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독특한 캐릭터도 흐른다! 3
ㅡ 너무 지극한 효성때문에 역사를 바꾼 문종이향ㅡ
우리 대부분은 세종 큰아들이자 조선 5대 왕 문종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단지 문종 바로 아래 동생 수양대군 쿠데타에 의해 비극적 죽음을 당한 단종 아버지 정도로 기억한다.
문종 재위기간은 2년 정도였다. 그 기간에 후세에 주목받을 만한 역사적인 큰 사건도 없었다. 당시는 세종 대 태평성대가 문종 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운 역사 책에는 문종이 너무 병약해서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세종의 뛰어난 업적을 이어가지 못했다고만 나온다.
어떤 역사가들은 세종이 병약한 문종보다는 건강한 수양에게 왕위를 물려 주지 않은 것을 세종 최대 실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역사적 인물에 대해 드라마나 소설 혹은 학교에서 잘 못 배워 오도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삼국지연의' 라는 뛰어난 소설때문에 간웅의 이미지로 오랫동안 남겨진 조조이다. 중국 역사전문가들은 조조를 중국 역사상 가장 실용적이며 현실적으로 뛰어난 리더로 꼽는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도 그런 인물이 많다. 그 중 가장 억울한 사람 중 한 분이 오늘 이야기 주인공 '문종'이다.
문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병약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왕이 아니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 사극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 나온 문종에 관한 이미지는 체구가 작고 마른 병약한 모습으로 항상 누워있는 모습만 보여 주었다.
또 문종이 너무 유약한 심성을 가져 바로 아래 동생 수양대군 위풍당당함에 항상 두려워하며 주눅이 든 모습으로 나왔다. 수양 기분을 맞추려고 전전긍긍하며 수양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만 그려 졌다.
이는 문종의 참 모습이 아니었다.
조선실록에 나온 문종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런 문종 캐릭터와는 정반대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처럼 알고있는 문종의 병약한 캐릭터도 정반대로 나온다.
또한 문종이 수양 위풍당당에 주눅이 들기는 커녕, 문종 세자 시절부터 수양이 문종 눈에 들기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문종 이미지를 앞서 말한 식으로 그리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만든 작가들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제대로 한 번 읽어 보았는 지 의심스럽다.
물론 드라마틱한 수양 일대기를 극화하면서 주인공 수양을 카리스마 있게 그리려면 상대적으로 문종을 병약한 캐릭터로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치더라도 지금까지 문종에 대한 왜곡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무 오랫동안 문종은 병약하고 나약한 캐릭터로만 남아 있다.
조선실록에 나오는 문종 이미지는 체구가 건장하고 키도 훤칠한 지금으로 보면 꽃미남에 엄친아였다.
문종은 젊은 세자시절부터 수염이 길고 멋드러졌다. 문종이 관우를 닮은 외모빨로 중국 사신들에게도 큰 인기가 있었다.
문종 그런 외모 뿐 아니라 생각도 깊고, 아는 것도 많고,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해서 중국 사신들이 오면 젊은 세자인 문종과 토론하는 것을 무척 좋아 했다.
이런 조선 젊은 세자에 대한 소문이 중국까지 퍼져 나가 중국과 외교, 무역등이 세자 빨로 활발해졌음이 실록에 적혀 있다.
어찌보면 문종은 우리나라 최초 한류를 열어 간 당시에는 요즘 아이돌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문종 출생 배경도 지금까지 어떤 왕자보다도 출중한 명분을 가진 정통 적장자였다. 조선 최초 적장자 왕이자 세자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려서 부터 문종 존귀함은 하늘을 찌르듯 높여져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 성군이자 문종 아버지 세종 조차도 적장자로 태어나지는 못했다.
문종 외아들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라서 문종이 아주 젊은 나이에 단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종이 승하할 때 나이는 39세로 당시 왕 나이로는 적지않는 나이였다.
조선 왕들이 단명을 해서 조선 왕들 사망나이로 봐서도 문종은 평균이다. 왕으로서 재위기간이 짧았을 뿐이다.
문종은 열살 어린 나이로 세자에 올라 무려 29년 동안 세자로 보낸다.
사실 세종대왕 치세기간이 31년 6개월이다. 그 기간 중 문종이 세자로만 무려 29년을 보냈다. 어찌보면 세종 치적은 문종과 공동으로 이룬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세종은 병치레가 아주 심했다. 병치레가 심해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세종후기 5년 정도 치세는 문종치세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문종은 세종대신 대리청정을 하면서 과도한 업무를 특별한 건강 문제없이 모두 잘 소화 해냈다.
여기서 문종의 독특한 캐릭터가 나온다.
세자시절 문종은 세종과 비슷하게 일중독에 가깝게 일에 몰두한 일벌레 였다. 너무 성실한 타입이었다. 놀 줄도 모르고 여색도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나 지나친 효성도 문제였다
문종은 세종대왕을 쏙 빼 닮아서 학문을 좋아했고 깊이도 있었다. 병서와 다른 분야도 업적이 많았다.
문종은 1450년(문종 즉위)에 삼국 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크고 작은 전쟁 기록을 담은
《동국병감》을 편찬케 했다. 이 책은 "외적이 와서 침범한 일과 우리나라에서 미리 준비하고 방어한 계책의 수미와 득실을 자세히 참고"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다. 이는 과거의 일을 통해 현재의 국방을 튼튼히 하자는 것으로, 조선 시대 무장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교양서로 여겨졌다
장영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측우기도 사실은 문종이 세자시절에 낸 아이디어 였다고 한다.
사실 한글창제도 문종이 세자시절부터 주도했고 깊숙히 관여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한글도 문종이 창제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도 한다.
문종은 국방에도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세종시대 개발한 신기전과 화차, 화포등 화약무기에 관해서는 문종이 기획 개발 설계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했다. 그리고 군제 개편 또한 관심이 많아서 4군 6진 개척 또한 세자시절 문종이 주도했다. 역사서에는 모두 다 세종 업적으로만 나온다.
실록에 세자시절 문종과 수양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문종이 병권에도 얼마나 전문가였는가를 보여 준다.
문종이 수양에게 말했다
"나의 기재는 제갈량에 비해서 조금 모자란 수준인 듯 하다"
수양대군은 그에 답했다
"형님이 제갈량보다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이 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해 준다.
문종이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고, 기재가 뛰어났으며, 수양이 문종에게 이렇게 아부할 정도로 꼼짝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종은 세자로서 보기 드물게 효자였다. 이게 문제였다.
문종 어머니 소헌왕후와 아버지 세종이 3년 격차로 돌아 가셨다.
문종은 소헌왕후 장례에 혼신을 다해 유교적 장례의식을 3년 간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고 3년이 지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세종이 돌아 가셨다. 문종은 또 유교적 장례의식에 따라 3년을 철저히 지키려 한다. 게다가 그때는 왕에 즉위하여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병까지 얻었다.
일벌레인 문종이 너무 지나친 효성으로 장례의식을 철저히 지키다 큰 병을 얻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전문가들 진단이다.
이러한 걸 독특한 캐릭터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어쨌든 지나친 것만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문종의 독특한 캐릭터를 들자면 장성한 동생들에게 지나치게 자신만만했고 온정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종은 수양에게도 자신만만한 형이었다.
그래서 문종이 세자시절이나 왕이 되어서도 수양이나 동생들을 전혀 견제하지 않는다. 문종이 보기에는 수양등 동생들은 이쁘고 착한 동생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수양과 안평은 간혹 권력에 대한 욕심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중신들이 왕권 강화를 위해서 수양과 안평을 견제하기를 요구하고 문종에게 결단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종은 자신만만했다.
"부왕인 세종은 왕이 되어서도 두 형님을 끝까지 잘 모셨다. 그런데 내가 동생들인 수양과 안평을 충분히 제어 할 수 있는데도 그들을 견제만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말했다.
문종은 "내가 이렇게 건재한데 지깟놈들이.... " 하는 생각으로 중신들 요구를 다 무시했다. 게다가 수양에게는 견제를 떠나 아예 조정 일을 맡기기까지 했다.
물론 문종 이런 생각이 후에 엄청난 비극을 불러 왔고 조선역사를 바꾸었지만 당시 문종생각은 올바른 것이었다.
이처럼 문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처럼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세종 승하 때보다 문종 승하 때 더 슬퍼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시대에는 백성들이 문종 치세를 잘 알았던 듯 하다.
만일 문종이 조금 더 오랫동안 조선 5대 왕으로서 보위에 있었다면 우리는 로마 5현제 시대처럼 연속적으로 세종대왕과 같은 현군이 탄생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조선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까?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자질을 가진 문종에게도 몇 가지 문제는 있었다.
문종 개인 가정사가 정말로 불운했다.
문종은 세자시절 세 명 세자빈을 모두 잃었고 문종이 승하할 때까지 홀아비 임금으로 살았다. 조선 왕조 중 유일한 홀아비로 돌아가신 왕이다. 그 이유는 문종이 왕으로 즉위할 때 세종 장례식을 치루고 있었기에 효성 가득한 문종이 장례식 끝날 때까지 왕비를 비워 두었다.
문종은 특히 처 복이 지지리도 없었다.
첫째 세자빈의 경우는 못생겼다 해서 문종이 마음을 주지 않았다. 이에 세자빈이 문종 마음을 얻기위해 궁녀 신발을 태워 문종에 먹이는등 이상한 행동을 하다 세자빈에서 쫒겨나고 만다.
두번째 세자빈은 세종이 첫 번째 세자빈이 못 생겨서 문종이 가까이 안 했다는 말을 듣고 인물중심으로 뽑았다. 또 그러다보니 캐릭터는 안 보았나 진짜 독특한 캐릭터를 뽑았다. 두 번째 세자빈이 인물은 괜찮았지만 문종과 성격이 맞지 않아서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번째 세자빈은 궁궐 야사에 초유의 이름을 올리고 만다. 그녀는 궁녀와 동성애로 쫒겨난 순빈 봉씨이다.^^
여기까지는 문종보다 세종 책임이 더 크다. 문종 의지가 아닌 세종 의지로만 세자빈을 뽑았기 때문이다. 세종이 세자빈을 뽑을 때 인물, 성격등은 별로 개의치 않고 뽑은 거 같다. 세종이 또 다른 성군(?)이기도 하지만 며느리 고르는 것은 대실패했다
그래서 세 번째 세자빈은 문종이 총애한 후궁 중 한 명을 선택했으나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사망한다.
이 처럼 문종은 세 명의 부인과 비극적으로 헤어졌다. 그 이후로는 새 왕비를 얻지 않고 혼자 살았다. 단종과 경혜공주, 다른 후궁으로부터 옹주 하나만 두었다.
세종의 엄청난 생산력(?)에 비하면....
문종의 이러한 조촐한 가정사는 단종이 즉위한 후 그를 보호하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이 없어서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러한 문종의 빈약한 가정사가 문종을 더 병약하고 나약하게 보이게 했을 것이다.
오늘 문종에 관한 내 글이 세종 못지 않은 성군이 될 수도 있었던 문종이향에 대해서 새롭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음 한다.
문종은 왕으로서 재위기간은 2년 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자 시절을 29년이나 보내면서 세종 치적들을 문종이 거의 같이 했다.
문종의 치적은 위대한 성군이자 아버지인 세종에게 가려졌다.
문종의 독특한 캐릭터는 지나친 성실함과 지극한 효성이었다.
문종은 적당히를 몰랐던 거 같다.
문종의 독특한 캐릭터는 이 한 단어로 정리한다.
과유불급!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문종은 이런 캐릭터로 사후 동생 수양의 쿠데타로 문종은 병약하고 나약한 이미지로 지금까지 남게된 우리 역사 속 가장 안타까운 비운의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