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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숨 / 김사리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잠이 들었어
폐허가 된 성에는 고장 난 시계
녹물 떨어지는 꼬리를 흔들며 꼬리로 흔들리며
컹컹 짖다가 죽은 개처럼 잊히기도 한다는데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망루에서 내려다보면
바닥은 가시덤불에 싸여 보이질 않아
타락한 왕의 폭언은
계단 위 발소리를 얼어붙게 만들었지
창문에 비친 해를 가위로 도려내면
계절은 언제나 겨울
창문은 덜컹거리고 아침은 오지 않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밧줄에 매달린 여자처럼 창문이 흔들린다
성벽을 타고 들어온 빗줄기는 지린내가 진동하고
입과 코를 막은 성문 안 사람들
군홧발에 밟힌 개미처럼 쓰러진다
병색이 짙은 왕의 분노가 포도주처럼 넘치고
사람들은 층층이 포개진 침대에서 잠이 든다
다리를 펴고 목을 다시 이어 붙이고
용케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두 마리 개가 컹컹 번갈아 짖는 동안
달빛이 긴 치맛자락을 끌며 회랑을 따라 걷는다
- 월간 《현대시》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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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리 시인
본명 김현미(金賢美). 1968년 경남 밀양 출생.
2014년 계간 《시와 사상》으로 등단.
시집 『파이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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