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의 딸들
- 『몽실언니』(권정생, 창비)
김용란
나는 딸 둘을 두었다. 두 딸들이 옥신각신 투정을 부리다가, 마치 어느 장마 긴 여름날 쨍하고 햇볕이 떴을 때 참으로 기쁘고 반가운 것처럼 투정만 부릴 줄 아는 딸들이 효성스러운, 또는 기특한 마음씨를 보여주었을 때 감동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즐거워하게 된다. 긴 장마와 같이 나를 힘들게 하던 날들을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큰 녀석은 내 어릴 적 생김새와 하는 짓을 닮았고 작은 녀석은 고집이나 생김새가 남편을 빼다 닮았다.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신기한 점이,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어떻게 받아서 나올까 하는 거다.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유전자들까지 받아서, 아빠의 아빠의 아빠의 유전자들까지 챙겨서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 참으로 신기하다. 그래서 내가 셋째를 낳게 된다면 누굴 닮을까, 어떤 모습일까, 어떤 성격일까 궁금해진다. 그래서 한번 낳아 볼까나 하고 오후의 낮잠 같은 몽롱한 공상에 빠지기도 한다.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우리 문학의 토대 위에, 그 자양분 위에 새롭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에너지들이 결합해서 새로운 작품들이 한 해, 두 해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새로운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 작품들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 아빠의 아빠의 아빠의 모습들을 더듬어 보는 일을 머릿속에서 해 본다.
권정생의 『몽실언니』는 내가 보기에는 전통적 양식과 현대적 양식이 만들어 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몽실언니』의 주인공 몽실은 옛이야기 인물의 모습과 현대를 살아가는 인물의 모습이 투사되었다고 생각한다.
빠른 호흡으로 펼쳐지는 사건 위에 몽실은 그 위에 몸을 맡긴다. 그 사건들은 몽실이라는 캐릭터가 창조해 낸 것이라기보다는 몽실의 서사를 위해서 마련된 모티프들이다.
즉, 몽실의 일대기를 구성하기 위해서 사건들은 마련되고 몽실은 그 사건들을 하나하나 겪어낸다. 마치 옛이야기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일본이 전쟁으로 망하고 나서 맞이한 해방, 말만으로 해방된 조국에 만주 거지, 일본 거지라 불리며 빈 몸뚱인 채로 조국을 찾아 온 행렬 속에 묻혀 있던 꼬마 몽실이네 가족이 살강 마을 어느 농사꾼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 『몽실언니』이야기는 시작한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비운 아버지, 동생 종호의 죽음, 그 비극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 밀양댁은 재가를 선택한다. 어머니에게 이끌려간 몽실은 새 아버지 김씨와 그 집 할머니를 만난다. 김씨와 새 살림을 시작한 밀양댁은 사내아이를 낳는다. 친아버지 정씨가 찾아오자 새아버지 김씨는 화풀이로 몽실이 모녀를 때리고 넘어뜨려 몽실의 왼쪽 다리를 부러지게 만든다. 다리가 젖혀진 몽실이는 그대로 까무러쳐 버리고 밀양댁은 그런 몽실이를 데리고 캄캄한 부엌에서 밤을 지샌다. 몽실은 새아버지 김씨가 또 난리를 피울까 봐 울음을 삼키며 아픔을 참아낸다. 아무 내색도 하지 못한 채, 신통하게도 한 달 동안을 꼬박 누워 있는다. 절름발이가 되고 나서야 절뚝거리며 걷기를 시작한다. 몽실은 찾아온 아버지 정씨를 따라 절뚝거리며 살강마을로 되돌아가고, 새어머니 북촌댁을 만난다. 그리고 새어머니가 난남이를 낳다 죽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몽실은 그렇게 전쟁이 할퀴고 간 시대의 굽이굽이를 만난다.
『몽실언니』는 인물들이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인물들이 사건을 만난다. 인물들이 만나는 사건들의 흐름을 쫓아서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의 내면이나 심리 묘사 비중이 적을 수밖에 없다. 새아버지 때문에 절름발이가 된 몽실이 한 행동은 아픔을 참아 내는 것, 아픔이 가실 때까지 누워 있는 것이었다. 서럽고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몽실의 심정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픔을 느끼면서도 아픔을 참아 내는 모습은 팔이나 다리가 찢겨져 나가도 아픔을 모르는 옛이야기의 주인공과 닮아 있다. 사지에서 생긴 육체적 장애의 고통 뒤에 연속해 찾아오는 갖가지 고통들을 견뎌 내는 몽실의 모습은 서사무가의 여신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서사의 완결을 위해 통과제의를 거치는 인물의 형상이다.
『몽실 언니』가 현대적인 이유는 사회적 현실을 다루는 예술성 때문이다. 우리가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내가 『몽실 언니』의 뼈와 살을 이어 받는 작품들을 찾아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을 받는 부분은 작품의 끝 부분이다.
삼십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가을. 좁은 시장 조그만 대폿집 앞 그만그만한 자리를 깔고 장을 벌여 놓은 아주머니들 속에 마흔이 다 된 콩나물 장수 몽실이 있기 때문이다. 깔고 앉았던 비닐 쪼가리를 접어 빈 콩나물 시루 밑에 받쳐 머리에 이고는 몽실은 시장을 나온다.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과 ‘잘 가요’ 따뜻한 인사를 건네며 나오는, 여전히 절뚝 다리를 절고 있는 몽실의 모습에서 풍기는 힘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이 참으로 아름답다.
1970년대 노동자의 노동과 투쟁을 그린 황석영이 쓴 『객지』의 마지막 장면보다 『몽실 언니』의 이 장면에 더 감동을 받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가 아동문학의 독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몽실 언니』의 메시지가 더 부드럽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형상화를 통해 소외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들을 보여 주고 동시에 그들의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내고 있다.
그러나 시장 노동자들에게 따스한 인사를 나누며 난남이를 보러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조용히 일어서는 몽실의 모습이 더 은근하게 삶의 의미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느낄 수 있다.
검은 시루를 이고 좁은 시장을 걸어가는 몽실의 모습은 너끈하게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강한 여성 노동자의 이미지이다.
『몽실 언니』는 전쟁이 인간들의 삶에 어떤 파란을 안겨 주었는지 보여 주면서, 현대사를 조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시대 속에 살아 남은 한 여성 인물을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여성 인물을 수난의 표상으로 이해할 것인가, 모성주의의 전범으로 이해할 것인가는 비평적 선택의 몫이 크다고 본다.
통치세력과 민중이 전면적인 대립관계를 지속해 오던 엄혹한 시대 상황에서 씌어진 『몽실 언니』를 그 전형성에서 비슷하게 반복하려는 경향은 재고되어야 하고, 더불어 전형은 새로운 시대정신 아래 새롭게 창출될 때 유형으로 떨어지지 않고 생명력을 얻는다는 지적1)은 『몽실 언니』에 대해 새롭게 읽기를 시도할 때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유영소의 작품 「그래서 공주님은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알파벳 벌레가 스멀스멀, 유영소, 문학동네)에서 새아버지의 딸 지영을 껴안는 윤정의 모습에서 몽실의 흔적을 느낀다.
그것은 몽실의 육체를 현대사의 수난을 나타내는 상징만으로 바라보기를 비껴가는 데서 시작한다. 몽실은 수난을 받아 내며 수용해 내는 인물이기보다는 남성적 질서가 만들어 낸 전쟁의 횡포를 강렬하게 반박하는 인물로서 더‘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주고, 받고, 뺏고 쌓아 두는 경제는 남근적 질서이다. 더 많이 쌓아 두기 위해 발생하는 전쟁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핍진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것, 그러함 속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 그것은 여성 몽실의 삶을 통해 보여진다. 몽실의 여성성은 영남댁, 북촉댁, 그리고 그네들의 아이 영득이 난남이를 통해 구현된다.
어머니와 자식들의 관계 속에서 여성성을 구현하는 몽실은 남근적의 결제 질서에 반하는 비교환적 가치인 선물의 선사를 실천한다. 마치 태양이 지구의 생명이 퍼지고 자랄 만큼 끊임 없이 에너지를 선사해 주듯이. 주는 행위를 실천한다. 몽실은 영득이를 사랑하고 난남이를 사랑한다. 몽실에게 흘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애정은 영득이에게도 흘러가고 영순이에게도 흘러가고 난남이에게도 흘러가고 배근수에게도 서금년에도 머물렀다. 몽실의 애정은 다시 되갚기를 원하는 교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몽실의 애정은 흘러가고 흘러갈 뿐이다. 그것은 모진 세월의 굽이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몽실은 밀양댁과 북촌댁의 모습을 통해서 그런 힘을 습득하게 된다. 밀양댁과 북촌댁의 이별은 ‘자궁에서 벗어나기’2) 형태를 띤다. 안락하고 평온한 거처, 자신의 근원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은 자신의 육체가 새로운 삶의 근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님은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아주 짧은 단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윤정이 어머니의 재혼, 새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방황 속에서 어머니와의 의존적 삶에서 벗어나고, 친동생이 아닌 지영을 사랑해야 할 동생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한 인식은 윤정을 다르게 변화시킨다.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끓인 라면을 조금 놔 두었다 상을 차린다. 뚱뚱하게 불어 버린 라면을 먹어야 양이 맞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의지는 라면만 끓이던 윤정을 밥을 차리게 만든다. 쌀통을 열어 보니 쌀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도 전에는 쌀을 씻어 밥을 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밥을 하니 반찬을 차릴 생각을 하고 또 학교 생활도 잘 챙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렇게 윤정이 어머니 부재의 그늘에서 허덕이다 자신 인생의 힘의 근원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는 때는 삶이 핍진해지는 순간이다. 주인아주머니의 야단, 끼니를 해결해 주던 라면이 떨어지는 순간, 그 현실에서 윤정은 자신이 몽실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터득한다. 그래서 나는 윤정이 바로 『몽실 언니』의 여성 인물 계보를 잇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윤정이 보여 준 이 자매애는 김중미의 작품 『내 동생 아영이』(김중미, 창비)의 아영이 모습 속에서도 여실히 들어난다. 시장 노동자들과 따스한 연대를 나누는 몽실, 병실의 난남이가 가진 튼튼한 어깨를 가진 몽실은 계급과 차별, 전쟁으로 점철된 남근적인 질서를 비껴갈 수 있는 인물이다. 윤정과 아영과 같은 여성인물들을 창조하기 위해 『몽실 언니』에서 착목해야 할 점들은 바로 이것이다.
새롭게 『몽실 언니』를 읽는 까닭은, 『몽실 언니』가 만들어 놓은 큰 산을 넘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이다. 『몽실 언니』가 빚어낸 자양분 속에서 금강석처럼 싹튼 우리 동화들의 일면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여성의 눈으로 『몽실 언니』를 읽는 작업을 앞으로 꾸준히 해 볼 요량이다. 짧은 지면이라 좀더 면밀하게 『몽실 언니』 감상을 이어가지 못하는 점이 무척 아쉽다. 무엇보다 짧은 글재주가 아쉬운 서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