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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인물

태봉국왕 궁예 - 관련 자료들

작성자칼빈코스트너|작성시간06.11.20|조회수633 목록 댓글 1

궁예 [, ?~918]

성은 김.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회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5) 죽주(:현 )의 산적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898년(효공왕 2)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현 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에서 성책()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라 개칭하였다.

궁예는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을 비롯하여 병부()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과 제휴하여 진도()·나주()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 두 아들은 보살(:·)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궁  예

 
애꾸눈이 된 사연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이다. 제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하기도 한다.

그의 탄생설화에 의하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日官:길일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그는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신라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뒤 궁예는 유모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 이라 하였다.

 
초기의 세력기반

당시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들고일어났으며, 흉년까지 겹쳐 국고는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자 889년(진성여왕 3)에는 바닥난 국고를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게 하였다. 가난으로 찌든 극한의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떠돌아 다녀야 했으며 남의 농작물을 훔치는 좀도둑(草賊:초적)으로 변하였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는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기훤이 대우해주지 않자, 이듬해 다시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길의 부하로 들어간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 지금의 평창)· 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지금의 인제)·생주(지금의 화천)·부약(夫若:지금의 금화)·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패서지역(浿西地域)의 무리들이 항복하여 왔다. 이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임진강 연안을 공략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王建)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僧嶺: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임강(臨江:지금의 장단)·인물(仁物:지금의 기풍군 풍덕) 등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孔巖:지금의 양평)· 금포(黔浦:지금의 김포)·혈구(穴口:지금의 강화) 등을 복속하였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國原:지금의 충주) 등 30여성을 취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가사 장삼에 왕관을 얹다.

899년(효공왕 3)에는 송악궁을 수리(修理)하고 왕건을 보내어 양주·견주(見州)를 복속하고, 그 다음해에도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지금의 화성군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阿飡)의 벼슬을 주었다.

901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그해 7월 청주인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 서울을 정하고 상주(尙州) 등 30여현을 얻으니, 공주장군 홍기(弘寄)가 투항하여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聖冊)’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鎭)을 평정하였으며, 평양성주 금용(黔用)이 투항하여왔다. 그 뒤 궁예는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할만큼 세력이 강성하여졌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해에 왕건으로 하여금 해로로 금성(錦城)을 점령하도록 하고, 이를 나주라 이름하였다. 왕건이 거느린 해상세력에 의하여 나주정벌이 이루어져 궁예가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견훤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라 고쳤다.

 
'태봉'과 함께 사라진 미륵불

궁예는 자신의 세력이 커지자 호화 사치를 일삼았다. 그리고 점점 교만해져서 거칠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에 그를 따르던 많은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의 세력가였던 궁예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변복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 에서 백성에게 피살당하는 불운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궁예 다시 읽기
한국일보 | 김관명 기자 | 2000.09.01
최근 시청률 40%를 넘어선 KBS 사극 '태조 왕건'의 한 주인공은 궁예(김영철 분)이다.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스님 모습의 궁예는 현재 왕건(최수종 분)을 자기 휘하에 끌어들인 채 중부 일대를 장악해가고 있다. 아버지 경문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고 그 일로 악몽을 꾸는 등 훗날 광기 서린 모습도 예고하고 있다.

궁예의 이미지는 아직 우리에게 '광인'으로 자리잡혀 있다. 집권 말기 교만에 빠져 자칭 '미륵불의 화신'으로 행세한 인물,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죽인 나쁜 왕이 궁예이다. 지금까지 방송된 포용력과 이해심 많은 궁예의 모습은 이러한 극적인 반전을 노린 정교한 장치라는 느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경기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궁예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박사학위논문인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를 일반인을 위해서 각색했다. 빈약한 자료에 단순한 추측의 산물이 아닌, 학자적인 고증과 논리를 내세운 '궁예 사랑' 이다.

저자는 우선 과거 정사(正史)에서조차 궁예를 어떻게 포악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제시한다. '고려사'의 기록이다. '궁예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해 죽였다'.

이번에는 '삼국사기'의 기록. '왕이 무쇠방망이를 열화에 달구어 그 음부를 쳐서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였다'. 하지만 저자는 이후 사가들의 선입견과 억측을 하나하나 반박해간다. 궁예가 태어난 5월 5일은 중오일(重五日)로 불길한 날이라고 주장한 일관(천문을 맡은 관리)의 말에 대해서는 신라 때부터 명절로 꼽혀온 단오가 어떻게 궁예가 태어난 해에만 불길한 날이어야 하는지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

궁예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악했다는 증거로 꼽히는 '태어나면서 이가 났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궁예가 일찍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빨랐다는 사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 왕의 초상에 칼질을 한 사건도 TV 사극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당시 반(反)신라적인 민심의 성향을 대변하고 결집시키는 동시에 1,000년 동안 지속돼 온 신라의 관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소수 세력에 불과했던 궁예가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후삼국이라는 난세에 궁예가 3년 만에 홀로 설 수 있었던 비결은 개인적 자질에서 찾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성을 공격할 때 습(襲), 격(擊), 격추(擊追)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고, 병졸들과 매일 밤 숙식을 같이 할 정도였던 궁예였기에 아무런 배경도 없던 재가화상에서 장군으로, 이어 임금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궁예 사랑'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사랑' 에 못지 않은 것 같다.

기사제공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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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주의·성패론 따른 역사인물 재단은 잘못
조선일보 | 이지형 기자 | 2000.09.01
이재범(49) 경기대 교수는 궁예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15년 궁예을 연구했고, 지난 92년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도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다. 그는 왜 이토록 궁예에 몰두하는가?

''도덕주의 혹은 성패론에 따라 역사의 인물들을 재단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립했을지언정 한 시대를 고민했던 동반자로서 그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상 보기 드물게 나쁜 놈'으로 돼있는 궁예 연구는 그런 면에서 제격입니다.''

이 교수는 서문에서도 한 서양학자의 한국역사관 평가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당시 논문을 읽고 조롱당한 것 같았다''고 했다. 논문은 '좋은 놈, 나쁜 놈, 치사한 놈'이란 제목으로 각각 왕건, 견훤, 궁예를 비유해 놓고는, 그러한 은유가 권선징악적 편견에 사로잡힌 한국의 전통적 역사관이라고 비꼰다.

이런 생각들을 밑에 두었으니, '슬픈 궁예'는 물론 궁예에 관한 기존의 평가를 뒤집는다. '포학한 궁예'를 다각도로 한꺼풀 벗겨내고, 궁예에게서 거란에 보검을 하사하는 등 동아시아 패자를 자부했던 모습을 본다. 또 골품제를 부인하고 능력 위주의 관인체제를 구축하려던 혁명을 본다. 그리고는 ''궁예는 왕건의 용의주도한 반란에 의해 몰락했다, 포학함이 아니라 고구려계 호족들의 결탁에 의한 반역으로 왕좌에서 물러났다''고 잘라 말한다.

이 교수는 책 말미에 ''과거는 불변이지만, 역사는 바뀐다''고 썼다. ''바뀌어가는 역사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부탁한다''고 했다.

기사제공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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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개혁자, 궁예 다시 보기
중앙일보 | 오현아 기자 | 2000.08.31
KBS 드라마 〈왕건〉의 인기에 힘입어 궁예와 왕건에 대한 연구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애꾸눈에 험상궂은 인상, 죄 없는 백성을 역모로 몰아 수백 명씩 죽이는 살인마, 왕건에게 쫓겨나 도망가다 백성에게 처참하게 살해 당한 폭군.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궁예의 이미지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와 〈고려사〉등 역사서에 나타난 궁예의 모습이기도 하다.

방송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궁예의 본 모습을 찾아보려는 데에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관심의 초점은 고려 시대 역사 편찬가들이 왕건의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궁예를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태조 이성계와 조선 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려 우왕을 미치광이로 묘사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재범 경기대 교수의〈슬픈 궁예〉는 역사적 자료와 풍부한 민담 등을 통해 '궁예 바로 세우기'를 시도한다. ''과거의 사실은 변하지 않아도 역사는 바뀔 수밖에 없다''면서 궁예에게 덧입혀진 옷을 하나씩 벗겨나간다. 역사적 패자인 궁예를 정신이상자로 낙인 찍은 정사를 삐딱하게 바라볼 때 '궁예 바로 보기'가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이재범 님이 바라보는 궁예는 한마디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실패한 개혁가다. 견훤이나 왕건처럼 신분이 좋지 않고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궁예에게 현실의 모순은 더욱 첨예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고려를 세운 뒤 궁예가 시도한 개혁 정책이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왕건이 왕위에 오른 것은 궁예에 대한 '역모'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것도 30세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계획적으로 꾸민 역모라고.

궁예에 대한 역사적 억측은 그의 출생에서부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가지 가정이 있지만 이재범 님은 궁예를 선조로 삼는 순천 김씨의 족보를 참고해 궁예가 신무왕의 아들이거나 장보고의 외손자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 〈삼국사기〉에 그려진 것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애꾸눈에 이가 돋았다는 악의적인 기록도 재해석한다.

어린 시절을 절에서 보낸 궁예가 '난세의 영웅'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궁예가 덕장·지장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가졌기 때문이다. 강하게 나갈 때를 알고 회유할 때를 아는 유연성, 사졸까지 끌어 안는 포용력.〈삼국사기〉에서조차 궁예가 ''사졸과 함께 달고 쓰고 힘들고 편안함을 같이 하며, 주고 빼앗고 하는 데 있어서도 공(公)으로 하고 사(私)로 하지 아니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재범 님은 궁예의 성격을 말년의 극악무도함으로 대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한다.

궁예가 이상사회의 꿈을 펼쳤던 철원의 대부분은 비무장지대와 북한 땅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궁예는 왜 몰락한 것일까. 이재범 님은 궁예가 실정(失政)으로 몰락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원인이 궁예의 포악함이 아니라 그 당시 정치 사회 현상에 있음을 강조한다. 공명정대했던 궁예가 말년에 갑자기 변한 것은 개혁을 반대하는 수구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삼국사기〉에서 서술하는 것처럼 역사의 변화를 개인의 심성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궁예에 대한 정사와 민간전승의 기록이 가장 엇갈리는 것은 궁예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기록 부분이다. ''왕건이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 도망쳐 나가자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먹다 바로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이 책 202쪽)

〈고려사〉에 전하는 기록이다. 그러나 철원 지역의 민간 전승은 이와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즉 궁예는 보리이삭을 먹다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천명을 알고 이에 순응하여 자결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 민담은 궁예를 기억하고 기리려는 민중의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서술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만큼 시대에 따라 바뀐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의로운 혁명이 반역으로 몰리기도 하고, 쿠데타가 정당화되기도 하는 질곡의 세월이었다. 하물며 몇 천 년 전의 과거 사실을 왕조의 이해가 반영된 정사의 기록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궁예를 미화한 점이 없지 않지만 이재범 님의 '궁예 다시 보기'가 의미 있는 것은 민간전승 등 다양한 실증 자료를 통해 왜곡된 정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역사서에 그려진 것처럼 왕건은 '좋은 놈', 궁예는 '나쁜 놈' '치사한 놈'이 아니다. 의로운 덕장이자 실패한 개혁가일 따름이다. 끝없이 살아 숨쉬는 역사 속에서 역사 왜곡 따위의 조작으로 영원한 '성군(聖君)'도 또 영원한 '폭군(暴君)'도 만들어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시절이다.

기사제공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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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도 미륵도 아닌 자주적 혁명가
한겨레 | 노형석 기자 | 2000.08.28
요즘 텔레비전 사극으로 한창 뜨고 있는 '애꾸눈 제왕' 궁예(?~918)만큼 우리 역사에서 다기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 있을까. 안개에 싸인 출생배경만큼이나 인물 자체에 대한 후대의 해석도 극명하게 갈라진다.

이는 <삼국사기><고려사>같은 전통사서들이 궁예를 부인과 아들을 죽인 폭군으로 비난한 반면 민간전설들은 오히려 미륵불 같은 선인으로 묘사하는 데서 비롯된다. 더욱이 궁예 관련 유적들은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인 철원에 흩어져 그의 재평가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고려태조 왕건에 밀려 역사 저편에 사라진 이 비운의 인물은 그저 영원한 수수께끼 속에 파묻혀야할 운명일까.

몇안되는 궁예 연구자인 이재범 경기대 교수의 <슬픈 궁예>는 유교사관에서 덧씌운 악인의 굴레를 벗기고 경세가로서 궁예를 파헤쳐본 책이다. 신라쇠망기를 틈타 각지의 호족들이 발흥한 후삼국시대를 어느 때보다 자주적 에너지가 꿈틀거린 약동기로 눈여겨본 지은이는 정치정세와 지역적 역학관계를 토대로 풍운아 궁예의 생애를 색다르게 복원한다.

궁예의 성장사와 권력 획득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 이런 관점은 도드라진다. 이 교수는 하급승려 출신이던 궁예가 대권을 잡게된 것은 호족간의 영역싸움에서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한 지장으로서의 면모 때문이었다고 보고있다. 894년 피를 흘리지 않고 명주를 점령해 장군으로 추종받은 것이나 중부권 실력자 양길의 수하에서 급속히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사사로움 없이 위아래를 대하는 통치자적 자질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게 이 교수의 견해다.

896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려로 정한 궁예는 임금을 칭하며 관제를 신설한다. 이후 국호를 대동방국과 통일천하를 각각 뜻하는 마진과 태봉으로 잇따라 바꾼 사실을 책은 자주와 민족단합을 모색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골품제 대신 능력에 따른 관직등용제도를 신설한 것이나 독자 연호 사용과 거란과의 적극적인 통교정책 등도 궁예의 혁명가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조명된다. 심지어 지은이는 원주-영주-명주-간성-한계령-인제-철원-서해로 이어지는 정벌로를 `궁예의 길'이라 명명하고 국토개척자라는 별호를 주기까지 한다.

흥미로운 것은 궁예의 몰락배경에 대한 서술이다. 사서에서는 궁궐건축을 위해 무자비하게 조세를 거두고 부인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참살하는 등의 학정을 지목하지만, 이 책은 기득권층이던 고구려계 호족들과의 불화를 주시한다. 송악에서 철원으로의 재천도와 청주주민의 수도이주정책 등으로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 세력들이 왕건의 쿠데타를 부추켰다는 추론이다.

왕건이 30살 때 바다 가운데 솟아오른 9층 금탑 위에 올랐다는 꿈을 꾸었다는 사서의 기록은 거꾸로 그가 일찌감치 역모를 품었다는 근거로 등장한다. 궁예 몰락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환선길이 반란을 일으키고 30여 개 성이 후백제로 투항했다는 점에서도 왕건의 등극은 도덕적 승리가 아닌 권력투쟁의 소산이었다고 책은 주장한다.

궁예는 쫓겨나 달아나던 중 밭에서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농민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지은이는 궁예가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선 채로 자결했다는 철원지역 전설을 바탕으로 그의 최후도 악인처럼 윤색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분히 궁예를 미화하는 듯한 느낌도 주지만 선악개념이 아닌 기능주의적 사관으로 궁예, 왕건의 관계를 분석해 역사산책의 흥취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책이다.

기사제공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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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敗者 궁예 바로보기
동아일보 | 이광표 기자 | 2000.08.26
애꾸 눈에 거친 모습, 광포하고 괴팍한 성격. 보통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궁예의 이미지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 관련 역사서 역시 궁예를 악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역사의 대부분이 승자의 기록이었다는 점을 돌이켜볼 때, 패자인 궁예 역시 승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대목은 없을까.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궁예에 드리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그 실체에 객관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저자는 궁예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경기대 교수(한국사).

우선 궁예의 난폭한 성격에 관한 부분. 궁예는 의심을 일삼았고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죽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광폭함이 궁예 성격의 전부인 듯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년의 성격일 뿐, 이것만으로 궁예를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가들은 또한 이를 두고 궁예가 신라왕(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로 태어나 왕실에서 버림받은 충격, 그 정신분열의 결과로 이해해왔다. 저자는 이것이 잘못된 시각이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궁예가 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확실치 않다고 덧붙인다.

잦은 국호 연호 변경에 관한 문제. 궁예는 불과 십수년 사이에 국호를 고려 마진 태봉으로, 연호를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로 바꿨다. 이를 놓고 후대는 궁예를 광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의 출생에서 비롯된 정신불안의 결과라고 말해왔다.

저자는 그러나 국호의 변경은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첫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초기 점령지역이 고구려의 옛땅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결과였다. 이후 신라 백제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고구려 중심의 국호를 바꿔야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포함하는 마진(대동방국이란 뜻)으로 바꾼 것은 그래서 옳은 선택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국호 변경은 고구려적 요소와의 결별이자 삼국통일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계의 불안감과 반발을 가져왔고 이때부터 왕건의 역모가 시작됐다.

궁예의 미륵신앙에 관해, 사람들은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것을 놓고 과대망상이라고 폄하해왔다. 하지만 궁예의 미륵불 사살은 당시 지배방법의 한 형태였을 따름이라고 저자는 반박한다. 궁예의 미륵신앙만 유독 잘못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은 의도적인 편견이다.

궁예의 최후닌? '고려사'는 궁예가 궁궐에서 축출된 뒤 보리 이삭을 훔쳐먹다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육당 최남선이 철원지방에서 채록한 저설 내용에 주목한다. 이 전설에 따르면 궁예는 버림받은 폭군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을 받다 스스로 자결했다.

정사(正史)와 전설이 왜 이렇게 다를까. 이 대목에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것은 분명 역모였다. 궁예가 고구려 중심주의를 포기하자 불안을 느낀 왕건과 고구려계 세력이 역모를 꾸민 것이다. 그렇기에 그 역모는 명분이 약했다. 그래서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정사는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이도학 | 김영사 | 2000년 05월 01일
책소개 *이긴 자 위주, 왕건 위주의 역사가 아닌 연구자의 균형된 감각으로 완성한 후삼국사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말처럼 역사서는 왕건을 주인공으로, 이긴 자 위주로 서술되었다. 특히 ...
곽차섭, 이재범 | 최승훈, 강문형, 김동원, 최재호 | 푸른역사 | 2000년 10월 01일
책소개 후삼국시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분단과 지역주의라는 치유하기 힘든 병을 앓고 있는 우리 시대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궁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궁예가 얼마나 ...
이재범 | 푸른역사 | 2000년 08월 16일
책소개 궁예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강조하는 저자는 우선 사료 해석을 문제삼는다. '정사'라 불리는 국가의 역사 편찬은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쓰여졌고, 이 과정에서 궁예와 같은 세속적 권력의 패배자들은 변명할 기회...

 가장 슬픈 운명을 맞은 궁궐은 우리역사에서 어디일까.
    국가의 흥망성쇄와 함께했던 궁궐은 차기 정권에 의하거나 외적의 침입으로  사라지거나 파괴됐으니 저마다 사연이 많을 것이다.
   
    필자가 꼽는 `비운의 궁'은 태봉국 궁예도성이다.
    한 민족이 동족 상잔의 6.25전쟁을 맞으면서 만든 군사분계선이 이 도성을 동강냈기 때문이다.
    역사란 승자의 논리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궁예왕의  대한  견해는 여기서 논외로 하자.
    현재  궁예도성은 남측도, 북측도 접근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에 놓여있다.
    그 성 주변은 지뢰밭이다.






    
    이런 궁예왕의 도읍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실물 모형이 400분의  1로  축소돼 철원군청 현관에 설치됐다.
    궁예도성은 내성과 외성 등 3중성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희미한 성곽성태는  인공위성 사진을 기초로 했다고 한다.
    재현과정에 참여한 손영식 문화재위원(명지대교수)는 400~500년대 뒤에  완성된 서울 성곽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를 갖춘 의미있는 도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973년 궁예도성의 남문에 있는 군부대에서 중대장 생활을 했으니 1천년의 시공을 두고 궁예왕의 도읍지를 바라본 셈이다.
    도성내 건물은 일제시대 유적조사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와  조선고적도보에 등장한 석탑과 귀부 등을 참조하고 건물은 고구려의 안학궁, 발해 상경  용천부, 신라 왕경 등을 모델로 해서 재현했다.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 가운데를 가로 지르고 있는 군사분계선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고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발길마저 차단하는 레드 테이프다.
    역사학자들은 이 정확한 궁예도성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남북 사학자들의 학술연구와 공동발굴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궁예왕의 대동방국의 꿈은 후세들의 전쟁으로 아직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이 모형도를 보며 남북한 사학자들이 궁예도성 발굴작업을 하다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장면을 꿈꾸어 본다.
    반복과 질시, 갈등과 대립으로 50년을 살아온 남북한이 이제는  지뢰밭에  묻혀 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하며 근.현대 들어 기를 펴지 못한 대동방국의 꿈을 실현함이 어떤가.
2006.02.06 18:50:19

 

후삼국의 분열과 포천-궁예의 활동과 관련하여

 

진성여왕 3년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 50여 년 동안은 극심한 내란기였다. 이를 수습하여 정권을 수립하고 신라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옛 고구려와 백제지역에서 일어났으니, 그들이 바로 궁예와 견훤이었다. 그들은 비록 신라 계통 출신으로서 고구려나 백제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그들의 세력지에 팽배하였던 반신라적 고구려 백제의 회복이라는 움직임을 이용하여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계승을 표방하고, 대소 반란세력을 규합하여 마침내는 백제와 태봉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농민반란의 와중에서 새로이 성장한 궁예가 패강진지방의 호족 왕건 부자와 평산 박씨의 귀부를 받아들인 것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무렵인 896년 경이었다. 그 후 2년이 채 못되어 궁예는 패강진 지역과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차지 하였다. 이로써 우리 포천 지역도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궁예가 도읍하였던 철원은 우리 포천 지방과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고, 우리 포천시내에 궁예와 관련됨직한 유물, 유적들이 많이 분포하고, 궁예의 행적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보이고 있어서, 궁예의 세력 성장과 활동 및 몰락과정은 매우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궁예의 행적은 {삼국사기} 궁예전과 {고려사} 등에 많이 전하고 있는데, 궁예는 일찍이 신라 국왕의 서자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함께 전하고 있다.

 

(궁예는) 신라인이다. 성은 김씨인데,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嬪御)로서 그 성명은 아지 못한다. 혹은 이르기를, 제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 집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가 하늘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태어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光焰)이 이상하므로, 장래에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기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中使)에게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명하였다. 사자가 강보 중에서 아이를 취하여 누각 아래로 던지니,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하여 눈 하나를 찔렀다. 안고 도망하여 힘써 길렀다({삼국사기} 권 50, 열전 10, 궁예).

 

곧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서자라는 설과 48대 경문왕의 서자라는 설이 함께 전하고 있으며, 태어날 때의 여러가지 징조가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하다고 하여 유모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논자들도 궁예의 출신에 대하여 헌안왕의 서자라는 설과 경문왕의 서자라는 설, 그리고 중앙의 진골귀족출신이라는 정도로 절충하는 설로 나뉘어 있는 실정이다. 먼저 헌안왕 서자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헌안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만일 궁예가 헌안왕의 서자였다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헌안왕의 사위였던 응렴(膺廉, 경문왕)이 왕위를 계승했던 것은 응렴의 아버지인 계명(啓明)의 힘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즉 계명은 문성왕 때에 시중과 상대등을 역임하면서 의정(誼靖, 헌안왕)을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연유로 응렴이 헌안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고, 결국 응렴을 즉위시키기 위하여 궁예를 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들고 있다. 반면에 경문왕 서자설은, 경문왕의 경우 정비(正妃)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고, 정비와 심한 정치적 갈등이 있었던 또다른 왕비가 있었다는 점에서, 후비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인 궁예는 왕비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제거된 것이라고 보았다. 절충설의 경우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궁예 관련 기사들이 고려 태조 왕건 중심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견훤이나 왕건이 그 자신들의 가계를 중고시대 신라 왕실과 관련된 것처럼 꾸민 데 대해, 유독 궁예의 경우는 앞 시대의 신라왕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궁예가 유력한 가문 곧 진골귀족 출신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무튼 궁예는 중앙의 어떤 정치적 요인으로 인하여 숨어살게 된 왕족이었다고 할 수 있는 바, 그는 나이 10여 세에 이르러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출가하였다.

 

그는 후일 승려 생활을 그만둘 때 까지 세달사에서 생활하였는데, 세달사는 고려시대의 흥교사(興敎寺)로서 지금의 영월지방에 있었다. 이 절은 의상의 법손인 신림(神琳)이 주석하였던 곳으로서, 화엄종에 소속된 절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 3, 탑상(塔像),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는 이 절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하고 있다.

 

옛날 신라 때에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興敎寺이다]의 장사(莊舍)가 명주(溟州) 날이군(捺李郡)[안찰컨대 지리지에는 명주에 날이군이 없고 오직 날생군(捺生郡)만이 있다. 본래 날생군은 지금의 영월(寧月)이다. 또한 우수주(牛首州) 영현으로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 날이군(捺已郡)으로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다. 지금 날이군(捺李郡)이라 말하고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본사에서 승려 조신(調信)을 지장(知莊)으로 삼아 보내니, 조신이 장상(莊上)에 이르러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보고 매우 혹하여 낙산(洛山) 대비(大悲) 전에 나아가 몰래 행(幸)하기를 기도하였다. (조신이 홀연히 꿈에)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살 먹은 큰 아이가 굶어 죽으니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꿈을 깨어 해현의 아이를 묻은 곳에 가서 파보니 석미륵(石彌勒)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장사의 직임을 면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고 백업(白業)을 닦았다.

 

위의 기사는 세달사의 조신이란 승려에 관한 일화로서, 그 가운데에는 839년 장보고의 청해진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하여 소백산에 은거했다가 849년에 병사한 김흔과 관련된 부분이 있어, 대체로 830, 840년대의 사실로서 인정된다. 이는 궁예가 출가하기 50여년 전의 일로서, 세달사의 사상적 계통과 아울러 궁예의 사상적 바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세달사 승려인 조신이 낙산사 대비전에 나아가 기도를 하였고, 결국 석미륵과의 인연으로 깨달음이 있어 정토사를 창건하였다는 데에서, 세달사는 낙산사 미륵불 정토사상과 모종의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산사는 의상이 창건한 화엄종의 사찰이었으며, 의상의 법손인 신림(神琳)은 세달사의 승려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당시에 세달사가 화엄종 소속의 사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달사 승려인 조신이 미륵불과 관련을 맺고 있고, 또 세달사 승려 출신인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으면서 큰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둘째 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칭하였던 것은, 당시 세달사를 둘러싼 이 지역의 불교 신앙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특히 세달사가 영월지방에 있으면서도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는 낙산사의 소재지인 명주(溟州)지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위의 조신 설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거니와, 명주지방는 일찍이 진표(眞表)가 법상종(法相宗)을 폈던 곳이었다.

 

 

그런데 진표가 폈다는 법상종은, 일찍이 태현(太賢)이 중앙 진골귀족을 대상으로 한 법상종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곧 진표는 교학 중심의 태현의 법상종과는 달리 토착신앙과도 습합되기 쉬운 점찰법(占察法)과 참회의 실천을 그 내용으로 하였고, 법상종의 설주(說主)인 미륵을 주존불로 삼았었다. 이 무렵의 미륵신앙중고기의 하생신앙(下生信仰)과는 달리 도솔천에 왕생을 원하는 상생신앙(上生信仰)으로서, 이미 중대 초부터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신앙이 일반 민간에게 널리 유포된 결과로 보여진다. 이러한 관념은 태현의 법상종에서는 아미타불을 내세불로 내세우게 하였고, 진표의 법상종에서는 석가와 미륵 사이에 부처가 없는 세계(無佛世界)의 보살로서 지장보살이 상정되었다. 특히 지장보살은 말법시대에 6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성격을 가지므로, 이러한 신앙의 형태는 실천적 신앙인 진표의 점찰법과 함께 당시에 중앙으로부터 소외되고 기근에 시달리던 민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따라서 진표계의 법상종은 금산사(金山寺) 속리산 명주 등지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통일신라의 중심지인 삼국시대 옛 신라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 퍼져 신앙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진표 스스로가 백제가 망한 100여 년 뒤에도 '백제인'으로 자처했을 정도로 반신라적 성향이 강했거니와, 당시를 말법시대로 인식한 진표계 법상종이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포교의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은 주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표의 신앙형태나 정치적 성향, 그리고 그 포교 지역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신앙은 현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고 현실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두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비록 진표 이후 신라 지방사회에 폭넓게 선종이 융성하였다고 하지만, 명주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의 진표계의 신앙형태는 매우 뿌리깊게 작용한 듯하며, 그러한 신앙의 단편을 위의 조신의 일화와 궁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포천지방에 있는 미륵불상과 이와 관련된 전설은 그러한 신앙의 내력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곧 군내면 구읍리 청성산 서남단에 있는 2m 크기의 석불 입상은 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서, 아마도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읍내의 반월성을 쌓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얼굴이 거의 마모되었지만 마을에서는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어, 신라 말엽의 미륵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여겨진다. 또한 군내면 구읍리 600-1에 있는 미륵불상에는 '신라시대 어느날 밤 갑자기 미륵불 남녀 한 쌍이 옥계천을 중심으로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어서, 세달사의 승려 조신이 해현령에서 석미륵을 찾았다는 설화와 유사하다. 이 미륵불상은 현재 여미륵불만이 남아 있으며, 한말에 명성황후가 3년간 불공차 다녀 갔다고 전한다.

 

한편 그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으나 미륵신앙과 관련한 전설도 상당수 전하고 있다. 곧 이동면 연곡 4리의 뒷둔지(後屯地)에는 벌판 가운데 수목이 우거진 숲의 땅 속에 미륵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어서, 한때 이 미륵을 파서 세우려고 하자 마을의 옛 노인들이 이것을 파서 세우면 마을 아낙네들이 바람이 난다고 만류함으로써 발국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현재 포천 종합고등학교 뒤에 있는 마을인 군내면 하성북리 백석동(白石洞)의 지명과 관련된 전설은, 구읍리 미륵불의 조성과 관련된 것이다. 곧 이 마을 뒤에 있는 백석을 깎아 구읍리에 있는 미륵불 머리를 씌웠는데, 백석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흰돌을 가져 간다고 시비를 걸면서 그 흰돌을 제 위치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그랬더니 다시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흰돌이 다시 미륵불 머리에 씌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흰돌 곧 백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처럼 우리 포천 지역에 미륵불과 관련된 전설이 광범위하게 널려 있는 것은, 우리 포천 지방이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과 인접해 있다는 점과 신라 말엽에 진표계의 미륵신앙이 강원도 북쪽의 명주지방을 비롯하여 우리 지방에까지 일반 백성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궁예는 이러한 신앙적 배경하에서 후일 반신라의 기치를 세우면서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할 수 있었고, 진표가 그러했듯이 당시 지방에 만연해 있던 반신라적 기운과 현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지방민의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왕족이었던 궁예의 출신 배경은 명주 등지의 호족들을 쉽게 규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작용하였고, 중앙 정부에 의해 가혹한 부세로 착취당하던 이 지역 농민들로 하여금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궁예의 기치 아래 쉽게 결집케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궁예가 지방의 세력자로서 장군이 되기까지에 대하여 {삼국사기} 궁예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궁예가) 일찍이 재(齋) 올리는 데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들이 무엇을 물어다가 그의 발우 안에 떨어뜨렸다. 주워 보니 상아로 만든 점치는 가지에 임금 '왕(王)'자가 써 있었다. 비밀히 간직하여 말하지 않고 매우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신라 말년에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흩어지고, 왕기(王畿) 밖의 주현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내속하는 것이 반반씩이었으며, 원근 도적의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처럼 모이는 것을 보았다. 선종(善宗, 弓裔)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하고, 진성여왕 즉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891)에 죽주(竹州, 竹山)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귀의하였으나 기훤이 업신여기며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선종이 우울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고 비밀히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었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892)에 [선종이] 북원(北原, 原州)의 적 양길(梁吉)에게로 가니, 양길이 잘 대우하여 일을 맡기었다.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면서 동쪽으로 가서 공략하게 하니, 이에 그는 치악산 석남사(石南寺)에 나아가 머무르면서 주천(酒川, 原城) 나성(奈城, 寧越)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현성(縣城)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건령(乾寧) 원년(894)에 명주(溟州, 江陵)로 들어가니 군사가 3,500이나 되었다. 이를 14개 부대로 나누어 금대(金大) 검모(黔毛) 흔장(昕長) 귀평(貴平) 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은 部長이다]을 삼고, 군사들과 고통을 달게 감내하며 힘든 일을 함께 하였으며, 주고 빼앗는 데에 있어서도 공평하게 하며 사사로이 하지 아니하니, 무리들이 마음으로 경외하며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위의 기사에서 궁예는 세달사의 승려로 있으면서도 이미 세속의 정치에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도참적인 내용, 곧 까마귀가 임금 '왕'자가 쓰인 점치는 가지를 물어다 주었다는 것은, 일찍이 이 지역에 만연한 진표의 법상종에서 점찰법을 강조하였던 사실과 관련될 듯하다. 곧 진표의 경우 망신참회(亡身懺悔)에 의하여 미륵과 지장보살로부터 계(戒)와 점찰간자(占察簡子)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 이 지역에 유포된 이러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궁예 또한 그러한 일화에 대비한 결과가 까마귀의 일화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아무튼 이러한 일화는 궁예가 승려 생활을 하면서 신라사회의 모순과 당시의 혼란한 사회적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출신과 관련하여 뜻을 키워갔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궁예는 진성여왕 5년(891) 환속하여 기훤에 귀의하였지만 기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궁예가 기훤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궁예의 세력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위의 기사에 보듯이 궁예는 자신의 뜻을 키우기 위해 거의 홀홀 단신과 같은 처지에서 기훤에 의지하였고, 기훤의 휘하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만한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같은 지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에 궁예가 양길에게 투탁하였을 때에 이들 새로이 모은 지기들과 그들의 휘하는 궁예와 행동을 같이 하였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양길의 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그가 잘 알고 있었던 지역에 대한 공략 책임을 맡게 되었고, 결국 진성여왕 8년(894) 장군으로 추대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행적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가 있었으니, 모든 일에 있어서 고락을 함께 하면서 공평무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의 정치적 혼란과 과도한 부세, 그리고 옛 고구려 지역민에 대한 차별 등에 대해 반발을 갖고 있는 이 지역 출신인 군졸들의 마음을 안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궁예는 신분에 있어서도 왕실과 연결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지역민과 동일하였기 때문에 어느 초적의 무리들과는 다른 정치적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는 신라 중앙귀족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는 호족들의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였고, 결국 제주(堤州) 지역의 귀평(貴平), 영월의 김주원(金周元)계 후손, 김순식(金順式)으로 대표되는 명주 세력 등을 비롯하여 895년에 투항한 패서도의 평산박씨세력, 896년에 귀복한 송악의 왕건 부자, 효공왕 4년(900)에 귀부한 청주세력, 904년에 내항한 공주(公州) 지방의 홍기(弘奇) 등의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특히 895년 궁예가 저족(猪足, 麟蹄) 성천(川, 華川) 부약(夫若, 金化) 금성(金城, 金化郡 金城面) 철원 등을 점령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강원도 북변 일대를 격파한 궁예가 이제 철원을 점령함으로써 한강 북쪽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자, 패서[패강진] 지역의 무리들이 항복해왔던 것이다. 이로써 개국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는 바, 892년에 이미 완산주에 도읍하고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정권과 함께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궁예의 고려 건국은 철원과 패서지방을 점령함으로써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거점 지역을 확보하면서부터이거니와, 국호를 고려라 칭한 것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것으로서, 이 지역 고구려 유민들의 호응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한 이듬해인 896년에는 송악(개성)의 왕건 부자가 투항하였다. 궁예는 그를 철원군 태수에 임명하여 패강진 일대의 공략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승령(僧嶺, 연천군 삭녕)과 임강(臨江, 장단)을 공략하였는데, 이 무렵에 우리 포천 지역도 궁예의 지배하에 들어 가 그 이듬해의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공격을 위한 교두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 포천시와 철원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명성산(鳴聲山)에는 왕건이 궁예에게 항복했다는 '항서(降書)받골'이 있어서, 이 곳에서 궁예가 왕건 부자로부터 투항의 서한을 받았던 것이 현재의 지명에까지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 734에 위치한 반월성(半月城)에 대하여 {문화유적총람}에는 "신라 48대 경문왕의 왕자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건립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여 남으로 신라, 서남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대치하여 자웅을 겨룰 때 그 부장(副將)이 축성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석축성으로서 최대 높이가 10여 m로 복원되나 전장(全長) 1km 가량으로 대부분 붕괴되고 300m정도는 일부 허물어진 채 석축이 잔존하며 산정(山頂0에는 직경 300m 정도의 공지(空地)가 남아 있고 그 상부에 200평 정도의 분지가 있다. 성중에 있었다고 전하는 3개의 우물중 현재는 1개소의 유지만 남아 있다"라고 하여,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에 이곳에 반월성을 쌓았다는 전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살폈듯이 이를 백제 초기의 성지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구읍리의 미륵불과의 관련이나 남창동(南倉洞) 등에 얽힌 전승 등으로 보아 궁예와의 관련설이 옳을 듯하다. 이 성은 해발 284.6m의 산봉우리를 감싸서 쌓은 포요형(包腰形)의 석축성으로서, 둘레는 1,063m이며 면적만도 37,205 평방m에 달한다. 물론 이 성은 한동안 쓰이지 않다가 조선 광해군 10년(1618)에 개축하여 주진(主鎭)을 삼았다가 인조 때에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 정상부의 봉우리는 장대지로 추정되는데 이곳으로부터 남벽쪽으로 경사면에 흙계단을 만들어 장대지를 보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면은 가파르고 서벽 밖으로는 포천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 해자를 겸하고 있다. 서벽 안에는 봉화대가 있는데, 강원도 철원부 적골산봉수(適骨山烽燧)-영군면 중군봉수(中軍烽燧)-며로곡(老谷, 老峰烽燧)봉수-성동리산성-독산봉수(禿山烽燧)-반월성-잉읍첩(仍邑帖, 仍邑峴)봉수-양주 대이산봉수(大伊山烽燧) 등으로 연결된다.

 

반월성에 얽힌 전설과 함께 관인면 초과 2리에 있는 남창동에도 궁예와 관련한 전승도 있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우나 본래 이 곳에는 '궁예왕이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하여 큰 창고를 지었다고 하며, 실제로는 남창뿐 아니라 北倉, 司倉도 있었다'는 전승이 있어서, 궁예 정권이 패서도와 한강유역을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우리 포천시 지역에 반월성과 함께 이들 군창지를 조성하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898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비롯한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공략한 궁예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북원의 양길의 침입을 물리치고 그 이듬해에는 광주(廣州) 국원(國原, 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 淸州) 괴양(槐壤) 등지를 정복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年號)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이 해에 패강진의 10개 군현이 항복해 왔으며, 상주를 중심으로 한 30개 현을 정벌하자 공주의 홍기가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중부 지역은 공주-상주-죽령을 경계로 신라 및 견훤의 후백제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제 남쪽의 강역을 확장한 궁예는 905년에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곧 철원에 도읍을 옮기기 바로 전년도에는 스스로 투항하여 친궁예적 성격을 띤 청주의 인호를 집단으로 사민하였던 바, 이들 청주인의 세력을 새로이 국도에 안치함으로써 궁예의 정권하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이들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수립하고자 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청주인들은 궁예의 정권 하에서 문신과 무신, 군인 등으로 크게 활약하였고, 후일 왕건과 궁예의 대결과정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국도를 철원으로 옮긴 905년 이후로 후삼국간의 전쟁은 궁예와 견훤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후백제의 배후지역인 서남해안을 공격하게 하여 나주 광주 진도 등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견훤의 중국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고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반신라적 호족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궁예가 과도하게 전제적 왕권을 추구함으로써 이에 반발하는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913년 왕건이 시중(侍中)에 보임된 직후에 일어난 이른바 아지태(阿志泰) 사건은 새로운 민심의 수습자로서 왕건이 등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아지태 사건은, 청주인 아지태가 같은 청주인인 입전(笠全) 신방(辛方) 관서(寬舒) 등을 궁예에게 참소하여 모함한 사건으로서 수년동안 유사가 해결하지 못했던 것인데 왕건이 그 진위를 밝혀 아지태를 처벌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아지태는 궁예의 측근세력으로 입전 등은 왕건의 세력으로 이해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군대의 장교들과 종실의 훈현(勳賢)들, 그리고 유학의 무리들이 왕건을 따르게 되므로 왕건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하여 다시 외방에 뜻을 두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아지태 사건 이후 궁예는 많은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는 궁예가 전제적 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는 것과 사치를 극한 거둥,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간언한 자의 처단 등을 들면서, 그의 부인 강씨(康氏)를 죽인 이후로는 '의심이 많고 화를 잘내니,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주륙되는 자가 자주 있으며, 부양(斧壤) 철원 일대의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디지 못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삼국사기}의 이러한 서술 태도는 왕건의 고려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궁예의 가혹하고 부도덕한 측면을 과장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점차 민심이 궁예로부터 떠나고 있었던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은 민심의 이반은 918년 철원의 시전에 [고경참문(古鏡讖文)]이 나돌게 되면서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그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시전에 살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918)에 시중에 모양이 괴이하게 크며 모발이 모두 흰 사람 하나가 나타났는데, 옛날 의관을 입고 왼손에는 자기로 된 사발을 가지고 오른손에는 고경(古鏡)을 들고 와서 왕창근에게 이르기를 "거울을 살 수 있는가"라고 하므로 창근이 곧 쌀로서 바꾸었다. 그 사람은 쌀을 거리의 걸아(乞兒)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자 거기에 가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읽어보니 고시(古詩)같은 것으로서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 사년(巳年)중에는 두 용(龍)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몸을 청목중(靑木中)에 감추고, 하나는 형상을 흑금동(黑金東)에 나타냈도다." 왕창근이 처음에는 문구가 있는 것을 몰랐다가 이것을 자세히 보고는 보통 일이 아니라 하고 드디어 왕[궁예]에게 고하였다.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 주인을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오직 발풍사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랫 동안 이상함을 탄식하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을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이르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 마한을 말함이요, 두 마리 용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靑木)에 감추고 하나는 흑금(黑金)에 나타냈다고 하였는데, 청목은 소나무이니 송악군인(松岳郡人)으로서 용(龍)으로 이름한 이의 손자 곧 지금의 파진찬 시중(왕건)을 말함인가. 흑금은 철이니 지금의 도읍인 철원을 말함이다. 지금 임금이 여기서 일어났다가 나중에 여기서 멸망한다는 참언이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얻고 나중에 압록강을 거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함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의 포학하고 어지러움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들만이 젓갈이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다"라 하고, 이에 말을 적당히 꾸며서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갈수록 흉악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여, 신하들은 떨며 두려워 하여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당시에 이러한 고경 참문이 나타나게 된 것에 대하여는 왕건을 중심으로 혁명파 인물이 조작한 것, 또는 강원도 통천군에 있는 발풍사를 중심으로 궁예의 학정에 반발하고 왕건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의 반영 등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는 바야흐로 왕건과 궁예의 대결이 임박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결국 같은 해에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을 옹위하여 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의 정변에 대하여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부인 유씨도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듣고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바치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부축하여 호위하고 문 밖으로 나오며 앞에서 외치게 하기를,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전후로 달려와 따르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며, 또 먼저 궁성문으로 가서 떠들며 기다리는 자가 역시 1만여 명이었다. 왕이 이에 어찌할 바를 몰라 이미 사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중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아니하여 부양(斧壤, 平康)민들에게 해를 입었다.

 

 

위의 기사에서 왕건의 정변은 아무런 무력 충돌 없이 성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궁예의 정권 내에는 상당수의 친궁예세력이 온전해 있었고, 또한 철원에 인근해 있는 우리 포천 지역에는 당시에 궁예가 왕건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다는 전승이 많이 전하고 있어, 정변에 따른 양 세력의 접전을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왕건의 정변을 반대한 청주 출신의 능달(能達)과 견금(堅金), 그리고 정변 이후에도 여전히 귀부하지 않은 명주의 김순식 등은 친궁예세력으로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왕건이 정변을 성공한 당해년도 9월에는 청주 출신 순군리(巡軍吏) 임춘길(林春吉)이 철원의 배총규(裵悤規), 계천(季川)인 강길(康吉) 아차(阿次), 매곡(昧谷)인 경종(景琮) 등과 더불어 왕건에 반발하여 청주로 도망가려 하다가 발각되어 처벌된 사례가 있었으며, 그 다음달에 다시 청주지방에서 왕건에 반발하여 진선(陳宣) 선장(宣長) 형제가 모반을 일으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 청주 세력은 일찍이 철원을 궁예의 도읍으로 삼을 때에 사민되어 왕경인이 되었으며, 그 후 궁예의 정권에서 문무관리와 요직을 누렸던 이들이었다. 이들 세력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잘 보이지는 않는데, 물론 이는 고려시대의 사서들이 왕건을 중심으로 서술한 까닭이라 할 수 있으며, 위의 {삼국사기} 기사에 보이는 정변의 과정은 상당한 윤색이 있는 기사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포천 지역에는 당시 정변의 과정에서 궁예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대치하고 접전을 벌였던 전승이 많이 전하고 있다. 곧 {문화유적총람}에는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에 대하여 "후삼국 시대에 궁예왕이 그 부장이었던 왕건에게 쫓길 때 하루 저녁을 숙영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라 전하는데 북강(北江, 現 漢灘江)에서 이 성까지 백성과 군졸들이 일렬로 서서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달해서 쌓았다 전하며 높이 2-4m, 둘레 2km의 석성의 일부가 유존할 뿐 전체 규모는 확실히 알 수 없이 붕괴 멸실되었다"라고 전하고 있어, 성동리산성이 궁예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영북면 산정리에 위치한 산정호수의 수원이며 철원과 접경을 이루는 해발 922.6m의 명성산(鳴聲山)에 얽힌 전설이나 각종 지명들에 얽힌 이야기는 왕건의 정변에 따른 당시의 정황을 어느정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곧 왕건의 정변으로 인하여 궁예는 부하 군졸들과 밤중에 궁성을 빠져 나와 명성산에 은거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려 이 산에 성을 쌓았는데, 왕건과 대결하다 왕건군이 명성산 뒤쪽을 포위하자, 궁예군은 명성산 앞 절벽에 떨어져 죽고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하여 부양(斧壤, 지금의 平康)에 이르렀으나 얼마 후 그 곳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 때 도망하지 못한 궁예의 군사와 그 일족들은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며 그 후에도 산중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이 산을 울음산 곧 명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궁예의 참담한 이야기가 서린 이 산에는,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여 철원 북방으로 패주하여 갈 때에 왕건 군사로부터 급습을 받아 싸우게 되었다는 '야전(野戰)골',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望遠臺)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望峰)',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게 ?기어 은신하던 곳으로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동굴로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 琉??동리의 이름으로서 파주골(坡州洞)은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하였다고 하여 패주동(敗走洞, 가는골)이라 하던 것이 그 음이 변하여 파주골이 되었다는 전설과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고개는 궁예의 군사가 왕건 군사에게 패하여 명성산에 피난하고 있을 때 왕건군사들이 궁예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며갔다고 하여 도마치라 부르게 되었다는 등등의 전설이 있다.

 

이처럼 우리 포천 지역 특히 명성산 일대에 얽힌 궁예 관련 전설은 위의 {삼국사기} 기사에서 궁예가 도망하였다는 산림중이란 곳이 명성산이 아닌가 추측케 할 정도이며, 궁예 세력의 최후 항전지가 이 곳 명성산 일대가 아니었는가 짐작케 한다. 특히 이곳 지명에 얽힌 전설은 오히려 왕건을 적대시하고 궁예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철원과 이웃한 우리 포천지역의 궁예와의 친연성을 짐작하게 한다.

 

궁예가 신라를 적대시한 세가지 가능성.

작성자 아이디 greeny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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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궁예가 신라를 적대시 한 이유.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에 대해서는 3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으며 모든 가능성을 곰곰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요.

 

우선 궁예가 신라를 적대시 한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으로 비치는 것이 바로 궁예가 신라 왕자 출신이었으나 버림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삼국유사』에 그 내용이 보이지요.

 

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운수가 다 되고 도를 잃어버려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 게 되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도적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는 데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선조의 화상을 칼로 베기까지 했으니 그가 어질지 못함이 너무 심했다.

견훤은 신라의 평민으로 일어나 신라의 국록을 먹으면서도 나쁜 마음을 품고 나라 의 위태로움을 기화로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들을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실로 천하의 원흉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 에게 화근이 발생했으니 모두 스스로 만든 일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항우나 이밀 (수나라사람)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과 당이 일어남을 막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 와 견훤과 같은 흉인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으랴!"

史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弓裔 甄萱二人而已 弓裔本新羅王子 而反以家國爲讎 至斬先祖之畫像 其爲不仁甚矣 甄萱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若禽獸 實天下之元惡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况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 『삼국유사』 제 2권 「기이」 제 2 '후백제의 견훤'

 

여기에서 첫번째 가능성이 보입니다. 바로 궁예가 신라의 왕자라고 쓰여져 있지요. 이 기사에 대해서는 곰곰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동안 궁예가 신라의 왕자일 가능성이 없다는 쪽이 학계의 정설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너무나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으니 말이지요. 우선 궁예가 신라의 왕자일 가능성부터 타진해보면 이렇습니다.

 

신라의 왕자라면 자신을 저버린 부모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또 자신의 평생 스트레스인 애꾸를 만든 원흉이라는 생각마저 들 것이지요. 그리고 제대로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삐뚤어져서 살았으며, 절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였을 것입니다.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궁예대 대한 내용은, 바로 이러한 점을 기초로 하여 저술된 느낌이 들지요.

 

그러나 이러한 신라왕자설에 비판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당시 2층집도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위에서 왕자를 떨어뜨리고 받을까. 그리고 그 경황중에 눈을 다친 아이가 울어도 굉장히 울었을텐데, 어찌 군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는가. 그리고 궁예가 지배한 지역이 바로 예전의 고구려지역인데, 신라의 왕자라는 타이틀이 걸려있다면 어느누가 좋아할까? 아무리 버림받았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할텐데라는 반론또한 만만찮습니다. 그런 반론을 하시는 분들은 주로 궁예의 이야기가 그 스스로가 도적시절 꾸며낸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때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왕건이 궁예를 찬탈한 이후, 고구려세력에 등을 돌렸던 궁예를 핍박하기 위하여 고의로 만들어 낸 설화가 아닌가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다른 부분을 윤색하고 본래는 신라의 왕자였다는 것을 말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이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개연성의 여지일 뿐이고, 문득 생각난 사견일 뿐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 다음 가능성은 궁예가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다보니, 그들의 반신라 감정을 건들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지요. 이는 정설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큰 말이지요. 궁예는 고구려 유민들의 한을 풀어주고자 신라에 대해서 완벽한 반대노선을 취하였고, 이를 표출한 것이 이른바 신라를 멸도라고 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보더라도 신라에서 항복해 온 자들을 모두 죽이는 등, 신라에 대해서는 악감정을 유감없이 발휘하지요. 이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땅이 커지면 커질수록 포섭세력이 많아지게되고, 이 때문에 불교적으로 가게 되지요. 그는 마진, 태봉을 칭하면서 고구려적인 색채보다는 불교적인 색채를 선택하고, 이는 고구려세력에 대한 견제로 이어집니다. 결국 고구려 세력의 대표자인 왕건이 그를 처단하는 빌미를 제공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점을 본다면 신라왕자설의 비판에 대한 재반론도 가능합니다. 즉 고구려주의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은 것은, 그가 고구려 유민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지요. 이는 무조건 신라왕자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의 행적이 주로 옛 고구려지역에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본디 외지에서 온 군벌세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근원에 대해서 설명 할 수가 없는데, 버림받은 신라왕자라고 하여 비운의 색채와 복수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서 그의 카리스마에 다른 이들을 복종시키게 하는 방편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세번째 가능성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나 『삼국사기』 등을 통한 그에 대한 조작이라고 볼 수도 잇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을 지향하였으나,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승주의를 표방하고 있지요. 이는 『삼국사기』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가장 비판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신라계승주의로서 궁예는 옳지 않은 사람이지요. 이러한 자를 더욱더 악독하게 몰아세우기 위하여 일부러 신라를 배신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기기 위하여 신라의 버림받은 왕자로 만들고, 또한 그러한 과거 때문에 신라를 계속 공격했다고 연결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또한 개연성이지만, 왕건에 비해서 유독 신라에 대한 적대감정을 보이는 궁예의 모습은 왠지 조작된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서는 왕건 또한 초지일관으로 친신라정책을 펼칠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러 신라의 성이 왕건의 덕으로 스스로 항복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는 왠지 석연찮습니다. 고려와 신라의 전면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하지요.

궁예와 임꺽정이 공존하는곳 - 안성 칠장사

신라 7세기 중엽에 자장율사가 세운 칠장사는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이다. 원래 아미산으로 불리웠는데, 이곳에서 수도하던 혜소국사가 일곱 악인을 교화 제도한 고사에 따라 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 칠현인이 머문 절이라 하여 칠장사(七長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일곱 도적 및 소나무 이야기는 앞 혜소국사와 관련된 일곱 도적 및 나옹대사의 소나무 이야기가 그 모태다.

▲ 원래 원통의 당이 30개 였으나 현재 15개만 남아있다
칠장사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일주문 밖 밭 한가운데 있는 철당간이다. 대부분 절에 달랑 돌로 된 당간지주만 쓸쓸히 남아 있는 데 반해, 이곳 철당간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초파일 오색 연등과 함께 오월의 초록에 쌓인 철당간에서 당이 나부꼈을 풍경이 눈에 선하다.

▲ 진흙을 이겨 이토록 큰 사천왕상을 만들 수 있는 정성이 놀랍다
오색의 연등이 걸린 은행나무 길을 잠깐 걸으면 바로 진흙으로 만든 사천왕상을 만날 수 있다. 악귀 위에 걸터앉아 부처님의 도량과 불법을 수호하고 있는 사천왕은 짙은 눈썹에 큰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꼬불꼬불한 수염 사이로 보이는 입술 끝에 살며시 감돈 미소가 무섭다기보다는 해학적이다. 꼬질 꼬질하게 때묻은 과자를 뒷짐에 감추고 귀엽다는 표시로 기어이 나를 울리고야 말았던 고향 동네의 짓궂은 대복이 어른을 만난 듯하여 어쩐지 정이 간다.

▲ 소박한 것이 주는 감동이 무엇인가를 통째로 보여 주는 대웅전
응향각, 요사채, 명부전에 둘러싸여 있는 대웅전은 단청이 벗겨져 세월이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대웅전 건물 자체는 1800년대 후반에 세워진 그리 역사가 길지 않은 건물이나, 그곳에 쓰인 기둥 중에는 6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한다.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나무결의 무늬가 치장하지 않은 자연스럽고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이 진정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파일이 되면 잔디가 곱게 가꾸어진 대웅전 앞마당에 연등이 가득 걸리는데, 꼬마 전구로 연등을 밝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이곳 칠장사에서 최근까지 촛불로 아기 부처의 탄생을 봉축한다(재작년까지는 그랬는데 작년 초파일엔 가지 못했다).

손에서 손으로, 등에서 등으로 어둠과 함께 온 푸르름이 조금씩 짙어지며 연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온통 연꽃의 물결로 출렁인다. 손에 손에 연등을 들고 있는 중생들 또한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힌다.

칠장사가 자리한 안성땅은 역사의 전면에 한번도 화려하게 부상한 적이 없지만, 조선시대까지 삼남의 사람들과 물자가 한양으로 진입하는 요지였다. 사람들이 모여들면 이야기 거리가 생기고, 이야기는 다시 전설이 되고 그 전설은 사람들의 가슴에 신화가 되어 영원히 새겨진다.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대웅전, 봉업사터에서 옮겨온 석불, 아직도 당당한 철당간, 해학적인 사천원상,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의 원혼을 달래려 하사했다는 국보 괘불탱 등은 칠장사를 빛내는 보물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으로 발걸음을 끌게 하는 것은 칠장사에 서려있는 조선의 의적 임꺽정의 전설이다.

▲ 병해대사와 임꺽정 일곱두령. 벽화 밑에 그들의 이름이 써있다.

▲ 병해대사의 칠장마를 탄 꺽정
백정출신으로 민초들에게 가죽신 짓는 법을 가르쳐 유기와 더불어 가죽신을 안성의 명물로 만든 갓바치인 스승 병해대사를 만나러 꺽정은 자주 칠장사에 온다. 갓바치는 10년동안 꺽정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자신의 애마 칠장마를 주는데 이 상황이 명부전 벽에 그려 있다. 천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 사회를 꿈꾸던 그들, 꺽정이 스승 갓바치를 위해 만든 꺽정불이 벽초 홍명희가 임꺽정을 썼던 1930년대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한다.

▲ 궁예도 명부전의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임꺽정과 함께 명부전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은 궁예다. 신라 왕실의 서자였던 궁예는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한쪽 눈을 잃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진 채 이후 이 곳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활 연습을 했다 한다. 지금 명부전 뒤편에 있는 궁지(弓地)는 바로 궁예가 활 쏘는 연습을 하던 곳으로, 활을 잘 쏘아 궁예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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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골든밸 | 작성시간 08.04.28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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