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레드 리버(Red River)와 서쪽 탐험으로의 중요한 길을 안내했던 애시니보인 리버(Assiniboine River)의 합류지역, 이곳은 6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매니토바의 수도. 위니펙.
공항을 나와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위니펙 특유의 바람과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산, 그리고 조용히 웃고 있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위니펙만의 색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삶의 거점을 마련한 3천여명(대략)의 한인들.
위니펙 초기의 한인 이민자들
위니펙의 이민 초기는 1953년부터 1970년대로 구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의사, 간호사, 병리기사, 대학교수, 서독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 비행기 관련 기술자 등 캐나다 사회가 필요한 분야의 이민자들이 거주 했다. 초기 한인 이민자의 수는 1백50여명 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봉제 공장에 3백명이 집단 취업 이민자로 들어오면서 위니펙 한인사는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1992년 8월 한인 아파트를 건립하면서 발전된 위니펙 한인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런 한인 이민 역사 중 한국인 최초로 위니펙에 정착한 사람은 1953년 매니토바 의대 대학원에서 흉곽외과 박사 학위를 취득한 황대연 박사이다.
그는 매니토바 한인 이민사 최초의 박사였고 거주자였다. 또 1965년 10월, 이학박사 김원겸씨와 부인 김윤덕씨는 이민비자로 위니펙에 도착했다. 그는 캐나다 연방정부 농업 연구원 주임과 매니토바 대학원 연구 교수로 근무하였고 부인 김윤덕씨는 1967년 오타와 대학에서 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매니토바 대학 의과대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부속병원 생물학 연구실에 주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그 이후 1964년 6월 산부인과 의사인 장인환 박사가 위니펙에 거주했다.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이민 비자로 캐나다로 왔으며 그의 첫번째 정착지는 오타와였다. 1년간 오타와 병원에서 근무한 후 그는 위니펙 미저리코디아 병원 (Misericordia Hospital) 에서 1년 근무하였으며 이후 산부인과를 개설하였다. 1972년 한인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4년, 산부인과 의사인 강상성씨는 가족과 함께 미저리코디아 병원에서 1년간 근무를 하고 1966년 1월 매니토바주 정부 소속 정신박약자 센터(Manitoba Developmental Center)에 취업하여, 29년간 정신박약자를 돌보고 1944년 6월에 은퇴했다.
그 다음 1964년 산부인과 의사 임단일, 전용기 정형외과 의사 등이 위니펙에 거주했다. 위니펙 최초의 간호사 이민자로는 1965년 3월에 로블린 (Roblin), 매니토바에 도착해 로블린 지역 병원 (Roblin,District Hospital)에 근무했던 최신택씨이다. 그는 1968년 위니펙으로 이주해 장애자 아동병원에서 20년간 근무했다. 이 외 1968년 최초의 병리기사로 이민 온 최영작씨, 같은 해 매니토바로 이주한 최초의 한인 전기 기사인 최영덕씨 등 위니펙의 초기의 한인들은 크게 의사와 간호사, 대학교수, 간호원, 기술자들에 의해 구성 되었다.
위니펙 한인역사의 거목
김원겸 박사와 김윤덕 박사
“누구나 과거를 기억하면 힘들었지만 그래도 참 잘 견디고 때로는 행복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매니토바 한인 이민사도 초기의 몇 가정이 안 되었을 때, 서로를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이 하나의 모임을 만들고 그 모임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그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나누었던 것에서 기억이 시작된다” 라고 말하는 김원겸 박사. 그는 1965년 캐나다 정부로부터 농업연구원으로 자리를 보장 받고 캐나다로 이주하게 되었다. 처음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1백50여명의 한인들이 초기 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이다.
그는 1994년 매니토바 대학 연구 교수를 정년 은퇴했지만 동 대학원의 요청으로 연구 교수직을 1996년 까지 역임했다. 그의 연구는 수출곡물의 막대한 병균 피해를 근절, 식물의 균 저항성과 유전인자의 축출 감정에 성공, 균에서 플라즈미드 (Plasmid) 핵산 발견했다. 그의 연구 발견은 세계 농업 연구계에 놀라운 성과로 인정되었고 일본, 독일, 화란, 영국, 한국 등 여러 나라의 초청을 받아 연구 발표를 했다.
그의 부인인 김윤덕씨는 “초기 한인사회는 하나의 작은 공동체였다. 각 가정의 아이들의 돌 잔치를 모두 모여 축하해 주었고, 공항에 한국사람이 한 사람만 도착해도 그 한 사람의 도착을 축하하기 위해 각 가정이 하루씩 식사를 준비해 함께 했던 … 그래서 풍족한 공동체였다” 라고 회상했다. 1960년 말부터 70년대 초는 한인사회에 각종 모임들이 형성되었던 시기라고 말하는 김원겸씨는 “1967년 5월 백선엽대사가 위니펙을 방문해 그의 제안으로 매니토바 한인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당시 매니토바주에는 15개의 소수민족이 살았으며 그 중 한인 커뮤니티는 너무 작아 복합문화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단지 그들의 행사를 관람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인회가 조직되고 난 다음 한국의 문화 전통 예술을 다른 민족에게 알리는 여러 기회가 마련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매니토바 한인회는 부회장에는 강상설, 총무 김형갑, 재무 김원겸, 부녀회장에 장정미씨가 선출되었다. 그 당시 한인회는 한인 상호간의 친목도모 및 캐나다 사회와 잘 연합하여 우리들의 좋은 문화 전통을 그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배우는데 그 의미를 두었다. 백선엽 대사의 제안으로 매니토바 한인회를 조직하게 된 것은 매니토바 이민 교포사회 발전상 귀중한 첫 출발이었던 것이다.
한인연합교회 태동과 한글학교
한편 1968년 초겨울 교민 중 임훈재씨 부인 변씨가 중한 병으로 입원치료 중에 몇몇 교포들이 문병하여 기도회를 가지게 됐다. 그 때 처음으로 위니펙에도 상당수의 신앙인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때 모인 분들만이라도 정기적으로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예배 드리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최능원 박사가 그 발기인이 되어 신앙인들을 찾고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신학 전공자가 3명이 있어 교파는 달라도 발기인의 노력으로 모임을 가지게 되면서 <한인 성경 클럽> 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대표자 임훈재씨, 성경 지도 윤원길, 명계수, 이하영씨를 중심으로 1969년 2월 첫 주일부터 트리니티 침례교회 (Trinity Baptist Church) 지하실 예배실에서 모였다. 교파는 장로교, 감리교, 안식교, 성결교, 침례교 등 다양했고 가정수는 10여 가정, 교인은 장년 25명, 어린이 10명이었다. 이 성경 클럽이 발족 된지 약 4개월 후 한인회와 성경 클럽 활동으로는 처음으로 1969년 6월8일 그 교회에서 “한인의 밤”을 개최하였다. 이 일을 위해 최능원 한인 회장이 한인 합창단을 조직하여 열심히 연습하고 공연하여 큰 갈채와 환영을 받았다. 그 날밤 순서로는 최능원 한인 회장의 개회사, 침례교회 시릴 헌트 목사의 축사, 이옥희씨, 김문자씨의 고전무용, 최능원 회장 지휘의 한인 합창단의 합창, 한국에서 7년간 헌신한 에스더 티에슨 선교사의‘한국과 한국인' 에 대한 말씀, 한인소개 Film, 문화자료 전시 등이 있었다. 이 행사는 교포 사회를 캐나다 사회와 소수 민족에게 소개하고 인식시키게 된 첫 사업이 되었다. 또 점차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그의 자녀들에게 한글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이연섭 박사를 발기인으로 1974년 한글학교를 개설. 초대교장으로는 이연섭 박사, 교사로는 최영희씨가 활동했다. 그 외에도 1969년 25명의 간호원들에 의해 창립 된 간호원협회 (초대 회장 장정미씨 ). 한국의 전통과 역사 소개 및 친목도모를 위해 1975년 조직된 단체 노인회. 이 모임은 이영숙씨와 박영효 한인 회장의 협조로 박영효 회장 댁에서 22명의 한인이 모여 노인회 창립 총회를 열고 초대 회장으로 임택호, 총무로 유갑열씨가 선정되었다.
위니펙 한인사회의 봄, 1980년
캐나다 이민역사의 한 획으로 기록되어 있는 또 하나의 이주 그룹은 위니펙으로 집단 이민 온 2백5십 여명의 봉재사들이다. 이들은 1980년대부터 1982년 2월까지 10차에 걸쳐 위니펙으로 이주 했다. 고속 재봉기술자로 온 이들은 매니토바의 패션회사협회(Manitoba Fashion Institute)의 초청을 받았다.
재봉업이 발달한 매니토바주 위니펙이 의류시장에 인력이 부족하자 주에서 영주권을 주는 조건으로 한국 봉재사들을 초청한 것이다. 그 전에는 필리핀계 재봉사가 1만 5천여명이 와 있었다. 패션협회는 이들의 파업등 집단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계 봉재기술자들을 초청했고, 이민조건으로는 미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 봉재사들은 1~2년 이곳에서 일을 하다가 대다수 토론토나 대 도시로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고 봉재회사의 불경기와 봉재 이민자들의 타지역 이주로 매니토바 주의 취업이민이 1982년 2월부터 중단되었다. 10차례에 걸쳐 위니펙으로 들어온 봉재기술자들의 현황을 보면 1980년10월28일 제1진 김숙영씨외 33명, 1980년 11월 제2진 양옥란씨외 36명, 1981년 제3진 1팀 김정란씨외 23명, 2팀 김진숙외 34명 등 10번째 마지막 팀으로 1982년 2월29일 윤형주씨외 1명이 도착, 총 2백30명이 봉재기술자로 이주했다. 이들의 출현은 위니펙 한인사에 활기를 띠게 했고, 초기 1백5십 명에서 7백2명으로 한인수가 크게 증가했다.
1982년 위니펙에 이민자들이 종사 했던 업종을 보면 대학교수 8명, 의사 4명, 병리학 기사 3명, 간호원 9명, 목사 2명, 태권도사범 5명, 식료품 상점 18명, 식당 6명, 제복회사 취업인 2백24명, 기타 약 20가지의 업종에 종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인사회의 활발한 움직임을 토대로 1981년 22명의 실업인이 모여 실업인 협회를 만들었고 초대 회장에는 박영수씨, 부회장에는 박영재, 총부 구자창, 재무 백춘빈, 섭외 및 사업 통보 이준만, 이사 이종만, 구명회, 이두영씨가 선출되었다. 그 다음해 1981년에는 김형갑 교수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매니토바 한인 천주교회를 설립할 것을 결정하고 1982년 고종옥 신부 방문 때 세인트 에드워드 (ST. Edward) 성당에서 첫 피정을 가졌다. 이처럼 1980년대의 위니펙의 한인사회는 화창한 봄날처럼 조직적인 발전과 함께 캐나다 사회에 규모가 잡힌 소 민족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매년 매니토바 주의 대표적인 축제인 폴크로라마(Folklorama) 행사에 한국의 문화와 먹거리를 선보이게 되면서 한인사회는 하나로 결집되었다. 한인회는 이 행사를 통해 모여진 기금을 정립해 1992년 8월 리버 에비뉴 (River Ave)에 기공식을 했던 한인 아파트를 1994년 6월 2백여명의 한인들이 모인 가운데 개관식을 가졌다. 코리아 가든 (Korea Garden)이라는 이름으로 건축 된 한인 아파트는 28세대가 입주 할 수 있는 6층짜리 아파트로 한인 노인들이 입주해, 그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현재 3천여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매니토바 수도 위니펙, 그곳에서 1953년 황대연 박사를 시작으로 한 작지만 서로 나누는 공동체로서 오늘까지 굳건히 자라잡고 있다.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는 위니펙 한인들
위니펙의 다운타운 스트레드 브룩 에비뉴, 바로 거기에 ‘바로 거기(Right There !)’라는 카페가 있다. 들어 선 입구부터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도자기와 여러 가지 작품들… 그리고 비빔밥을 먹고 있는 캐나다인들, 그들에게 한국음식 하나 하나를 설명해 주고 있는 김원웅씨. 한국 문화원의 역할을 바로 여기에서 하고 있음을 알게 했다. 김원웅씨는 2001년 12월에 이 카페를 열었다. 그가 위니펙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던 한국 생활에서 벗어나 여유 있는 삶을 찾아 이곳을 찾았고 한국을 알리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라는 판단이 이곳에 그를 정착하게 했다.
“이 카페에서 할 일은 한국의 먹거리를 통해 한국의 여러 가지 문화와 역사를 캐나다 사회에 알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타 민족과 한인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많은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이다.” 라며 한국인들의 사랑방 역할과 캐나다인과 한국의 문화가 만나는 만남의 공간으로 성장하겠다는 그, 그는 미래에는 위니펙의 한국인이 우수한 한국의 문화와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캐나다 사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진출하기를 제안한다.
안병환씨 (Si-Chang Ent 대표), 그가 제시하는 위니펙의 비젼은 바로 우수한 위니펙의 건초를 한국에 진출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한국인이 아니고 큰 한국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닌다.
건초사업에 관련된 모든 기관을, 그리고 그는 그 기관의 담당자들에게 한국인 특유의 끈기로 협조 상황을 얻어냈으며 이제 그는 그가 꿈꾸어 왔던 큰 한국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건초 사업에 몰입하고 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할 수 있다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한 구분. 나도 잘되어야 하고 또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도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그는 정도만을 고집한다. 천천히 도달한다고 해도 그는 단단하게 본인이 자랑스럽게 스스로 생각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겠다고 한다.“주류 사회로 진출해 작은 사람이 아닌 더 커진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것을 위해 먼저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그는 젊은 한국인, 건강한 한국인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처럼 캐나다의 주류사회와 함께 하는, 그리고 더 커진 한국인으로 성장 하겠다는 매니토바 한인들의 희망찬 결심이 바로 위니펙 한인사회의 밝은 내일을 보여 주고 있다.
코리아 미디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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