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시창작 이론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의 유고시집

작성자박용찬|작성시간10.12.14|조회수27 목록 댓글 0

 

 

 

옛날의 그집

                    - 박 경 리 -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의 유고시집이다. 이 시집은 시인의 딸 김영주 님이, 마지만 순간까지 남은 모든 기운을 불사르며 남기신 39편의 어머니의 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김영주님은 말씀하신다: "불꽃 같은 정열로, 분노로, 사랑으로 생애를 사셨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시듯, 수놓으시듯 정성으로 글를 쓰셨습니다. 글쓰기를 통하여 삶을 완성하시고 죽음도 완성하셨으니 평안하소서!"

 박경리 :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 출생,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으로 등단.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발표. 특히 1969년 6월부터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 25년만인 1994년에 완성. 현대문학 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등을 수상. 시집으로는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이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