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원숭이가 어두운 계단을 오른다
모자를 비껴 쓴 원숭이가
서커스단의 붉은빛
허리가 움푹 조여든
조끼를 입고
번쩍거리는 기차들이 계단 아래로 질주한다
썩은 사과 냄새가 풍겨오는
손풍금 소리
자정 치는 소리
소매가 검은
형광빛의 원숭이가 신문을 판다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원숭이들 얼굴에 흘러내리는 형광등 불빛
환하게 밝혀진 허공의 먼지들
이토록 환한 밤
기차를 기다리는 밤
비껴 쓴 모자가
잘 어울리는 밤
옆 원숭이들과 눈인사를 하며
얼굴 위로 식은
화장 분을 느끼며
기차를 기다리는
밤
창밖 어둠 속으로
잿빛 눈은 내리고
기차들은 번쩍거리며
질주한다
이토록 환한 밤
천 개의 형광등이
켜져 있는 밤
골렘
눈을 뜨면 꿈이 시작된다
눈을 감으면 유령이 시작된다
파이프에서 검은 기름 새어나온다
하수구 속 어딘가에서 진흙인간이 운다
다리 아래로 금속 막대기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가고
벽과 벽 사이 쓰레기 산을 이룬 곳
달빛이 날 닮은 시체를 비춘다
겨울 산
진눈깨비 내리는 새벽 눈을 뒤집어쓴 산이 낄낄거리며 걸어다닌다 백수광부(白首狂夫)처럼, 깡마른 도깨비처럼
나는 식은 커피를 들고 창 앞에 서서 휘도는 눈보라를 응시한다 순간 산의 새하얗게 충혈된 커다란 눈이 창을 가득 채우며 나를 들여다본다
―또 너로군
산의 얼음장 같은 입김이 창문에 부딪는다
―난 네 시가 마음에 안 들어
나를 보면 안 돼 세상을 봐
창틈으로 바람의 거친 헐떡임이 새어든다 나는 내 꿈이 빚어낸 것일 산의 외롭고 쓸쓸한 목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치는 걸 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너에 대해 쓰고 싶었어
산의 눈은 말없이 웃고 있었다 산은 입을 벌려 눈을 받아먹었다 산의 옆구리에 매달린 헐벗은 잡목숲 위로 새벽을 뚫고 파고드는 첫 햇살이 비친다
―난 네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내 말을 기억해 이 꿈이 마지막이란 걸 나는 다시는 네 꿈에 나타나지 않을거야
산은 내게 등을 보인 채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창 앞에 서서 산이 품고 있는 메마른 나무들의 길이 눈보라에 뒤덮여 점점 새하얗게 지워지는 모습을 본다 산의 웃음소리가 멀어져간다
나는 식은 커피를 삼킨다 실내는 어두운 추위로 가득하다 나는 탁자 위의 시계를 바라보며 잠에서 깨어날 순간을 기다린다
―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