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5 - 요동정벌
정도전을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요동정벌이다.
이 요동정벌은 두 개로 나누어서 봐야한다.
고려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과 순순히 정도전이 주도한 요동정벌이다.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물거품이되고 고려멸망과 조선건국의 단초가 된다.
이 위화도회군도 정도전의 작품이라는 말이 드라마나 소설속에서는 정설처럼 등장하지만 확실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성계의 4불가론이나, 위화도 회군 결정, 그리고 회군 뒤 착착 진행되는 이성계 왕만들기 프로젝트를 보면 무인출신인 이성계가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도전을 위시한 개혁적인 신진사대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먼저 위화도 회군을 부른 요동정벌은 위화도 회군편에서 자세히 썼으니 배경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몽고가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 한족 왕조를 세운 주원장은 국호를 명으로 하는 한족 제국을 창건한다. 그리고 원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낸다.
당시 고려 공민왕은 원의 몰락을 지켜보며 과거 원에 빼앗겼던 국토를 다시 찾고 친명사대 정책으로 전환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명은 과거 원이 지배하던 땅을 자신들이 관할하겠다고 했으며 고려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고려를 길들이려 했다.
이에 화가 난 최영이 우왕을 설득해 요동정벌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요동정벌은 최영과 우왕에 천추의 한으로 남긴 위화도 회군으로 결국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기에 이른다.
명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해서 요동정벌을 추진한 최영과 우왕을 죽이는 것을 보고 잠시 고려를 지켜만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대변혁기에 중국왕조와 한반도 왕조와의 갈등은 임시 봉합된 것에 불과했다.
신생왕조 명은 고려가 큰 변화없이 단지 원을 섬기던 것을 명으로 바꾸기만 바랬다. 철저한 친명정책 입장을 고수 하고있는 정몽주, 이색등이 주도권을 잡고 고려가 계속 지속되길 바랬다.
그런데 생판 알 수 없는 무장출신 이성계가 나타나 조선을 건국하자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한다.
당시 명태조 주원장은 신하가 왕위찬탈을 극악한 범죄행위로 보고 있었다. 주원장이 보기엔 이성계는 극악한 범죄자 였다.
특히 이성계 뒤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정도전에 주목하고 트집 잡기 시작한다.
명이 정도전을 왜그리 눈에 가시처럼 여겼는 지는 알려진게 없지만 명의 태조 주원장은 정도전을 위험인물로 보고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정몽주와 같이 친명주의자였던 정도전은 처음에는 지나칠 정도로 명에 잘 보이려 한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런 과공에도 불구하고 명의 트집과 요구는 점점 정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고려가 어렵게 획득한 쌍성총관부를 다시 내 놓으라는 것도 모자라 명 마음대로 쌍성총관부에 중국관리를 보낸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도 명은 이성계를 이인임 아들로 표현 하는 등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이성계는 명의 공식 외교문서에 왕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고 썼다.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또는 권지조선국사(權知朝鮮國事)는 1392년부터 1401년까지 명나라의 황제가 조선의 국왕을 봉하는 칭호였다. 이는 국왕의 의미가 아니라 고려 국왕을 대신하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1401년 음력 6월 12일, 건문제가 조선 태종을 정식 조선 국왕으로 봉하면서 사라졌다.
사대주의를 지금 시각으로 보면 부끄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당시는 중국과 주변국의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조공, 책봉 관계였는데 작은나라들 외교전술의 하나였다.
제후국이 황제에게 조공을 하고 황제가 제후를 책봉하는 것이다.
오늘날로 생각해보면 굴욕 외교 같고 중국에 약탈 당하는 느낌이지만 대체로 이 조공책봉 관계에서 득을 보는게 오히려 주변국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명분상의 관계를 통해 실제로는 주변국이 물질적인 것이나 군사적인 도움을 받고, 중국은 명분상의 우위른 점하며 동아시아 외교질서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은 조선 초기 태조, 태종 임금의 책봉에 있어서 왕위 찬탈을 빌미로 문제를 삼기도 했다.
아무튼 이성계는 당시 외교적으로 보았을 때는 왕이 아니었다. 이성계가 죽을 때까지 그랬다.
이처럼 조선왕조 내내 명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에 비해 조선초에 대명 외교는 많이 시끄러웠다.
이 때 불거진 사건이 표전문 사건이다.
표문은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요, 전문은 태자에게 보내는 문서인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고 명이 트집을 잡는다. 즉 중국황제를 모욕하는 언급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문서의 작성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으로 압송을 요구한다.
아래 초상화는 명태조 주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의 초상화가 저럴진데 실제로도 대단히 추남이었고 굉장히 잔혹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특기가 트집잡아 사람 죽이는 거였다고 한다.
그 주원장의 특기가 조선의 정도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튼 조선 조정은 정도전을 명에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정도전도 명에 가는 길은 자기가 죽는 일인지 뻔히 알면서 갈리가 없었다.
이런 관계속에서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태조 이성계에게 건의한다.
이성계도 요동정벌을 허락한다.
하지만 이방원은 물론 거의 대부분 신흥사대부들은 요동정벌을 반대한다.
정도전은 지난번 최영의 요동정벌과 정반대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정도전에게 있어서 요동정벌은 양수겹장이었다.
즉 조선 국내상황도 녹녹치 않았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첫번째 왕비 신의왕후 한씨 자제들인 이방원등을 제껴놓고 신덕왕후 강씨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정한다.
그리고 정도전은 1398년 요동정벌을 핑계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왕자들의 힘을 빼려 는 위협이 보이자 이방원과 다섯형제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도전,남은,심효생등을 제거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고구려의 옛땅을 찾을 기회를 둘 다 쿠데타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300년 가까이 지나서야 조선 효종때 북벌론이 잠시 나오기는 하지만 정도전의 요동정벌 시도 이후로 우리 민족에게서 요동은 영원히 떠나고 만다.
여기서 항상 궁금증이 드는 것이 있다.
과연 최영과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가능한 거 였을까?
그게 당시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거 였을까?
일단 당시 명과 조선의 국력으로 따지면 당연히 힘이 달렸을 것이다.
사실 이상주의자적 성격이 있던 최영과 정도전에게 보이는 다소 돈키호테같은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과 정도전 요동정벌을 단순히 돈키호테적 발상으로만 볼 수 있을까?
둘 다 국내정치 상황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고 당시 국외상황을 잘 이용하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고 보는 역사 전문가들도 많다.
그 이야기는 여기서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고 어쩌든 가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결론은 최영도 그렇고 정도전도 마찬가지로 요동정벌이라는 북벌을 시도하다가 그 이유때문에 둘 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성계 말처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안된다는 한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