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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계간<유심>지에 문창길시인론 발표

작성자민들레|작성시간03.01.13|조회수122 목록 댓글 0

시적 긴장감과 현실성, 조율하기
― 문창길론 ―

조미숙

1. 1980∼90년대와 시인 문창길

엘리어트의 말처럼 시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는 무의미한 오류 반복이다. 하지만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시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시인에게 짐지워진 고민이고 풀리지 않는 숙제일 터이다.

우리 나라 80년대의 시를 이야기하자면 두 개의 큰 사건을 떠올리며 시작해야 한다. 1979년의 10·26사태와 잇단 12·12 사태, 이것은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향한 기대의 변죽만 울렸다가 다시 70년대의 암울한 문학 풍토 속으로 들어갈 것을 강권하는 것이었고 문학인들은 자신의 전부를 걸고 이에 투쟁을 다짐하여야 했다. 지식인들이 광주사태 같은 미증유의 민족적 아픔을 모른 척 하거나 외면하고 살아갈 도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4·19로 김수영 같은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리얼리즘적 시쓰기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처럼 1980년대의 시인들은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시로써 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80년대는 시의 시대라 일컬어진다.

당시 각박한 현실 속에서 소설은 위축되는 반면, 시는 다양한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것은 시라는 장르가 혹독한 검열 기제와 정보 장치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기법과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다. 이것은 80년대의 시가 단순한 탄식이나 현실고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90년대, 표면적으로나마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거대담론보다는 미시담론이 제기되는 시대이다. 80년대와 다른 시 정신이 요구되면서 시의 정체성은 강하게 변화되었다. 이런 격변기에 문창길 시인이 있다.

김수영의 시 구절에 “사물을 바로 보마”라는 말이 있다. 사물을 바로 본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관심이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각오하는 말이다. ‘보다’는 ‘알다’이고 ‘인식하다’이며 ‘보이다’와 연관된다. 사실 바로 보아야만 바로 알고 바로 깨달으며 바로 보일 수도, 말하여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로 보려는 시인의 각고를 문창길의 시에서 볼 수 있다. 각 시가 쓰여진 날짜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아 시간적 거리나 공간적 근접성 등 자세한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으나, 대부분의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항시 역사, 현실과 정면 대결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는 아름다움이나 시어의 세련됨 안에 잠자기보다 늘 컬컬한 목소리로 현실을 개탄하며 아파하고 때로는 격한 호통도 치려 하고 있다. 그의 시어는 일상어와 다를 바 없다. 때로는 욕설이, 때로는 대화체가 그대로 시에 삽입된다. 시는 그에게 있어 생활이고 현실인 것이다.

2. 시적 대상-서민, 서민의식

문창길의 시는 서민의식을 바탕으로, 시적 소재는 주로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거나 일상이다. 거시적인 역사 탐구를 보이는 시에서도 역시 서민의식이 깔려 있다. 그는 꾸준히 없는 자, 빼앗긴 자, 소외된 자, 뿌리뽑힌 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가 형상화하는 인물들은 룸펜이 아니며 온몸으로 삶의 치열한 현장을 견뎌내는 이들이다. 배추장수, 연탄장수, 생선장수, 과일장수, 방어진 상회, 대림상회 등 시장통 사람들이거나 공사판 잡부, 용접공, 기능공에서부터 목수 등의 막노동자들, 그리고 어부나 농부, 미화원에 이르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성실과 땀만이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줄 수 있는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다. 때로는 포주와 매미, 창녀 등의 뿌리뽑힌 자들까지도 이에 포함되기도 한다.

알맹이도 없이 껍데기만 남은 나는
눅눅한 쓰레기통 구석에 구겨져 있다
이미 저 밑바닥에 버려진 이웃들이
거친 숨을 밭아내고 있다
그래 나는 늘 버려져야 하는 것인지 몰라
예닐곱 개구장이들의 손끝에서 아니면,
신사 숙녀 너희들이 던지는
동전 몇개의 값으로 가볍게 불려졌다가
그렇게 빈 껍데기 또는 천덕스런 쓰레기로 남아
어느 소각장에서 이름 없는 재로 흩뿌려지는
훠이훠이 바람에 밀려 한 세상 숨넘기는 나는
아이스크림 봉지이거나 황 씨
나의 이름은 그 황씨 아니면 막노동자
그려 이 나라 자본의 자식들이
위선의 두 얼굴을 가진 막정치꾼들이
토해 놓거나 퍼질러 놓은 오물더미 속에서
아둥거리고 바둥거리며 살아야 하는 나는
한국인 황 씨, 황 씨-이
거리마다 아이스크림의 단침들이 질질 흘러
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썩어드는
오 피폐한 공화국이여
가볍게 치켜들고 쉽게 버려지는 손끝에서
목줄은 더욱 구겨지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너희들의 아이스크림을
지켜주기 위해 오늘도 그럴싸한 껍데기로
감싸안고 있는 이 차거운 시대
뜨거운 분노의 이름 황 씨
황 씨-이
― 〈아이스크림 껍질과 황 씨〉 전문

가스통 바슐라르는 시를 읽음에 있어 너무 빨리 읽어버려 큰 덩치를 통째로 삼켜버릴 위험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독자가 해결 가능한 크기로 시의 난제를 가능한 한 많은 부문으로 나누어 읽을 것을 권하면서 “잘 씹으세요. 조금씩 마시세요. 시를 한 행 한 행 맛보세요”라고 말했다.1)

위의 시는 바로 이런 독법이 필요한 시이다. 얼핏 읽기에는 단순 병치인 것 같은 두 단어―아이스크림 그리고 황 씨―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시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아이스크림이라는 소비재와 막노동자의 비애를 등치시키는 데 이르게 한다. 시의 초반부에서 ‘나’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인 채, “알맹이도 없이 껍데기만 남은”, “늘 버려져야 하는”, “바람에 밀려 한세상 숨넘기는” 존재로 묘사된다. 11행에 와서야 그것은 ‘아이스크림 봉지’라고 정체가 드러나는데 문제는 “∼이거나 황 씨”, “아니면 막노동자”이다. 알맹이 없이 무의미하게 버려지며 자본에 의해 가볍게 불리는 존재가 아이스크림이라면 황씨를 비롯한 막노동자들의 삶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 시인의 인식이다.

그들은 “이 나라 자본의 자식들이 위선의 두 얼굴을 가진 막정치꾼들이 토해 놓거나 퍼질러 놓은 오물더미 속에서 아둥거리고 바둥거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1960년대부터 한국은 경제개발 계획 시대에 진입한다. 그것은 조국의 근대화를 결과하는 것이지만 근대화와 산업화는 부의 편중을 가져온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는 “거리마다 아이스크림의 단침들”로 “질질 흘러”넘치지만 그들의 풍요와는 대조적으로 이땅의 수많은 가난한 ‘황 씨’들은 부조리한 사회의 희생양과 같이 “어쩔 수 없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뜨거운 분노의 이름”이다.

시인의 ‘없는 자’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실정에까지 구체적 관심을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아닐 듯한 서민들의 편지까지 시화하여 그를 통해 농정 문제, 빚 문제, 그리고 노인네들이 주가 되는 농촌의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여실하게 드러난다(〈나의 살던 하궁 1리에서〉).
그런가 하면 시와 드라마를 결합함으로써 범속함, 통속성과 숭고함을 혼합하는 기법(mixing of style)을 시도하기도 한다.2)

3. 미래지향적 세계관

사회학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거대한 역사적 국면이 다양한 개인들의 내면 생활과 외적 생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이해하게 하여 자기 자신의 위치를 그가 몸담고 있는 시대 속에서 찾아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시대인들의 생활 기회를 인식하면서 자신의 생활 기회를 알 수 있다.3) 문창길의 시에서 거대 역사적 국면과 개인 내면과의 연관을 이해하는 시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이 잘 나타난다. 시인은 늘 역사와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문창길의 시는 미래지향적 세계관이 주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희망에 대한 기구와 아이들에 대한 기대, 그리고 낙관적 역사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1) 희망의 세계관
시인의 없는 자에 대한 따뜻한 시각은 앞날에 대한 비전 제시로 나타난다. 그것은 희망이다. 시인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시집 전반부, ‘묶음 하나’의 시 중 희망이 중요 모티프가 되어 있는 시들을 뽑아 표로 만들어 본 것인데, 시적 대상이 서민이라는 것과 함께 시인의 한결같은 희망에의 관심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희망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란 ‘얻고자 이루고자 바라는 것, 앞날에 어떤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 나아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기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인식, 강한 미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무조건적은 아니다. 때로는 ‘아득히 멀’기도 하고 때로는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희망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시들을 살펴보며 논의를 전개하여 보자.

①배추장사 김 씨의 풋풋한 손끝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언덕을 오르내리는
연탄장수 석 씨의 까만 얼굴에서
생선칼을 다루는 연희엄마의
불거진 팔뚝에서
또는, 딸기물에 젖어 붉은 송 씨 아주머니의
흔들거리는 전대주머니 속에서
희망은 늘 그렇게 담겨 있습니다.
― 〈삼양동 사람들〉 中

①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을 가진 이들은 모두 건강한 삶을 지향하고 있다. 작가에 의하여 ‘어둔 하늘 한 폭엔 유난히 반짝거리는 이름모를 별들’로 그려지는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평범한 이웃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희망을 꿈꾸며 살고 있고, 작가는 그런 그들의 꿈을 ‘선연한 꿈으로 피어오’른다고 표현한다. 시인의 희망에의 기대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인식이 잘 나타난다.

②이른 새벽 공장에 나가는
아내의 푸석한 뒷모습을 본다.
다섯 살배기 딸년의 앙징스런 주먹손에
이미 쥐어준 동전 몇 개가, 막연한
희망처럼 달그락거린다.
(……)
너는 이 나라 특별시 삼양동
공사판 잡부 길용이의 딸년
― 〈밝은이-길용 씨의 희망〉 中

그러나 희망 가진 이들의 내면적 삶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쓸쓸하고 외롭다. 공장에 나가는 길용씨의 아내는 푸석한 얼굴로 건강하지 않지만 이른 새벽, 집을 나서야 한다. 화자인 길용씨는 공사판 잡부이다. 이들의 절대적 가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용씨는 천진스런 딸아이의 손에 쥐어준 동전 몇 개를 통해서라도 ‘막연’하지만 굳이 희망을 보려 한다. 그것은 삶의 객관적 척박함에 지지 않겠다는 적극적 삶의 표현형태이기도 하다. 우리의 빼앗기고 소외된 역사를 축소해 놓은 듯한 곳이 삼양동이기에 그의 시에는 삼양동이 자주 등장한다.4)

③굳이 절망일 것도 없는 선창가
막술집에서 우리는 낯선 눈빛들을 나눈다
그들의 거친 팔뚝엔 이미
한 모금의 연기를 뿜어낸 담배꽁초가
한때의 열정을 식히며
쉽게 버려질 것을 예감하고 있다
(……)
그들의 어깨 위로 달큰한
희망 한 점 살빛으로 일어선다
― 〈방어진 포구에서〉 中

‘굳이 절망일 것도 없’다 함은 희망적이지 않다는 표현이다. 절망에 가깝지만 절망하지 않는 어부들, 그들은 ‘한때의 열정을 식히며 쉽게 버려질 것을 예감’하는 담배꽁초처럼 버려질 존재들이다. 극도로 성장하는 산업사회에서 1차적 생산양식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자본과 부에서 제외되며 ‘낡은 뱃전’, ‘짓무른 도시의 하수’, ‘해진 그물’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절대적인 절망과 같은 시의 분위기는 작품 후반부로 가면서 반전을 보인다. “그들의 어깨 위로 달큰한 희망 한 점 살빛으로 일어선다”-희망을 가질 수 없는 객관적 상황 하에서도 시인은 희망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희망은 어떠한 모습일까.

④이른 아침 시린 가슴을 안고
가득 찬 리어카를 이끌며
골목 쓰레기를 거두는 청소부
이 씨의 입김 서린 희망이 그렇고,
이백 몇십 부의 조간을
가는 허리에 안고 집집마다 신문을 던지는
여중생 숙이의 앳띤 희망이 그렇고,
남들보다 먼저 가게문을 열어야 된다며
잔기침 몇 번으로 하룻장사를 알리는
대림상회 황 노인의 주름진 희망이 그렇고,
(……)
흰새벽 햇살만큼 어둔 그림자를 밀쳐낸다.
― 〈신용협동조합 건물이 있는 풍경〉 中

청소부 이씨의 희망은 그가 해야 하는 새벽일처럼 입김어리며 가슴 시린 것이다. 어린 몸으로 신문배달을 해야 하는 여중생 숙이가 느껴야 할 ‘이백 몇십부의 조간’처럼 무겁기도 하며 황노인의 잔기침처럼 불건강하기도 하다. 희망을 가진 개인 개인은 모두 자신의 생활과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건강하지 않거나 가난하다. 시인의 대상에 대한 애착에 의하여 포착된 그들 각자의 삶의 양태는 다르고 그 희망의 모습도 다르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의 희망이 모두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꿈은 ‘설익은’ 것이며 그들은 늘 ‘분주하’기만 한 것이다. 분주하기만 할 뿐, 실현 가능성은 적은 그들의 희망이기에 그들은 더욱 간절하고 절박하다.

낟알 같은 희망을 흙으로 다질 때
소낙비는 더욱 세게 마른 가슴들을 적신다 (〈서정리역〉 中)

가지마다 희망처럼 피어나는
이른 사월의 진달래꽃 송이송이들 (〈진달래, 그 사월의〉 中)

아 이 요염한 정욕의 밤
희망의 꼿꼿한 등뼈 하나 세우리라. (〈가로등〉 中)

옥이 가시내의 꿈처럼 희망처럼
온 몸에 뜨거운 피 흘러 들겠지 (〈한강에게〉 中)

하늘이 파아란 나라의 희망을 위해
그대들 그렇게 쓰러져 갔는가 (〈하얀 비망록〉 中)

희망처럼 떠 있는 태양을 향해 굽은 등뼈를 곧추세우는 갈대들의 긴 그림자 흔들며 떠난다 (……) 희망은 어느 곳이든 불빛이 닿는 곳이면 살아 있는 것 그대 척박한 몸으로 부질없이 찾아드는 달빛을 지우고……(〈그에게〉 中)

어머님의 주름진 소망이 흔들린다.

희망처럼 떠 있는
순이의 별꽃이 흔들린다. (〈바람〉中)

1.5평의 의식 속에 거미줄이 쳐지고 그리울 것도 없는 곤충들이 어둠을 재고 있다. 13월을 가리키는 희망을 쫓으며 침묵으로 그려진 숫자들을 지우고 있을 때 (〈시 한편을 쓰면서〉 中)

때로 희망은 ‘낟알’ ‘진달래꽃’ ‘가로등’ ‘태양’에 대비되며 ‘옥이 가시내의 꿈’이라든지 ‘하늘이 파아란 나라’의 바람과 등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희망의 긍정적 양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덧없는 희망의 부질없음도 지적한다. 물론 ‘낟알’ 같은 희망은 다져져 버리고 ‘가로등’ 같은 희망은 그것이 한계가 있음을 의미하며 ‘태양’과 직유되었을 경우에도 ‘아득히 먼 곳에 있어 닿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만큼 이미 온전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희망에 대응되는 ‘순이의 별꽃’은 흔들리고 어머니의 소망은 ‘주름진’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이 진정한 희망이라 할 수는 없겠다. 심지어 그것은 13월을 가리켜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희망은 점점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시인은 절망하는가.

쓸쓸한 뒷그림자를 이끄는
내 12시 반의 귀가는 늘
가파른 시간의 계단을 오른다
낡은 티브이 안테나에 걸린
별빛만큼, 내 희망도 흐린 것일까
(……)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오늘의 삶을
쉽게 계산해 버리는 아 나의
궁핍한 희망, 아니면
저 희미한 가로등
가게문을 빠져나와 여름 실바람에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가로등을 지난다
깜박거리는 나의 앞길을 비추기라도
하는 것일까 갑자기 내 더딘 발걸음을
뒤따르는 그림자를 앞세우며,
타성과 부실한 꿈에 젖은 쇠잔한 잔등이를
무수한 빛줄기로 후려치고 있다
― 〈저 희미한 불빛 아니면 희망〉 中

여기에서 희망은 “낡은 티브이 안테나에 걸린 별빛만큼” 흐리다. “궁핍한 희망”은 “희미한 가로등”처럼 “실바람에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흐릿한 희망일지라도 놓치지 않으며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희망으로 하여금 “앞길을 비추”게 하고 “더딘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며 “타성과 부실한 꿈에 젖은 쇠잔한 잔등이를 무수한 빛줄기로 후려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진실로 희망을 갖기 어려운 상황, 그 상황에서 가로등의 후려침이라도 받으며 희망을 향해 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아이’에 대한 애착
1)과 무관하지 않은 부분이다. 희망적 세계관을 가진 그인 만큼 아이에 대한 애착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애착이 강한 만큼 시적 탄력성에는 손상을 보이기도 한다. 술에 취한 주인공이 취기에 웃고 노래부르며 소리지르다 달려나온 아이에게 코끼리 열차를 태워주면서 현실감각을 찾기도 하고(〈특별시민 주 씨〉) 너무나 척박한 삶에 희망이라곤 부질없지만 아이 손에 동전 몇 개 쥐어주고 가게를 찾으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으며(〈밝은이〉) 또 술 취하여 귀가하는 아버지를 맞는 딸이 그 아버지에게 “노동자의 발전이/ 이 나라 발전의 근본임을 깨닫고/ 또는 당신이 지키는 이 가정의 희망임을 믿고/ 가열찬 투쟁을 하시어요 라고 힘을 주어/ 불끈 주먹을 쥐어보이”며 이야기하는(〈나의 아버지〉) 등, 어설픈 구도로 비추기도 한다. 아이에 대한 강한 기대가 엉성한 구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애착이 역사와 민족적 문제로 번지면 그 애착의 근원은 보다 명확해진다.

너의 작은 주먹손을 감싸쥐면
동트는 아침 태양처럼 어느덧
초라한 애비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 오르는 구나
― 〈무등을 타던 아이〉 中

시인이 애착을 갖는 ‘아이’는 민족의 미래이다. 그래서 부끄러운 역사 앞에 ‘애비의 가슴’5)은 초라해지는 것이다. 민족의 미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 시인에게 있어 ‘부끄러움’이란 중요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6)

3) 민족의 문제-낙관적 통일관
민족적인 문제를 다루는 문창길의 시는 대부분 격정적이다. 어떤 말로도 다 못할 만큼 주체 못할 분노와 사랑, 이중적 감정이 이 문제에 경사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반미감정과 통일 의지로 집약된다.

①그대들이 자랑하는 전투기를 타고 그대들이 자랑하는 자동소총을 어깨에 걸고 떠나야 한다 물밀듯이 밀려왔던 인도주의 나랏놈들 무우 자르듯 잘라 놓은 반도의 강산을 다시 커다란 발자국을 찍으며 확실하게 점령한 아름다운 놈들 그대들의 Girl girl한 입으로 먹다버린 빈Can처럼 쉽게 채이고 쉽게 찌그러진 매향반도 누이들의 앞가슴에 여지없이 찍어버린 성USA 성유도탄 성폭격기를 싣고 그대들의 조국 성조기가 아름다운 나라로 떠나라 하늘 푸른 매향리에서
― 〈매향리에서〉 전문

②아름다운 나랏놈들의 질겅질겅 씹어대는
껌처럼 꽃과 나무들이 씹히고 나라의
강들이 뜨거운 피로 붉게 흐르던 날
아 그 날 눈이 초롱한 누이를 낳고
젖살 부풀은 가슴 흔들며
이 논빼미 저 밭뙈기 열심히
김 매시고 논물 잡을 때
양키군의 단검에 가랭이가 찢기고
앞가슴이 도려지던 어머니 아 그 날의
어머니
― 〈아 그 날〉 전문

여기에서 ‘미국’은 민족적인 것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전반적 힘의 실세를 의미한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일개 ‘손님’에 불과한 그들, ‘미국’은 우리 민족의 전부를 강탈하고 생존권조차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적 시인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그들에게 강하게 소리지르기도 하며 차마 할 말을 다하지 못한 채 맺기도 한다.

먼저 ①의 시에서 ‘인도주의 나라’, 그 패러독스에 시인은 분노한다. 인도주의를 그토록 추구하는 나라지만 그들에 의해 어느새 식민지 국가처럼 인식된 한국인은 거기에서 예외적이다. 굳이 2002년의 여중생 장갑차 살인사건을 들지 않더라도 미군들에 의해 살상된 이 땅의 수많은 희생자들, 그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빼앗긴 자’ 중에서도 미군 기지의 접대부들에게 회한과 동정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게 한다(〈금촌가시내〉 연작을 비롯한 많은 시들). 성적 억압으로 대표되는 나라 대 나라의 억압, 그것이 시인이 바라본 미국과 한국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굳이 영어로 특수히 표기하고 싶은 “Girl girl한 입”의 그들, 그들의 수식어는 ‘성(性)’이다. “성USA 성유도탄 성폭격기를 싣고 그대들의 조국 성조기가 아름다운 나라로” 가라는 부분은 매우 공격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②의 시에서 ‘그날’은 특정한 어느 한 날이라기보다는 미군에 의해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이땅의 여인들이 유린당해온 역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어머니”라고 말하고 차마 끝을 맺지 못할 정도의 격정, 오랜 시작 활동을 해 온 시인이고 감정 주체를 훈련해 왔음에도 어쩌랴, 민족의 문제에는 그럴 수가 없으니…… 가슴 아픈 민족적 문제 앞에 냉철한 가슴이란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①아 어쩌란 말인가
반세기 침묵으로 지켜온 냉전의 역사를
초라한 남조선 시인의 가슴으로
어떻게 풀라는 것인가
(……)
인민해방 아니면 남북통일 또는
개혁개방이나 신자유주의…
― 〈월정리역에서〉 中

②북한산에 올랐습니다 오르는 길목마다 붉은 꽃들이 사랑에 환장한 년놈들처럼 피어 제꼈습니다 북녘 바람이든 남녘 바람이든 불어와 흔들면 자지러지듯 가는 목을 숙이며 붉은 피를 흘립니다 그 붉은 피가 지천으로 흘러서 발목을 적시고 가슴까지 차오르면 우리들의 통일은 될런지 모릅니다 꿈에도 소원인 통일이 통일이 어서 오면 꽃다운 딸년들의 햇가슴 마냥 벅찬 가슴과 가슴을 부비며 백두에서 한라까지 묘향에서 지리까지 발맞추어 갈 것입니다
― 〈통일꽃〉 전문

그러나 ①의 시에서처럼 민족적인 것을 노래함에 있어 설익은 감정이 지나친 것은 틀림없는 시인의 약점이다. 영탄의 빈번과 함께 논리적 비약, 그리고 시임을 망각한 표현들(이를테면 “두 갈래의 철길이 희망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인민해방 아니면 남북통일 또는/ 개혁개방이나 신자유주의……”) 등은 시적 긴장감을 잃고 있는 예이다. 이에 비해 ②의 시는 상징과 비유의 적절한 사용으로 시적 탄력성을 회복하고 있다. 얼핏 “민주주의는 피를 원한다”는 김수영식 논리를 떠오르게 하는 이 시에서 ‘붉은 꽃’은 ‘통일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남이고 북이고 따지지 않은 채 바람에 몸을 맡기는 꽃들처럼 민족도 북녘과 남녘을 따지지 말고 통일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붉은 피가 지천으로 흘러서 발목을 적시고 가슴까지 차오르면”이라는 부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거나 어설픈 통일의식이다.

민족의 통일은 어떤 이데올로기라도 능가하는 당위이며 본질적인 명제이다. 시인의 통일에 대한 전망은 매우 낙관적이다. 그에게 있어 통일은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우리들의 앞날은
붉은 해 싣고 오는 새벽같이
밝을 것이다
― 〈우리 하나인 것을-임수경 방북을 보고〉 中

4. 시인의 정체성 찾기-시적 탄력성의 회복과 현실 사이

시인의 고뇌와 시적 정체성의 문제를 볼 수 있는 작품들로는 〈거울 속의 나〉, 〈시 한편을 쓰면서〉,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등이 있다.

눅눅한 서울의 끝에서 불어터진 라면을 입에 물고
빌어먹을… 분꽃들을 흘기며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를 읽고 있다
찌찌륵 파랑새의 서툰 노래 소리에 미쳐
원고지 몇 장 넓이의 세상을 쉽게 흘려버린
세라믹펜의 그림자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그려진다
(……)
무거운 만큼 어설프게 쌓인 별빛들이 유형의 이슬에
젖고 있을 때 바람이 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혼이 떼밀려 오고
대방동에 계신 어머니의 간절한 희망이 달려온다
간절한 희망이 달려온다
―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中

시인이 파악한 현실은 ‘김춘수의 무의미시’를 능가하는 것이다. “불어터진 라면을 입에 물고 빌어먹을……” 시인이 보는 현실은 이토록 가난하며 무의미를 노래할 정도로 여유롭지도 못하다. 게다가 시인 자신이 “파랑새의 서툰 노래 소리에 미쳐” 가볍게 쓴 시 위에 어머니의 얼굴이 겹친다. 그러면서 문득 맞닥뜨리는 현실, 그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희망’이다. ‘어머니의 간절한 희망’, 그리고 현실, ‘시’ 사이에 갈등하는 자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 시를 쓴다는 것은 현실과의 갈등이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희구의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문창길 시인이 시를 썼던 80∼90년대의 격변하는 국내 상황, 그 속에서 현실성과 시적 탄력성 사이를 조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전자로만 빠져들면 구호나 선전 선동이 되기 쉬웠고 후자로만 침잠하면 안이한 형식주의자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으로 저항하기, 시인으로 살아가기는 매우 힘겨운 일이었겠지만 그는 리얼리즘 시론을 인식한 채, 시적 탄력성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제는 또다시 격변하고 있는 이 상황에 시인이 어떤 시적 변모로 대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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