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루카 9,7-9
헤 로 데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이 이야기는 23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6-12).”
앞의 9장 7절에 있는,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만 보면,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헤로데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23장 8절에 있는,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라는 말을 보면,
그에게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느낀 두려움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미신적인 불안감’ 같은 것, 즉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하지나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불안감이었을 것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23장 8절에 있는,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헤로데는 그저 어떤 신기한 기적 같은 것을 보고 싶어 했을 뿐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앞의 9장 9절에 있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헤로데의 말은,
자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음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루카복음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헤로데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2; 마르 6,16).
그러나 세 복음서를 전부 합해서 생각하면,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헤로데의 말은 ‘세례자 요한이 부활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죽은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했을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로 해석됩니다.
(부활과 환생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환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헤로데가 생각했더라도,
그는 그런 생각 때문에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고,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친 것 같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마태 14,5).
(아마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 문제를 비판한 것 때문에,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백성에 대한
요한의 영향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서 죽였을 것입니다.
뒤의 13장을 보면, 헤로데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번역문만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헤로데의 계획을 미리 알려 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헤로데가 바리사이들을 보내서, “어서 이곳을 떠나라.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라고 협박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헤로데가 그 바리사이들을 보냈음을 나타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예수님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고, 차지하면 잃을까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비참하게 밀려나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린 다른 권력가의 말로를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채로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나는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신약성경에 세 명의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세 명 다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을 등지고 살면서 세속의 권력과 재물만 욕심내다가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