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지 말걸 / 임곤택 소리 지르는 아이를 참다가 참다가 그 엄마에게 항의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눈이 내렸고 눈을 뭉쳤고 벽을 맞혔다. 말을 그치자 말이 없다 잠깐 뜨겁고 오래 차갑다. 생면부지의 열애는 늘 이렇다. 주머니에 손 넣어 동전을 짤그락거린다. 눈이 계속 내린다. 벽에는 내가 던진 눈 뭉치가 뭉개져 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 시집 『죄 없이 다음 없이』(걷는사람 , 2021) --------------------------------- * 임곤택 시인 1968년 전남 나주 출생, 고려대 신문방송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4년 《불교신문》신춘문예 등단 시집『지상의 하루』『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시론서 『현대시와 미디어』 고려대 교양교직부 교수 *************************************************************** 여기 대학 시절 같은 꿈을 품고 출발했던 8인회라고 부르는, 여덟 명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는 잘나가는 영화사 대표가 되었고 누군가는 흥행 감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황동만(구교환 분)'은 이십 년째 데뷔 준비만 하고 있는 영화감독, 아니 그저 '지망생'일 뿐입니다. '동만'은 성공한 친구들 사이에서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며 깊은 시기나 질투, 자격지심에 시달립니다. 돈이 없어 장비조차 빌리지 못하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듭니다. 이 줄거리는 JTBC에서 제작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줄여서 모자무)』의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 줄거리가 소개한 부분까지만 봤습니다. 솔직히 드라마를 보다가 조금은 짜증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 누군가에겐 그저 허구(픽션)일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뼈아픈 현실(논픽션)일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의 결말은 어떠할까요. 동만이 성공하는 모습은 지극히 비현실적입니다. 동만이 어떠한 상황인지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2화만 봐서는 극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 없지만, 후반부의 얘기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집니다. 비극으로 끝난다면, 아픈 현실만 보여주고 막을 내리는 찜찜한 드라마에 불과할 테니까요. 이 드라마에는 임곤택 시인의 시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동만'의 형인 '진만(박해준 역)'의 과거 직업이 시인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모종의 이유로 더는 시를 쓰지 않습니다. 드라마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어딘가 묻어 있는 잘못」이라는 시. 이 짧은 시는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던져줍니다. 어쩌면 이렇게 담담하게 아플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시와 가장 닮은 시 한 편을 시인의 시집에서 찾아봤습니다. 제가 찾은 시는 시집 『죄 없이 다음 없이』 11페이지에 실린 시, 「그러지 말걸」입니다. 이 시는 '후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늘 끊임없이 후회하며 살아갑니다. 화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소리 지르는 아이를 참다못해 그 엄마에게 기어코 항의를 내뱉고 돌아설 때처럼, 혹은 마음의 분풀이로 던진 눈 뭉치가 벽에 부딪혀 허무하게 뭉개지는 것을 바라볼 때처럼, 감정이 격해지던 순간은 잠깐 뜨겁고, 밀려오는 후회와 씁쓸함은 오래 차갑다라고. 이는 드라마 속 '동만'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특히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동전을 짤그락거리며, 눈을 맞고 걷는 화자의 모습은 자격지심과 무력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동만들'과 겹쳐 보입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라는 나지막한 탄식은 오늘도 저마다의 무가치함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이 시집은 2021년 발표된 시집입니다. 그냥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시집이, 드라마를 통해 소개되어 거론되고 읽히는 모습을 보면서, 좋은 시는 언제든 누군가에게 호명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이 정한 속도에 뒤처져 잊힌 것처럼 보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삶은 언젠가 (모든 무가치함을 극복하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위안도 같이 전달되는 듯합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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