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다시 살펴 보는 역사도 흐른다! 2
ㅡ광해 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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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 대통령이 해외방문 중 한 언행들로 말들이 많다. 대통령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분으로서 그 언행은 한 나라 외교 정책에 엄청난 파급을 줄 수 있다. 대통령이 기분 내키는대로 할 말들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강대국들에 둘러 쌓여 어쩔 수없이 강대국들 눈치를 봐야 하는 요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정제되고 또 정제 되어서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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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가 살았던 시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광해가 생존해 있는 동안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임진왜란, 정묘, 병자호란을 겪는다. 당시는 동아시아 전체가 혼란과 집단 광기에 빠져있던 시대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 시각으로 보면 집단 광기로 보이지만 당시로는 대세였던 시대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30년 말 부터 1940년 초 독일이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 나찌 시대였다. 히틀러는 1차세계대전 패배로 패배감과 상실감에 빠져있던 독일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단 시간에 독일을 세계적 패권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초토화 시키고 유럽인 수 백 만을 희생 시켰다. 또 유태인 600만도 학살한다. 이런 정권에 당시 독일 국민은 열렬히 지지했고 환호했다. 당시 히틀러 나찌정권은 군부쿠데타로 일어난 정권이 아니라 90% 이상 국민 지지로 성립 된 정통성있는 정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잘 알다시피 처참했다.
히틀러보다 오래 된 프랑스 나폴레옹도 비슷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대혁명 자유주의 깃발 아래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기운을 전 유럽을 정복하면서 휘날리게 한다. 그리고 전 유럽 민중 영웅으로 떠 오른다. 정복당한 독일 국민이었던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한 '영웅'이라는 교향곡을 만들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즉위하면서 전 유럽 민중을 실망 시킨다. 베토벤도 실망하여 불같이 화를 내며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지워 버린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황제 즉위를 국민투표에 붙여서 압도적 지지로 통과 시키고 국민들은 나폴레옹 황제에 열광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일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국가였다. 가미가제 특공대를 보면 알 것이다. 천황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거림낌 없이 받치는 집단 광끼 최전면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도....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금 우리 국민 대다수가 군부 독재 시절이라고 생각하는 박정희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등도 그 당시는 겉으로나마 국민들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유신정권은 당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확정 되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기 드문 현상을 보여 주었다.
군부 독재 정권이라 할 수 있는 전두환 5공화국 헌법도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보다 더 높은 95%대 투표율과 찬성율을 보여 주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간접 선거였지만 거의 100% 지지로 전두환이 당선 되었다.
이처럼 국민들은 당시 정권들 프로파간다에 현혹되어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이 당시 사회 분위기에 빠져 들어 간다.
요즈음 우리나라 교육 문제에 대부분 국민이 집단 최면과 광기에 빠져 있는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사실 정권이 국민을 현혹 시키거나 사회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면 그 당시 당장은 국민들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헷갈린다.
또 국민들 대다수가 선택했다고 꼭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당시 폭군의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이 우매해서 당한 게 아니다. 객관성을 잃고 그 사회 분위기에 부화뇌동 했기 때문이다.
폭군이나 독재자가 먼저 당시 사회분위기를 만든 것인지 아님 백성이나 대중들이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폭군이나 독재자가 나오게 만드는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논쟁일 뿐이다. 언제든 폭군은 나타날 수 있다. 누구나 폭군이 될 수 있고, 누구나 폭군에게 지배를 당할 수 있다.
엇그제 올린 인조부터 시작하여 조정신료, 백성들 까지도 소현세자를 친청매국노로 치부한 예도 그런 경우에 해당 된다.
당시 분위기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서론이 길어 졌다.
광해가 살았던 시대도 윗 이야기들처럼 국가적으로 엄청난 위기의 시대였다.
광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 때는 세자 신분으로 분조를 이끌고 직접 전장을 누볐다. 정묘, 병자호란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쫒겨나 강화도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어 겪었다.
광해는 세자 시절 지난한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드라마틱하게 왕이 되었다. 왕이 되어서도 많은 치적과 악행을 행한다.
광해는 최근까지 역사적으로는 연산군과 같은 폭군 부류로 인정 받아 왔다. 요즘 와서야 광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거기에 나오는 광해는 그 동안 우리가 알았었던 폭군 광해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광해가 왕으로 있는 동안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정세와 비슷한 상황에서 중립외교로 나름 큰 전쟁을 막았고 평화를 지켜 냈다는 이미지로 다가 온다 .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 쿠테타인 인조반정으로 광해가 왕에서 쫓겨 나자 인조와 서인정권의 무지한 병신 외교로 정묘, 병자호란이 발생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광해는 왕에서 쫒겨 난 뒤에도 왕이 아닌 신분으로 정묘, 병자호란 두 참사를 보면서 19년을 더 살았다.
나는 왕조시대 때 왕 자리에서 쫒겨나서 자기를 돌보는 하녀들에게 까지 말 못할 굴욕을 당하면서도 19년이나 더 살다간 광해의 인간적 고뇌에도 큰 관심이 있다. 같은 처지인 연산군은 1년도 못 살고 아주 젋은 나이 서른에 죽었다.
광해는 임진왜란 때는 세자로서 전장 한 중심에서 조선군 실질적인 최고 사령관이었다.
광해가 임진왜란 한 가운데서 전쟁 참혹함을 직접 체험했기에 '전쟁만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로 평화를 지켜 냈다.
광해가 왕이던 시절 당시 국제 정세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에 청나라가 되는 후금이 강성 해지면서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을 때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운 것을 명분으로 후금을 치는데 조선이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해는 출중한 정보력으로 후금이 명보다 우세에 있다고 판단 한다. 광해는 명의 요청을 들어 준 척 하면서 당시 최고 사령관 강홍립에게 비밀 명령을 내려 적당히 싸운 척 하다가 후금에게 투항하도록 해 후금 원성을 사지 않고 전쟁을 막아 냈다.
이 처럼 조선이 명, 후금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광해는 임진왜란 이후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또 다른 전쟁에 내 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어느 왕조를 불문하고 사대교린정책이 대외정책 큰 줄기였다.
특히 조선은 건국 때부터 사대교린 정책을 기본 외교정책으로 삼았다.
여기서 '사대'는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교린'은 이웃 나라와는 화평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즉 사대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 책이며, 교린은 여진족과 일본에 대한 외교 책이었다.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붙어있고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나라이다.
이렇게 적은 나라가 오천년 가까이 한 민족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버텨 오기 위해서는 특단의 외교정책이 필요했다.
바로 그게 사대교린정책(事大交隣政策) 이었다.
사대교린은 조선 전기 확립되었지만 그 형태는 오래 되었다.
고구려도 한나라(32년), 북위, 수나라 등 중국에서 강성한 왕조가 들어 서면 조공 책봉관계를 맺고 외교적 이익을 취하였다.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와 함께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말 할 것도 없다.
고려도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강성할 때는 이러한 외교관계로서 국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주변 약소 민족에게 회유와 토벌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외교정책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와 원나라 관계는 조금 모호하지만....)
조공(약소한 나라가 강대한 나라에 정치·군사적인 복속의 표시로 공물을 헌상 )과 책봉(중국 황제가 국내외 귀족이나 공신에게 왕 또는 공.후등의 작위를 주는 것)의 외교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명나라가 조선에 5만명 군사를 보내면서
사대교린정책은 사대주의로 달라지기 시작 한다.
이때부터 조선사대부들은 사대교린정책을 넘어선 성리학적 질서에 의한 명나라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는 맹목적 사대주의에 빠져 든다.
원래 사대정책은 자기 보다 힘이 센 나라와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이 쇠퇴하고 청이 우세해지면 청에 대한 사대정책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광해는 그렇게 해서 전쟁을 막았다. 광해 정책이 진정한 사대교린정책 이었다.
그러나 명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사대주의자 서인 꼴통들은 광해 그런 모습에 참지 못 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를 쫒아 냈다. 그리고 여진족인 후금을 교린상대에 불과한 오랑캐로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했다가 된 통 당하고 만다.
꼴통사대부들 자기들만 당했다면 모르겠지만 자기들은 별 피해가 없었고 수십만 백성들만 죽어났고 또 수십만 백성이 청으로 납치 되었다. 수많은 문화재가 불에 타거나 잃어 버렸다. 조선 왕이 그들이 오랑캐라 불렀던 황제 앞에서 땅에 머리를 아홉 번이나 쳐박는 역사상 유례없는 삼전도 치욕이라는 국가적 수모를 당한다.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을 구별하지 못한 당시 어리석은 인조와 서인들이 불러들인 최악 국가적 참사였다.
요즈음도 그런 모습들이 보여 걱정이다.
꼴통 조선사대부들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사라질 조선을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의리 표시라고 명분을 삼았다.
명이 조선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순망치한' 조선은 명에게 소중한 입술이었다.
일본은 명나라를 치기위해 조선에 길을 요구했고 명나라는 본국에서 치뤄야하는 전쟁을 조선땅에서 치룬 것 뿐이었다
인조반정 이전 광해의 평화추구 이상과 수준높은 중립외교정책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떠오르는 태양 중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정권마다 그 색채가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현재도 병자호란 당시 후금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 미국이 요격미사일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하려는 문제로 한국은 미국과 중국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드배치 문제의 옳고 그름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럴 때 지금 시각으로 보아도 두 강대국 사이에서 수준 높고 실리적인 중립 외교력을 보여준 광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으로 앞으로 광해 편을 더 깊이있게 살펴 보고자 한다.
이어서 광해 2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