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오릉 무덤주인의 의문 ▶
경주 월성 남서쪽 탑정동에 크고 작은 고분 5개가 모여 있다. 오릉(五陵-5개 무덤)이라고 한다. (#1경주오릉)
오릉의 유래이다.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시신을 ‘5체로 나누어 장사지내 오릉이며, 또한 사릉(蛇陵-뱀릉)이라 한다.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고 설명한다. 박혁거세의 5체(五體)릉이 사릉인 셈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사릉(오릉)에 묻힌 사람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그리고 남해왕(2대), 유리왕(3대), 파사왕(5대) 등 5명으로 나온다. 무덤 숫자 5개는 같으나,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단일 무덤으로, [삼국사기]는 5명의 다른 무덤으로 소개한다.
어느 기록이 맞을까?
둘 다 아니다. 아니 될 수가 없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라의 경주 입성시기가 파사왕 때라는 점이다. 초기신라는 서기전57년 경기 북부지역에서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창업하며, 이후 점차로 남하하며 남해왕, 유리왕을 거쳐 파사왕 때인 서기94년 비로소 경주에 정착한다. (#2신라남하지도) 따라서 파사왕 이전의 박혁거세, 남해왕, 유리왕 등 3명은 경주에 묻힐 이유가 전혀 없으며, 가능성 또한 매우 희박하다. 물론 훗날 이장(移葬)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참고로 오릉은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적이 없다. 또한 도굴된 기록도 없다. 직접 발굴조사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무덤주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더구나 경주일대의 신라초기 무덤구조는 오릉의 원형봉토분(흙무덤)이라는 근거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도 없다. 특히 대형의 원형봉토분은 4세기 이후 등장한다. 이런 까닭으로 오릉은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구조로 볼 수 없다‘는 해석이 학계의 중론이다.
오릉은 누구의 무덤일까?
오릉(5개 무덤) 중 하나는 파사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파사왕은 경주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사초](남당필사본) 기록을 보면, 사릉(오릉)에 묻힌 왕과 왕족이 다수 나온다. 왕은 파사왕(5대), 지마왕(6대), 일성왕(7대) 등 3명이며, 왕족은 남해왕의 딸 아혜(阿惠)와 손자 일지(日知), 파사왕의 어머니 아리(阿利), 지마왕의 어머니 사성(史省)과 아들 우옥(右玉), 일성왕의 부인 애례(愛禮), 그리고 아달라왕(8대)의 어머니 지진내례(只珍內禮) 등 7명이다. 총 10명이다.
※ 참고로, 오릉의 2호분은 쌍분(표주박 모양)이다. 일성왕과 애례부인의 합장묘로 추정된다. (#3오릉2호분) 또한 비록 봉분은 사라지고 없지만 오릉 주변 숲에서 추가적으로 무덤의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고고학의 분발을 기대한다.
이들 사릉에 묻힌 10명은 박씨왕조 계보(파사왕→지마왕→일성왕→아달라왕)를 잇는 왕과 왕족이다. 사릉은 경주 박씨왕조의 집단묘역이다. 그래서 기록은 사릉원(蛇陵苑-탑정동고분군)으로도 표기한다. 이는 김씨왕조의 집단묘역을 대릉원(大陵苑-황남동고분군)이라 칭한 경우와 같다. (#4사릉원,대릉원) 이런 연유로 현재 쓰고 있는 오릉의 명칭은 사릉원으로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은 어떤 근거일까?
[삼국유사]는 민간의 구전(口傳-박혁거세 5체릉)을 기록으로 정리한 것이고, [삼국사기]는 신라역사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신라(서라벌)의 최초 건국지를 경주로 고정시키다보니, 경주입성 이전의 5명을 억지로 기록에 포함시킨 것이다.
사릉원(오릉)은 경주입성 이후 조성된 박씨왕조의 집단묘역이다. (#5신라역사의명암)
작가 정재수님
경주 월성 남서쪽 탑정동에 크고 작은 고분 5개가 모여 있다. 오릉(五陵-5개 무덤)이라고 한다. (#1경주오릉)
오릉의 유래이다.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시신을 ‘5체로 나누어 장사지내 오릉이며, 또한 사릉(蛇陵-뱀릉)이라 한다.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고 설명한다. 박혁거세의 5체(五體)릉이 사릉인 셈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사릉(오릉)에 묻힌 사람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그리고 남해왕(2대), 유리왕(3대), 파사왕(5대) 등 5명으로 나온다. 무덤 숫자 5개는 같으나,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단일 무덤으로, [삼국사기]는 5명의 다른 무덤으로 소개한다.
어느 기록이 맞을까?
둘 다 아니다. 아니 될 수가 없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라의 경주 입성시기가 파사왕 때라는 점이다. 초기신라는 서기전57년 경기 북부지역에서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창업하며, 이후 점차로 남하하며 남해왕, 유리왕을 거쳐 파사왕 때인 서기94년 비로소 경주에 정착한다. (#2신라남하지도) 따라서 파사왕 이전의 박혁거세, 남해왕, 유리왕 등 3명은 경주에 묻힐 이유가 전혀 없으며, 가능성 또한 매우 희박하다. 물론 훗날 이장(移葬)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참고로 오릉은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적이 없다. 또한 도굴된 기록도 없다. 직접 발굴조사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무덤주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더구나 경주일대의 신라초기 무덤구조는 오릉의 원형봉토분(흙무덤)이라는 근거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도 없다. 특히 대형의 원형봉토분은 4세기 이후 등장한다. 이런 까닭으로 오릉은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구조로 볼 수 없다‘는 해석이 학계의 중론이다.
오릉은 누구의 무덤일까?
오릉(5개 무덤) 중 하나는 파사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파사왕은 경주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사초](남당필사본) 기록을 보면, 사릉(오릉)에 묻힌 왕과 왕족이 다수 나온다. 왕은 파사왕(5대), 지마왕(6대), 일성왕(7대) 등 3명이며, 왕족은 남해왕의 딸 아혜(阿惠)와 손자 일지(日知), 파사왕의 어머니 아리(阿利), 지마왕의 어머니 사성(史省)과 아들 우옥(右玉), 일성왕의 부인 애례(愛禮), 그리고 아달라왕(8대)의 어머니 지진내례(只珍內禮) 등 7명이다. 총 10명이다.
※ 참고로, 오릉의 2호분은 쌍분(표주박 모양)이다. 일성왕과 애례부인의 합장묘로 추정된다. (#3오릉2호분) 또한 비록 봉분은 사라지고 없지만 오릉 주변 숲에서 추가적으로 무덤의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고고학의 분발을 기대한다.
이들 사릉에 묻힌 10명은 박씨왕조 계보(파사왕→지마왕→일성왕→아달라왕)를 잇는 왕과 왕족이다. 사릉은 경주 박씨왕조의 집단묘역이다. 그래서 기록은 사릉원(蛇陵苑-탑정동고분군)으로도 표기한다. 이는 김씨왕조의 집단묘역을 대릉원(大陵苑-황남동고분군)이라 칭한 경우와 같다. (#4사릉원,대릉원) 이런 연유로 현재 쓰고 있는 오릉의 명칭은 사릉원으로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은 어떤 근거일까?
[삼국유사]는 민간의 구전(口傳-박혁거세 5체릉)을 기록으로 정리한 것이고, [삼국사기]는 신라역사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신라(서라벌)의 최초 건국지를 경주로 고정시키다보니, 경주입성 이전의 5명을 억지로 기록에 포함시킨 것이다.
사릉원(오릉)은 경주입성 이후 조성된 박씨왕조의 집단묘역이다. (#5신라역사의명암)
작가 정재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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