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식 게시판

압바스 시대 문학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4.27|조회수162 목록 댓글 0

이슬람 제국의 기초를 이룩한 우마이야조는 알리파와 손을 잡은 예언자 가문의 일가인 압바스가에 의해 멸망하고(750년) 압바스조가 창건되었다. 초대 칼리파에는 예언자의 숙부인 아부 알 압바스(Abu al-'Abbas)가 즉위하였으며 이후 몽골족이 바그다드를 함락(1258년)할 때까지 대략 500여년간 존속하였다. 압바스조의 역사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정치·문화적으로 번성하였던 시기로서 황금시대(750∼1055)와 쇠퇴기인 은시대(1055∼1258)이다.

 

1. 황금시대

 

아랍인 우월주의 정책을 폈던 우마이야조와는 달리 새 왕조에서는 정권 창출에 크게 기여한 페르시아인들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새 왕조에서는 아랍적인 색채보다는 페르시아적인 요소가 강화되어 페르시아의 전제 정치와 행정 직제 등이 도입되고 페르시아 출신들이 고위 관직에 등용되었다. 새로운 도읍지도 페르시아쪽에 가까운 바그다드로 옮겨졌다.

 

이제 바그다드는 아랍인 뿐만아니라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인도인 등 가지각색의 인종과 문화, 종교가 뒤섞이는 범세계적인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압바스조의 바그다드는 풍부한 수자원과 인도무역의 중개지라는 유리한 지리적 자연적 조건 덕택에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어 경제적 중심지로 발달되었다.

 

이 시기는 정치사적으로도 황금기를 구가한 시기지만 문학사적으로도 황금기였다. 이 시기의 칼리파들은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구분하지 않고 학문과 문학 활동을 적극 장려하였다. 특히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Harun al-Rashid)의 재위 기간(786∼809)이 최고 전성기였다. 압바스 시대 문학의 특징은 문학 활동을 주도한 시인이나 작가들이 대부분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이거나 비아랍계 무슬림 개종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압바스 시대의 시문학은 압바스 정권에 의해 조장된 경건하고 종교적인 분위기와 외래 문화 특히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자힐리야 시대와 우마이야 시대의 이상이었던 <남성의 덕목>들은 압바스조에 와서 아랍 우월주의가 무너지면서 <종교>에 밀려나고 말았다. "자힐리야 시는 완벽하다"라는 정설이 완전히 깨진 것은 바로 이 무렵에 와서였다.

 

이와같이 문학적인 환경과 문학 활동의 주체가 바뀌면서 시문학의 경향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페르시아인들이 아라비아 시에 들여온 것은 생생하고 우아한 이미지, 세련된 시어, 오묘하고 다정다감한 감정과 풍부한 착상이었다. 그리하여 아랍 시의 언어는 고전 아랍어의 정수와 격조를 잃지 않으면서 보다 단순하고 세련된 언어로 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시는 과장과 허풍, 화려한 수사와 풍부한 상상력이 현저한 것이 특징적이었다. 고대 아라비아의 시인중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무타납비(al-Mutanabbi,915∼965)가 이 문체의 대표적 시인이다. 무타납비는 숭고함과 과장에 빠지는 장엄체의 시 문체때문에 흔히 동양의 빅토르 위고(Victor Hugo)로 불린다. 특히, 알렙포의 총독 사이프 다울라(Sayf al-Dawla)에게 바쳐진 칭송시를 통해 그는 이슬람 이전의 시문학의 전통을 부활시켰으며 놀라운 완숙미를 보여주는 많은 시를 남겼다.

 

이슬람과 더불어 기독교, 유태교, 조로아스터교, 사비교, 마니교 등이 공존한 압바스조에서는 종교적 분위기가 강조되었고 이는 시문학에도 반영되었다. 시인 아부 알 아타히야(Abu al-'Atahiya)는 그의 시에서 세속적 쾌락의 허무함과 신에 대한 경외심, 금욕생활을 훈계함으로써 금욕주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압바스 사회에는 경제적 물질적 번영과 함께 사치와 향락, 도덕적 타락 현상이 만연하였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 현상을 반영하여 사랑과 술을 노래한 시들이 많이 나타났다. 아부 누와스는 술을 예찬한 그의 주시(酒詩, Khamriyyat)에서 시적 재능을 가장 마음껏 발휘하였다.

 

시리아 출신의 장님 시인 아부 알 알라 알 마아리(Abu al-'Ala' al-Ma'ari)는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경향의 소유자로서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철학적인 내용의 시를 많이 지었다. 그는 단테의 {신곡}에 비유되곤 하는 산문 형태의 {용서의 서간문(Risalat al-Ghufran)}이라는 명작을 남겼다.

 

이 시기 산문 문학에서는 우마이야조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 2세의 서관이던 압둘 하미드 알 카팁('Abdu 'l-Hamid al-Katib, 750년 사망)이 작성하던 서간문과는 다른 새로운 산문이 나타났다. 압둘 하미드 알 카팁의 제자로서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 초기에 걸쳐 살았던 이븐 알 무깟파아는 인도의 동물 우화를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한 {칼릴라와 딤나}를 짓는 등 왕과 궁정관리들의 행동 지침을 제시한 궁정 서관문학을 주도하였다.

 

또 당대 최고의 산문작가인 알 자히즈는 40여개의 작품을 남긴 다산 작가로서 수전노와 도둑 등을 소재로 한 일화집 같은 오락성의 책을 많이 저술하였다. 그동안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공식적인 문어체 문학을 일반 대중계층에까지 확대함으로써 대중문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수전노(al-Bukhala')}를 비롯해 백과사전격의 {동물의 책(Kitab al-hayawan)}과 문학비평의 기초를 놓은 {명유(明喩)와 상설(祥說)의 책(Kitab al-Bayan wa-'l- Tabyin)}등을 남겼다. 특히 그의 인물 묘사나 수필들은 사회에 대한 묘사와 심리적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아랍 문학을 아답의 단계에서 새로운 예술적인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자힐리야 시대이래 구전되어오던 이야기와 설화들이 이 시기에 수집, 정리되어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자힐리야 시대 영웅 시인인 안타라의 생애를 소재로한 {안타라 이야기}가 있다. 또한 후에 {천일야화}의 원천이 된 {천개의 전설(Hazar Afsana)}이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고 다른 아랍적인 이야기들이 이 책에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아랍의 언어학과 문헌학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는 가운데 이븐 꾸타이바(Ibn Qutayba)와 이븐 알 나딤(Ibn al-Nadim)은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되는 저술을 최초로 남겼다. 이븐 꾸타이바는 문체의 입문서로 철자법, 정음법, 사전 편찬법을 다룬 {서기의 예(禮)(Adab al -Katib)}와 통치, 전쟁, 고상함, 우정, 여자 등 특정 주제를 다룬 {역사의 정수('Uyun al-Akhbar)}를 저술하였다. 이븐 알 나딤은 988년까지의 모든 학문분야에서 아랍어로 쓰여져 전해지는 저술과 편찬자들에관한 정보를 기록한 일종의 도서목록인 {알 피흐리스트 al-Fihrist}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히즈라 4세기 말까지의 아랍 문학사의 유일한 개요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부 알 파라즈 알 이스파하니(Abu al-Faraj al-Isfahani, 967년 사망)는 당대까지의 아라비아시의 시사(詩史)라고 할만한 {노래의 책(Kitab al-Aghani)}을 펴냈다. 이 책은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를 위하여 선정된 약 100편의 시가를 기초로 여기에 자힐리야 시대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뽑은 많은 시가를 첨가한 것이다. 먼저 시구와 시에 붙여진 곡조를 소개하고 그것을 지은 시인과 작곡자의 생애를 기술한 다음, 거기에 전승과 일화를 덧붙이기도 함으로써 아랍 문학사상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유명한 학자이자 대신인 싸히브 이븐 압바드(Sahib b. 'Abbad)는 여행을 떠날 때면 30마리의 낙타에 1만권의 책을 싣고 다녔는데 {노래의 책}이 나온 이후부터는 이 책만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이 책은 문학상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압바스조 이전의 아랍인의 역사·사회·교육·음악 등을 알 수 있는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791년 칼릴 이븐 아흐마드(Khalil b. Ahmad)은 최초의 아랍어 사전인 {알 아인 al-'Ayn}을 저술하였다. 페르시아계로서 칼릴의 제자인 시바와이히(Sibawaihi)는 793년에 최초의 아랍어 문법서인 {알 키탑 al-Kitab}을 썼다. 이 시기에 또한 예언자의 성전(聖傳)과 역사서들의 저술이 활발하였다.

 

2. 은시대

 

압바스조의 쇠퇴와 몰락의 조짐은 이미 황금시대 중반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칼리파 무타씸(Mu'tasim, 833-842년 재위)은 터키족 출신으로 근위대를 구성하였는데 이들 터키족 용병들은 칼리파의 선출과 폐위를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소요와 암살, 매관 매직 등 부패와 불안정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동안 전권을 행사하던 칼리파들은 겨우 자신의 이름이 주화에 주조되거나 금요 예배에서 예배를 이끄는 형식적인 통치자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군사령관에게 집중되어 칼리파들의 권위는 유명무실하고 불안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칼리파위가 쇠퇴하고 중앙집권이 약화되자 지방주에서는 군소 왕조들이 일어났다.  그중 페르시아 왕조인 부와이흐조가 100년간 바그다드를 지배함으로써 터키족 근위대의 공포 정치가 분쇄되었다.  그후 1055년 터키인들의 셀주끄조가 이슬람 세계의 동부 지역을 재통일하게되나 1258년 몽골족의 바그다드 점령으로 압바스조는 멸망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은 문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체로 문학 작품의 양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하락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문학의 장이 소수의 지식 계층에 국한되어 경직된 사고와 활기를 잃은 채 탁상공론과 현학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창작 활동보다는 일반적인 개요서나 백과사전의 저술이 유행하게 되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페르시아 문학이 더 활발하였다.  페르시아의 유명한 시인이자 학자였던 우마르 카이얌('Umar Khayyam,1050∼1122)은 {루바이야트 Ruba'iyyat}로 잘 알려져있다. 이 시기의 또다른 문학적 특징은 바그다드의 니자미야(Nizamiya)학원 같은 학교가 건립됨으로써 학문적 전통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것이다.  이곳에서의 교육 방법은 주로 암기에 의존하는 것으로 어린 학생들은 꾸란, 예언자의 성전, 시와 마까마트를 암송하였는데 이같은 교육방법은 창의적인 사고의 계발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아랍의 대중문학 가운데 웃음과 미소를 자아내는 소화(笑話)의 주인공 주하(Juha,1208∼1284)가 이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보 주하의 기담}은 상식에서 벗어난 내용과 말장난에 가까운 어휘 구사, 신랄한 조소와 익살로 그 가치가 비하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과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 등을 기담(nadira)이라는 독특한 문학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이집트의 {바보 주하의 기담}은 주하가 지닌 상징성과 이집트인들의 서민적 정서, 정치적· 사회적 배경 때문에 다른 어느 아랍 지역에서보다 널리 알려졌다.  이야기의 원천이 아랍에서 출발하여 페르시아, 터키로 전파된 후 이집트에서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바보 주하의 기담}은 세계문학적인 범주에까지 포함될 수 있으며 순수 아랍·이슬람 문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기교적인 면에서 산문의 극치라고 일컬어지는 {마까마}라는 문학의 장르가 유행한것도 이 시기이다.  10세기경 바디아 알 자만 알 하마다니(Badi' al-Zaman al-Hamadani)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각운 산문체로 쓰여졌다. 바스라의 알하리리(al-Hariri, 1054∼1122)의 작품이 특히 명성을 얻었다. 본래 '마까마'는 집회나 문학적 토론의 모임을 뜻하였으나 후에 걸인들의 푸념도 마까마라고 불렀다.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마까마는 이 푸념이 발전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마까마가 정서적으로 좋지않은 부도덕하고 경박한 것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마까마에서는 셈족에게서 발달된 적이 없는 극적 문체를 엿볼 수 있는데 알 하마다니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방랑자를 내세운 것처럼 하리리도 아부 자이드(Abu Zayd)를 화자로 내세워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즉흥적으로 수사와 시, 학식을 과시하게 하였다.  주인공 아부 자이드의 매력은 교활하고 줏대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화술과 교훈적인 설교, 흥겨운 민요와 상스러운 농담이 뒤섞인채 애가속에 나오는 위트와 금언에 있다.  하리리의 마까마는 <꾸란 다음으로 아랍어의 보고(寶庫)>라할 만큼 최고의 언어적 기교와 함께 당시 아랍 이슬람 사회의 언어와 관습,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원이 된다.  마까마 문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학가들이 모방하여 썼으나 하리리의 작품을 능가하지는 못하였으며 후에 페르시아·히브리 문학에도 도입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