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4- 임오군란 반발
임오군란은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일어난 사태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두 사람이 있다.
그 두사람은 요즘 kbs2에서 절찬 방영중인 '장사의 신(원작 객주)'에서 크게 활약 중이다. 장사의 신은 김주영 원작소설 객주를 드라마화 했다. 오래 전에도 방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장사의 신 드라마는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다. 그 드라마를 잘보면 그 시대상황과 당시 일반백성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 지도층을 상징하는 두 사람, 지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승승장구하는 두 사람, 김보현과 민겸호이다.
김보현은 장사의 신 처음부터 등장한다. 그는 개경 유수로서 주인공 천봉삼 아버지와 갈등을 빗는다. 그러면서 탐관오리로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 그 돈으로 더 높은 벼슬을 사고 승승장구를 해서 그가 꿈에 그리던 선혜청당상관을 맡는다.
선혜청당상관은 지금으로 말하면 국세청장이다. 당시는 거의 모든 세금을 쌀로 냈기에 선혜청당상관은 국가의 모든 재정을 한 손에 질 수 있었다.
명성황후 세력이 집권하고 또 다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남발했다. 드라마에서 나오듯이 김보현이 거액을 들여 산 선혜청당상관 자리였다. 김보현은 투자한 돈의 몇 십배로 뽑아내기 위해서 별 짓거리를 다한다. 김보현등과 같은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와 명성황후 등에 의한 궁궐의 사치 그리고 외세침탈로 조선의 국가재정은 바닥 난다.
그런데도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온 것이 모두 바닥나 경관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5군영 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이 정상적으로 지급되던 흥선대원군 집정 시대와는 달리 13개월 동안 군료(軍料)가 미지급되는 등 십 년 가까이 녹봉을 자주 지급하지 못한다. 군인들에게 녹봉도 지급하지 못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군인들의 불만이 고조됐고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개화정책에 따른 제도의 개혁으로 정부기구에는 개화파 관료가 대거 기용됐으며,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營)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 2영으로 개편하는데, 여기에 소속된 옛 영문의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게 된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했다.
이런 와중에 김보현의 비리가 발각되어 선혜청당상관이 바뀐다. 이번에는 명성황후 척족인 민겸호이다. 그런데 바뀐 민겸호는 김보현 보다 한 술 더 뜬다.
1882년 7월 19일 전라도에서 쌀을 싣은 선박이 도착하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됐다. 그러나 민겸호 집안 하인이 맡았던 선혜청 창고지기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 로 속여서 지급했다. 이에 격분한 무위영 군병들은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따졌다. 그러나 민겸호의 하인인 군료 지급 담당자가 안하무인격으로 불손한 언동까지 했다. 당시 민겸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며 민겸호 하인들까지 내놓고 수탈을 하면서도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이에 군병들은 격노했다. 그동안 쌓여왔던 것이 한 꺼번에 폭발했다. 옛 훈련도감 출신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등을 선두로 한 군졸들은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다. 그리고 도봉소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를 도봉소 사건이라 한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가 잘잘못을 따지기는 커녕 무조건 군란 주동자 체포령을 내렸다. 곧 김춘영·유복만 등 군인 네 다섯 명이 포도청에 잡혀갔다. 직후 그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중 두 명이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을 접한 군병들은 김장손·유춘만(유복만의 동생)을 필두로 투옥된 군병의 구명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통문을 작성했다
“ 굶어죽는 것이나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것이나 죽는 것은 똑같다. 마땅히 죽일 놈은 죽여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겠다.”
7월 22일(음력 6월 8일), 흥선대원군 친형인 이최응이 별기군을 동원하여 폭동을 진압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건에 가담한 군병들은 더욱 흥분했다.
그러나 흥분을 삼키고 일단 7월 23일(음력 6월 9일)에 김장손과 유춘만을 선두로 한 무위영 군병들이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집에 가서 민겸호의 위법사실과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경하는 자신에게 군료 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편지 한 통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했다.
책임을 회피한 그들의 직속상관인 이경하에 실망한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 으로 몰려갔다. 군병들은 문제를 일으켰던 도봉소 창고지기를 민겸호 집 앞에서 발견하자 더 흥분하여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했다.
하지만 그들은 폭도가 아니었다.
흥분은 했지만 그들은 소리쳤다.
“ 1전이라도 집어가는 자는 죽인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썩은 지도층에 현명한 백성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의병활동, 조선말기 민란, 동학혁명 가까이는 광주항쟁까지....
폭도로 변했지만 그래도 정도를 지키던 군인들은 빼앗은 재물들을 마당에 한꺼번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기름을 끼얹자 재물들은 성난 군병들의 심정처럼 활활 타올랐다.
성난 병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겸호는 미리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자신도 숨었다가 궁궐로 도피했다.
매천 황현의 목격담에 의하면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라고 진술했다.
군인들에게 녹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그 돈으로 자신의 배만 채우던 탐관오리의 탐욕의 불꽃이었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군병들은 본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자 일반 백성들도 합세하기 시작했다.
민씨 정권의 보복을 예상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 군병들은 운현궁으로 달려갔다. 흥선대원군을 만난 그들은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군민의 소요 사태에 대해 무위영 군졸 장순길 등에게 명하여 표면상으로는 그들을 달래는 태도를 취하여 밀린 군료의 지급을 약속하며 해산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비밀 지령을 내리고 심복인 허욱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군민들을 지휘하게 했다.
대원군과 연결된 군민들은 좀 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난입한 후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했다. 이어서 의금부를 습격하여 척사론자인 백낙관등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다른 일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나머지 일대는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 파괴했다.
또 그 날 저녁에는 일본 공사관을 포위·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등 일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도피했고, 공사관 건물은 불탔다.
또 한 편의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 하도감을 습격해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순사를 포함해 일본인 열 세 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 날의 폭동은 끝났다.
7월 24일(음력 6월 10일)은 흥선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령부 영사 흥인군 이최응과 호군 민창식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에 육박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했다.
사건의 와중에 민겸호는 강압적으로 진압시키려다 실패하고 다시 피신한다. 그러나 피신하던 중 민겸호는 한성부 도심에서 군병에 붙잡혔다. 결국 민겸호는 전임 선혜청 당상인 지중추부사 김보현 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궁중에 끌려갔다가 군병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난도질 당해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군병들은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계훈(洪啓薰)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한다.
이어서 명성황후 5- 임오군란 결과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