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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나타난 불교와 생태적 상상력

작성자촛불시인|작성시간09.12.08|조회수171 목록 댓글 0

- 만해축전 문학심포지엄 발제문

 

 


동시에 나타난 불교와 생태적 상상력

 

 

 

                                                                 오 인 태 (시인․  진주교대 강사)

 

 

  

 

1. 들머리

2. 불성, 시성, 아동성

3. 불교의 생태관과 시적 세계관

4. 동시에 나타난 불교적 사유와 생태적 상상력

5. 마무리

 

 

 

 

1. 들머리


흔히 “아이들이 바로 부처”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모두가 시인”이라 이르기도 한다. 이는 아동성이 곧 불성이요 시성이라는 말이니 아이들의 마음이야말로 부처의 마음이요, 시인의 마음이라는 뜻일 테다.

 

어린이를 대상독자로 하는 아동문학은 본질적으로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에 두고 있다. 생태적 상상력으로 지어진 최초의 문학 형태가 신화다. 이 신화는 특히 아동문학의 모태가 되었으며, 오늘날 인간중심주의와 물신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고자 꿈꾸는 장르가 바로 아동문학이다.1)

 

 신화의 세계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일원론적 상상의 세계다. 신화적 상상세계는 이승과 저승, 신과 인간, 인간과 동물, 동물과 식물, 심지어 생물과 광물 사이에도 경계가 없이 하나의 유기적인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속의 만물은 독립적이거나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기되어 순환한다고 보는 것이 곧 불교의 연기사상이다. 연기(緣起)의 눈으로 보면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가 따로 없다. 자타를 구별하지 않고 만물을 평등한 관계로 보는 연기론적 태도의 실천 행위를 ‘자비(慈悲)’라 이른다.2)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춤을 춘다’고 생각한다든지, 새의 지저귐을 ‘운다’ 또는 ‘노래한다’고 여긴다든지, 인형에게 우유병을 물리고 토닥이며 말을 건다든지,3) 다친 강아지를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든지, 진지한 표정으로 죽은 새를 묻어주며 ‘하늘나라’로 잘 가라고 빌어준다든지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야말로 자아와 타자를 일체화하는 연기론적인 사고와 충만한 자비심을 지닌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자기중심성4)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모든 사물을 자신과 같은 생명체, 혹은 인격체로 인식하는 이른바 ‘물활론적 사고’는 어린이의 고유성이자 인지특징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 물활론이야말로 동화에서든, 동시에서든 생태적 상상력의 근원이 된다. 이처럼 아동문학과 불교와 생태적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다.

 

 이 자리에서는 아동문학 장르 가운데서 동시에 나타난 불교적 사유와 생태적 상상력을 다루려 한다. 먼저 발제내용과 관련한 주요개념들과 이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실제 창작동시에서 이런 주요개념들이 어떻게 반영되고 구현되는가를 살필 것이다.      

 


2. 불성, 시성, 아동성


법화경과 함께 불교의 양대 경전 가운데 하나인 화엄경에서는 여러 동자상을 빌려 불심을 드러내고 있다. 보장엄동자, 도솔천동자, 선재동자를 우선 손꼽을 수 있겠다.5) 이 가운데 우리 눈과 귀에 익은 선재동자는 바로 불심의 체험자로서 문학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자상이다. 이외에도 법화경의 궁아, 십우도의 동자상 등, 기독교의 아기천사만큼이나 불경에는 동자상이 흔히 나타난다. 이렇듯 부처의 마음을 동자승을 빌려 표현하는 것은 어린이의 순진무구한 마음이야말로 부처의 마음에 가장 가깝다고 본 탓일 터이다.

 

 이성이 전혀 스며들지 않은 순수 감성의 세계가 바로 어린이의 마음, 곧 동심의 세계다. 흔히 ‘이성’이란 합리적 사고체계를 말하거니와, 이는 곧 ‘근대성’ 개념과 등치되면서 근대서구문명의 바탕을 이룬다. 문제는 기독교사상에 뿌리를 둔, 이 서구문명의 자연관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구약성서 창세기 1:27-286)

 


읽다시피, 기독교는 우주만물을 부릴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놓고, 자연에 대한 지배를 당연시하는 근대서구문명은 자연을 대상화한 가운데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오로지 인간의 이기적인 삶에만 관심을 쏟는다. 어떤 면에선, ‘신(神)’조차 이들에겐 욕망 실현의 방편이자 이용대상일 따름이다.  

 

기독교적 근대문명이 자연과 인간을 분리한 가운데 자연에 대한 지배로 일관해온 반면, 불교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연기의 그물 속에서 연생(緣生)하고 연멸(緣滅)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파악한다. 우주와 은하계, 은하계와 지구,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땅과 신체가 모두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유정지물)은 불성, 즉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화엄경은 여기서 더 나아가 생명이 없는 사물(무정지물)조차 불성을 지닌 것으로 여긴다.7) 요컨대, 기독교적 세계관이 인간과 세계를 서로 분리 ․ 대립하는 관계로 본다면, 불교적 세계관은 인간과 세계가 일체 ․ 상생하는 관계로 인식한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본디 인간은 시적인 존재였다. 최초의 문학양식도 시, 즉 노래였다. 시는 본질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추구한다. 해서, 시정신이란 한마디로 ‘동일화정신’이다. 이에 비해 산문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는 문학양식이다. 세계를 자아로부터 떼어놓고 대상화하여 이리저리 따지고, 견주고, 값을 매기는 문학이 산문이다. 한마디로 산문정신이란 ‘비판정신’이랄 수 있다. 이 산문정신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근대에 들어와 산문이 더욱 각광받고 있는 현상은 ‘근대성’이란 다름 아닌 과학적 이성의 산물인 탓이다. 근대성의 위기, 그리하여 오늘날 이 전 지구적 위기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근대적 이성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인간의 본성인 시성을 잃어버린 결과이기도 하다.

 

시성이란 ‘세계’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는, 즉 자아와 세계를 동일시하는 시적 세계관이자 시의 고유성이다. ‘자아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이 동일성이야말로 시정신이자 시의 본질에 해당하는 서정성의 원리다. 김준오는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정신 또는 시적 세계관이나 비전에서 발생한다. 서사나 극과 구분되는 시정신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 있다. 여기서의 동일성이란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이다.”8)고 했다.

 

어린이들은 ‘자기중심성’ 혹은 ‘천진성’으로 해서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은 존재, 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며, 이는 쉽게 자아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심리적 기제가 된다. 이것이 어린이가 어린이다움을 지키는 고유성, 즉 어린이들의 인지특성 가운데 하나인 동일성이다.9) 피아제는 아동의 사고는 ‘동화’와 ‘조절’을 통해서 ‘평형화’를 유지한다고 보았다. 동화란 어린이가 기존도식을 활용하여 외부자극을 자신의 내부정신구조에 적응시키는 과정이고, 조절이란 외부자극의 구조에 자신의 정신구조를 적응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발달을 조정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평형화이다.10) 이 동화와 조절이 바로 시의 동일성의 원리인 ‘동화’와 ‘투사’에 해당한다. 시에서의 동화란 시인이 세계를 자기의 내부로 끌어들여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것이고, 투사는 반대로 자신의 자아를 세계에 투사하는, 곧 감정이입에 의해서 자아와 대상이 일체감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살아 있고 각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는 어린이들의 물활론적 사고도 바로 이 동일성에서 비롯한다.

 

이렇듯 인간과 세계가 본디 일체로서 연생, 연멸하는 관계로 파악하고 실천하는 ‘불성’이나, 세계를 자아화하고 자아를 세계화하는 ‘시성’이나, 대상을 반응적으로 자아와 동일화하는 ‘아동성’이나 모두 ‘동일성’에서 일치하거니와 요컨대, 부처의 마음과 시인의 마음과 어린이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3. 불교의 생태관과 시적 세계관


생태학자 머레이 북친은 오늘의 전 지구적인 생태의 위기에 대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라는 수직적 관계로 된 것이 근본원인이며, 그것이 사회관계 속에서 발현되어 인간사이의 소외와 계급관계를 만들었다”11)고 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구약성서에서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며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하고 있다. 기독교사상에 뿌리를 둔 서구문명의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인간을 정점에 둔 수직적인 지배관이 바로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했고 이는 인간사회에서도 소외와 계급관계를 부추겼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도널드 워스터(1977)도 “인간 자신의 초월적 가치-특히 동물의 단순한 본능에 대한 인간 이성의 탁월성-라는 엘리트적인 의식을 의외로 소중하게 여겨온 휴머니스트들은 반내추럴리스트들”12)이라고 규정한다.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본질을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파악하는 서구문명의 오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북친의 견해와 워스터의 인간중심주의자들에 대한 질타에 공감하면서, 나는 지금 정부가 케케묵은 ‘성장 ․ 개발’의 구호 아래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국토개조의 삽질에 불안감을 넘어 공포심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 경론에서는 정식(情識)이 없는 무정지물이나 생명현상은 있되 정신작용이 없는, 예컨대 초목 따위는 ‘중생’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았다. 생명현상을 정신작용 유무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생명현상과 함께 정신작용까지 하는 동물, 생명현상은 있으되 정신작용은 없는 식물, 심지어 생명현상이 없는 광물 따위, 무정물까지 모두 ‘중생’으로서 불성을 지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중생은 연기적 존재이며, ‘보살’은 자신과 중생이 한 몸임을 통찰하며 자비를 실천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연기사상이자 생태관이다.13)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로서 배우는 자이며 아직 마음이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최상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을 /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으로 여기고 나서 /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에 있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으로부터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에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 /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 그래서 올바로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사람은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을 즉자적, 대자적으로, 주관적 객관적으로, 소유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14) 

 


<중아함경>의 ‘근본법문경’에서 붓다는 위와 같이 생명현상에 대해 즉자적, 대자적, 주 ․ 객관적, 소유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실체로 여기고, 주관적인 욕심을 객관으로 위장하며, ‘나’ 아닌 ‘타자’를 모두 대상화하여 끊임없이 소유화하려드는, 이른바 ‘합리적 이성’과 ‘과학’을 앞세운 서구사상과 사뭇 대조된다. 요컨대, 모든 만물은 ‘너’와 ‘나’가 딴 몸이 아니며, 서로 연기되고 순환하는 관계 속에서 범우주적인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불교의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 즉 생태관이라 할 수 있다.

 

시는 시인의 시적자아와 세계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문학이다. 그러나 단순히 세계를 대상화하여 이리저리 재고 따지고 부리려는 사고나 진술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건 산문의 몫이다. 시인은 자아로부터 세계를 분리하고 객체화하여 단지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순순히 조응하는 존재다. 이른바 ‘세계의 자아화’든지 ‘자아의 세계화’든지 세계와 자아를 일체화하는 것이 바로 시적 세계관이자 시정신이다. 이때 ‘세계’란 시간(世)과 공간(界), 그 속에서 자연발생적이고 순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유정지물과 무정지물, 심지어 그들의 인식과 감정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넓게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 개념이나 좁게는 ‘자연’ 또는 ‘생태’ 개념으로 대체해도 무방할 듯싶다. 인간도 세계의 한 개체이자, 수많은 개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체, 즉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문학에서 말하는 ‘생태적 상상력’일 테다. 이런 점에서 시는 본질적으로 생태적 상상력의 산물임이 분명해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본디 ‘시적인’ 존재였다. 스스로 생겨 그렇게 존재하는 ‘자연’, 즉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속의 다른 생명체들을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여겼으며 오히려 숭배하기조차 했다. 그들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해, 달, 별, 불, 물, 바람 따위 무기체조차도 생명과 정령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폭력적인 서구문명에 철저히 파괴되어버린 인디언들의 이전 생활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인, 즉 시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인디언들은 버펄로를 사냥할 때 반드시 제사를 지내고, 사냥한 버펄로 고기를 먹은 사람에게는 버펄로의 영혼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디언의 어떤 부족은 집을 지을 때 집터 바닥에 선인장 몇 뿌리를 파묻었는데, 이는 집도 생명체이니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본 데서 비롯한 풍습이다.15) 김욱동은 이를 일러 “백인이 자연의 언어를 제대로 읽고 쓸 수 없는 생태맹(生態盲)이라면, 원주민 미국인은 자연의 언어를 읽고 쓸 줄 아는 독해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16)고 했다. 시는 자연의 언어다. 인간이 본디 시적인 존재라 여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4. 동시에 나타난 불교적 사유와 생태적 상상력


‘불성’과 ‘시성’과 ‘아동성’이 인간과 자연, 또는 세계와 자아를 동일화하는 ‘동일성’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불교적 사유나 시적 사고나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을 짚어보았다. 이쯤에서, 실제 동시 작품에 불교적 사유와 생태적 상상력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동시는 “어른인 동시인이 동심을 가진 어린이와 동심을 추구하는 어른에게 읽히기 위해 쓴 시”다. 이것이 동시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다. 이에 따르면, 동시의 창작주체는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다. 대상독자도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이에 해당한다. 창작주체가 오로지 어른이든, 대상독자에 어른도 포함되든 어떤 경우에도 그 전제는 ‘동심’, 곧 어린이의 마음이다. 그런데 어린이도 아닌 어른이 어떻게 어린이의 마음으로 동시를 쓰고, 또 읽는가.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무리 어른이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렸을 적 가졌던 동심이 영 소멸되지는 않고 남아있는 탓이다. 이원수도 동심을 어린이의 고유한 속성이라 하면서도 이는 “어른에게서도 발견할 때가 있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심적 현상”17)이라고 했다. 바로 이 ‘어른 속의 어린이’의 마음으로 동시를 쓰고, 읽는 것이다. ‘어른 속의 어린이’가 ‘실제 어린이’에 가까울수록 동시는 동시다워지고, 그 ‘동심’을 매개로 한 공감의 폭은 커진다. 시의 마음이 곧 어린이의 마음이니 어린이를 위한 동시를 쓰는 동시인은 누구보다 시인의 마음과 어린이의 마음을 함께 지닌 사람일 테다. 이런 믿음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동시’와 ‘어린이’를 안심하며 맡겨두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동심이 실제 어린이의 그것과 똑 같을 수는 없다. 어른이 동심을 어느 정도 간직했다 하더라도 실제 어린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기실 아동문학이란 실제 어린이의 동심을 모방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서 ‘시의 화자’의 문제만 봐도 확연해진다. 일반 시에서는 시적자아가 곧 시의화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에서는 시를 쓰는 시적자아는 어른인 시인 자신이지만, 시의화자는 대개 어린이화자, 이를테면 ‘대리화자’를 내세워 그들의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하고, 그들의 어투로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 어린이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며, 시18)를 쓰고 있을까. 

 

 

오줌이 누고 싶어서 / 변소에 갔더니 / 해바라기가 / 내 자지를 볼라 한다. / 나는 안 비에 줬다.

-이재흠,「내 자지」(3학년 어린이시)  

 


  이 시를 쓴 어린이는 대상인 ‘해바라기’를 자아와 똑같은 인격을 가진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물활론적 사고다. 그래서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하는데’ ‘나는 안 보여줬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어린이들의 물활론적 인식은 자아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동일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일성’은 ‘현재성(평면성)’ ‘집중성’과 함께 아동성의 원리이며 중심 속성이다. 아동성의 이 세 속성은 시의 속성, 또는 시적 원리이기도 하다. 시의 속성이나 시적 원리도 동일성, 현재성(순간성), 집중성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상을 자아와 동일화하여 시적 서정성을 발휘하는 자질을 어린이들은 ‘아동성’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는 모두가 시인’이라는 말이 나왔을 테다. 

  

 어린이들이 천성적으로 지닌 시적 세계관, 곧 천진난만한 동심을 모방하는 것이 바로 동시다.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있고 /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있다.

-최계락,「꽃씨」전문 (『꽃씨』, 문학수첩, 1998.)


 

 그 작고 딱딱한 꽃씨 속에 “파아란 잎이 하늘거리고”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어린이다운 세계관이며 놀라운 생태적 상상력인가. 어린이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이것이 곧 동시의 눈이다. 작은 꽃씨 하나에도 온 우주가 그대로 담겨있다고 보는 것, 즉 하나는 전체(一卽多)이고, 전체는 하나(多卽一)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유한에서 무한을 보는 것이야말로 화엄19)의 눈이기도 하다. 화엄의 눈으로 보면, ‘꽃씨’는 한 순간의 현상일 뿐이지, 꽃씨 그 자체가 꽃씨의 실체는 아니다. 꽃씨는 곧 싹이 되었다가, 잎이 되었다가, 꽃이 되었다가 나비에 의해 또 다른 꽃과 만나 꽃씨로 환원될 테다. 꽃이 나비 없이 어떻게 그 순환하는 생명현상을 이어갈 것이며 나비 또한 꽃 없이 어찌 무한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꽃’과 ‘나비’는 연기적 존재다. 꽃과 나비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이 하나의 그물망을 이루어 연생, 연멸하는 생명현상을 무한히 반복한다는 것이 곧 불교의 연기사상이다.   


 

물은 / 나무가지로 기어 올라 / 파란 잎과 예쁜 꽃을 / 피게 하고 // 사과 알을 굵게 한다. // 이슬 되어 / 풀잎에 앉아 쉬고 // 거미줄에 달려서 / 대롱대롱 그네 뛰다가 // 따스한 햇살 타고 / 하늘로 오르면 // 구름 되어 어디론지 / 훨훨 날아간다. // 가믐에 단 비로 내려 / 시들은 곡식을 가꾸고. / 땅 속에 스몄다가 / 샘물 되어 솟은 물은 // 시내 따라 / 흘러가며 // 저마다 여행한 얘기로 / 밤 낮 없이 / 재잘거린다.

-김종상,「물」전문 (『흙손 엄마』, 형설출판사, 1964.)

 

 

  ‘물’ 또한 특정 형태로, 특정 장소에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이 동시가 보여주는 대로 나뭇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때로는 사과 알로 존재하기도 하다가, 이슬이 되어 “풀잎에 앉아 쉬”기도 하다가, “구름 되어 어디론지 훨훨 날아”가기도 하다가, 다시 “단 비로 내려”, “곡식을 가꾸고”, “땅 속에 스몄다가”, “샘물 되어” 솟아 “시내 따라” 흐르기도 하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존재다. 곳곳에 현현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이 물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뭇가지인가. 잎인가. 꽃인가. 사과 알인가. 이슬인가. 구름인가. 비인가. 시내인가. 맞다. 물은 나뭇가지요, 꽃이요, 사과 알이요, 이슬이요, 구름이요, 비요, 샘물이요, 시내다. 그러나 아니다. 나뭇가지도 아니요, 꽃도 아니요, 사과 알도 아니요, 이슬도 아니요, 구름도 아니요, 단비도 아니요, 샘물도 아니요, 시내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공에서 색을, 색에서 공을 볼 수 있는 그가 바로 부처요, 시인이요, 어린이다. 그 ‘재잘거림’이 모름지기 동시가 아니겠는가.  

 

 

동네엔 누가 사나. / (사람들이 살지 누가 살어.) // 아니 아니 사람말곤 누가 사나. / (소에 개에 돼지 닭 모두 살지.) // 그럼 그럼 그 밖엔 또 없나. / (가만있자 옳지 새도 쥐도 살지.) // 그러면 언제부터 동네 생겼나. / 그리고 사람 짐승 같이 사나.

-권태응,「동네엔 누가 사나」전문 (『감자꽃』, 창작과비평사, 1995.)

 


사람들이 사는 ‘동네’만 하더라도 거기엔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다. ‘소’ ‘개’ ‘돼지’ ‘닭’이 함께 산다. 그뿐이 아니다. ‘새’도 ‘쥐’도 같이 산다. 옛날 우리 농부들은 콩을 심을 때 꼭 세 알씩을 묻었는데, 그 까닭은 한 알은 공중에 나는 새의 몫이요, 한 알은 땅에 사는 벌레의 몫이요, 나머지 한 알은 심는 사람의 몫으로 생각했던 탓이다. 이렇듯 사람을 스스로 전체 속의 한낱 개체로 여기면서도, 다른 개체와 동등한 관계에서 더불어 전체를 이룬다고 생각했으니 이것이 바로 화엄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가을에 과일을 거두고 서너 개씩은 남겨두었던 ‘까치밥’도 같은 마음에서다. 이렇듯 사람들은 본디 화엄의 마음, 즉 동심을 가진 것이었으니, 동심이란 바로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우리라.

 

동네는 처음부터 사람과 짐승이 같이 살던 생명공동체였다. “나의 여름옷에 / 아직 잡지 않은 / 이가 몇 마리”20) 일본의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인 마츠오 바쇼가 지은 이 하이쿠는 이조차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야할 이웃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의 삶 속에 뿌리내린 화엄사상21)의 진수를 보여준다.        

 


새우등이 휜 것은 / 바다가 좁아서 그런 게 아니야 // 다른 물고기들 더 넓게 자라고  / 웅크리고 자기 때문이지 // 할머니 허리가 꼬부라진 건 / 햇살이 무거워서 그런 게 아니야 // 맑고 고운 햇살 조금이라도 더 / 우리에게 주려고 피하느라 그런 거지

-신천희,「새우등」전문 (『웃음바다』, 도서출판 문원, 2001.)

 

 

이 동시는 하나의 우주 속에서 연기된 생명체들이 어떻게 자비심을 서로 베풀며 생명을 영위하는가를 보여준다. 대승경전인 화엄경의 시각에서 보면, ‘새우’나 ‘다른 물고기들’이나 ‘할머니’나 ‘우리’, 심지어 ‘바다’와 ‘햇살’까지도 중생이다. 그리고 새우가 자신은 웅크리며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나 할머니가 우리에게 햇살을 좀더 쬐어주려고 등을 구부리는 일은 중생을 향한 ‘보살행’에 해당한다. 해서, 새우나 할머니는 불성을 지닌 중생이자 연기의 불법과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이나 다름없다. <불설태자쇄호경(佛說太子刷護經)>에서는 “보살은 마땅히 자비심으로 시방의 인민 및 날벌레와 길벌레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어여삐 생각하여 마치 갓난아이와 같이 보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22)고 설하고 있으니 동물이든, 식물이든, 광물이든 만물을 저와 같은 인격체로 대하는 어린이들이나 이런 동심을 여전히 간직한 시인이야말로 불보살이 아니겠는가.   

 


나무는 / 청진기 // 새들이 / 귀에 / 꽂고 // 기관지가 / 나쁜 // 지구의 숨결을 듣는다.

-정운모,「나무」전문 (『참동무 깨동시』, 청동거울, 2002.)


 

‘나무’는 ‘청진기’이고, ‘새’는 ‘의사’다. ‘환자’에 해당하는 ‘지구’는 지금 심한 기관지염을 앓고 있다. ‘기관지가 나쁘다’는 기표의 기의를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다. 이렇듯 이 시는 생태의식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강성 녹색문학’23)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동심과 생태적 상상력에 의한 은유를 통해 시적 ‘연성’을 얻음으로써 훌륭한 생태동시로 성공하고 있다. 물론 ‘나무’ ‘새’ ‘지구’를 모두 불성을 지닌 생명체로 보는 데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이쯤하면, 동시와 불교와 생태적 상상력의 상관관계가 더 말할 필요 없이 뚜렷해지리라. 



5. 마무리

 

 

소리도 냄새도 없이 천지는

언제나 씌어지지 않은 경(經)을 되풀이 읊고 있나니.24)


니노미야 손토쿠의 노래대로 천지, 즉 우주는 문자 없는 경전이 아닐까. 이 경전은 소리, 냄새 따위 오관이 아니라 심안이 있어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손토쿠가 하려는 말일 터인즉, 시란 바로 이 심안으로 “언제나 씌어지지 않은” 우주의 경을 읽는 일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우주의 경이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온갖 중생들이 연기적인 생을 영위하고 순환하는 세계, 즉 중생계의 생명현상 그 자체일진대, 시를 쓰는 일은 단순히 이런 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생명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생명질서에 조응하는 일이 될 터이다.

 

생명공동체에서 모든 생명체는 수평적인 존재다. 그런데도 인간을 ‘우주의 주인이요 소유주' 또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는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야말로 오늘날 이 생명공동체 위기의 주범, 또는 본질임이 분명하다.

 

모든 생명체를 동등하게 바라보고, 인격화하고 일체화하는 어린이야말로 천성적으로 불성과 시성을 지닌 존재다. 이런 어린이의 마음, 즉 동심에 귀의하고자 하는 문학이 동시다.

 

가장 시적인 시, 가장 불교적인 시, 가장 생태적인 시가 바로 ‘동시’라 해도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1) 황정현,「문화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아동문학」,『한국어교육』제24호, 한국어문교육학회, 2006, 75-96쪽 참조.


2) 장영우,「불교적 상상력과 현대시의 세계관」,『한국어문학연구』제43집, 한국어문학연구학회, 65쪽 인용.


3) 아이에게 우유병을 물리고 토닥인다든지, 소꿉놀이를 하는 행위 등은 일종의 상징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린이들의 이런 상징놀이는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 세계 통합적 사고와 상상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황정현, 앞의 논문, 78-81쪽 참조.


4) 어린이들의 이 ‘자기중심성’은 어른들의 ‘자기중심적’ 혹은 ‘이기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속성이 다르다. 어른의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거나 수용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해, 어린이의 ‘자기중심성’은 다른 견해와 역할이 있다는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가지는 인지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5) 조명렬,「불심의 표현과 동심문학(1)」,『한국불교학. 5』, 한국불교학회, 1980, 133-150쪽 참조.


6) 민희식,『법화경과 신약성서』, 불일출판사, 1986, 34쪽에서 재인용.


7) 고영섭,『연기와 자비의 생태학』, 연기사, 2001, 21쪽 참조.


8) 김준오,『詩論』, 삼지원, 1982, 34쪽 참조. 


9) 오인태,『어린이시의 생성 심리와 표현상의 특징』,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21-33쪽 참조. 발제자는 이 논문에서 아동성, 즉 어린이들의 인지특징을 피아제, 비고츠키, 안나 프로이트 등의 이론을 바탕으로 ‘동일성’ ‘현재성(평면성)’ ‘집중성’으로 구분하고, 이를 시의 속성, 혹은 시적 원리라 할 수 있는 ’동일성‘ ’현재성(순간성)‘ ’집중성‘과 연관하여 어린이시를 분석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아동성은 시의 속성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10) John H. Flavell 외, 정명숙 역,『인지발달』, 시그마프레스(주), 2003, 7쪽, 491쪽. 김종미 외,『교육심리학』, 학지사, 2006, 41쪽. 이옥형 외,『교육심리학』, 집문당, 2003, 80-81쪽 참조.  


11) 고영섭,「불교의 생태관」,『생태문제와 인문학적 상상력』, 나남출판, 1999, 134쪽에서 재인용.


12) 도널드 워스터, 강헌 ․ 문순혹 역,『생태학-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 上』, 아카넷, 2002, 115쪽에서 인용. 


13) 고영섭, 앞의 책, 2001, 43-94쪽 참조.


14) 전재성,「불교사상과 환경문제」,『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도서출판 모색, 1996, 116쪽에서 재인용.


15) 김종철,『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주)도서출판 삼인, 1999, 48-49쪽 참조.


16) 김욱동,『생태학적 상상력』, 나무심는사람, 2004, 189쪽 인용.


17) 이원수,「시작노트」,『이원수아동문학전집 29』, 웅진, 1991, 115쪽 참조.


18) 어린이가 쓴 시를 보는 입장은 크게 ‘시’로 보아주느냐, 아니냐로 나뉜다. 전자는 어린이의 시가 ‘시의 본질’에 비춰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고 보는 데서, 후자는 어린이시가 ‘문학형식으로서의 시’에 비춰 그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는 데서 나뉜 입장이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어린이가 쓴 시가 ‘동시’가 아니라는 견해에는 일치한다. 그래서 후자 쪽은 어린이가 쓴 시를 어른들의 동시를 모방하여 쓴 ‘동시습작품’ 또는 ‘학습결과물’ 쯤으로 취급하고, 전자는 ‘시’로 인정하되 어른이 쓰는 ‘동시’와 구분하여 ‘아동시’ 또는 ‘어린이시’라 부른다. 발제자는 ‘아동시’를 ‘아동이 직접 쓴 시’로 정의하는 데 대해 ‘아동성’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여 ‘어린이 스스로 아동성에 따라서 쓴’시로 새롭게 정의하고, ‘아동시’를 ‘어린이’시로 고쳐 부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발제자의 입장에서는 ‘동시’를 모방한 시는 어린이가 썼다 할지라도 ‘아동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이시’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 쓰기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 어린이로 하여금 ‘어린이시’를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어른들의 동시를 모방하여 쓰게 한다는 데 있다.  


19) 카마타 시게오, 한형조 역,『화엄의 사상』, 고려원, 1987, 18쪽에서 인용. 


20) 김욱동, 앞의 책, 90쪽 재인용.


21) 카마타 시게오, 앞의 책, 16-22쪽 참조. 저자는 이 책에서 화엄의 ‘一卽多’사상이야말로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직관력이 뛰어난 일본인의 생활감정과 꼭 맞아떨어진다고 말한다. 


22) 고영섭, 앞의 책, 74쪽 재인용.


23) 김욱동, 앞의 책, 24-37쪽 참조. 서구 자연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삶에 대하여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정도에 따라 ‘강성’ 자연주의와 ‘연성’ 자연주의로 나눈다. 이 책의 저자도 생태주의를 직접 드러내놓고 다루느냐 아니면 좀더 묵시적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강성’ 녹색문학과 ‘연성’ 녹색문학으로 나눈다. (이 책, 333쪽 주석 인용)  


24) 카마타 시게오, 앞의 책, 20쪽에서 재인용.


 

-  계간『불교문예』2009 겨울호(통권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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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인 태1962년 경남 함양 출생 91년『녹두꽃』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혼자 먹는 밥』『등뒤의 사랑』『아버지의 집』등이 있음 경상대학교대학원에서 문학교육을 전공하고「어린이시의 생성심리와 표현상의 특징」으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음 (사)한국작가회의 이사 ∙ 경남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음 초등학교와 진주교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 ∙ 동시 ∙ 평론 들을 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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