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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의 시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탐방기.

작성자경주남산|작성시간26.06.17|조회수34 목록 댓글 0

제목 :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탐방기.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고장으로, 명승지에 뒤지지 않게 관광객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 의령이다. 의령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분으로 백산 안희제 선생을 손꼽는다. 그가 탄생하고 자란 설뫼 마을로 간다. 의령 설뫼 마을은 앞으로 낙동강 지류인 유곡천이 흐르고, 마을 뒤로는 부드럽고 편안한 장백산이 가리는 배산임수 마을이다. 뒷산의 모양이 반듯하고, 유곡천이 북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지형은 풍수상으로 큰 인물이 나온다는 곳으로, 그래서인지 설뫼(立山)에 많은 유명 인물이 배출된다고 한다. 포장도로 앞의 이정 목에는, 의령 입산리 탐진 안 씨 종택, 안준상 고택, 안호상 고택, 안법준 고택, 백산 안희제 생가, 상로재, 고산재가 적혀있고,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홍살문이 있다. 이것만 봐도 그냥 고만고만한 마을에서 얼마나 큰 인물이 시나브로 배출되었는지 느낌이 오고 매우 놀랍다. 과연 충효(忠孝)의 고장 의령의 진 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로 간다. 초여름의 햇살이 청포도 송이처럼 떨어진다. 그래서인지 바람 따라 청포도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가는 소담하고 정갈한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되어 있다. 먼저 사랑채를 살핀다. 한옥은 큰 틀에서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나누는데, 사랑채는 갈대로 이엉을 한 초가집이다. 전면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동향으로 배치하고 너른 마당에도 불구하고 안채와 바싹 붙어 있다. 안채로 건너간다. 기반의 돌담이 단정하고 그 위에 수려하면서 화려하지 않은 목조 와가가 있다. 백산고가(白山古家)라는 글씨도 소박하고 고졸하다. 마루에 앉아 집 앞을 바라본다. 싱그러운 산야와 푸른 하늘에 시선을 빼앗기면서 어떤 상념에 풍덩 빠져버린다.

설뫼 마을 이웃에 있는 유곡면 세간리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신 곽 재우 홍의장군의 생가가 있다. 그리고 여기 설뫼에는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하시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가 있다. 이것만 해도 충효의 고장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산 안희제 선생은, 청산리 전투의 전설적인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과 영원한 애국지사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삼백(三白)’으로 불리어졌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서 귀국하신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 안착하시면서 처음으로 한 일이 백산 안희제 선생이 영면하고 계시는 의령을 향해 큰절을 올리신 일이다. 독립운동의 거목이시고, 산 역사이신 백범 김구 선생의 이러한 행적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이 얼마나 위대하였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이제 백산 안희제 선생의 일생을 추모해보자.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독립운동 일대기를 따라가면, 그분의 위대한 정신과 고향 의령의 의기(義氣) 를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관향은 탐진(耽津)이다. 서기 1885(고종 22) 84일 설뫼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총명하며 슬기로웠다. 17살 때인 어느 날 초 밤 동접과 함께 시를 읊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새는 한가함을 탐하고자 궁벽한 골짜기를 찾고, 달은 한쪽만 비춤을 싫어하여 중천에 이르렀네.’ 이에 듣는 사람들이 탄복하며, 큰 인물이 될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을사년인 21세 때 겨울 찬 바람 부는 날,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변고를 듣고 크게 탄식하며 행장을 꾸려 상경하였다. 그 해 보성 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년 뒤에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였다. 그 후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면 민족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그 시작으로 구포(龜浦)에 구명학교를, 고향(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를, 이어 설뫼에 종중에서 갹출한 기금으로 창남학교를 세웠다. 일본의 침탈에 의한 치욕의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해였다. 그리고 1911년 봄에 약간의 경비를 마련 러시아로 향했다. 해삼위에서 이 갑, 신채호, 안창호 등 여러 사람을 만나 광복을 의논하기도 했다. 그 후 귀국하여 민족을 교육하는 것이 최우선인데, 돈이 없이는 일을 행하기가 어렵다.’ 하여 백산상회를 열고 경영하니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그 자금의 여력으로 국내 및 만주 거점 도시에 지점을 개설하고 독립운동 산하 비밀연락처 역할을 맡았다. 그러든 어느 날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시를 지어 애도했다. 비가장사귀하지 (悲歌壯士歸何地 : 슬픈 노래 들리는데 장사는 어디로 돌아갔나.) 통곡오생우일무 (痛哭吾生又一無 : 통곡소리에 우리 생명 또 하나 사라졌네) 참으로 가슴을 쾅쾅 치게 하는 분하고 애통한 의미의 시(). 1914년 가을 부모(父母)님의 승인을 받아 재산을 사업에 투자하여 더욱 번창,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조선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다.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던 안희제 선생은 지역의 권력과 시설이 일인 중심으로 되어 있는데 분노하여 시민대회를 발의하여 차별정책을 질타하였다. 그 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도 점차 위생 교통 산업 시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부산 시민들이 백산 회사는 전 시민의 회사고, 백산 선생은 부산의 주인이다.”는 여론을 형성 입에 찬사(讚辭)가 오르내렸다. 그 총 중에도 몇 사람을 중국 상해에 보내 몇천만 원의 독립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192012월 안동 현에 있던 동지 김 삼, 박 광, 신 성모 등과 독립운동의 계략을 꾸미고 귀국할 때, 그 사실을 어떤 이가 고변하여 신의주 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때 당한 27일간의 모진 고문과 형벌은 매우 잔인했으나 백산 선생은 끝내 버텨 석방되고 부산으로 돌아와 치료하여 고비를 넘겼다. 1921년 부산에서 박춘금이란 민족 반역자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여객선에 도항 증제도를 만들어 1장에 20원을 받는 불법을 시행하자, 백산 선생이 동지 수십 인과 의논하여 관계기관과 언론기관에 진정하여 도항증제도를 없앴다. 힘없는 조선인을 위한 실로 속 시원한 쾌거였다.

그러다가 1926년 동 만주로 건너가 동경성에 큰 토지를 매입, 조국을 떠나 와 살고 있는 동포 300여 가구에 경작지를 분할하고, 5년 동안에 원금을 갚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종교로서 국권 회복을 할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 1931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대종교의 윤세복 선생을 초빙하고 총본사를 옮겨 지으니, 그 뜻을 알고 믿는 자가 1년 사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고 날로 늘어났다. 1935년 참교로, 1941년 상교로 승진, 194210월 총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대종교 신봉자가 수백만 명으로 늘어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취하고자 하는 실질 효과가 엄청났다. 대종교의 이러한 흐름을 예의주시한 일인들이 감시를 엄히 하고, 19434월에 질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고향 설뫼에 와서 치료하였다. 그해 11월에 만주에서 대종교 사건이 터지자 책임자가 모두 검거되었다. 그러더니 목단강 성 경무서 원 세 명이 15일 아침에 고향 집으로 와 백산 선생을 체포하여 곧장 만주로 압송했다. 그때 잡혀가 옥중에 갇힌 대종교 간부는 윤세복 외 21명이며, 모진 고문과 잔학한 형벌로 옥중에서 10명이 사망하였다. 세상에서 말하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다. 그 해, 83일 옥중의 잔인한 고문으로 백산 선생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감옥 밖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던 장남 상록이 급히 면회를 하고, 백산 선생을 의원으로 모셔와 응급조치하니 정신이 깨어났다. 그 와중에도 백산 선생이 신문을 보시며 전황을 물었다. ‘이탈리아가 패했다.’고 하니 통쾌하게 웃으시며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는데, 내가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는 말을 두세 번 하시다가 두 눈을 감으셨다. 감옥에서 나오신 지 한나절쯤이었다. 일생을 오직 나라의 독립운동에 다 쏟아부은, 충효와 의절로 점철된 위대한 인물의 생명이 거두어지는 슬픈 순간이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일대기를 돌아보면, 민족의 제단에 바친 그의 위대한 의기와 애국심에 눈물이 나고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진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그 불멸의 충혼이 우리 민족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한 그 우국충정이 우리 모두의 정신에서 자라고 뻗어가 새로운 얼과 혼이 되고 뿌리가 되어 영원한 번영을 누리는 대한민국으로 우뚝 서게 되면 그분이 나라에 온통 쏟아부은 애국 충절의 은공에 보답하는 일이 되리라고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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