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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공항에서 / 허수경

작성자군불|작성시간26.06.16|조회수37 목록 댓글 0

 






공항에서 / 허수경

기다림만이 내 영혼의 물속을 헤적이는 날
당신이 언젠가 들렀을 것만 같은 공항으로 간다

기차나 배를 타고 오기에도
버스는 더욱더 안 될 어스름한 저편에 서서
기다린다 당신이 오는 발자국마다 손가락이 돋아나
지그시 누르는 자리마다 멍이 든다

밤 11시 24분 비행기가 도착하고
새벽 2시 55분 비행기가 떠날 때
전광판에는 도착하는 비행기와 떠나는 비행기가
검은 눈빛처럼 반짝인다

모든 길은 거짓이고 또한 그림자 같아서
백년을 살아도 낯설 고향의 새벽 공항에 앉아
아주 조금 술을 마신다

당신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목소리도 마치 전생의 무늬 같다
취기만이 당신인 것처럼 곁에 앉았는데
많이 잘해 주지 못해서 마음은 비었고
많이 안아 주지 못해서 손도 비었다
꼭 내가 당신을 배반한 것 같다

우리 모두 다만 기어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난다
산으로 바다로 항구의 젖은 가슴에게로
그래서 이 지구에는 기다림에 살이 아픈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고
마을에는 연인을 지켜 주는 방도 있다
그래서 나무들은 조금씩 키가 자라고
잎들은 조금씩 빛을 해에게 내준다

어제는 당신이 나를 더 기다렸고
오늘은 내가 당신을 더 기다린다
그것만이 농담이 아닌 이국의 공항에서
상냥한 벗인 취기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당신을 기다리면서 물들면서
나는 이 세상 속,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사라져간다


- 유고시집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난다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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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 시인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경상대 국문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모래도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동화책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
2001년 동서문학상, 2016년 전숙희문학상 및 '15회 이육사문학상수상.
2018년 10월 3일 독일 뮌스터에서 위암으로 타계(향년 5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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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을 만나 뵌 적은 없습니다. 제가 등단하고 시인으로 활동할 때, 허수경 시인은 이미 독일에 계셨습니다. 시인의 시를 좋아했고, 애독자로서 시를 읽는 것이 전부였을 뿐입니다. 딱 한 번 연락을 드린 적은 있습니다. 제가 《공시사》에 산문을 연재할 때였을 것입니다. 시인께 연락드려 시 재사용에 대한 허락을 구했습니다. 아. 이제는 시인께 재사용 허락을 구할 수도 없네요. 시인은 이렇게 답변을 주셨었습니다.

“주영헌 시인께,
시를 사용하시는 것을 허락합니다.
건필하시고 좋은 산문이 나오기를 멀리서도 바라며.
허수경 드림”

짧지만, 사람에 대한 배려가 물씬 묻어나는 글이었습니다. 이때가 2017년 6월 5일입니다. 시인께서 2018년 10월 3일 작고를 하셨으니, 돌아가시기 1년 전입니다. 언제부터 시인께서 위암으로 투병하셨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가 이메일을 보냈던 때에도 실은 위암으로 투병 생활 중이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시인은 투병 생활 중에도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끝끝내 펜을 놓지 않은 까닭을 잠잠히 생각해 봅니다.

유고작인 시 「공항에서」의 정확한 집필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저는 이 시가 시인의 투병 생활 중에 쓰인 것이 아닐지 짐작해 봅니다. 이렇듯 이 시를 투병 중에 쓴 시, 유고 시집의 한 편의 시로 읽으니, 시의 문장들이 시인이 자신의 떠남을 직감하고 세상에 남긴 마지막 예감처럼만 느껴집니다.

공항을 방문하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떠나는 사람과 도착하는 사람. 떠나는 사람은 어딘가로 여행을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시인처럼 멀리 타국에서 살기 위해 떠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도착하는 사람은 그리운 이의 마중을 받으며, 누군가의 곁으로 돌아오는 이들일 것입니다.

시인은 ‘밤 11시 24분 비행기가 도착하고 새벽 2시 55분 비행기가 떠날 때’ 전광판을 바라봅니다. 저 전광판의 시간은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생의 시간표입니다. 내가 떠난 빈자리에 누군가는 다시 도착할 것이고, ‘어제는 당신이 나를 더 기다렸고 오늘은 내가 당신을 더 기다리는’ 그리움 역시 저 공항에서 멈추지 않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사라져간다’라는 시인의 고백도 허무한 소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사라진 그 공항에 또 다른 '당신'이 도착해 누군가를 기다릴 것이고, 그 기다림 덕분에 ‘나무들은 조금씩 키가 자라고 잎들은 조금씩 빛을 해에게 내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 세상의 이름다운 순환은 계속되리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이 병마 속에서도 끝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허수경이라는 가냘픈 육체는 사라질지라도, 남겨진 시와 문장들이 누군가에겐 따뜻한 마중이 되어 줄 수 있기에. 타국에서 저라는 이름 모를 시인의 건필을 빌어주었던 마음의 배려처럼, 시인은 자신의 빛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자를 배려하고, 꼭 안아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시를 읽으며 허수경 시인을 잠시나마 추억해 봅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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