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공주>
-이야기의 즐거움에 빠져들다
김민선
처음
<장미 공주>는 막스 뤼티의 《옛날 옛적에》를 읽다 처음 접했다. <찔레꽃 공주>라고도 하는 이 작품은 흔히 아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원작을 읽고 나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란 이야기를 오해하고 있었단 것을 알았다. 우선 공주는 숲속에서 잠든 것이 아니고, 용을 무찌르지도 않고 마녀와 싸우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것이 아닌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요정이 아닌 지혜로운 마법사가 나오는 것도, 무언가를 물리쳐서가 아니라 ‘때’가 되어 공주가 깨어난 점도 좋았다. 멈췄던 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영화적인 장면도 생동감 있어 좋았다. 이 작품을 읽고 비로소 그림 형제 ‘민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린이들과 함께 읽기
이 작품이 좋아지는데 한몫한 것은 어린이들도 있다. 4학년 친구에게 읽어줬는데 아이가 너무 재밌어했다. 아이가 좋아하니 더 신났다. 그리고 이야기에 자신이 붙어 서울지부 고학년 친구들과도 읽어봤다.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아 기대되기도 하고 반복해 읽을 때마다 머무는 지점이 달랐다. 하지만 일관되게 마음에 와닿은 것은 “때가 되어”라는 말이었다. 때가 됐다는 말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 때가 되면 다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거운 순간도 넘기고 있다. 내 삶도 이야기처럼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도 점점 커졌다.
작품을 읽어주니 아이들은 인물에게 몰입하기보다는 일어난 일들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왜 100년이나 자요? 짧게 자도 되잖아요.” “왜 아이를 굳이 낳으려 해요?” “접시를 한 개 더 만들지. 왜 안 그랬어요?”
그렇지. 접시를 하나 더 만들면 간단한 일을 왜 안 그래서 이 사달을 냈을까? 그런데 그렇게 쉽게 접시를 만들어버리면 이야기가 되지 않지 않나?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해결된다면 우리가 굳이 애쓰며 살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애쓰지 않는 삶이 과연 좋은 삶일까? 질문이 꼬리를 이으며 이제부턴 내 내면과 대화를 시작한다.
- 세상이 편하게 흘러가면 좋잖아.
그렇지. 그럼 좋겠지만 난 반쪽이 되겠지.
왜 반쪽이 되는데?
그 고난이 나를 만나게 하는 것인데 그런 시간이 없다면 난 표면의 나만 만나게 되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가니 ‘황금 접시’는 삶의 시련이자 내가 누군가에게 준 소외와 상처이면서 동시에 내가 받은 소외이자 상처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13번째 황금 접시를 만들었다 해도 14번째의 소외된 마법사는 나올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이는 우리의 욕망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산뜻하게 하나 더 만들면 돼지라고 할 때 어른은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그러면서 나의 상처를 들여본다. 그래서 사는 게 더 팍팍한지도?
화소의 보물창고
아이를 위해 온 나라의 물레를 없애도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일어나야만 아이는 세상에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100년의 잠에 들게 된다는 바로 그날 공교롭게 왕과 왕비는 외출한다. 외출하니 아이는 온 집안을 둘러본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을 만나고 왕국에 유일한 물레에 찔려 100년의 잠으로 들어간다. 100년이란 시간. 함께 읽은 어떤 샘은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와 가족이 보내는 100년의 잠이라고도 해석했다. 100년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우리가 힘든 순간을 보내는 체감적인 시간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해결되길 바라는 것처럼 혹은 내 인생의 잠들어 버린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암흑기인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견뎌내는 시간. 그 견디는 시간 동안 성 밖은 온통 가시덩굴이 되어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고 자신도 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한다’라는 말처럼 ‘때’가 되면 가시덩굴이 열리고 내게 입맞춤해 주는 왕자가 나타날 것이다. 열다섯의 공주는 성인이 되었고 그 시간을 견딘 나는 진정한 내가 되었다. 또 나라는 사람을, 청소년이 될 아이를,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로서의 나를 다 들여다보게 한다.
이렇듯 <장미 공주>는 읽을수록 궁금해지고 이야기는 찾아갈수록 풍부해진다. 그래서 더 재밌다. 애쓰지 않아도 화소들이 내게 손을 흔든다. ‘나는 뭐게?’‘나는 뭘 의미하는 것이게?’
자연스럽게 옛이야기 공부로 넘어간다. 분석해서 작품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더 이해하고 싶어서 분석해 보려는 것이다.
공부의 즐거움은 이런 데서 온다는 것을 중년이 되어 알게 된 점은 안타깝지만, 노년에 알게 된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