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 박남희
암센터에 다녀 온 후
아내의 한쪽 컵에서 종소리가 났다
컵의 쓸모는 채우는 것일까
비워두는 것일까
아니면 입에 대한 혐오일까 연민일까
생각하다가
스스로 컵이 되어보기로 한다
준비도 없었는데
무언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몸이 휘청이다가 점점 무거워진다
이럴 땐 어디론가 몸을 기울여야 한다는데
한 순간 컵 밖으로 드러날 내용이 두렵다
컵의 이름은 내용이 결정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것이 싫은 나는 돌이켜
내용 없는 컵이 되어보기로 한다
내용 없는 컵은 안보다 밖이 더 중요하다
없는 내용을 후려치면 그 소문은
밖으로 멀리멀리 퍼져 나간다
종이 그렇다
종은 그 안에 내용을 채우지 않기 위해
빈 몸으로 운다
내용 없는 컵은 악기도 되고 트로피도 되고
없는 그 만큼의
박수와 함성 소리가 컵 밖에 서식한다는데
조용한 성격의 아내는
언제부터 종소리를 숨기고 있었을까
- 계간 <다시올문학> 202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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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희 시인(문학평론가)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숭실대 국문과 및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과정 졸업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당선
시집『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고장난 아침』『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어쩌다 시간여행』
평론집『존재와 거울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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