeing)은 idea, eidos, intuition, theorein 에서의 봄과는 다르다. 후자의 것들이 현전하는 (present) 순간에 있어서의 봄에 집중하는 반면, 전자의 봄은 "신중하게 둘러봄" (circumspective seeing) 인 것이다. 즉 phronesis 에서의 봄은 Dasein의 총체인 인간사를 다루는 봄이다. 따라서 sophia는 현전하는 것, 시간적으로는 현재하는 것, 혹은 영원히 실재하는 것에 관계되고, phronesis는 Dasein의 시간성에 속하는 "둘러봄"에 관계한다. 이론적 행위는 "단순히 봄, 둘러봄이 없이 그냥 봄" (Heidegger 1962, 99) 이며, 프락시스적 행위는 상황을 둘러보는 행위이다. Phronesis는 상황을 두루 살피는 행위이며, 둘러봄으로서의 phronesis는 "관심을 갖고" (concerned) 현재를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중하게 둘러본다는 것은 관심을 갖고 드러내는, 즉 관심을 갖고 본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여기서 눈으로만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적인 지각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관심을 갖고 배려된 통현전 (appresentation)을 시키는 것이다. (Heidegger 1985a, 274)

 관심을 갖고 둘러볼 때, phronesis에 포함된 "현재"의 의미는 그냥 "현순간" (now-point)이 아니다. Phronesis가 행동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접근하여 둘러보는 행위라면, 여기에는 행동의 지향점을 정하고 현재를 파악하며 행동의 방식을 처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hou heneka) 것에 견지함을 포함한다. 따라서 phronesis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현재"의 의미는 단순한 현순간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둘러보는 현재이다. 이와 같은 "현재"의 의미는 일상적 시간에서의 현순간과 다르다. Poiesis적인 행위, 즉 생산, 만듦에서의 "있음"은 완성되어 있음 (being-finished) 혹은 그것의 운동이 목표에 도달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상적 시간에서의 현재는 그 운동과정의 한 부분을 이루는 한 순간순간들이다. 이와 반대로 phronesis가 작동하는 현재는 "있음"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일순간 (Augenblick)인데,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로는 phronesis를 통해 상황을 보는 그 순간을 지칭한다. 일순간은 "무엇보다도 행동의 상황을 구성해주기 위한 눈을 갖고 있는" (Heidegger 1982, 287) 순간이다. 즉 phronesis에서의 현재적 일순간은 행위자가 전체의 프로젝트 혹은 목표와 연관지어서 상황을 둘러봄으로써 그 상황의 현재가 단순히 무엇이 행해졌으며 어떻게 그리 진행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미래에 어떤 것이 진행될 지를 이슈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일순간은 현전으로 존재하는 현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성 안에 있는 것을 만나도록 허락해 준다.
 일순간에서 상황을 본다는 것은 시간성 내에서 상황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무엇무엇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며, 또 "아직 무엇무엇이 아닌" 것으로서의 일순간은 "이미 무엇무엇인" 것으로서 동시에 존재한다. 요컨대, 일순간으로서의 현재는 그 자체 외연분열적인 시간성 속에서의 현재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Phronesis의 드러남에서 발견되어지는 존재로서의 prakton은 아직 무엇무엇이 아닌 존재로서 실존한다. "아직 무엇무엇이 아닌" 것으로서 그리고 사실상 관심되어지는 그 무엇으로서의 prakton은 동시에 이미 그러그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밝혀질 구성이 phronesis에 의해 정해지며 구체적으로 phronesis에 의해 다루어지게 될 것으로서 관계한다. (Heidegger 1992, 381-382)

요컨대 일순간으로서의 현재는 "구체적으로 그러그러하게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의 관계있음" (Heidegger 1992, 382) 으로 존재한다. Phronesis는 그 안에 시간화시키는 시간성, 즉 근원적 시간성을 포함하고 있는 둘러봄인 것이다.
 그러므로 praxis적 행위에서는 "현재 보고 있음"과 "보았음"이 어떤 반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해하고 있음"과 "이해했음"이 반대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Sophia에서는 현재가 우선성을 갖는데 비해 phronesis 에서는 오히려 미래가 중요해 진다. 현재 결정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행위는 항상 미래적이다. 왜냐하면 숙고 (bouleusis)와 결정 (prohairesis)은 미래를 담지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이며 "앞으로 볼"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따라서 phronesis에서의 일순간은 외연분열적인 시간성을 담고 있다. 그 일순간 속에서 나는 나의 밖에 서 있고, 나는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을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외연분열적 시간에서의 일순간은 미래와 떨어져서는 이해될 수 없다. Phronesis에서는 미래가 시간성의 우선적 양식이며, Dasein은 미래를 기투하는 만큼 세계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phronesis는 일순간으로 규정되는 순간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그 순간은 그 안에 시간화시키는 시간성을 포함하고 있다. Praxis의 지적 성향으로서의 phronesis는 그자체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따라서 phronesis로 상황을 보는 일순간은 근본적으로 Dasein의 "근원적" 시간의 시간성에서 움직인다. 이 시간성 속에서는 우리가 미래로부터 관심을 갖고, 과거와 현재를 둘러보는 숙고행위를 하지만 그 모든 계기들이 현전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전되지 않는 계기들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전하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일순간을 무엇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즉 상황을 둘러봤을 때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혹은 현전되어 나타나는 결과는 그 일순간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phronesis의 시간성을 특징으로 하는 praxis는 일상적 시간성에서 일어나는 존재자적 규정 (ontic determination)으로 환원되어 질 수 없는 행위이다. 그것은 외연분열적으로 구성된 근원적 시간 속에서 상황을 관심있게 둘러보는 행위이다. 따라서 외연분열적 시간 속에서의 praxis는 상황을 무엇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항상 가능성으로 열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려진 가능성으로서의 praxis는 어떻게 재어질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우리는 흔히 존재의 의미를 혹은 진리의 의미를 신 (God), 선 (Good), 합리성 (Rationality), 정의 (Justice), 원칙 (Principle)과 같은 변하지 않는 완벽한 어떤 것으로 상정하기 쉽다. 이것은 모든 나타난 것들의 원인으로서의 기원 (origin)을 찾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전적으로 궁극적으로 하나에 연관됨 (pros hen)의 재현 (representation)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위의 근원적 시간 속에서의 praxis는 외연분열적 계기들을 갖고 있는 행위이므로 항상 모든 가능성들을 재현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재현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근원적으로는 이미 그 순간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상황을 고려하는 행위는 비록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가능성이 그 상황에 내재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재현의 진정한 기원은 무엇으로 규정되어지지 않는 열려있음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praxis란 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지정된 폐쇄성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praxis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그냥 행함, 원초적 가능성들 중에서 어떤 것을 그저 행함이다. 왜냐하면 가능성에 열려 있을 때에만 praxis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목적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praxis는 어떤 목적 (telos) 이나 원리 (arche)를 그 기원으로 삼을 수 없다. Praxis는 목적론적 행위를 부정한다. Praxis는 우리를 특정한 목적지로 인도하지 않는다. Poiesis (making)가 어떤 목적을 이루는 행위인 반면 praxis는 "이유없음" (without why)으로 이해되는 행위이다.
 이러한 가능성에 열려 있음, 규정되어 있지 않음에 바로 인간의 자유가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열려 있음으로서의 자유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간은 기껏해야 자유의 소유물인 것이다. 자유 그 자체는 "모든 인간 존재를 초월하는 진정한 존재 일반의 규정" (Heidegger 1985b, 9) 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이러한 존재의 규정에 참여해야만 하며 따라서 자유란 인간이 결정하는 자의적 의지가 아니라 존재 (Being)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참여함에 있다. 즉 인간의 임무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용인 (letting-be)함에 있는 것이다. 자유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대로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열려진 공간에 굳건히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유라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와지며 자유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 자유란 우리가 움직이고 살고 있으며 우리의 존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이데거의 praxis 개념은 다른 현대 정치철학들 - 맑시즘, 실존주의, 실용주의, 분석철학 - 의 개념과 구별된다. 후자들은 praxis를 그 행위자의 의식에 의해 시발되는 행위로 간주하고, 따라서 그 행위자의 "의도" "동기" "목적" "이성" "목적론적 설명" 등의 맥락에서 이해하여 왔다. 이러한 praxis에 대한 주관주의적 접근과는 달리 하이데거의 praxis 개념은 praxis를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을 드러내주는 (disclosive) 행위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praxis를 목적 그 자체로서의 행위라고 함은 인간이 praxis의 저자 (author) 이기 보다는 praxis를 통해 그 존재가 드러나는 행위라는 것이다.

V. 결론

 결론적으로 위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답하자면,

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praxis가 행해지는 시간성은 poiesis가 행해지는 시간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poiesis는 일상생활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반면 praxis는 Dasein의 근원적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⑵ 따라서 praxis란 행위자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주체적, 의도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열려진 가능성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praxis로서의 정치행동은 탈원칙적 (an-archic) 이다. 또한 이러한 praxis를 통해 얻어지는 자유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한 무엇으로 부터의 자유 (freedom-from), 혹은 무엇을 위한 자유 (freedom-for)가 아니라 praxis가 존재론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주는 규정되지 않은 열려있음으로서의 자유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praxis와 그에 연관된 자유는 규정되지 않은 열려있음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praxis는 탈원칙적 (an-archic)이다. 이러한 탈원칙적 praxis는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가? 어떻게 우리가 현실정치에서 활용할 수 있는가?
 첫째, 하이데거적 의미의 praxis는 정치현상이 왜 항상 애매하고 (ambiguous) 이중적으로 해석되어지는 (equivocal) 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정치현상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것들을 분석하기 위한 과학적 기술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정치행위가 praxis적인 한 정치적 praxis 그 자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탈원칙적 애매성 때문이다. 여기서 praxis에 관한 아렌트 (Hannah Arendt)의 논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에서 아렌트는 praxis를 가역불가능 (irreversible) 하며 그 효과는 무한하고 예측불가능 (unpredictable)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praxis는 다양성 (plurality)을 특징으로 하며 항상 손상받기 쉬운 (frail)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애매성, 무한성, 손상받기 쉬움, 다양성은 하이데거의 근원적 시간성 속에서 행해지는 praxis의 탈원칙성에 의해 이해되어 질 수 있다고 본다. 아렌트가 애매성과 손상받기 쉬움의 원인을 praxis 속에 내재된 다양성에 귀속시킨 반면 하이데거는 praxis가 이루어지는 시간성 속에서 찾는다. 탈원칙적 praxis는 도덕적 상대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리스적 정치적 삶 (bios politikos)은 그러한 손상받기 쉬움과 애매성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그것들 나름대로 인식, 재구성하려는 노력이었으며, 따라서 하이데거의 탈원칙적 praxis는 이러한 그리스적 노력에 대한 하나의 또다른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둘째, 탈원칙적 praxis는 타인에 대한 지배 (mastery)를 방지하고 그 대신 타자성 (otherness)을 용인 (letting-be) 해준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용인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다양한 목소리의 생생한 경연이라면 타인의 타자성을 인정할 때에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용인의 중요성은 오늘날 서구에서 강조되고 있는 환경정치학 (ecological politics)과 페미니즘 (feminism) 에서도 볼 수 있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지구에 대한 지배와 더불어 인간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켜 왔으며 그 결과 인간은 환경의 파괴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파괴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지배를 정당화 할 수 없다는 용인의 자세를 무시한 결과이다. 또한 용인의 정신은 페미니즘을 지지해 준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남성다움 (masculinity)과 동일시 되어 왔고 따라서 여기서 배제된 여성다움 (feminity)을 회복시켜 인간의 한 속성으로 다시 포함시키는 데에는 여성다움에 대한 용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요컨대 용인의 정치철학적 함의는 타인이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갖고 있는 타자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타자성이 용인되지 않는다면 정치란 타인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정치에선 결국 "개인들이 자기 확신을 위한 투쟁 속에서만 타인 혹은 세계와 만날 수 있을 뿐" (Thiele 1994, 288) 이다. 탈원칙적 praxis의 정치적 교훈은 타자성을 용인하고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의 덕목인 다양성을 보장해 주는데 있다.
 이상과 같이 하이데거의 시간성 속에서의 praxis 개념해석은 praxis와 poiesis의 존재론적 차이를 잘 드러내 줌으로써 praxis의 본래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탈원칙적 praxis를 통한 용인의 미덕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사회의 민주주의 정치를 배양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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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cholas Lobkowicz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theoria와 praxis의 관계를 추상적인 이념과 그것의 구체적 적용 혹은 실현 사이의 반대 (opposition)로서가 아니라, 삶의 다른 두가지 차원을 구성하는 두 가지 종류의 행위들 (activities) 사이의 긴장 (tension)으로 이해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고대 그리스적 전통을 이어받아 theoria와 praxis의 차이를 근본적 반대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차이로 이해한다. Lobkowicz 1967, 26.
 그리스적 의미의 praxis와 poiesis를 인간과 사물에 관계되는 행위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에 관해서는 Taminiaux 1991, 111을 참조하라.
 특히 Nicholas Lobkowicz는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신적인" (divine) 요소와 "인간적인" (human) 요소가 혼재하고 있으며 그 두 요소가 각각 theoria와  praxis를 통해 나타난다고 본다. Lobkowicz 1977, 14-15.
 하이데거에 의하면, 스콜라주의자들이 "energeia"를 "actualitas"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원래 energeia는 실현된 상태 (stat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aletheiological) 방식으로 채워감 (fulfilling), 현전함 (presencing)의 과정 (process)이다. 스콜라철학은 energeia에 포함되어 있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탈색시킴으로써 그것을 실현됨 (being-actualized), 만들어짐 (being-made)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주관적 "행동"과 객관적 "행태"로 나누고 이러한 구별의 시초를 베버에 소급시키는 학자로는 Fred Dallmayr가 있다. 여기서의 필자 논의도 이러한 Dallmayr의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보다 자세한 Dallmayr의 견해에 관해서는 Dallmayr 1984, 47-48을 참조하라.
 하버마스는 베버 논의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주관주의적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베버 행동이론의 네 가지 종류는 그 행동에 내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주관적 경향의 양상에 따라 나뉘어 진 것으로 주관적 의도에 근거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간주되는 것은 적어도 둘 이상의 말하는, 또는 행동하는 주체들 사이의 상호개인적인 관계 즉 언어적으로 이해에 도달하는 관계가 아니라, 홀로 외로이 존재하는 행동주체자의 목적적 행위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베버의 주관주의를 비판한 하버마스 자신도 주관주의로부터 자유로와 보이지 않는다. 이상적인 의사소통 상황에서 개인들간의 소통을 매개로 하여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훗설 (Edmund Husserl)과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의 출발점이 개인적 주체라는 주관주의적 견해를 담지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J rgen Habermas 1984, 279를 참조하라.
 하이데거는 Zeitlichkeit와 Temporalit t를 구별한다: 전자는 Dasein의 시간이고 후자는 존재의 시간이다. 시간성이 Dasein에 연관되는 한 그것은 Zeitlichkeit이다. 이 구별은 처음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25-6 겨울학기 세미나에서, 하이데거는 여전히 Zeitlichkeit를 "세속적" (vulgar) 시간으로 사용하고, Temporalit t를 Dasein의 시간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점차 Zeitlichkeit와 Temporalit t의 차이의 중요성이 없어지고 Being and Time, The Basic Problems of Phenomenology 에서는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Zeitlichkeit를 그것이 Dasein의 존재 (Being)에 관계되는 한 Temporalit t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둘의 자세한 차이에 관해서는 Fran oise Dastur 1996, 169를 참조하라.
 Graeme Nicholson은 배려 속에서의 시간의 통합구조를 종합적 (synthetic) 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종합적" 이라는 말은 각 계기들을 통일적으로 포함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떼어질 수 없는 형태로 얽혀있다는 점에서 종합적이라는 것이다. Nicholson 1986, 219.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이유없음" (without why)이 "근거없음" (without ground)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장미꽃이 이유없이 피었다고 할 때 그것은 장미꽃이 피었기 때문에 피었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장미꽃이 피었기 때문에 장미꽃이 피었다는 말은 장미가 핀 것에 대한 근거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Heidegger 1991, 36-38.
 Hannah Arendt의 praxis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Arendt 1958, 제5장을 참조하라.
 Michael Zimmerman은 하이데거 정치철학의 환경론적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는 학자들 중 하나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중심주의적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 인류에게 용인의 중요성을 배우도록 일깨워 준 점, 인류가 사물들을 지배하는 대신 보호 내지는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들어 하이데거 사상이 오늘날의 환경보호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Zimmerman 1990, 242-243.
 Leslie Paul Thiele는 페미니즘에 포함된 용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남성은 "행함"으로, 여성은 "있음"으로 동일시된다는 Nancy Chodorow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사회의 전통적 (자유주의적, 가부장적) 이해에 대한 점증하고 있는 비판과 연결시킨다. 이에 따르면,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남성의 주권으로 묘사되는 자유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Thiele 1994,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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