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작전 (여호수아 6장 1절-5절)
지난 주중에 학교에 있는데 갑자기 집사님들을 비롯하여 여섯 분이 연구실로 오셨습니다. 지난주에 자동차 헌금을 했는데 벌써 구입할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하여 산청에서부터 대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일을 이루기 위해 모든 분이 한 마음이 되어 애쓰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역시 부곡교회는 일할 사람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일군이 떠나간다는 농촌에 이렇게 일할 사람들이 모였으니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분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 부곡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하여 함께 모이니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기적도 가능합니다. 부곡교회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꿈이 있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대상이 있습니다. 전도받을 사람이 없다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이 얼마 되지 않기에 전도할 사람이 없는 마을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사람이 있어서 할 일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적을 시작하셨습니다. 자동차를 구입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일의 시작입니다. 게속되는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곡교회가 올해 40주년을 맞이한 것을 보면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위하여 여리고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본문에서 여리고는 어떠한 곳입니까? 광야에서 방황하던 무리들이 드디어 가나안 땅을 향하였습니다. 땅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이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어떻게 땅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1. 굳게 닫힌 여리고
1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여리고 성을 쉽게 정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땅을 예비하셨지만 우리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느냐고 겁을 먹으면서 약속의 성취를 지연시킵니다.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광야에서 그들은 정탐군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는 가나안 정복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열두명 중에서 두명만이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적으로 계산해서는 가나안 정복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인간적으로 계산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믿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여리고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들이 바라보니 “굳게 닫혔다”고 했습니다. 저 굳게 닫힌 문을 누가 연단 말입니까?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야. 내까짓게 할 수 있겠어?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두려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1-2년전의 우리 마음이며 아직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을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면 갈 길이 멉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은 완고합니다. 내까짓게 무슨 일을 합니까?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은 오히려 우리의 장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째서 이러한 길을 열으셨는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부곡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실까요? 농촌이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외국의 농산물들이 들어오고, 이제 농촌의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기가 코앞입니다. 이제는 필사적으로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부곡교회를 선택하셨습니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농촌 사람들이 보고 본받을만한 부흥이 필요합니다. 모든 농촌 사람들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그런 부흥이 목표입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만 바라보지 말고 그 성을 무너 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허무는 것은 힘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2. 여리고 정복에 필수적인 것은 여호수아같은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정복을 토론을 통하여 결정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정해지면 순종하는 믿음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훈련된 여호수아같은 지도자를 통하여 길을 보여 주십니다. 믿음이란 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앞에 순종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명령을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지도자는 그 사람의 능력 때문에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개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리를 만드시고 세우셨기에 그리고 그 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흘러나오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사명은 모세의 사명과 또 다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광야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싸맸습니다. 불평하면 들어 줍니다. 고기가 필요하면 해결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역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맡은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역할은 이제 가나안 땅에서 무사히 전쟁을 치루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꿈을 주시는데 바로 지도자를 통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준 꿈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고 이루기 위하여 모두가 노력하여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아무리 좋은 꿈을 주셨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꿈이 지연될 수도 있고, 끝내 이루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3. 전투는 예배처럼
그러면 본격적인 전쟁을 위하여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미 승패는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철저히 순종할 때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보기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여기는지를 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잘 훈련된 군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의 승패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임을 선포하는데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렇습니다. 중앙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그 앞에서 나팔을 붑니다. 무장을 한 군인들은 제사장 앞에도 있고 언약궤 뒤에서 지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에 한번씩 엿새 동안 돕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일곱 번을 돈 후에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였습니다. 그 명령을 듣고 어떤 반응들이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강한 성벽이 어떻게 무너져? 그러한 일은 절대 없을 것이야. 바보같은 짓이라고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돌지 않을 것이야 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돌기로 결정하였다고 합시다. 첫날 돌았습니다. 둘째날 돌았습니다. 여섯째 날까지 돌았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평하던 자들이 말합니다. 거봐. 안되잖아. 이렇게 돌았으면 흔적이라도 있어야지. 그런데 기적은 점진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리고성이 조금씩 무너내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순종이 완료되는 순간 한 순간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기적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 우리가 순종을 완료하면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순종을 기쁘게 여기셔서 거기에 나타나십니다. 그리하여 성이 무너집니다. 단번에 승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후에 뒤처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승리가 확정된 후에 전리품을 걷고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여리고 성과 같이 단단한 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루어질려나 의심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차량헌금을 하면서도 이루어질려나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과를 받으시고, 이루십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내가 할 수 있나 하는 계산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것일까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4. 승리는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여리고 전쟁은 대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나안 정복의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남은 전투가 많은데, 이 전투의 결과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하나님은 관심이 많습니다. 승리에 도취되어서 결과를 잘 못 사용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고 사람의 것만 취하여야 합니다. 승리에 도취되어서 하나님의 것까지 취한 사람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보십시요. 여리고성 전투에서 대성공을 걷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죄악을 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를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 이유는 가나안 정복의 첫 번째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첫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전투의 모든 전리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욕심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모두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왔습니다. 이러한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은 아간입니다. 아간은 전쟁이 끝난 후에 물건이 탐이 났는데, 그것은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세겔, 금덩이 오십 세겔을 취하였습니다. 이것을 성전에서 취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한 것을 취하였기 때문에, 곧 하나님의 것을 취한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가 끝난 다음에 아간이 죄를 범하였을 때는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셨고 그 결과는 다음 전투에서 드러났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철저하게 패해버렸습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죄를 지었는지 확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분이 나셔서 아간의 가족을 죽이고 돌무더기를 높이 싸올린 후에야 분이 풀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을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결국은 모든 성도들이 다 잘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은 넘어지게 만드실 것입니다. 부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흥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부흥하는 과정에 서로 돕고,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섬기고 세워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흥의 과정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흥의 열매만이 아니라 부흥의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해야 합니다.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세워주고 아끼고 협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철저히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은 믿고 많은 것으로 맡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차량을 구입함으로 여리고 정복을 하고 가나안 정복의 출발점에 섰습니다. 이것은 부곡교회의 부흥의 시작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쩌다가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농촌교회가 우리를 보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연히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부흥의 과정에 철저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할일들이 있습니다. 하나 하나 철저히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할일이 더 많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기적의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마을에서 교회가 할 일에 대하여 꿈을 꾸십시오. 농촌이 변화되는 꿈을 꾸십시오. 농촌 부흥의 앞장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감으로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여리고 Ⅰ (수6:1-7)
= 자 아 론=
요 약
여리고성은 먼저 옛사람의 자아를 상징한다. 즉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 주권중심의 회복 즉 자기 십자가 혹은 자아처리를 교훈한다. 여리고성 정복 방법은 사람의 소리는 들레지 않고 오직 여호와를 중심한 하나님의 군대가 여리고성을 돌고 돌다가 외치며 들어가 칼날로 멸하고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아처리란 나는 철저히 부인되고 오직 여호와 중심이 나의 일상적인 행동이 되고 여호와 중심이 나의 열심이 되고 여호와 중심이 나의 감사와 찬송이 되고 나아가 여호와 중심이 나의 영적 싸움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리고성을 재건축해서는 안 되듯 날마다 내가 죽는 생활이어야 함을 교훈한다.
설 명
<내가 죽어지려면>
1. 십자가에 못 박힘을 믿음
2절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붙이심=십자가의 승리의 예표
2.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
8-9절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이 행열은 하나님을 중심의 형렬임
3.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
10절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자기 소리를 내지 않음= 최고의 금기사항
4. 매사의 삶 속에서 깨어지라
3절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6은 사람의 수, 사역의 만수, 기적 준비수
6. 늘 감사하며 살라
5절 "양각나팔 -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양각나팔=복음의 상징, 큰 소리=신앙의 고백
7.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복함
21절 "칼날로 멸하니라"
칼은 하나님의 예리한 말씀의 상징
8. 늘 깨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
24절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불은 성령의 상징
9. 항상 경건함으로 사는 것
26절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장자와 계자의 죽음= 영육 간의 시험
(강해)
이 시간에는 "무너진 여리고"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져라, 나를 죽여라, 자아를 죽여라, 죽어야 산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설 수 없고, 성령께서 주관하실 수 없으며,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 완악한 자아를 처리하시기 위해 온갖 연단을 주실 수밖에 없다는 등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자아처리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은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막10:27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고, 잠21:15에도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여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왕의 마음이란 좁게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내가 죽는다란 과연 무엇인가?
1. 이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힘을 믿는 것입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하셨습니다.
여기 붙이다란 군사적인 용어로 '권력이나 통치권을 넘겨주다', '어떤 사람에게 승리를 허락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이미 붙이신 것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가 이미 확정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즉 그 성취가 아직 미래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있으므로 이미 성취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붙였다란 거의 항상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승리의 복음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이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롬6:10-11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2.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8-9절에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했습니다.
여기 군대의 행열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행열은 하나님을 중심의 형태라는 점입니다. 즉 양각 나팔 불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전군과 후군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자아파쇄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주권신앙의 확립입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내가 주가 됨에서 물러나 이제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겸손이라, 혹은 순종이라, 혹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C.C.C 전도 소책자인 사영리에 나의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아 있는지 묻는 그림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가 나의 마음의 왕좌에 앉아 왕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기쁨과 마음의 안정 그리고 영적인 풍성함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 주권 중심의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여 마음을 목석처럼 피동적으로 만들거나 마음을 파괴하여 절단 내서는 안 됩니다.
3. 자아 처리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10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했습니다.
자기 소리를 드러내지 않음이 여리고 작전의 최고의 금기사항입니다. 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란 소리란 마음의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내가 도무지 나타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자아를 죽인다는 것은 온전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금지된 자기 표현 방식 세 가지 즉 외침과 음성과 말이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는 동의어일 뿐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크든 작든 무슨 일이 있든지 그 어떤 것에도 자기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내 생각에 아무리 옳고 좋아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하면 버려야 합니다. 자기 앞길을 정할 때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4. 자아 처리란 매사의 삶 속에서 실천됩니다.
3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여기 엿새의 6은 사람의 수요(계13:18), 사역의 수요(창1:31), 기적을 위한 준비의 만수입니다(요2:6). 즉 엿새는 매일 충실해야 할 일상의 삶을 가리킵니다. 즉 일할 때나 쉴 때나 길 갈 때나 자녀를 교육할 때나 전도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매사의 삶이 곧 영적인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분들이 있고 매일 같이 환경만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데 언제나 자신이 훈련 중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역경에 처함도 훈련이요 풍부에 처함도 훈련입니다.
마치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매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표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관적인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기도하고 기다리며 찾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미숙할지라도 나는 무엇을 하든지 내 뜻대로는 하지 않겠다 라는 이 다짐이 확실히 서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5. 자아 처리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복하는 삶입니다.
4절에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했습니다.
여기 7일 그리고 일곱 번의 7은 완전한 사역의 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고 돌고 또 돈 것처럼 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동일한 사건이지만 깊이 깊이 음미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은 것처럼 주님이 이루신 은혜를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그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자기를 버리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예수의 복음과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아직도 자기를 위한 기도이지 주님을 위한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이 서로 크겠다고 싸운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았을 때는 주님을 위한 애매한 고난까지도 오히려 합당하고 다행스러우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6. 자아를 처리 받음이란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5절에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했습니다.
여기 두 가지 소리가 나타날 때 여리고가 무너지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제사장의 일곱 양각나팔은 구원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이 나팔 소리가 들릴 때 백성들이 외신 큰 소리는 입술의 시인의 상징입니다. 이 때 강대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신기한 것은 우리가 복음에 서서 감사할 때 자아가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입술의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입술의 시인은 성화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을 기억하고 또 이미 예수 안에서 승리자가 되고 복된 자가 됨을 생각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한 번 감사해 보세요. 이상한 것은 내가 죽어집니다. 감사로서 내가 죽어진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적인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과연 그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랬을 때 놀랍게도 다 이겨지고 죽어지고 평안이 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7.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1절에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했습니다.
여기 칼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6:17)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말씀을 알 때 내 고집을 버리게 됩니다. 고집이란 알고 보면 무식의 산물입니다. 무식할수록 용감하고 무식할수록 고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면 그 진리에 순복하고 자아를 내려놓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후10:5의 바울처럼 말씀의 칼날로 모든 이론과 교만과 악한 생각들을 파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불신도 불순종도 교만도 의심도 죽여야 합니다. 불만 불평도 세속과 욕심도 무지와 방종도 죽여야 합니다. 악성 부패성 죄성 인간성 등을 처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녀노유 불문하고 우양 나귀까지 다 죽이라는 것은 말씀과 다르다면 이유 불문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함입니다.
8.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24절에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했습니다.
여기 불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의 불은 죄를 소멸하는 불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을 때 초대교인들처럼 나를 잊게 됩니다. 성령 충만할 때 내 중심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항상 경건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26절에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여호수아의 맹세는 500년 후에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왕상16:34을 보면 아합왕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들 이름이 존귀한 고귀한 이런 뜻입니다. 이는 또 다시 자아가 출현해서는 고귀한 것이 희생된다는 경고입니다.
즉 여기 장자란 출4:22에 선택받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한 것처럼 자아가 살아나면 내 심령에 은혜가 소멸되어 죽어진다는 뜻이요, 계자는 막내로서 가령 막내 아들 베냐민이 육신의 상징이었듯 육체까지도 고통 속에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한 순간이라도 혹은 무슨 일일지라도 내가 나타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자아를 죽임 마음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주요 왕이 십니다.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가나안이 없었듯 우리 자아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참된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아래 나를 매장시키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너진 여리고 Ⅱ (수6:1-27)
=전 도 론=
요 약
여리고성의 두 번째 의미는 타인의 완악함을 처리하는 것이니 전도론이다. 그 방법으로는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 영혼을 이미 주심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위해 늘 기도하며, 인간이 할 일에 최선을 다하여 감동시키고, 의심하지 않고 그 일을 계속할 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면 그 영혼에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며, 성령의 권능을 입도록 도와 하나님을 경외함이 삶이 되도록 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성도가 되어진다.
설 명
<전도의 원리>
1. 그 영혼을 허락하셨음을 믿으라
2절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2. 신앙의 방법으로 전도하라
8-9절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3. 인간 할 일에 최선을 다하라
3절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의심하지 말고 계속하라
10절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5. 완전한 복음을 전하라
6절 "제 칠 일에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라"
6. 말씀으로 양육하라
21절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7. 성령의 권능을 입도록 돕는다.
24절 "불로 - 모든 것을 사르고"
(강해)
오늘 말씀의 제목은 "무너진 여리고"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리고성은 옛사람의 자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아 처리란 하나님 주권중심의 회복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 처리란 내 자아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아도 처리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도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자행하던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전도 즉 타인의 자아 처리라는 관점에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어떻게 타인을 전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복시킬 수 있을까요?
1. 이미 그 영혼을 허락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완악하더라도 이미 주셨음을 깨닫고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부터 마음의 문을 여는 작업입니다. 완악하면 완악할수록 더 귀히 쓰일 사람으로 여기고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전도가 안 되는 것은 문제가 불신자 편에 있지 않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하고 나의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이 열려 불신자들을 향하여 대문처럼 열린 마음과 대낮처럼 밝은 우리 얼굴의 날이 오기를 기도하십시다. 이 자신이 먼저 열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합니다.
2. 신앙의 방법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8-9절에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히 신앙으로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없이 전도하면 결실이 없습니다. 간혹 전도를 받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군가의 기도라도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중국의 띵 리 메이 목사는 그의 학생 1,100명을 기도명단에 실어 날마다 기도했는데 수백 명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고 다수가 기독교의 사역자가 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기도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 없이 나서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신앙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3. 인간이 할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부모를 전도하려면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기도하고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야로 공부하는 그 모습을 부모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배우자를 전도하려면 남편은 남편 아내는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하면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벧전3:2). 기도 많이 해도 행함이 없거나 반대로 부부 금슬은 좋은데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회가 사회인들을 전도하는 데도 그들이 감동될 만큼 사랑의 사역을 계속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뿌린 씨앗을 통해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서울 목민교회의 부흥의 일화를 보면 김동엽 목사님이 부임했을 당시에는 사람들이 교회에 돌팔매질을 하던 달동네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님은 그 행위를 그들의 고난에 함께 하지 않는 교회에 대한 저항으로 보고 먼저 가난한 가정에 쇠고기와 쌀을 돌리고 구제사업을 오늘날까지 펴 온 결과 특별히 대 교회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지역이 복음화되어 무려 만 명이 나오는 대교회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여리고 성을 돌 듯이 매일 밤중에 동네를 돕니다. 그것도 믿음이라면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의식적인 방법보다는 매일 매일 기도로 돌고, 사랑으로 돌고, 봉사로 돌아야 하겠습니다. 이적이 나타날 때까지 신앙으로 돌고 돌아야 합니다.
4.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10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가시적인 효과가 즉시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뿌린 씨앗은 피곤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부흥에는 년 월 일 시가 있습니다(계9:15). 어떤 일자라는 뜻이 아니고 우리의 기도의 분량이 차고 사랑의 분량이 차는 그 때입니다. 그래서 벧전2:12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 권고하시는 날 즉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응답의 날이 있습니다.
1907년은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의 운동이 일어난 해로 유명합니다. 선교사들이 매일 모여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달을 기도했건만 부흥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부 선교사들 중에는 낙심하여 결실이 없으니 이제는 개인적으로 기도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더 많은 시간을 정하여 더 기도하자고 하여 실천했습니다. 그 결과 평양 장대현 교회를 시작으로 한국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가 오려면 믿음이 분열되지 아니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5.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6절에 "제 칠 일에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제 칠 일은 하나님의 때를 상징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사람의 일을 계속하면 감동의 하나님의 때가 옵니다. 이때가 하나님의 역사의 때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즉시 전도해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의 때를 만들어서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일곱 양각나팔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양은 그리스도의 예표요, 뿔은 권세의 상징이요, 나팔은 복음의 예표입니다. 7 나팔이므로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이 완전한 복음이란 먼저 확실한 복음 이해를 뜻하고, 또 성령으로 감화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듣는 자는 살아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믿는다는 성도들조차 체계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해 복음을 모르는 자가 많은 실정입니다.
6.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21절에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했습니다.
여기 칼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를 위하여 할 일이 바로 말씀의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르신 제자들을 삼 년간이나 말씀으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입혀야 합니다.
24절에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했습니다.
말씀의 연단을 받은 제자들이 다음 단계로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았듯이 말씀의 양육만이 아니라 나아가 성령의 능력을 받도록 도와야 비로소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어떤 구역장은 새 교인이 나오면 함께 기도원에 들어가서 금식하며 부르짖어 체험케 만듭니다. 그 결과 초 신자들이 믿음의 용사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지금은 성서시대 당시의 과도기적 상황과는 달리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하심은 경건함으로 주를 섬길 때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목회적인 견지에서 보면 성서시대의 단계적 상황은 좋은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능력을 강조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7단계의 사항을 참고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의 중인이 되기까지 전도하고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여리고 작전은 단지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 역사는 오늘 우리를 통하여 또 다시 계속되어야 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먼저 내 자아의 여리고 성부터 무너뜨리십시다. 그리고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심령들이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믿고 오늘부터 도십시다.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들레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까지 돌고 또 도십시다. 이 작전 속에는 놀랍고 부푼 복음화의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내외적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이 귀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전쟁>
본문 : 여호수아 6장 1~27절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저희들이 무너지게 해야될 여리고의 장벽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어떻게 무너질지 말씀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해야될 일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금요일 저녁 온누리교회에서 실크로드 선교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 방문하셨던 고세중 선교사님이 ANF라는 새로운 조직을 가지고 이슬람 선교의 비전을 나눈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이 일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계속 제임스 홀과 셔우드 홀 이야기를 하며 의사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했었는데 마침 고 선교사님이 오셔서 실크로드 선교의 밤에 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고 선교사님이 우리 나라의 제임스 홀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거기에서 너무 큰 일을 많이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선교를 하려면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의술을 베풀어주니까 한국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여권 없이도 들어오라고 한답니다. 특별히 감사했던 것은 교회를 개척해서 100명이 넘게 모이고 있습니다. 모든 전도의 이유가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제임스 홀이 평북 지방을 선교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돌아가셨는데 그러고 나서 2~3년만에 평북 지방에 교회가 39개가 세워졌습니다. 저희 4대조 할아버지께서 그때 예수님을 믿고 당시 영수(장로)가 되어서 4대째 내려온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을 하며 제가 감격이 넘쳐서 제임스 홀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하는데 고 선교사님은 연세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분입니다.
그 정도 학벌이면 편안하게 한국에서 살 수 있는데, 사모님도 박사 학위까지 마친 재원이신데 선교에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날 밤 고세중 선교사님은 자신의 특기는 아무 것도 없는데 무조건 일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땅을 파고,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고 합니다. 제임스 홀도 한국에 와서 아동병원, 부인병원 무조건 짓고 나면 미국에서 원조를 해줘서 우리가 이렇게 덕을 봤습니다. 고 선교사님도 지금 아무 것도 없지만 예배당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사놓았다고, 그 사진을 봤습니다.
하나님의 전투에 부름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합니다.
우리들교회 개척 준비기도회를 한지 2주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고 우리들교회를 개척하면서 첫 예배를 집에서 드렸는데 얼마나 모일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과 생각이 많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서 교회가 되겠는가, 여자 목사가 하는데 열명 모이면 많이 모일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르심이 있어서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고 시작했을 때 사실 너무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금새 예배 처소를 구해야 했는데 예배 처소를 구할 때 휘문학교를 주시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교회라는 하나님의 부대를 통해서 여기까지 싸우게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가, 또한 교회가 싸워야 할 영적 전투를 생각하면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어떤 전투를 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때 예배처소를 구하는 것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준비된 자본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에서 장소를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참 비상식적인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감히 잡히십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을 벌렸는지 아십니까. 여리고 전투가 꼭 이랬습니다.
여리고 전투는 하나님의 전쟁인데
첫 번째,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전쟁입니다.
첫째, 적이 더 강팍하게 나온다고 하십니다.
1절 -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요단 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하여서 아모리 사람들이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습니다.(5:1)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양피를 베고 유월절 예배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피를 뿌리면서 희생을 하고, 참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렇게 순종을 해도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나 때문에 여리고는 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설교를 듣고 가서 승리하셨습니까.
그렇게 승리를 했는데, 마음 속에 양피 베어야지 희생을 해야지 하고 갔는데 식구들이 마음을 더 굳게 닫고 부모자식 의를 끊자 이런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출입하는 자가 없고 마음이 더 굳게 닫힌 식구들을 경험한 일주일이었습니까? 승리한 것도 사실이고 내 옆의 식구들이 안 변한 것도 사실입니까?
이쯤되면 여리고가 순순히 손을 들고 나오면 좋겠는데 망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손을 안 듭니다.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건너고, 그래도 죽자고 양피를 베고 있으니까 사실 마음 속으로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 꿇기 전에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성문을 꼭 닫고 자기가 가진 것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돈이 있다' 이러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아말렉 족속이 있고 여호수아와 갈렙, 정탐꾼을 보냈을 때 '그들은 너무 장대해서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했던 그 민족입니다. 게다가 여리고 성벽이 얼마나 철벽인지 두께 11미터로 외벽과 내벽을 쌓았고, 그 두 벽이 35도 각도로 되어있고, 그리고 외벽 밖에는 3~4미터 높이의 석조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거기에 기어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안 그래도 혼자 잘난 맛에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 때문에 홍해가 갈라졌다고,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딛고 왔다고 해도 한 쪽으로는 무서우면서도 더 마음을 굳게 닫는 겁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예수 믿는 거 보고 믿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더 출입문을 굳게 닫는 우리의 식구들입니다. 나는 사장을 위해서, 시부모를 위해서, 장인 장모를 위해서, 배우자를 위해서, 양피를 베고 예배 더 열심히 드리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더 마음을 닫고 출입도 못하게 하는 우리의 식구들, 여리고입니다.
예수 믿은지 2~30년이 되어도 아직도 예수 안 믿는 나의 부모님 식구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주일만에 환경이 달라질 줄 알고, 지난 주에 양피를 베었으면 이번 주일에는 우리 부모님, 식구들이 다 교회 나오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30년도 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을 똑같이 보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음이 녹습니다.
이번 주간에도 어떤 무시와 조롱을 받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2절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둘째, 하나님의 전쟁은 내가 이기는 전쟁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서
'지난 주에 내가 순종했어도 하나도 안 바뀌었다, 남편은 더 술 먹고, 애는 가출하고, 하나님이 식언하시는 분이다, 믿음이 안 가는 분이다, 도대체 나보고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참는 거 좋아하네'
이런 여러분의 안타까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이런 경로를 밟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고, 학교에 붙고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사건이 오면서 내가 가난하고, 출세를 못하고, 병 걸리고, 보잘 것 없어도 내가 우리 집의 대장이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우리 집안, 공동체에서 내가 대장입니다. 나에게 다 붙이셨다고 합니다. 믿습니까.
모두 나의 손에 붙이십니다.
나의 기도에 그들의 내일과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3절 -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셋째, 기도가 무기입니다.
난공불락의 성인 여리고, 내 옆의 식구 여리고를 위해서 하루에 한번씩 돌면서 기도하십니까?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에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계속 만나로 공급하시고, 요단을 건넌 후에도 할례와 유월절, 돌 쌓기 등으로 전쟁과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방법으로 기억하고 성결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 왔는데 하나님은 또 성 주위만 돌라고 하십니다. 정말 돌아가실 지경입니다. 총칼 들고 싸우라고 하셨으면 좋겠는데 자꾸 이상한 명령만 하십니다.
그래도 오늘 내 식구들을 위해서 하루에 한 번씩 돌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안 변하는 것 같으면 내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시고, 강팍한 남편이 안 믿으면 잠잘 때라도 몰래 손을 얹고 기도하시고, 시아버지 같으면 뒤에서 양복 끈이라도 붙잡고 기도하시고, 시어머니는 '어머니~~'하면서 하루에 한 번씩 안아드리면서 기도하십시오. 우리 자녀들도 하루에 한 번씩 꼭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겉으로만 너무 기도하지 마시고 속으로 하십시오. 너무 강팍한 남편 앞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소리도 하지 마시고 '여보~~'하면서 속으로 하십시오.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라고 하십니다. 여리고 성을 돌라고 하십니다.
다같이 서로에게 이야기하십시오.
'하루에 한 번씩 기도합시다!'
어떤 똑똑한 분이 신학 공부를 하고 전도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이혼 소송을 냈습니다. 신학 공부까지 했지만 남편이 자기한테 너무 잘못을 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목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이혼 소송을 냈습니다. 이 부부가 이혼을 하면 안 되겠기에 제가 두 분을 만나보게 됐습니다. 부인도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고, 두 분 다 학벌도 대단하시고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니는 엘리트였습니다.
남편 전도사님은 자기 부인이 교만하고, 자기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법원이 이혼 판결만 남아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제가 만났을 때 남편이 겸손하게 배우고 태도를 바꾸기만 하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신학까지 하셨기 때문에 부인의 의사를 전했더니 자기 부인이 교만해서 안 된다고 합니다. 예배 열심히 드리고, 그동안 신학을 했어도 큐티를 안 하셨으면 큐티도 좀 하시라고 그랬더니 그런게 본질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인이 교만하다고만 합니다. 전도사님이기 때문에 뭔가 통할 줄 알았는데 말이 안 되는 사람은 남편 전도사였습니다.
항상 말을 두 세 마디 해봐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상처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상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굉장히 잘한 사람입니다. 역기능 가정에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힘들게 살았는데 공부를 잘해서 늘 인정받았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대단한 직장에 갔는데 거기에서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니까 자꾸 공부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녔습니다. 직장에서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니까 신학을 해보겠다고 하는데 신학교에서도 공부를 너무 잘해서 인정을 받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착각을 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분이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성경이 좔좔 나옵니다. 그런데 통하지가 않습니다. 정말 힘든 여리고성이 그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분을 놓고 날마다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고 도는 것이 무모한 것 같아도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시간 동안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인이 있을 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서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언약궤가 중심에 있고, 앞에 무장한 자가 있고, 뒤에 또 후군이 있고 이렇게 진행을 하면서 돌아야 합니다. 이 부인은 무장한 자가 아닙니다. 말씀도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도 잘 빠집니다. 말씀을 듣고 우리가 같이 기도하고 격려하면서 가야 된다고 했더니 부인도 말을 안 듣습니다. 남편이 큐티모임 나와서 자기한테 잘 해주기만 바라는 것이지 부인의 목적 자체가 남편의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한테 잘 해주는 것 때문에 달라지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언약궤 앞에서"입니다.
일곱 제사장이 일곱 나팔을 불고 제 칠일에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셨습니다.
'7'이라는 숫자가 열한 번이 나오고 언약궤라는 말이 열세 번 나옵니다.
이 전쟁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고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찬송하면서 가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칼과 무기에 의해 죽는 것보다 자연의 섭리에 의해 죽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소총, 장총 들고 싸워서 이기라는 것이 아니라 찬송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기도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이 행진에는 예배팀이 선두에 있습니다.
4~5절 -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 하시매
5장 마지막 15절에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고 하셨습니다. 거룩은 예배 용어입니다. 전쟁 장면이 아니고 예배의 장면입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는 사람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전투에서 이기는 사람은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도 또 나옵니다.
제가 교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들교회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늘 눈 앞에 요단강이 있는 사람들이 오기 때문입니다. 늘 여리고 전투를 해야될 사람들이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오니까 말씀에 순종을 하고, 각자의 환경에 가서 '잘못했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고마워요'하는 말들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부인은 자신이 너무 잘났기 때문에 '잘못했어요, 용서해요' 그 말이 안 나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그렇게 하기 힘든 부부도 처음 봤습니다. 그만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절이 느끼게 됩니다. 모든 일에 예배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12절 -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5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15절 -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우리의 모든 승리는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일곱 번 도는 것입니다.
그날 여리고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항상 평범 속에 비범이 있다고 늘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언제나 똑같이 이렇게 살면 언제 외치고, 언제 가만히 있어야 할지 때를 알게 됩니다.
주일예배에서 제사장의 일곱 양각 나팔 소리를 듣고, 큐티 말씀으로 계속 진행을 하면서 무장한 자들, 먼저 고난 받은 사람들, 목자들이 목장 모임에서 나누어줍니다. 본을 보이고 서로 나누고 기도하며 격려해 주는 것, 주님 앞에 갈 때가지 이렇게 살다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인생은 없습니다. 오늘이 그날인가 하고 똑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여섯 바퀴를 돌면서 얼마나 소리 지르고 싶고 악을 쓰고 싶을 때가 많겠습니까. '세상에 저렇게 장대한 여리고 백성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아무 것도 안하고 여섯 번을 돌으라니!'
그러나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 많지만 주일예배에 와서 성을 한 번 돌고, 제사장의 말씀을 듣고 가야 합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나의 여리고가 앞에 있어도 지체의 교제가 있을 때는 슬프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집이 없고, 아무 것도 없어도 예배에서 그냥 나누기만 해도 슬픔이 나누어집니다. 기쁨은 함께 할 수록 더 커집니다. 그런데 꽁꽁 싸두고 '내 어려움을 누가 알겠어, 아무도 몰라'하는 것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마귀의 속성은 폐쇄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몰라' 이러는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살펴보면 말씀대로 싸워야 하는데, 그것이 비상식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려면 목장에서 나눔이 중요한데 사소한 것도 나누어야 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첫사랑이나 옛날 은사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에서 누가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누가 날 안 찾아주나, 어렸을 때 나를 흠모한 사람이 없었을까 하는데 워낙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도 안 찾아줍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을 어느 남자 동창생이 찾더랍니다. 그것도 연예인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신명기 말씀을 묵상하면서 보니까 그날 본문이 "너는 스스로 삼가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목장 모임에서 나누니까 거기에 나가야 될지 안 나가야 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 있는 사람들은 나가보지 그러냐고 할텐데 목장에서 나누면서 안 나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비상식적으로 보이죠. 나가면 밥이라도 맛있는 것 먹을 텐데, 출연료도 줄 건데 왜 안 나가냐고 할 겁니다. 그런 일에 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수아 목자를 만나는 것이 복중에 복입니다. 힘들 때 말씀 붙잡고 본을 보이고 목자들을 보면서, 고난의 전리품을 나누어주는 목자들 때문에 우리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중앙에 두고 끝이 없는 행진을 하면 행진하는 자체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줍니다.
세 번째, 무장한 군사들이 선두에 섰습니다.
7절 -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실 때는 제사장 일곱이 먼저 나왔습니다.(4절)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무장한 군사들이 궤 앞에서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선두에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몫으로 주신 싸움을 우리가 승리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에서 영적 전쟁을 할 때 아버지의 몫을 다 해야 되고, 어머니의 몫을 다 해야되고, 남편이 몫을 다 해야되고, 아내의 몫을 다 해야 됩니다. 직장에서 여러분이 싸워야 될 전투를 감당해야 됩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되고, 아내의 역할, 엄마의 역할이 다 다릅니다. 남자의 역할이 다르고 여자의 역할이 다릅니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무장한 자들이 앞에 나가서 장애물을 치워줘야 합니다. 말씀이 절대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보호하는 사람은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교회가 말씀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앞에서 뒤에서 보호를 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투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모릅니다. 말씀을 보호하는 무장 군인들이 되어야 할 자가 오히려 말씀을 훼방하는 일을 하는 걸 많이 봅니다. 몸으로 교회를 막고, 앞에서 뒤에서 말씀이 혹시 훼방을 받을까 노심초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전투가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여리고 사람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놓고 '그 교회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라' 그러면 온 몸으로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장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이 와서 뭐라고 해도 대답을 못합니다. 그래서 무장한 자들을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는 앞에 장애물이 강물밖에 없기 대문에 언약궤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전투에서는 무장한 자들이 먼저 나갑니다. 사람이 제일 무섭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항상 무너지는 게 사람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 때문에 무너집니다.
여러분들이 대답을 잘 못 하겠으면 '목자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목사님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하십시오. 그러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대고 '가서 큐티해요!' 이러면 '큐티가 기저귀냐?' 이럽니다. 그러면 완전히 말씀이 조롱받고 훼방받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만홀히 여김을 받을까봐 언약궤를 감싸고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감싸고 보호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구원이라는 작품을 이루기 위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을 돌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 -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 하고
60만 명이 가면 60만 개의 의견이 있지 않겠습니까.
몇 백 명이 모이면 몇 백 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섞여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돌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것은 '이 전쟁 져요~ 여리고 사람들이 화살 한 번만 쏘면 우리는 다 죽어요~ 죽으면 책임 질 거요!!' 이런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침묵하라고 하십니다.
침묵할 때가 있고, 일곱 째날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외칠 때가 따로 있습니다.
200명이면 200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연약해서 여러분들이 너무 자기 소리를 내시면 교회를 안한다고 할까봐 지금까지 잘 따라와주고 계십니다. 제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게 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교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이 많으면 제가 이걸 왜 하겠습니까. 예전에 큐티 모임을 할 때도 그럴까봐 다들 잘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다 천명까지 모이니까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의 소리를 다 내면 교회라는 배가 흘러가지 못합니다.
각자 의견이 있지만 여러분이 침묵할 때인가 외쳐야 할 때인가 생각해보십시오.
침묵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기도 부탁을 하고 곳곳에 내 짐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기도해줘, 기도해줘'하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하고 신뢰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 부탁을 해도 하나님이 이 모든 사건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인이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두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 부탁을 해도 기도 받을 그릇이 못 됩니다.
외칠 때와 침묵할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전한 방식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그 때를 알 게 됩니다.
오늘이 그날인가 하고 똑같이 하면 알게 됩니다. 똑같이 여섯 번을 하는 동안 소리 지르고 싶고 악을 쓰고 싶어도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교제가 있을 때는 결코 슬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시종이 여일(如一)하게 여전한 방식으로 살면 됩니다. 다른 것 하나도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사건이 해결되기만 바라고, 학교에 붙기를 원하고, 직장이 잘 되기를 원하고, 우리 애가 좋은 배우자를 얻기 원하면서 예배를 등한히 하는 겁니다.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를 안 드립니다. 생활예배도 안 드리고, 주일 예배도 안 드리고, 목장 예배도 안 드리고 날마다 내 사건만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지난 주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번 주 말씀도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잘 살고 있으면 너의 칠일이 온다, 이거 아닙니까. 왜 그걸 모릅니까. 여러분이 안 바뀌어지면서 누가 바뀌어지길 원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예배를 그렇게 소흘하게 여기면서 어떻게 내 자식이 바뀌어지길 원하고, 내 부모가 바뀌어지길 원합니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오늘도 똑같이 말씀드리는 것은 참으로 나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복되지 않으면 지금이 외칠 때인지, 침묵하며 돌 때인지를 모릅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동창이 찾는다고 해도 나가지 말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지체가 없는 겁니다. 나홀로 다방에서 나 혼자 돈 잘 벌면서 남편에게 순종한다구요? 아닙니다. 그래서 남편이 돈 잘 벌면 뭐하겠습니까.
자녀들이 일류학교 나온 부모라고 존경할 것 같습니까. 자녀들이 제일 존경하는 부모는 성경대로 사는 부모입니다.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고해도 알콜중독자 남편에게 순종하는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그 어머니가 학교를 하나도 안 나왔어도, 배운 것이 없어도 알콜중독자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 엄마를 자녀들이 존경하게 돼 있다는 겁니다. 남편하고 이혼해서 돈 잘 벌고, 아이 잘 먹이고, 유학 보내면 아이들이 존경합니까.
여전한 방식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그 끝이 안 보이는 성을 그냥 도는 것, 끝없이 돌다가 천국가시면 됩니다. 칠일 째가 안 와도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드디어 나의 칠일 새벽이 옵니다.
칠일 째 되는 날은 일곱 번 돌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말씀에 따라 더 기도가 되고, 더 애통이 되어서 일곱 번을 돌아야 합니다. 6+7은 13번인데 내 힘으로는 못 합니다.
성령이 시키셔서 저도 남편이 구원되던 해에는 더 기도하게 하시고, 생명을 내놓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더 조용히 지내게 하시고, 더 애통이 되게 하셨습니다. 남편이 쓰러지던 날 아침에도 눈물 흘리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그래서 큐티 노트에 '우리 남편이 구원이 안 됐어도 말세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인생보다 더 기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썼습니다.
구원을 위해 사는 자는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남편이 가기 한달 전에 제 옷에 샴푸를 부었어도 제가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리고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제가 침묵하며 여리고를 돌면서 '네가 이래도 돌겠느냐, 이래도 돌겠느냐'하며 악~ 소리를 지르고 싶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중에 하나가 이른바 '샴푸 사건'입니다.
남편이 가기 한 달 전쯤의 일입니다.
제가 머리숱이 적은데 그 때도 머리카락이 너무 빠져서 대학병원에 가서 어렵게 진찰을 받고 처방으로 비싼 샴푸를 사왔습니다. 몇 번 예약을 하고 가기도 어려운 병원에 가서 샴푸를 사다 놨는데 아들이 자꾸 그 샴푸를 쓰는 겁니다. 그건 쓰지 말라고 엄마만 써야 된다고 하는데 자꾸만 그걸 씁니다.
그러다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아들이 그 샴푸를 쓰고 있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야~~ 왜 그 샴푸를 쓰니' 야단을 쳤는데 거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남편이 무슨 일로 시끄럽냐고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러고 저러고 설명을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에미가 돼가지고 샴푸나 아끼고 말이야, 아들이 쓰겠다는데 그걸 못 쓰게하는 에미가 에미냐'하는 겁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술을 한 잔 마셨으니까 더 말이 안 됐는데, 에스겔 간증한 것처럼 벙어리가 되었어야 하는데 제가 설명을 했다가 그런 소릴 들었습니다. 그럴 때는 설명이 필요가 없고 가만히 있어야 되는데 너무 타당한 일이라고 설명을 했던 것이 안 하느니만 못했던 겁니다. 그러고서 제가 금새 입을 다물었는데 입을 다물기 전에 남편은 '그래 샴푸가 그렇게 아까워서 아들도 못 쓰게 하냐'고 하면서 그 비싼 샴푸를 제 옷에 다 부어버렸습니다.
그 때는 이혼을 꼭 해야겠더라구요.
성을 돌면서 여리고 사람들한테 조롱을 받는 것처럼 아들 앞에서 조롱과 무시를 당하는 건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생기면 그것이 영적 전쟁인 줄 알고 제가 긴장을 해서 살기 때문에 금새 벙어리로 돌아왔습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그날은 저녁예배를 가도 뭐라고 안 할 것 같아서 '교회 갔다 올게요'하고 저녁예배를 갔습니다. 전혀 감정을 안 나타내고 '교회 갔다올게요' 하고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날 본문이 고린도후서 4장 말씀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종된 것도 전파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남편에게 예수가 주되심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너희 종된 것" 남편의 종된 것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남편의 종이라는 것도 입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편의 종인데 주인이 종한테 샴푸를 붓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남편의 것인데' 이것이 깨달아지니까 너무 기뻤습니다. 저녁 예배 한 시간만에 내 마음을 바꾸어주신 주님, 이것이 기적입니다.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을 부르고 기뻐하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살아줘서 너무 고맙다, 그리고 난 정말 당신의 종이다.'
그 사람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이 미안해 할 일인데 제가 들어와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헷갈리기도 했을 겁니다. 저는 남편의 태도가 변하기를 기대하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변화되든지 안 되든지 제가 기뻤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모릅니다. 참으로 구원을 위해서 사는 자는 어떤 일을 당해도 슬프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16절 -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그렇게 벙어리로 조용하게 있던 제가 남편이 쓰러지고 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남편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나의 여리고 성이 안 무너질 것 같아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여리고 성을 깨뜨리는 것처럼 힘들어 보여도 외치며 나갈 때 성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부부가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도 외치고 믿음으로 나가면 그 삶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그런데 여리고가 무너지고 나서 16절에 "이 성을 주셨느니라"했으면 17절에 바로 함락 기사가 나와야 되는데 함락 기사는 20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17절부터 19절까지 여리고가 무너져도 거기에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17~19절 -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찌니라
남편이 믿기를 원하는 것이 나한테 잘해주기 위해서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사장을 전도하는 것이 전리품 취하려고 전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장을 전도해서 덕을 보려고 전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상급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한 번의 결정적인 행동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동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위대한 것은 습관이다'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 놓는 것은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것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신을 벗고 전쟁하고 있나, 무장한 사람을 앞에 세웠나, 언약궤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나 이것을 보십니다.
여리고성 함락 기사는 20절에 딱 한 절 나옵니다. 과정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입시도, 직장도 장고(長考)를 해야 하지만 일단 결정한 후에는 좋은 결과이든지, 안 좋은 결과이든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여리고 함락 기사는 6장 전체에서 한 절입니다. 입시에 붙고 떨어지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아들 공부 잘 하라고 전도하고 싶고, 예수 믿게 해놓고 거꾸로 그런 세상적인 것에 끌려가시면 안 됩니다. 사장 전도해놓고 사장이 골프치러 가자고 하면 거기에 끌려갑니다. 사장하고 가면 콘도도 다 준비돼 있고 편하니까 도리어 끌려가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런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심이 없는 자는 단호하게 불 살라야 합니다.
여리고의 모든 것은 불 사르라고 하셨습니다. 은금과 동철과 라합 집만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속의 여리고는 단호하게 불 살라야 합니다. 기생이지만 라합 집만 살려야 됩니다.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이 못 되는 것은 아직도 여리고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가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죽어도 안 변하는 남편이 있습니까. 부인이 있습니까. 그것이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싸워주십니다. 내가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여리고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무수한 여리고가 줄줄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갖은 방법으로 여리고를 향해서 싸우셨을 것입니다.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그래도 여리고가 딱 버티고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방법이 아니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열세 바퀴를 돌면서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여리고가 얼마나 나를 비웃고 있겠습니까.
'네가 예수 믿어봐라, 내가 믿나' 비웃고 있습니다.
열세 바퀴를 돌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주님, 나는 여리고를 절대로 부실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두 손, 두 발 들도 쫓아가도 여리고를 부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남편은 더 일찍 일어나고, 나보다 더 늦게 자고, 헌금도 온라인으로 꼬박꼬박 하고, 저는 제 힘으로 남편을 부술 수 없었습니다. 남편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 열세 바퀴를 돌라고 하시겠습니까.
열세 바퀴를 돌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고백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으면 남편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부인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걸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내 자녀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성령충만의 비결입니다.
'왜 당신은 그래, 너는 왜 그 모양이야' 이런 이야기가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것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100% 죄인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면 우리의 사랑과 섬김과 봉사는 다 헛것입니다. 부부간에 무슨 사랑이 있습니까. 부모 자식간에 무슨 사랑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할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고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릴 때, 내가 당신의 종이다, 나 같은 것하고 살아줘서 고맙다' 그 이야기가 진심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안 돌아와도 기쁘게 기도할 수 있었고 제가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 정도 되니까 그의 여리고는 무너뜨리시고, 그의 라합 집은 구원해주셔서 육적으로는 여리고로 망했지만 영적으로는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 기도제목을 드립니다.
아직도 굳게 닫혀있고 출입하는 자가 없는 여리고가 나에게 있고 우리 집안에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이기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한 번씩, 내 자신을 잡고 기도를 하고
무너져야 될 여리고를 위해 하루에 한 번씩 손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씩 사랑한다고 말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입으로 하지 못할 때는 악수라도 하고, 안아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고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예배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여리고를 열세 바퀴 돌면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주님 앞에 엎드린다고 고백하십시오.
무장하고 선두에 서서 아내의 역할, 남편의 역할, 자식의 역할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훼방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교회가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잘 살아주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일주일 간 영적 전쟁에서 낙심도 하고, 승리도 하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양피를 베고 유월절을 기념하고 내가 희생하고자 했지만 아직도 출입문을 굳게 닫고 출입하는 자가 없는 내 옆의 식구들이 있고, 아직도 출입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있습니다. 주님, 절망스럽지만 그러나 오늘 여리고 왕과 모든 용사들을 내 손에 붙이셨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기는 전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나의 사랑하는 식구들을 하루에 한 번씩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기도하며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의지하여서 하고자 하오니 하루에 한 번씩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그것을 할 수 있는 비결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도는 것밖에 없는데 그 가운데서 특별히 침묵하며, 벙어리가 되어서 아무 소리 없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기를 원합니다. 열세 바퀴를 돌며 깨닫는 것은 나의 여리고는 내가 부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100% 죄인이오니,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오니 주님이 전쟁을 치러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손만 의지하고 가오니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 되게 하옵소서. 참으로 내 죄만 보고 걸어갈 때에 총칼 들고 싸우지 않아도, 돈 들고 싸우지 않아도 하루 아침에 여리고가 무너질 줄 믿습니다.
나에게 잘해주기 위해서 아내가, 남편이, 사장이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전리품을 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상급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내가 무엇을 상급으로 원하는지 아십니다. 나에게 하나님만이 상급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시고. 우리의 모든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저희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본문말씀 : 여호수아 6:1~21
설교제목 : "갇혀진 문을 여는 길"
우리 인생 앞에는 진로와 진학과 결혼 등 많은 종류의 닫힌 문이 있음. 이스라엘 백성들도 닫힌 여리고 성문이라는 같은 상황 처함.
그럼 오늘 본문을 통해 닫힌 문을 어떻게 열 것인지 보기로 함.
Ⅰ.에배의 능력으로 열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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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칼과 창이 아닌 예배의 행렬로 닫힌 문을 열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음. 역대하 20장에서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의 침략을 맞게된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기도함을 통하여 크나큰 승리를 맛보게 되었음.
닫힌 문이 있는가? 예배를 통해 열기 바람.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우리가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말하였음. 우리의 대적을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통해 깰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음.
모세 때의 방법은 모세라는 슈퍼 플레이어 한사람 통해 홍해 갈라지게 하셨지만 여호수아 때는 온 회중이 여리고 성을 도는 예배를 통해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되는 기적이 있게 하셨음.
성숙이란 온 성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예배하고 기도할 때 승리가 주어지는 것임. 막힌 문이 있는가? 온 성도가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함을 통해 열 수 있음.
“주여! 예배를 통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게 하옵소서”
Ⅱ.침묵의 기도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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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동안 침묵의 기도를 하였음. 일곱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볼 동안 조용히 하면서 하나님만 묵상하였음. 삶에 많은 문제가 있는가? 사람 만나서는 해결되지 않음. 사람과의 만남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함.
시편 62편 5절에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를 좇아 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음. 믿음은 들음에 있음. 어느 구약학자는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원망 잘하고 재잘대기 잘하는 이 백성들의 입이 닫히기 전에는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신다”고 말하였음.
기도 없이는 담대함이 없음. 기도가 있을 때 닫힌 문을 열 수 있음.
주여! 기도의 능력으로 닫힌 문을 열게 하옵소서”
Ⅲ.순종의 걸음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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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은 걸음이 있어야 함.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문을 연 것도 걸음이 있었기 때문임. 우리는 다 이해하고 예수 믿는 것 아님. 믿고 걸어가야 함.불교는 너무나 논리적임. 반면 그래서 도리어 인위적인 냄새가 남.
그러나 성경이 인간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쓰지 않고 훨씬 과학적으로 썼을 것임. 그러나 그대로 선포하였음. 믿음의 눈이 있을 때 성경은 불합리가 아닌 초합리임..
서구사상의 두가지 큰 흐름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너무나 대조적임. 그리이스,로마철학으로 대변되는 헤브라이즘은 인식론의 싸움임. 그래서 진리냐 아니냐, 맞느냐 틀리느냐로 시간 다보냄. 그러나 헤브라이즘의 유태인은 논쟁이 아닌 적용에 강함. 그래서 그들은 실무에서 다 잡게 되었음.
이같이 승리를 위해서는 사색이 아닌 걸음이 있어야 함.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위해 여리고 성을 도는 것은 이해가 안되는 일임. 그러나 설명이 아닌 걸음이 있었을 때 성문을 열렸음.
우리도 닫힌 믿음의 문을 열어야 함. 닫힌 믿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 예배와 기도와 순종의 걸음 걸음을 걸어가길 기원함.끝
본문말씀 : 여호수아 6:15~27
설교제목 : "여리고 승리의 부스러기 진리"
이스라엘백성들은 말씀을 통한 앞세운 순종을 통해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음. 승리의 뒤안길에 있는 부스러기(부수적) 진리를 보고자 함.
Ⅰ.위기의 순간에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잡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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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의 멸망 가운데 라합과 그의 가족의 구원 이야기를 통해 위기의 순간에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잡는 것이 필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음. 17절 말씀과 같이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이 다 죽었음. 그러나 라합과 그의 가족은 살아남. 우리는 위기의 경각 중에 복잡하면 안됨. 단순해져야 하며 가장 중요한 한가지 믿음 하나 잡아야 함.
우리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폭을 좁혀야 함. 스스로를 제한함으로써 강력해질 수 있음. 물줄기를 가늘게 할수록 수압은 더 강해지듯이 위기 중에 나 자신을 제한함으로써 강력해질 수 있음.
“주여! 위기의 순간에 믿음에만 집중하게 하옵소서”
Ⅱ.미래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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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리고성을 재건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음.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심을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음. 열왕기상 16장 34절에서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스굽을 잃었으니 저가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음.
현대인은 합리성에 속고 있음. 그러나 합리성보다 더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합리성으로 설명이 안됨. 그리고 여리고 성을 재건하면 왜 안되며, 또 왜 죽게 되는지 합리성으로 설명이 안됨.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임.
지혜란 말씀을 붙잡는 것임. 미래에는 복음 전하는 것이 온세계에 퍼짐. 한편 핍박과 탄압은 더 심해짐.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음. 미래는 하나님 말씀대로 됨을 믿는 자들이 되기 바람.
“주여! 하나님 말씀에 미래를 걸게 하옵소서”
Ⅲ.여호수아의 지도력이 확고해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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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 말씀과 같이 여리고성의 함락 이후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더 강화되었음. 이같이 어려움은 지도력을 더 강화시킴. 평탄한 가운데 인물이 나지 않음. 하나님께서 어려움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임.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이 더 채우고 보충하기 위해 그러시는구나 생각하면 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까다로운 사람 만나게 하는 이유도 우리를 더 폭넓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 주시고 설들도 하였지만 그의 약점을 고치지 못했음. 그러나 그가 20년 동안 라반이라는 비열하고도 지독한 사람 만나 속임을 당하고 떼어먹힘을 통해 비로소 변화되었음. 그 아래서 자신의 모난 부분 다 깨어지고 변화되었음.
평탄함도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어려움도 하나님의 축복임. 여리고라는 큰 난제가 여호수아라는 슈퍼스타를 탄생시켯듯이 어려움을 즐길 수 있는 종이 되기를 바람.끝
7장
본문말씀 : 여호수아 7:1~ 9
설교제목 : "성공 이후 생기는 병(자아 비대증)"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에서 대승리를 거둠. 그런데 시험은 대승리 이후에 왔음.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음. 섰다 생각할 때 교만하고 나태해지며 무절제해짐.
그럼 성공 이후 시험이 오는 이유를 분석해 보기로 함.
우리는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연약한 존재들임. 우리의 승리는 우리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했기 때문임.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강해 승리한 것으로 착각함.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온전히 못박히지 않으면 항상 넘어지기 쉬움. 자아비대증이란 하나님에 대한 의존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말함.
우리의 중요성은 하나님께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 로마서 5장 8절에서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람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고 있음.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닌 내가 누군지를 항상 점검해야 함. 이스라엘 민족도 여리고의 대승리 이후 “내가 누군지”점검해야 했음에도 승리에 도취되어 이를 하지 아니하였음. 자아비대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항상 십자가에 못박아야 함.
그럼 자아비대증의 증세를 보기로 함.
Ⅰ.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상황을 바라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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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3절에서 “그들은 소수니”라고 하고 있음. 믿음은 하나님 바라보는 것임. 자신감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으면 문제가 없음. 그런데 우리가 다수고 그들은 소수니 하면서 수를 자랑하면 안됨. 숫자 자랑하고 유리한 상황 바라보면 다 무너짐.
하나님 바라볼 때 이기지만 상황 바라보면 무너짐. 그런 의미에서 평소에 높은 점수의 모의고사 성적, 대통령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여론조사, 이모두가 다 무의미함. 실제 결과가 중요함. 하나님 인정하시는지 여부가 중요함. 우리는 상황 때문에 안도하고 그 상황에 다 속고 있음. 하나님 말씀으로 점검받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종이 되기를 기원함.
Ⅱ.최선을 다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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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말씀에서 삼천명쯤 올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음. 최선 다하지 않는 모습 보여줌. 여리고 성 정복 이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최선을 다했음. 그러나 승리 이후 이러한 모습 사라졌음.
일류인생이란 큰일이나 작은 일에나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임. 반면 삼류인생이란 상황에 따라 다름.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성이라는 큰성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였으나 아이성이라는 작은성 앞에서는 최선 다하지 않았음.
패배 이후 8장 1절에 보면 “군사를 다 거느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음. 이렇게 최선 다하였을 때 다시 승리하게 됨.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함. 최선 다할 때 승리가 주어짐. 이스라엘 민족이 최선 다하던 모습 사라지니 무너졌음. 교만, 자아비대증 이 모두 최선 다하지 않은 결과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종이 되기를 기원함.
Ⅲ.기도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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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에서 싸울 때 기도가 없었음. 그리고 나서 깨지고 나서는 기도하였음. 여러 번 얘기했듯이 신앙에는 수리형 신앙과 정비형 신앙이 있음. 수리형 신앙은 깨지고 나서 기도하는 신앙이며 정비형 신앙은 사전에 기도함으로서 승리하는 신앙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능한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함. 또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 우리의 자녀들이 사고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고치기전 미리 기도해야 하며 애국하는 사람 만들기 위해 기도하여야 함.
박사인가?, 지도자인가? 당신이 유능한 사람일수록 도리어 더 기도하여야 함. 그리할 때 하나님은 별빛처럼 당신을 사용하실 것임. 기도하는 것만이 여리고 성에서 뿐만 아니라 아이성에서도 승리하는 비결임임. 기도로 말미암아 이러한 승리를 이루는 종이 되기를 바람.끝
아간을 잡아라 (수7:1-26)
=인 죄 론=
요 약
아이성 전쟁의 패배의 원인은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아간은 죄의 상징이다. 그가 도적질한 시날산의 외투는 세상의 명예와 허영이요, 은과 금은 각종 탐욕과 도덕적인 부패를 각각 가리킨다. 제비뽑기로 아간을 추적하는 과정은 신앙점검법의 원리를, 심판 받은 그와 그의 가족과 장막과 소유는 죄의 구체적인 속성들을, 그를 치고 불살랐던 돌과 불은 각각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를 가리키며, 그리고 돌의 커다란 무더기는 다시는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징계로 말미암는 은혜의 장막을 각각 예표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죄의 아간을 잡아낼 때 고통의 심령골짜기는 평화의 푸른 낙원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성경의 예언이다.
설 명
<죄악론>
◎ 죄의 정의 ◎
1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 아간"
죄란? '하타' = '표적을 빗나가다'
◎ 죄의 구분 ◎
1. 성부의 속성과 관련된 죄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치장 할 옷 = 영광
2. 성자의 속성과 관련된 죄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 은 이백 세겔과"
은 = 구속의 상징
3. 성령의 속성과 관련된 죄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금 = 신성의 상징
◎ 신앙점검법 ◎
1. 찬송이 넘치고 있는가?(16절)
2. 회개하지 못한 죄는 없는가?(17절)
3. 주신 은사를 얼마나 활용하는가?(17절)
4.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가?(18절)
☆ 죄의 아간 처리법 ★
1. 돌로 치라=그리스도 복음
2. 불 사르라=성령충만
3. 안전장치 주심=징계, 가시
(강해)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간을 잡아라"입니다. 오늘은 풀리지 않는 신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무슨 이유인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방황하며 부르짖습니다. 오늘 이 아간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죄론을 상세하게 교훈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번째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전투인 작은 아이성에서는 어이없게도 실패하고 맙니다. 그것은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영문을 알지 못해 티끌을 무릅쓰고 부르짖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그 실패의 원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악론의 교훈을 발견합니다.
먼저, 죄란 무엇입니까?
1절, 18절을 보면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아간은 죄의 상징입니다. 죄란 히브리어로 '하타'라고 하는데 '표적을 빗나가다, 실패하다', 혹은 '아바르' 라 하는데 '벗어나다, 위반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교리문답에도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나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의 상징답게 출발은 좋았지만 빗나간 족속이었습니다. 그의 출신을 살펴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영적 장자 지파인 유다 지파의 출신입니다. 유다 지파라 함은 12지파 중에서 가장 수효도 많고 가장 강하고 기업도 가장 크고 언제나 이스라엘의 선두에서 행하는 가장 뛰어난 지파입니다. 또 유다 지파는 메시야의 줄기입니다. 마1:2-3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 세라가 아간의 증조부입니다. 그런데 창38:27을 보면 이 아름다운 줄기에서 빗나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베레스와 세라는 쌍둥이였는데 세라가 형이 되지 못하고 동생이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날 때 세라의 손이 먼저 나와 형의 표시인 손에 홍사는 가졌지만 다시 들어가 안타깝게도 베레스의 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세라는 메시야의 줄기의 축복을 베레스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간은 빗나간 행동을 했습니다. 수6:18-19에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했습니다. 또 수6:24을 보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불사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투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불태우지 아니하고 그것을 몰래 숨겼고 은덩이와 금덩이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빗나감이 곧 죄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아간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아간이란 이름이 "구부러진" 의 뜻입니다. 비뚤어진 것이 죄입니다. 그는 불법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불법이 곧 죄입니다. 이처럼 아간은 죄의 모형입니다.
그럼, 죄란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21절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아간이 세 가지의 물건을 도적질했는데 이는 죄의 세 가지 속성을 보여줍니다. 즉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죄는 삼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침범이라는 관점에서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1. 성부의 속성과 관련된 죄가 있습니다.
여기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그랬습니다.
여기 시날산은 바벨론의 다른 명칭입니다. 그리고 외투는 몸을 보호함이지만 여기서는 외모를 치장하는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려야 할 마음의 자리에 세상이나 이방종교나 인간이나 자아를 숭배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관련된 종교적인 죄입니다. 이 죄로서 마귀가 예수님께 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내게 절하라고 유혹했습니다. 혹시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삼위에게 모두 적용되나 특히 성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도적질하는 죄입니다.
2. 성자의 속성과 관련된 죄가 있습니다.
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 은 이백 세겔과" 했습니다.
은은 성경에서 화폐의 가장 보편적인 물질로서 대개 구속의 상징으로 많이 쓰였습니다. 여기 구속이란 사셔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이백의 2는 증거의 수요, 100은 갖춤수 10의 제곱으로서 만족수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은 구원 얻기에 만족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 다른 교리를 다른 말씀 혹은 복음을 알지 않거나 복음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3. 성령의 속성과 관련된 죄가 있습니다.
여기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했습니다.
금은 본래 신성을 상징하는 물질입니다. 그래서 성막에서 나무를 금으로 입혔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예표했습니다. 특히 오십 세겔에서 성령은 50이라는 숫자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오순절도 그렇고 500문도도 그렇습니다. 신성의 본질은 거룩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기 금은 몸으로 범하는 도덕적인 죄들을 뜻합니다.
아간은 범죄하고도 그것을 숨기고 회개치 않았습니다. 잠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가 시날 산의 외투를 감추었는데 시날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세상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품으면 내가 죽습니다. 내 가족이 죽습니다. 공동체가 죽습니다. 기도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잃습니다. 삶에서 실패합니다. 이 때는 먼저 내 속에 아간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시인 아삽과 같은 신앙이 필요합니다. 시73:25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까?
아간이 취한 것은 극히 적은 것이며 전 민족 중에 단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회개하고 온전히 헌신한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큰 문제일 때도 있지만 의외로 작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간을 찾듯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막힌 것을 찾을 때 그것은 보배와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자신의 죄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16-18절에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 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범인 추적에서 자신의 막힌 영적 문제를 점검하는 범을 발견합니다.
1. 찬송이 넘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6절에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했습니다.
제비뽑기에서 맨 먼저 뽑힌 지파는 유다 지파였습니다. 유다 지파는 메시야의 줄기요 찬송의 뜻을 가진 지파입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그리스도 안의 바른 복음 안에서 신앙이 찬송으로 넘치고 있는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즉 먼저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신 구원의 은총을 우리는 날마다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영적 생활의 가장 기본입니다.
그 동안 많은 성도들이 이 첫 부분에 걸려서 영적 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봅니다. 즉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여 주신 복음을 몰라서 믿음과 감사보다 애통과 간구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풍성한 영적 생활은 고사하고 구원의 확신마저 희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 뿐 예수님께서 이루신 복음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 지파보다 나은 이미 오신 메시야 줄기의 성도들입니다. 아담의 줄기였을 때 아담의 저주가 그대로 적용된 것같이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줄기이므로 그리스도의 공로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살고 나아가 하나님 우편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게 된 자신임을 깨닫고 이 진리에 서서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내 안의 죄악이 꿈틀거리고 환경이 그렇지 않아도 진리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찬송 상태를 확인하십시오. 이 때 유다 지파와 같이 영적 능력이 임합니다.
2. 회개하지 못한 죄는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7절에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했습니다.
여기 세라는 "광선, 빛, 여명" 이란 뜻입니다. 빛은 거룩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엡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영적 생활이 잘 되지 않으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회개할 죄의 문제는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요일1:6-7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이 문제가 잘 되면 영적 사귐이 있는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죄악을 발견하여 내어 버려야 합니다. 아직도 '이것만은 안되' 하는 죄가 있습니까? 혹은 깨닫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이 죄는 성경의 거울과(약2:23-25) 은사의 도움으로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깨닫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주신 은사를 얼마나 활용하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17절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여기 삽디는 "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이는 성령의 은사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은사에는 크게 교회를 통한 객관적인 은사와 각자에게 주신 주관적인 은사가 있습니다.
고전12:28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했고, 엡4:11-12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이상의 말씀이 바로 객관적인 은사입니다.
그런데 주관적인 은사는 고전12:8-11에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들을 존중하고 또한 나에게 주신 각종 은사의 도움도 충실히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8절에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했습니다.
여기 갈미는 "포도원지기"란 뜻입니다. 포도원은 교회요 포도원지기는 직분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는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나가 이 문제에 걸렸습니다. 이것이 사명의 점검입니다. 주신 사명에 충실하므로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남을 살리려고 하면 내가 살게 되는 이치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더욱 말씀으로 풍성해지려면 나에게 주신 이 말씀의 달란트로 아낌없이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아깝거나 게을러서 붙잡고만 있으면 말씀이 막혀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을 점검하므로 아간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비뚤어진 죄의 아간을 발견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에, 죄악의 아간은 어떻게 심판해야 합니까?
24절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그랬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몇 가지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1. 죄의 집을 불살라야 합니다.
여기 "장막과"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아간의 장막을 불살랐습니다. 죄에게도 집이 있습니다. 범죄의 물리적 환경이나 범죄의 이념적 환경이 바로 죄의 장막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온전히 처리하려면 범죄의 환경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승리했으나 범죄의 환경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잠5:8에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했습니다.
2. 죄에게는 자손이 있습니다.
또 "그 아들들과 딸들과" 그랬습니다. 즉 죄의 자손이란 죄가 죄를 낳고 또 그 죄가 다른 죄를 낳는데 이것이 죄의 자손들입니다.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죄란 자손을 낳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의 자녀들까지도 죽였습니다. 개인의 죄가 가족에게 전가되지 않음이 율법인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가족과의 공모 혹은 은닉죄였을까요? 자세한 근거는 없어 설명치 못하지만 영적인 교훈으로는 이처럼 죄가 죄를 낳는 악순환이 없도록 원천적으로 막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알레스카에 사는 레밍이라는 쥐는 수효가 늘어나면 닥치는 대로 먹다가 광란증에 걸려 우두머리를 따라 바다에 빠져 집단으로 자살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죄의 증가는 곧 파멸의 길입니다.
3. 죄에게는 소유가 있습니다.
또 여기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했습니다. 이 짐승 재산들의 특징은 낳고 낳아 자꾸 불어나는 재산들입니다. 이처럼 죄는 그 수법이 자꾸 불어납니다. 거짓말도 하면 할 수록 불어납니다. 일부 죄수 중에는 교도소를 몇 번 드나드는 동안 풍부한 죄의 수법을 갖는다고 합니다. 성경은 죄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교훈합니다. 즉 죄를 지을 줄을 몰라서도 못지어야 합니다. 즉 죄를 회개하려면 죄만이 아니라 죄의 환경에서부터 죄의 자손 죄의 수법까지 온통 제거해야 합니다. 나아가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그 이름조차도 부르기를 꺼려야 합니다. 암 수술을 할 때 전이 가능성이 있는 부분까지 다 제거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죄 짓게 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25-26절에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했습니다.
1. 복음의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여기 "돌로 치고" 했습니다. 우리도 돌로 쳐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돌로 치시렵니까? 여기 돌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길입니다. 롬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했습니다. 여기 죄의 몸은 앞의 옛사람과 동의어입니다. 즉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죄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못박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공로를 적용시키사 실재가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적용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대상이 본인이든 타인이든 그리스도의 은혜의 돌을 너도나도 던져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기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있으면 악이 제거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했습니다. 영적 전쟁은 미움과 혈기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죽이고 은혜와 사랑으로 덮고 덮어서 다시 살아날래야 살아날 수 없도록 만드는 선한 싸움입니다.
2. 성령의 불로 살라야 합니다.
여기 "불사르고" 그랬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불로 살라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아니면 죄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4:4에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처럼 제단 숯불로 부정을 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여기 또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 중에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기념물로 그곳에 큰 돌 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온전히 은혜에 덮여서 살아야 됩니다. 은혜가 나를 덮고 은혜가 나를 눌러 죄가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은혜의 장막이(고후12:9) 위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은혜의 장막은 바로 그를 찌르는 하나님의 사자 즉 사단의 가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찌르는 환경을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우리의 죄악에 대한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아골 골짜기가 사65:10처럼 소떼의 눕는 곳이 되며, 호2:5처럼 소망의 문이 되어질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의 아간을 잡아내십시다. 우리 속의 죄가 바로 아간입니다. 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 이 죄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 도적이 우리 속에 있는 한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실패의 원인을 몰라 부르짖고 계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철저히 처단할 때 절망의 골짜기는 소망의 문으로, 고통의 골짜기는 평화로운 푸른 초장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을 원하십니까>
본문 - 여호수아 7:1~15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너무나 성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진짜 어떤 성공을 하는 것이 성공인지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 많은 실패 뒤에 성공이 오는 것인데 성공을 하기 위해 오늘 말씀을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19일 서울지검 특수 1부에서 회사 돈 30억원을 횡령한 회장을 구속하려고 그 회사에 들어가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는 가운데 너무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많은 감사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이 일년에 3,500만원씩 아산병원에 보내서 백 명이 넘는 난치병 환자들이 수술을 받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 23명에게 8,8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680 가구에 매달 쌀 700여 포대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매년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사용해 온 돈이 10억에 달했습니다. 이분이 왜 구속됐는가 하면 수자원공사에서 하는 어떤 일에 몇 천만원 뇌물을 주었다가 수사를 받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수십 억의 횡령 혐의도 드러난 것입니다. 그 회장님은 불구속으로 수사를 받기로 하고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교회를 다니실까요. 안 다니실까요?
안 다니실 수도 있고, 다니신다고 해도 큐티를 안 하셨는가 보다 생각해 봅니다.
그 회장님은 2000년도 초반에 부도를 당하고 그 충격으로 반신 마비가 오고, 그러면서 평생 마음에 품어왔던 자선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그런 생각은 금새 무너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회사가 어려우면 자선활동도 막고 해야 될텐데 큐티를 하지 않으면 그런 것을 지혜롭게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큰 성공을 한 뒤에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일에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상담을 하기 위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부인은 예쁜 외모에 교양있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처녀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꽤 열심히 나갔는데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 후에, 중요한 것은 교회를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은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분주하게 살다보니까 아이 셋을 데리고 교회 가는 게 쉽지 않아서 가다 말다 했습니다. 남편이 돈을 잘 벌고, 힘들게 안하고, 핍박도 안하고..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인생입니다. 부인도 모든 걸 갖춘 사람이고 남편도 세상적으로 좋은 학벌에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성공을 한 줄 알았는데 어느날 남편이 바람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뜨겁게 연애를 했고, 그럭저럭 결혼 생활을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마음이 떠나버렸습니다. 교회 안 나가는 남편 때문에 교회도 알맞게 안 나가주고,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이가 셋이나 되고 주위의 눈도 있고, 이혼해봤자 별다른 살 길이 없는 걸 알았기에 이혼할 생각은 애당초 포기했습니다. 삶이 공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졌습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지만 남편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로 했습니다. 예쁜 잠옷을 사다 입고, 요리학원까지 나가면서 맛있는 반찬을 만들고, 남편이 퇴근할 시간에 맞춰서 집안 분위기를 맞추고 애를 썼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상담을 받으러왔습니다.
결혼 생활에서 실패한 이 여성처럼 여러분이 성공을 했지만 실패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남은 생애에서 이루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여리고성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아이성 전투에서도 당연히 이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실패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오늘 이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성공적인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아이성 전투 실패의 원인은 죄였습니다.
여리고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다음 전투지인 아이성으로 향했습니다.
1936년에 여리고 유적을 발굴한 영국의 거스탕 박사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지진에 의해서 무너졌다고 합니다.
여호수아서를 쭉 읽어오면서 본 것처럼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을 건널 때 배 한 척 없이 건넜습니다. 맨발로 건넜습니다. 몇 백만 명이 배 한 척 없이 마른 땅처럼 그 강을 밟고 건너는데 요단 서편에 가나안의 모든 왕들이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 믿는 나를 무서워합니다. 아이성은 그래서 예수 믿는 나를 무서워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뺏은 다음에 대패를 했습니다. 5절에 보니 마음이 물같이 녹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내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죄 때문에 그럴까요. 큐티를 하면서 날마다 무슨 죄 때문에 그런 일이 왔는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첫째, 전리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1절 -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예수님의 조상이 될 유다 지파 중에서 죄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1절 서두에 이야기하고 21절까지 유보합니다. 제일 중요한 죄는 이것입니다.
유다 지파 중에서, 모태 신앙 중에서 죄인이 나왔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유력한 지파의 사람이 범죄를 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부인의 집도 세상적으로 교회적으로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어떻게 적용을 해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학교만 붙으면, 결혼만 하면, 병만 나으면 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막상 그것이 나에게 올 때 내가 취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일류학교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랑하고 싶습니다. 또 결혼도 자랑하고 싶습니다. 직장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린 부분을 내가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놀고 싶고, 내가 가고 싶고, 내가 하고 싶은 부분이 생깁니다.
제가 16년 동안이나 재수생 모임을 인도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합니다. 대학교에 가도 다 큐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는 애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운 부인도 일류 학교 가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교회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둘째,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입니다.
2절 -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를 볼 수가 있습니다.
여리고 전투와 딱 달라진 게 있는데 여리고 전투에서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6:2)하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인도하셔서 인도를 받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를 딱 이기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씀 없이 여호수아가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이 자기 과신의 죄입니다.
남들이 가기 어려운 학교에 붙었습니다.
휘문학교하면 입시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대치동 한 복판에 입시학원들이 다 모여있는데 제가 여기 정복을 못하고 있습니다. 휘문학교 아이들이 여기에 많이 와야 되는데 너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전도를 해야될지 더 기도해야 겠습니다.
아무튼 남들이 가기 어려운 학교에 붙으면 갑자기 자기가 복음이 됩니다.
큐티도 다 내려놓습니다. 자기가 복음이 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붙었냐고 물어보면 '내가 정석 수학을 보고 성문 영어를 봤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해주셨다' 이런 이야기가 쏙 들어갑니다. 수석합격자들 인터뷰 보십시오. '나는 과외 공부도 안하고 교과서만 봤다' 이러지 않습니까. 여전한 방식으로 생활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공부를 잘하니까 맞기는 맞는 말입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할 일이 많은데 언제 큐티하면서 하나님께 묻겠습니까.
제가 재수생 아이들을 경험해보니까 시험보기 전 날까지 얼마나 겸손하게 큐티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간절하게 묻던 아이들이 학교에 붙기만 하면 갑자기 신이 내렸는지 아무 것도 안 묻습니다. 이전과 이후가 확 달라집니다. 아무 것도 안 묻습니다. 시험보다 훨씬 중요한 배우자 문제, 직장 문제 아무 것도 안 묻습니다. 자신감이 마구 생기나 봅니다.
학교 들어가자 마자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것이 이성교제인데, 이성교제야 말로 영적인 스승에게 물어가면서 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데 갑자기 왜 프라이버시(사생활) 침해 하냐고 하면서 묻지도 못하게 합니다. 입시 치를 때는 프라이버시고 뭐고 그런 말을 안 하더니 갑자기 이성교제에서는 프라이버시가 막 나옵니다.
여러분은 연애할 때 꼭 물어보고 하십시오.
꼭 연애하고 미팅하기 위해서 대학교에 들어간 것처럼 성전인 몸에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고, 혼전순결을 우습게 여기고 더럽힙니다. 혼전 순결을 강조하면 천연기념물 아니냐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대학에 가고 직장에 갔는지 모두 다 잊어버렸습니다.
제가 16년 동안 재수생 모임을 했는데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 정탐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이기고 나서 정탐을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3절 -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정탐을 잘 못하는 사람들끼리 노는데 어떻게 정탐을 잘 하겠습니까.
붙은 아이들끼리 뭔가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잘된 사람들끼리 놀아야 레벨(수준)이 맞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간절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정탐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는 믿음의 사람들이 내 옆에 있습니다.
부모가 정탐을 잘못해서 38년을 광야에서 돌았는데 다 잊어버렸습니다. 부모하고 나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나 혼자서 잘 붙고 잘 살게 되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들어갑니다. 갑자기 떨어진 아이 무시하고 못 사는 아이 무시합니다. '내가 그렇게 어렵다는 학교도 들어갔는데 그까짓 결혼쯤이야 못하겠는가. 내 용모로 학벌로 얼마든지 결혼 잘 할 수 있다' 이런 과신이 생기는 겁니다.
어떤 아이는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혔는데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내가 저 남자 교회 나가게 하는 것쯤이야 못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내가 하버드 대학도 들어갔는데 저 남자 마음쯤이야 못 움직이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당연히 합니다.
그래서 하버드 가는 수고의 1/200 수고도 안하고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결혼이 얼마나 힘든 고지인데 얼마나 쉽게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가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교만이 들어가게 되니까 자기 레벨에 맞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학벌과 용모를 따집니다. 믿는 사람의 레벨은 학벌과 용모가 아닌데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잘 된 사람들끼리 모여서, 정탐이 잘못된 사람들끼리 모여있으니까 정탐을 잘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못정탐'끼리 모여서 '안정탐'을 하고 실수를 하는 겁니다.
여리고를 함락시켰다는 전제에서 이런 정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여리고를 물리쳤다, 그러니 아이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이겁니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서 자기가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13 바퀴 돌다가 소리 한 번 지른 것밖에 더 있습니까.
한 일이 아무 것도 아닌데 막상 이기니까 자만심이 생깁니다.
저도 대학 입시가 저의 여리고였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께서 대학에 붙여주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레슨 한 번 따라와 준 적도 없고, 입학식 졸업식도 안 오시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집은 망하고, 엄마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피아노 전공을 했는데 제가 어떻게 붙을 수 있었겠습니까. 집이 망했으니 레슨도 과외도 제대로 못했는데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도 그래서 교회 다니면서 늘 '주님, 여기만 붙여주시면 나중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진짜 제가 한 것이 없습니다. 돈을 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들어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합니다. 저도 피아노 실기 시험을 볼 때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붙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해주셨는데도 들어가니까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성도에게 제일 위험할 때가 승리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떤 작은 유혹도 이길 수가 없는 인생입니다.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0만 명이 수고한 여리고와 비교할 때 200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여리고를 돌면서도 거기에서 한 명의 전사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3천 명만 보내는 수고 아닌 수고를 해서 36명이나 죽었습니다.
저는 성도의 삶에 패배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패배가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필요 없는 패배를 해서 시간 낭비를 합니까.
앞에 말씀드린 부인처럼 바람 피우는 남편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밤잠을 못 자고, 건강 낭비, 시간 낭비, 감정 낭비를 합니다.
4~5절 - 백성중 삼천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륙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36 명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자기 경력과 모든 것을 생각하니 5절 말씀처럼 마음이 물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됐습니다. 이쯤 되면 앞에 말씀드린 부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이 부인은 문제의 핵심을 모르고 아직도 반찬 만들고, 잠옷 바꾸고, 쇼파를 이렇게 놓았다 저리 놓았다 합니다. 전부 상담을 받아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이 안 바뀌었는데 겉모습을 아무리 바꾼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그것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데 회복이 되겠습니까. 남편도 하나님을 몰라서 방황을 하는 것이고, 배신 당한 부인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서 만족이 안 되기는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는 일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그나마 아주 마음이 녹는 사람이면 낫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음처럼 차가워서 냉장고가 되는 사람은 더 고약합니다. 옆에 갈 수도 없습니다.
바람을 피웠을 때 90%의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는 절대 안 돌아온답니다.
여자 바람 피우는 걸 무섭게 여기십시오. 한 번 나갔다 하면 안 돌아옵니다. 그러니 남편들은 아내를 하늘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 부인이 잘난 남편하고 살다가 36명 안 죽었으면, 바람도 안 피우고 잘 살았으면 그대로 끝나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36명 죽었기 때문에 200만 명을 안 죽게 하십니다. 36명이 죽었기 때문에 200만 명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진짜 성공을 하기 위해서 남편을 통해 하나님이 수고를 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부인이 마음이 물같이 녹았기 때문에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들교회 사람은 아니니까 탐정처럼 수사는 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물같이 녹으니까 그나마 교회를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고난을 당해도 냉장고처럼 차가워져서 안 나옵니다. 잘 살아도 안 나옵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는 게 인생 최고의 축복입니다.
지금까지 왜 마음이 물같이 녹는 일이 있는지 진단을 해봤습니다.
그러면 이제 처방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성공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6절 -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엎드렸습니다.
혼자 엎드린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함께 엎드렸습니다.
힘들 때는 혼자 아무 것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옷을 찢었습니다.
마음을 찢는 심정으로 여호와의 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세를 낮추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즉시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참으로 축복입니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썼습니다.
수치를 당했을 때 행하는 고대의 관행인데 이제 나의 수치를 드러내야 약화가 됩니다.
저물도록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것이 습관화 되어서 습관적으로 이런 일들을 행했습니다. 습관은 참 중요합니다. 모태신앙이니까 그래도 속상하면 교회에 나오고, 구역에 다녀본 행태가 있어서 구역예배에 가고, 오픈하라 오픈하라 하니까 티끌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오픈을 합니다.
"저물도록 있다가", 빨리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해 본 대로 하는 것이 습관입니다. 모태신앙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집안의 습관이 점쟁이한테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학벌이 좋아도 점쟁이한테 갑니다. 또 해결사 엄마라고 안 믿어도 돈 많은 엄마한테 갑니다. 돈 많은 사람 찾아갔다가 더 수치를 당할 것인데 그게 습관이 돼있기 때문에 힘들면 돈 많은 엄마, 돈 많은 친구, 돈 많은 데로 가서 계속 더 수치나 당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 때 기도 부탁을 하고, 목장 모임에 가고 서로 아뢰는 것이 습관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금새 해결이 안 돼도 그것이 습관이 되기 위해서 아이들 어려서부터 교회로 보내고, 말씀을 읽게 하고,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유년부부터 중고등부, 대학부까지 서로 분반 공부를 하고 나눕니다. 지체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지체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기도를 해도 하루 아침에 해결이 안 됩니다.
해결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여호수아가 어떻게 하는지를 좀 보십시다.
7절 -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나이다
이것이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말씀을 듣고 떠난 여호수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별소리를 다 해도 애가 떨어지고, 남편이 바람 피우고 하면 우리는 다 그럽니다.
"어찌하여!!" 멸망시키려고 요단을 건너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말이 '어찌하여'인데 여호수아 입에서 그 말이 나왔습니다.
'어찌하여'는 하나님의 틀렸다는 뜻이니까 가장 교만한 말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가지고, 거기다가 큐티는 왜 해 가지고, 왜 목자는 해 가지고....
저는 '내가 목사는 왜 했지' 이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전도를 했는데, 전도하고 집에 왔을 때 남편이 속상하게 하면 '내가 전도는 왜 해가지고, 전도 안 했으면 당장 이혼할 텐데' 이랬습니다. 그러다 병원 살림 집에서 2~3명씩 데리고 성경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싸움만 하면 '내가 성경공부만 없으면 당장 이혼할 텐데 말이야. 내가 올해까지만 성경공부를 하고 내년엔 이혼을 해야지' 이랬습니다. 정말 밤낮 '내가 왜 예수님을 믿어서, 뭐하려고 성경공부는 해가지고...'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께서는 2~3명이 열 명이 되게 하시고, 열 명이 백 명이 되게 하시고, 백 명이 천 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속상해도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돼야 될 텐데, 남편이 너무 외출을 못하게 하고, 간호사 사무장 앞에서 '야!' 하면서 너무 쉽게 나를 무시하고, 월급도 다른 곳에서는 원장 부인이 주는데 자기가 주고, 시어머니께 용돈 드리는 것도 며느리로서 제가 드려야 되는데 꼭 남편이 주고... 자존심이 팍팍 상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교만하면 하나님이 절 그렇게 낮추셨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어떤 때에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한참을 슬퍼하고 있으면 남편이 그럽니다.
'예수 믿는다고 그러더니 소리 잘 지르시네~'
그러면 주의 이름이 훼방받았기 때문에 너무 괴로운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러면 제일 못 견디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교통신호 위반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컨닝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음란사이트 보다가 딱 걸렸다고 합시다. 그것도 우리들교회 사람한테 걸리면 우리는 100% 죄인이라고 이해를 하겠죠. 그런데 하필 내가 전도해야 될 아버지한테 걸리고, 엄마한테 걸리고, 시어머니한테 걸리면 죽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내가 예수 믿기 원하는 남편한테 나도 모르게 소리 질러놓고는 너무 괴로운 겁니다. 제가 사실 그런 경험이 있었죠. 병원 살림집에 살 때인데 너무 화가 나니까 환자들 앞에서 소리를 질러야지 하고 막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진찰실 문을 딱 열었더니 환자 세 명이 앉아있는데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내진실로 해서 도로 돌아 나왔습니다.
그것만해도 굉장한 거죠. 웬 부인이 갑자기 진찰실에 들어왔다가 도로 나가는가 이상해 보였겠죠.
오늘 중고등부 1부 예배에서 어떤 학생에게 나눔을 시켰습니다.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우리 아빠가 예수를 안 믿는데요.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들어보니까 엄마가 아빠의 구원을 원한다고 하면서 엄마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이럽니다. '아무리 싸워도 엄마가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되죠'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엄마도 사정이 있다고 엄마를 불러내서 이야기를 하게 했죠. 그런데 사정을 다 이야기해도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고 아들이 재판관이 돼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엄마도 시어머니, 시아버지 모시면서 집안 일도 하고 열심히 하는데 교회 좀 간다고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못한 게 뭐가 있냐, 이렇게 나오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시원했는데 '야, 네그 그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냐' 이러면 우리는 못 견딥니다.
그래도 소리 지르고 삼수갑산을 가실 분은 가시기 바라는데, 소리 한 번 지르고 살아보겠다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정도가 아니라 트럭으로 받는 일이 벌어집니다.
자녀 문제, 돈 문제, 자존심 문제에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맞어?' 할 정도로 화를 냅니다.
내가 홍해를 건너서 구원 받고,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른 줄 알았는데 딸 수영 가르친다고 했다가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싸우다가 매까지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살기가 싫어집니다. 예수 믿고 잘 가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문제는 수영밖에 없는 겁니다. 학원 문제, 사윗감 문제 말도 안 되는 아이성, 여리고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문제에 넘어져서 갖은 수치를 다 당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문제에 걸려 들었습니다.
집에서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박신양이라는 배우가 상대방을 알고 상대방의 약점을 알면 누구나 사기에 걸려든다고 합니다. 공중전까지 치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 약점이 있으면 다 넘어갑니다. 오늘 그 학생의 엄마인 집사님도 지금 시부모님 모시면서 그래도 말씀을 읽고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남편에게 무시 당하니까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고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살기 싫다는 생각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혼 생활하면서 이혼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좋다 이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백 번, 천 번 해도 믿는 사람은 빨리 돌아옵니다. 여호수아처럼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쓰고 저물도록 앉아있으면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가기 싫어도 교회에 이렇게 오시고, 가기 싫어도 목장 모임에 가시고, 가서 앉아만 있으면 돌아옵니다.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원망이 되어도 좋으니까 하나님께 인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간증으로 우리들교회가 많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간증으로 많은 분들이 제 책에도 등장을 하셨는데, 간증으로 등장한 사람들, 여러분들 모두가 잘못 살면 주의 이름을 훼방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이름을 훼방하면 세상에서 끊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9절 -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400년 참아주시고, 40년 참아주시고, 요단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 무너뜨리게 하셨는데 이제 주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면 세상에서 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대학교도 다 떨어지고, 사업도 다 망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물으셔야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께 물으셔야 합니다.
친정 엄마한테 가서 묻지 마시고, 돈 많은 사람한테 묻지 마시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남편이 주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이런 자식이 있을 수가 있어요, 나는 못 살아, 못 살아~~~' 이래도 하나님께 가서 하십시오. 하나님께만 가서 하시면 됩니다. 그저 악을 쓰고 욕을 해도 하나님께 가서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10절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느냐고,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고 하십니다.
누군가 야단을 쳐주고, 목장에서 목자가 야단을 쳐주는 것이 "일어나라"하는 것입니다.
11절 -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리고 네 욕심 때문이다, 네 삶의 결론이다. 가르쳐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지적하십니다.
네가 언약을 어겼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고서는 왜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니, 하나님의 소유를 네 것으로 삼았어.
이스라엘의 죄가 너의 죄야, 아간의 죄가 바로 여호수아 너의 죄란다. 왜 아간만 욕하고 있니, 예수 믿는 사람이 너잖아, 예수 안 믿는 부모의 죄는 너의 죄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도적질해서 자기 가운데 두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 것이라고 해 놓고 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마음이 녹습니다.
자식을 하나님 것이라고 해 놓고 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식이 대학교에 떨어져도 마음이 녹고, 결혼을 잘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녹아서 못 삽니다. 남편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바람을 피우면 마음이 녹습니다.
12절 -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적을 당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니까 대적이 됐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대적이 아니고 나의 탐심이 대적입니다. 나의 탐심 때문에 대적을 당하지 못합니다. 부부 간에, 대인 관계에서 아직도 지겨운 나의 욕심이 처리가 안 돼서 감당이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이 아직도 자기 기구가 있고, 포기하지 못하고 멸하지 못하고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13절 -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진짜 처방을 주십니다.
빨리 일어나서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환난이 심해도, 없어도 성결케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까짓 것 하면서 자기 합리화로 막 살고 싶고, 너무나 돈이 많으면 쾌락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신학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된 티모시 존슨 박사는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려면 첫째, 걷기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운동 중에 제일 좋은 건 걷기라고 합니다. 걷는 것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남을 도우라고 합니다. 힘든 사람 전화 오면 전화 받기 싫은데 도와주라고 합니다. 한 시간 동안 대화를 해주라고 합니다. 그것이 영혼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말씀 듣고 일주일 내내 혼자 입에 자물쇠 채우고 있다가 오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들었으면 다 토해내셔야 합니다. 셋째, 정기검진을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큐티, 말씀 묵상이 정기검진입니다.
오래 오래 사는데 가장 비참한 장애는 친한 친구가 없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 유명한 CEO들 중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진짜 친한 친구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한 다섯째는 잘 쉬는 것이고, 여섯째는 자기 내면에서 깊은 감동이 오는 것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적용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들교회 중학생 친구 하나가 시험을 보는데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찍어서 답을 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돼서 시험지를 내려고 하는 순간 앞의 친구가 쓴 답이 보였습니다. 그걸 보고 얼른 바꿔서 쓰면 되는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걸 맞아서 점수를 한 점 더 얻으면 뭐하나' 그래서 안 썼다고 합니다. 오늘 나와서 그런 나눔을 했습니다. 저 같으면 쓸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말씀으로 다져 놓아야 가치관이 바뀝니다.
티모시 존슨 박사가 말하기를 육체와 영혼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쪽에 좋은 것은 다른 쪽에도 좋다고 합니다. 육체에 좋은 것은 영혼에도 좋고, 영혼에 좋은 것은 육체에도 좋은 것입니다.
성결이 이런 것입니다. 영육간에 건강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리는 사람은 일등을 할 수 없습니다. 힘을 비축하기 위해 천천히 생각하면서, 저기쯤에 장애물이 있겠지, 내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됐을까, 내가 어디에서 명령을 어겼을까 자꾸 뽑아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언약을 어기고 망령되이 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제하기 전에는 절대로 대적을 당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학교 시험 볼 때는 그렇게 밤잠을 못자고 해놓고는 결혼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람을 우습게 여겼다가 그 사람을 내가 당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너무 제 말을 잘 들어줄 줄 알았습니다. 내가 입시를 위해서 준비한 것만큼 결혼을 위해서 준비했어야 하는데 나를 너무 좋아해주고, 너무 성실하니까 남편이 너무 잘해줄 줄 알았습니다. 앞에 말씀 드린 부인도 남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중매로 만났지만 그 부인은 아주 뜨거운 연애 결혼이었습니다. 남편이 무엇이라도 해줄 태세였기 때문에 교회 나가고 안 나가고는 문제도 안 됐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결혼 전에는 다 따라 나가주니까요.
한편 이 부인에게는 남편이 돈은 많지만 고고한 학자 집안인 자기 가문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고 남편의 집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시하다가 남편이 바람 피우는 일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대적이 되어서 당할 수가 없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아무도 못 만나게 됐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의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숨겨진 죄가 무엇입니까.
실제적으로 숨겨진 죄가 있습니까. 마음으로 눈으로 지은 죄가 있습니까.
내가 마음이 물같이 녹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 할 때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해 있다는 걸 아십니까.
심각하게 내 자신의 죄를 생각해보고 진단과 처방이 나와야 합니다.
저도, 그 부인도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결혼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입시 때문에는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누구한테 제가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까.
내 속에 인정받으려고 하는 부분이 있고, 내가 정욕으로 누리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남편이 전리품이 되어서 정욕으로 누리려는 부분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남편이 태워주는 자가용을 누리고 고고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바쳐질 물건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은 누구의 집에도 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간은 바친 물건을 자기 천막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걸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부자가 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경주 최부자 집, 300년 부자의 비결은 과거 시험을 보되 중사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좋지만 관직을 가지면 언제나 모함에 빠지고 숙청이 되기 때문에 언제나 부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지위만 가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며느리들은 시집와서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이 되었을 때는 모든 재산과 장서를 대학에 다 기증했습니다. 저는 최부자집 후손들이 다 예수 믿게 되었을 줄 믿습니다. 미리 적용을 했기 때문에 최부자집 후손들은 다 예수님을 믿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성공을 원하십니까.
이것이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대단한 승리를 했는데 오늘 말도 안 되는 아이성 싸움에서 무너졌습니까.
마음이 녹습니까. 물같이 되었습니까.
오늘 나의 죄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취하고, 전리품을 취하고 내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결케 하기 위해 영육간에 운동을 열심히 하십시오.
육적으로도 열심히 걷고 남들을 열심히 도우면서 영혼의 운동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동안 빨리 나에게 있으면 안 될 것들을 불 사르고 망령된 것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운동해서 진짜 성공을 하기 바랍니다.
엄청난 성공을 하고 30억원 횡령해서 부끄러운 일들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누구도 못하는 구제를 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도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공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이름을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좀더 자자, 좀더 졸자 하고 있으면 세상에서 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오늘 많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먼저 내 자신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저희들은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도 세상의 성공을 바라기 때문에 마음이 물같이 녹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남편이 예수를 믿어서 나에게 잘해주기를 원하고, 우리 자녀가 예수를 믿어서 공부를 잘해주기 원하고, 돈을 많이 벌기 원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마음이 물같이 녹습니다. 대단한 것에 무너지면 말하기도 좋겠는데 말도 안 되는 아이성에 넘어졌습니다. 자존심에 넘어졌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건에 넘어졌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망한 것이 서른 여섯 명 죽이고 이백만 명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 때문에, 부인 때문에, 모든 식구들 때문에 마음이 물처럼 녹아서 오늘도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너무나 목이 곧아서 잘 나가면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인생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호수아처럼 티끌을 무릅쓰고 재에 앉아서 슬프다고 외칠지언정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좀더 자자, 좀더 눕자 하면 세상에서 이름을 끊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내일을 위해서 스스로 성결케 하는, 영육간에 운동을 하기 원합니다. 남을 돕기 원합니다. 아직도 가족 우상주의에 젖어서 내 남편 때문에, 내 식구 때문에 슬퍼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믿고 이제는 다른 힘든 사람들을 향해서 나가게 하옵소서. 지경을 넓히게 하옵소서.
내 속에 망령된 것을 다 뽑기 원합니다. 불 사르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성공이 있을 수 있도록 우리 집안에서 나를 택하셔서 말씀하시오니 모든 것을 내 탓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에 이제 이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떠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믿사오니 주님과 나 사이에 주시는 이 언약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도 이 언약을 지키기 원합니다.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실패가 안겨준 기회
여호수아 7:6-15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실패에 맞서 싸우는 5가지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실패'라는 단어 대신 '시행착오'라는 말을 사용하라. 희망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쉽게 재기한다. 둘째,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실패를 딛고 재도전할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셋째,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반성은 하되 비하는 말아야 한다. 넷째, 항상 실패를 맞을 준비를 하라. 인생은 깊은 수렁도 있고 넓은 초원도 있다. 다섯째, 실패가 예견되면 빨리 단념하라. 사람들은 가끔 차선책에 대한 미련으로 최선책을 놓치는 우를 범한다.
화살은 과녁에 명중하는 것보다 빗나갈 확률이 훨씬 높다. 큰 교훈을 안겨주는 고상한 실패가 저속한 성공보다 나은 경우도 있다. 세상은 실패를 '시행착오'로 여기고 다시 일어서는 적극적인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다.
여호수아는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습니다. 온 백성의 간담이 녹아내렸고, 절망하여 낙심해 쓰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실패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세 가지 알려 주십니다. 실패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느끼는 이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1. 실패를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 간주하라(10절):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패를 과정으로 주실 뿐 종착점으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실패를 결말이 아니라 과정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아버지의 은혜가 있습니다.(10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한번의 실패가 영원한 결말이 아닙니다. 아이성에서의 실패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6절의 이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루 종일 땅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슬퍼한 이유를 그들의 항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7절) 여호수아는 실패를 통해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멸망시키려 한다고 낙담하고 있습니다. 이 실패가 멸망의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원대한 꿈과 계획을 다 없던 것으로 돌리고 싶어 합니다.
실패할 때 우리들의 반응의 문제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이성 한 곳에서의 실패를 전면적인 실패로 의도적으로 몰고 가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건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다 끝장인 것처럼 결론을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 아이성의 실패는 아이성 한 곳의 실패일 뿐입니다. 그것은 최종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과정을 결과로 착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실패를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노력을 살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절) 모든 것이 끝장난 사람처럼 엎드려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실패를 결코 우리의 마지막 순간으로 장식하지 않으십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아니 새로운 경험을 한 사람처럼 다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낙심하여 엎드려있는 것을 의아해 하십니다. “어찌하여 엎드려 있느냐”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실패 중에도 미래를 준비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실패로 좌절해 엎드려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실패 중에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꿈꾸고 계십니다. 아직 내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내일이 암담했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9절). 사실 여호수아에게 오늘의 실패는 내일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이름이 끊어지는 비극의 미래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실패 중에도 내일을 계획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쓰러져 있는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미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실패는 내일의 완성을 위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테헤란왕궁에 가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입구에서부터 아치형 천장과 벽, 그리고 창문에 이르기까지 마치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유리 장식 때문입니다. 이 유리 장식은 빛의 밝기와 방향에 따라 각양각색의 빛을 발하는데, 자세히 보면 모두가 미세한 유리조각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왕궁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깨어진 유리’와‘실패한 인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테헤란왕궁을 지을 당시, 건축가들은 왕궁을 장식할 거울처럼 비치는 반투명 유리를 프랑스에 주문했습니다. 마침내 몇 달을 거쳐 도착하였는데, 포장을 풀어 보니 유리가 완전히 깨어져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 관계자들은 당연히 흥분했고, 프랑스에 욕을 퍼부으며 즉각 새 제품을 다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이 깨진 유리를 붙인다면 더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주문을 한다 해도 공사 기간이 연장될 것이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작업 인부들은 큰 유리 조각을 일부러 잘게 부수어 벽과 창에 입히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찬탄했습니다. 그러자 급기야는 아치형 천장까지도 작은 유리 조각으로 장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각국의 관광객들이 이 왕궁의 장식을 보기 위해 와서 저마다 찬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깨진 유리를 활용하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갓 입사한 견습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테헤란에 작은 양복점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되지 않아 때로 자투리 천을 엮어 옷, 이불을 만들어 팔기도 했습니다. 그 때 만든 자투리 천의 옷이 특별히 더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실패가 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실패란 이제는 방향을 바꿀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징표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지으시고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과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들면 모든 것을 다 집어치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생애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십니다. 한 가지에 실패했으면 다음에 다시 잘하면 됩니다. 실패한 것 외에는 성공하고 잘 한 것, 다른 것도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실패는 한 가지 그 항목에만 해당합니다. 그러기에 절망하여 엎드려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만나서 실패를 과정으로 여기시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한 그 자리까지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기어이 사명을 주십니다. 그 실패는 과정일 뿐 베드로 인생에 결정적인 종착지는 아니었습니다. 모세도 40의 나이에 애굽의 왕자의 자리에서 쫓겨 광야에 머물렀지만. 그것은 더 큰 영광을 위한 과정이었을 뿐 결코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실패를 겪었을 뿐입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 믿는 자들을 죽이며 거룩한 사람 스데반까지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받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오늘의 실패는 인생이 끝장났다는 증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알려 주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실패한 것 같은 인생을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죽음이라는 종착역에서도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실패는 과정이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기회를 잡고 일어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실패를 거룩함의 기회로 삼으라(11-13절):
둘째,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거룩함의 기회로 삼길 원하십니다. 실패는 사실 우리에게 중대한 결함이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미래를 위하여 실패 중에 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실패를 통해서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13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실패를 통해서 중요한 일을 우리는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성의 회복입니다. 세속적인 때들을 실패를 통해서 벗을 수 있습니다.
이 실패가 드러낸 더러움 즉 세속성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지고 도둑질하며 속인 것입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 이 말은 12절과 13절과 15절에도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온전히 바쳐진 것들이 무엇입니까?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점령한 내 소득인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와 성공이었고,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6:18-19절).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입니다. 깨끗한 포기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직결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분리하여 버려야할 것들을 버리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것은 낭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굴러들어온 호박을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여리고성의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욕심을 포기하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나머지 가나안의 모든 기름지고 풍부한 것이 여리고를 포기할 때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깨끗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나머지 모든 것들을 누리고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입증하는 기초신앙고백이 됩니다.
실패 중에서 내일을 위하여 이렇게 거룩성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실패의 원인을 밝히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가 바로 스스로 거룩하게 하는 일인데 그 이유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거룩성이 심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받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심판의 도마 위에 눕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2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11절 하반부의 말씀처럼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 가운데 둔다면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오늘날에도 놀라운 진리의 말씀입니까? 오늘날 경제계와 정치권에서 최고의 성공의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버려야 할 것을 움켜쥐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멸해야 할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깨끗하게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않고는 결코 실패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일을 꿈꾸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러운 물건을, 포기해야할 것을 함께 소유하고 있으면 함께 망하게 됩니다. 같이 질이 낮아져 버립니다. 함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룩케 하여야 합니다.
둘째 이유는 거룩성이 하나님과 동행의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신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12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더러운 것과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 중에 더러운 것이 있으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온전히 바친 물건을 다시 하나님께 바쳐 드려야 합니다. 그것들을 멸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것 중에서 양자택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움켜쥐고 있을 것인가 잘 판단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없는 상태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이유는 거룩성이 승리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거룩하라고 하신 이유는 원수들 앞에서 우리가 능히 맞서기 위한 능력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13절). 13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거룩함이 가장 위대한 무기임을 믿어야 합니다. 원수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들의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원수들을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암적인 요소, 더러운 것들을 제거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룩하면 담대하고 당당합니다. 거기에 어떤 원수의 공격도 막아내는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 수중에 남아 있는 진멸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거룩케 되는 일이며, 내일을 위하여 복된 일입니다. 현재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할 것들, 아직도 포기해야할 습관들이 존재한다면 거룩성도 미래도 없습니다. 아이성에서와 같은 실패만 기다릴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져야 하는 것을 내가 숨기고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성의 훼손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 즉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탐욕에 있습니다. H. 헤세가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실패의 현장에서 거룩성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실패를 회개의 기회로 삼으라(14-15절):
셋째, 실패를 회개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중요한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1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누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는지 알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범인을 지목하지 않고 독특한 방법의 제비뽑기를 시행하게 하십니다. 14절을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지금 범인을 잡는데 하나님께서는 12지파 중에서 그리고 다시 족속 중에서 그리고 다시 가족 중에서 그리고 다시 남자들 중에서 범인을 찾아내십니다. 점점 범위가 좁혀지면서 초점을 맞추어 가십니다.
왜 처음부터 “아간, 네가 범인이렸다!”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범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2지파 중에서 유다지가 뽑혔을 때 범인인 아간은 얼마나 간이 콩알만 해졌겠습니까? 12가지 가능성 중에 가기가 속한 지파가 뽑혔다면 자신이 발각될 것을 생각하고 자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침묵하고 숨어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자기가 속한 족속이 뽑혔고, 그 다음은 가지가 속한 가족이 뽑혔고, 그 다음은 자기들 형제 중에서 누군가 뽑힐 순서입니다. 이 정도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빨리 엎드려 회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범인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자기가 뽑힐 그 순간까지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셨습니다. 다만 회개하길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복잡한 제비뽑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하면서 시간을 연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다 놓쳤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 중에서 중요한 것은 회개의 기회를 붙잡는 것입니다. 기회는 주어지기는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15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마지막에 당사자가 뽑히면 불사르라고 이미 경고를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회개했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악을 제하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교하신 심판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을 향해 점점 좁혀져 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사정권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실패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에 길이길이 남는 회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피윌크스 선교사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실패하는 것만큼 우리를 쉽사리 좌절시키는 것은 없다. 지난날의 잘못과 낭패를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슬픔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그런 중에서도 자만심과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우리의 실패로 낙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며 더욱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파헤쳐 그 속에 숨겨진 더러운 벌레들을 밝은 태양빛에 죽여 버리자. 마음속의 문제를 쏟아놓아라. 주께 아뢰라는 몇 마디 말을 실천에 옮겼을 때 그것은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어려울 때 더욱 힘을 내어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패할 때 견고하게 주님께 붙어 있는 길 외는 달리 방법이 없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심판의 사건들, 폭로되고 뒤집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은 우리에게 점점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제비뽑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유명한 사람들이 뽑히는 순간들이 있었고, 때로는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이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척이나 친구 중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언제 내가 뽑힐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께 자복하십시오. 그것이 오늘의 실패의 의미입니다. 오늘 내가 넘어진 것은 더 큰 과거의 어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회개의 기회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류에 감사드리면서 회개의 기화를 붙잡음으로 새로운 인생들로 출발하시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불후의 명곡 대부분은 육체적 고난과 실패의 돌무더기에서 창작되었습니다. 천재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태어났고 다르게 살았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35세에 요절한 모차르트, 31년밖에 살지 못한 슈베르트, 26세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페르골레지, 그 외에도 퍼셀(36세) 벨리니(34세) 베버(40세) 멘델스존(38세) 쇼팽(39세) 등 이름만 들어도 선율이 느껴지는 이들은 하나같이 40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너무 일찍 완성된 천재들입니다. 반면, 바흐(65세) 헨델(74세) 하이든(77세) 등 세 음악가는 당시 평균수명으로 보아 장수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베르디는 거의 90세까지 살면서 왕성한 창작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의 음악은 한사코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 고통 속에서 잉태됐습니다. 베토벤은 위대한 창조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1822년 11월 3일 ‘피델리오’의 재 공연으로 마지막 리허설에 지휘를 해달라고 요청받은 그는 맹렬한 몸짓으로 지휘봉을 앞뒤로 흔들었습니다. 그 때 슈레더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귀가 먹은 거장은 가수들과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나중에 사태를 알아차린 베토벤은 절망 속에서 극장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청력의 상실은 그의 창작 열정을 빼앗아가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은 이미 그가 귓병에 걸린 30세 이후의 작품이었고 특히 제7번, 제8번, 제9번 교향곡은 귓병이 심한 상태에서 작곡됐습니다. 가난하고 눈먼 한 소녀를 위해 달빛을 주제로 ‘월광곡’을 작곡했던 베토벤은 극기와 초탈의 정신으로 찬란함을 노래했습니다.
25세 되던 해에 타인에게조차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감동을 안겨준 슈베르트 역시 중병의 시기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1823년 5월 그는 <나의 기도>란 시를 통해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생명, 나의 육신, 나의 피! 그 모두를 ‘레테’의 강물 속에 던져 넣어, 보다 순결하고 보다 강력한 경지로 나를 옮겨 놓아 주소서. 위대한 분이시여”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서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 자신의 슬픔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오직 슬픔에 의해서 태어난 것만이 세계를 즐겁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천재적인 음악가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패와 좌절을 앓았으나 그것이 창작 열기를 오히려 고취시켰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천재적인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질병 또한 가시로 작용했음을 엿보게 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12:9-10). 실패의 가시를 안고 그것이 안겨주는 기회들을 붙잡아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말씀 : 여호수아 7:10~ 26
설교제목 : "실패에서 돌이키는 용기"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 처음으로 아이성 공격에서 실패하게 됨. 상상치 못한 패배였기에 그 충격도 컸음.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가르쳐 주섰음. 그 답은 죄를 제거하라는 것이었음. 그리할 때 잃었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음.
그럼 실패와 패배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를 보기로 함.
Ⅰ.기도하여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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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수리형 신앙과 정비형 신앙이 있음. 정비형 신앙은 물론 좋지만 깨어지고 넘어져서도 기도해야 함. 여호수아도 아이성에서 깨어지고 난후 7장 6절 말씀과 같이 기도하였음. 기도의 중요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 보여주시는데 있음.
가장 절망적일 때는 치유의 방법을 모를 때임. 아이성에서의 패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태였음. 그럴 때 하나님이 길 보여주심. 답답한 사람이 있는가? 안개 속에 헤매는 사람이 있는가? 기도하라. 홍해가 막혔을 때,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도 기도하여 기적이 일어났음.
야고보서 5장 13절에서 “너희 주에 고난 당하는 자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음. 기도로 승리하는 종이 되기 바람.
Ⅱ.공동체의 죄를 제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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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1절은 7장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임. 아간의 범죄 때문에 전체가 패배하였음. 한사람의 죄의 영향력이 그만큼 큼. 한사람의 죄는 공동체를 병들게 만듬. 그러나 한사람의 기도는 공동체를 살리기도 함. 고린도전서 12장 26절 “만일 한 지체가 고난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음.
이러한 말씀에 견주어 볼 때 지체중 한사람이 잘못하였을 때 그를 욕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공동체 의식이 없는 자임. 그 한사람이 돌이키지 못할 때 공동체 전체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으므로 한몸 의식이 있다면 그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위해 기도하여야 함.
Ⅲ.돌이키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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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서 중간에 돌이키기 쉽지 않음. 관성의 법칙이 있기 때문임. 가롯유다는 한번 범죄의 마음 먹고 나니 돌이키지 못하였음. 예수님이 “너희 중에 나를 팔자가 있도다”시며 회개할 기회 주셨음. 이에 가롯유다가 “저니이까?”하였을 때 예수님이 “그렇도다”라고 했음에도 돌이키지 못하였음.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여러 번 주심. 그런데도 우리는 회개치 않음.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열두지파 중 유다지파,그리고 유다지파 중 범죄자가 있는 족속과 가족, 그리고 범죄자를 가리키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 줄 때 돌이켜야 함. 하나님은 우리를 과정으로 변화시킴. 그러나 죄문제는 단호하게 끊어버리게 함을 통해 고치게 하심. 다윗이 밧세바와의 범죄 이후 나단 선지자가 꾸짖자 그 자리에서 회개하였음.
또한 갈라디아서 2장 말씀과 같이 베드로가 외식하자 바울이 와서 “네가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서 외식을 하는도다”라고 꾸짖었을 때 그는 거기서 돌이켰음. 성숙과 성장은 과정이지만 이렇게 죄를 이기는 가장 빠른 길은 죄를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것임.끝
<죄에는 장사가 없다>
본문 : 여호수아 7장 16~26절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는데 오늘도 많은 죄를 가지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길지 말씀하여 주옵시고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서 이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릴 수 있도록 말씀하여 주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좋은 취지를 가지고 정치를 하고, 청렴결백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하겠다고 청와대에 입성을 합니다. 그런데 퇴임할 때는 온전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산으로 가고, 한 사람은 땅으로 가고, 한 사람은 구치소로 갑니다. 그것을 보면서 대통령이라는 가문도 죄에는 장사가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오해]라는 희곡에는 가난하게 살면서 여인숙을 치는 두 모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모녀가 너무 가난한 나머지 남모르는 죄를 은밀히 행하기 시작합니다. 여인숙에 오는 손님 중에서 혼자 사는 것처럼 보이거나 부유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약을 타서 먹여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빠요 아들인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이 아들은 성공을 하고 어머니와 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어떻게 사는지 보려고 신분을 숨기고 숙박을 합니다. 그가 오빠인 줄도 모르고 음식에 약을 타면서 누이인 마르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행복과 사랑의 문을 열어줄 돈을 위해서 살인을 하는 거야'하면서 오빠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가방을 뒤지다가 신분증을 보고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아들이요 오빠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절망한 어머니는 아들을 버렸던 강물에 투신을 하고 누이 마르타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천명이 이 범죄에 가담했다고 할지라도 죄는 불행할 뿐이다.'
그리고 죽음을 택합니다.
돈이 불행한 자신들에게 행복과 사랑의 문을 열어줄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데에서 끔찍한 죄를 계속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결국 얻은 것은 불안과 초조와 성공하여 돌아온 아들의 살인과 자신들의 죽음뿐이었습니다.
누가 강한 자입니까.
죄를 이기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그런데 죄를 이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첫째, 유다 지파의 아간이 범죄를 했다고 합니다.
16~18절 -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고조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뽑다보니까 아간이 뽑혔습니다.
가장 강력한 지파인 유다지파에서 범죄자가 뽑혔습니다.
유다는 다윗을 배출해 낸 이스라엘의 명가이고 예수님도 이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세라의 증손인데 세라는 '새싹'이라는 뜻이고, 삽디는 '하나님만이 은혜를 베푸신다', 갈미는 '풍성한 수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만 아간은 '사고뭉치'라는 뜻입니다.
아간은 유대인 중에서도 보통 가문이 아닌 집안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싹이 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히 거둔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데 아간에게 와서 끝이 났습니다. 유아세례 교인, 목사 아들, 장로 딸, 교양이 흘러 넘치는 가문 다 소용 없습니다. 면죄부가 안 됩니다. 죄를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죄는 지옥처럼 강합니다.
지지난 주 말씀에 성공하는 삶을 살고 싶으면 자기의 죄를 보고, 전리품을 취하지 말고,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면서 망령된 것을 뽑아내라고 진단과 처방을 내렸습니다.
16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이에 일찍 일어나서" 처방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16절 -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말씀은 여호수아서에 여섯 번 나옵니다. 요단 강을 건널 때, 여리고를 돌 때 두 번 나오고, 아이성을 두 차례 공격할 때도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아간을 뽑아낼 때, 죄를 뽑아낼 때 아침에 일찍 일어납니다.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외적인 기적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 자기의 내면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늘 직시하지 않으면 내가 잘난척하게 됩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렸는데 내 죄를 보지 않으면 또 순간적으로 실수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속의 더러운 것들을 계속 뽑아내야 합니다. 나를 직시하라고 아이성 싸움에서 마음이 물같이 녹을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내 자신을 보고 죄를 뽑아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 후손의 약속을 받았어도 4대에 가서 사고 뭉치가 나왔습니다. 창세기 29장에서 유다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오리라는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2천 년을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표상이라는 요셉을 팔아먹고,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하나님이 계속 경고를 하셔서 첫째, 둘째 아들이 죽어도 정신 못차리고 일에 미쳐서 날뛰다가 술먹고 신전 창기와 놀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신전 창기가 며느리 다말이었습니다. 이 콩가루 유다에게 예수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유다가 그 일이 있은 후에는 형제들과의 분쟁에서 중재자가 되고, 잘난 척 할 게 없으니까 어느 공동체에서나 겸손하게 가만히 있었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돼서 온 집안을 먹여살리니까 얼마나 잘난 척을 했겠습니까. 유다는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는 가문이라고 약속해주셨으니까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면 됩니다. 이 지구상에 유다의 가문보다 더 좋은 가문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시는 가문보다 더 좋은 가문이 있습니까.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기다려야 되는데 이것이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아간은 모르는 겁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아간의 열등감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한마디로 열등감은 비교에서 옵니다. 자기가 최고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옵니다.
왜 열등감이 옵니까.
약속을 받아서 유다가 대단하지만 아직은 다윗이 등장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4대가 세 번 흘러가야 되니까 42대가 지나야 되는데 이제 4대째입니다. 다윗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왕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번듯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상이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었다고 해도 아간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조 할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사건은 해석이 안돼. 너무 부끄러운 일이야' 이럴 수 있습니다.
자유당 때 희대의 살인마인 고재봉이 군에서 도끼로 중령의 식구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래도 감옥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삼천 명 강력범을 전도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강단의 설교에서 고재봉 이야기가 쓰였습니다. 고재봉이 사형을 당할 때는 웃을 때 총을 쏴달라고 해서 울고 찬송을 하다가 마지막 3절 부르는데 웃어서 총을 쐈다고 합니다. 그 정도 믿음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데 고재봉 식구 중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고재봉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구속사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고재봉은 살인자일 뿐입니다. 아간이 이럴 수 있다는 겁니다.
지존파가 인육을 먹었어도 예수믿고 갔습니다. 그런데 지존파 형제들은 지존파가 우리 형제라는 것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 가문이라면 그런 지존파도 주님의 은혜로 구원됐다는 것을 너무 감사해야 되는데 감사가 안 나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간음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구속사가 이해되십니까.
우리 집에 아무 것도 없어도 예수 믿는 한 사람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좀 상황이 달라졌겠죠. 우리 집에 왕이 나오고 최고로 부유했던 솔로몬도 나왔으니까 그때는 좀 자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 왕만 자랑스럽지 죽을 때까지 유다는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 우리들 시각입니다. 며느리하고 간음한 것밖에 기억이 안되는 겁니다. 우리들교회에서 간증을 해도 저 사람은 망한 사람, 아픈 사람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는 참 죄인입니다.
예수를 아무리 잘 믿어도 집안이 가난하고, 복잡하고, 공부한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할 때 우리는 자꾸 비교가 됩니다. 아간이 어떻게 자기 집안과 세상의 집안을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여리고 사람들의 화려한 것들을 어떻게 가져오고 싶을 수 있습니까. 자꾸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하는데는 대통령도 예외가 없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가진 어머니도 이 죄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조상의 저주가 사대까지 간다는데 유다의 죄는 거기에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서 예수님이 오시게 돼 있는데 어떤 사람은 조상의 상처를 부여잡고 조상을 들먹이면서 '내가 조상 때문에 이 모양이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간 것은 인정을 안하고 그 행위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예수 믿었다는 게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기가 막힌 일들이 집집마다 일어납니다.
오늘도 부부간에 '니네 집에 뭐 선한 게 있냐, 니네 집엔 어떻게 공부한 사람도 아무도 없냐, 내가 누워 들어가도 그 학교는 들어간다' 이러면서 싸우고 오셨습니까. 그러면 진짜 예수를 믿었다면 '당신 집안은 정말 휼륭해' 이래야 되는데 '당신 나온 것도 학교라고 잘난 척 하시네'하고 맞 받아치면서 싸우고 오셨을 겁니다. '당신 닮아서 애가 공부를 못 하잖아' 하면서 애들이 공부를 못하면 양쪽 집안을 들먹이며 싸웁니다.
지금 아간은 자기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를 모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믿음의 가문에 속해있으면서 그 좋은 것을 모릅니다.
제가 요즘 방송에도 나오고 이름이 알려졌는데 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식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게 문제가 아니라 예수 믿으니까 최고인데 이 믿음의 가문에서도 다 따로 놀면서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 집안을 너무 무시합니다. '시날산의 외투도 없는데 예수 믿으면 다냐' 하면서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가 필요합니다. 겉모습을 치장합니다. 믿음이 좋은 집 자녀가 세상의 외투로 치장하고 싶어하고 금과 은이 필요합니다.
우리들교회에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많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기적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감사가 없고 우리 교인들을 무시한다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학벌을 비교하고 '레벨이 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똑같이 아간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성경을 볼 때 나에게 주시는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날산의 외투가 필요하고 금과 은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세상 외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비교해서 라합은 조상이 누구인지, 부모가 누구인지도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여리고 기생'이라는 것만 언급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라합이 구원을 위해 한 일은 다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아간이 저지른 악도 다 기록돼 있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아도 조금 지나면 어떤 죄를 지었는지 하나님이 다 알려주십니다.
라합이 구원을 위해 한 일이 다 기록이 돼 있는데, 라합이 내세운 것은 여리고 기생이라는 것입니다. 나팔을 불고 다녔습니다. 예수 안에서 내 신분을 소개할 때 '나는 공부한 것 없다, 죄를 지었다, 나는 여리고 기생이다' 이런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간이 자랑한 것은 가문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자랑했지만 감사가 없고 공동체를 망하게 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기생 이야기밖에 안 했어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찬란한 이름으로, 살몬의 아내, 룻의 남편 보아스의 할머니, 이새의 증조할머니,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찬란한 역사를 쓴 장본인이 됐습니다.
너무 비교되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라합인가 아간인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기생이어도 우리 집안에 찬란한 역사를 쓸 수 있고, 믿음의 훌륭한 가문인 아간은 이렇게 씨를 말릴 수 있습니다. 사고뭉치가 됩니다.
왜 비교합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작품은 특이할 수록 빛나는 겁니다. 다 똑같으면 왜 빛나겠습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토끼하고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 비교하면 안 됩니다.
거북이가 달팽이를 등에 태우고 가고 있었습니다. 조금 가다가 보니까 굼벵이가 지나 갑니다.
그러니까 달팽이가 하는 말이 '야 올라타! 진짜 빠르다!' 이럽니다.
그런데 우리는 토끼하고 비교하다 죽습니다.
하지만 거북이하고 굼벵이를 비교하니까 거북이가 하늘처럼 보입니다. 등어리에 업고 가는 인생은 늘 감사한 겁니다.
똑같으면 무슨 값이 나가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 돼지부터 야생에서 새끼를 낳고 돌보는지 신기합니다. 이번 주에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그런 예화가 나옵니다. 인간에게 기생충이 있으면 개미에게는 뇌충이 있는데 개미 뇌충이 양에게서 번식을 한답니다. 개미의 기생충이 머리로 올라가서 머리가 이상해지면 양이 제일 좋아하는 이파리에 매달린다고 합니다. 그 이파리를 양이 먹고 배설하고, 그 배설물을 달팽이가 먹고, 달팽이가 배설하면 개미가 먹고, 개미가 그것을 먹고 거기에서 구역예배를 드린다고 하더군요.
하나님은 기생충 하나도 정확하게 돌리시는데 내가 기생충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만 욕심이 많아서 쌓아놓고 삽니다. 사자는 사슴이 왔다 갔다 해도 배가 부르면 쳐다도 안 보는데 인간만 쌓아놓습니다.
탐욕은 '조금 더'의 뜻입니다.
대단한 죄가 아닙니다. '조금 더' 하다가 과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악한 왕에게서 선한 왕, 선한 왕에게서 악한 왕, 악한 왕에게서 악한 왕, 선한 왕에게서 선한 왕. 네 가지 모델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상 때문에 어떻다고 욕할 게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비교하는 아간처럼 유다의 가문이면 얼마나 대단한데 그걸 모릅니다. 내가 전세계를 창조한 창조주 예수님의 가문인데 빵 공자 앞에 가서 빵 하나 달라고 빵 하나 탐내는 게 아간의 죄입니다.
어떻게 교훈을 받고 적용할까요.
조상 때문에는 감사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 있으면 있어서 감사하고, 없다면 나같은 죄인을 아무 공로없이 구원해주셔서 감사하면 됩니다.
내 믿음은 내가 책임지고 가자로 적용하십시오.
내가 죄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적용하십시오.
아간의 죄로 인해서 조상 사대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부모는 잘 살아야 합니다. 악한 자로 성경에 올라가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식들이 본받을 일을 하고 가야 합니다.
내가 술먹고 도박하고 이혼하면 예수를 믿어도 약한 자녀에게 마귀가 틈타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술먹었기 때문에 내가 술을 먹었어, 부모가 이혼했기 때문에 내가 이혼을 했어'하는 동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사대가 지나도 이럴 수 있습니다.
조상의 저주를 끊어내야 합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내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나는 가문이 대단한 유다 지파인가, 여리고 기생 라합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강한 유다 지파에서도 죄를 짓는데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두 번째, 한 사람과 우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아간 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 전 이스라엘을 나오게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아픔과 죄와 슬픔은 우리의 것입니다. 아간은 이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아간이 범죄했는데 이스라엘이 범죄했다고 합니다.
아간은 완전 범죄를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한 사람 속이면 모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육십만 명 중에 제비를 뽑았는데 아간이 딱 뽑혔습니다.
16절에서 18절까지 "뽑혔고, 뽑혔고, 뽑혔고, 뽑혔더라" 여호수아가 안 뽑아내도 하나님이 뽑아내주십니다. 우리는 기다리면 됩니다. 내가 죄인 색출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아무로 똑똑한 인간의 속임수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을 못 따라갑니다. 토끼가 아무리 꾀가 많아도 하나님은 다 드러나게 하십니다.
우리들교회 한 사람이 우리들교회를 전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나 한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말씀 묵상을 외쳐도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만큼 일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죄는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습니다.
아간이 나가지 못하도록 할 뿐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아간 때문에 멈춰섰습니다. 이 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여호수아는 아간의 고백을 듣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장막에 달려가보니까 감춘 게 있었습니다.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해서 오고 이스라엘이 우리가 되어 여호와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모두가 아간을 붙잡고 그 집에 속한 아들과 딸과 소와 나귀와 양을 이끌고 와서 아골 골짜기로 갑니다.
그곳에서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하면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불사르는 양육을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죄를 위해 온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간을 위한 길입니다. 심한 것이 아니라 빨리 수술을 하면 낫기 때문입니다. 죄는 엄중히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누이 마르타가 천 명이 죄에 가담했어도 불행할 뿐이라고 했던 것처럼 죄는 우리를 너무 괴롭게 합니다. 살인을 했는데 그 고통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진노케 합니다.
왜 진노케 합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 받는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다루시는 방법의 클라이맥스가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십자가 위의 비참한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죄의 모습입니다. 끔찍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못이 30센티미터인데 손바닥에 박으면 몇 시간이 지나면 손이 찢어지니까 손목에 박고 발목에 박았습니다. 죄가 그렇게 비참하고 아픈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일으키시는 극렬한 분노가 십자가 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이렇게 엄중히 처리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듯이 다른 사람의 죄를 처리해줘야 합니다. 내가 물과 피를 흘리면서 죄를 처리해줘야 합니다.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가기 싫어하는 아골 골짜기로 같이 데려가 줘야 합니다. 데려가서 돌로 치지 않으면 공동체가 진행을 못합니다.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부인이 속을 썩이고, 자식이 속을 썩이는데 가만히 있으면 해결이 됩니까. 같이 데리고 가야 될 아골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가기 싫어하는 아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줘야 합니다.
[오해]의 어머니가 자식의 행복을 위해 수고하고, 아들이 돌아오면 행복하게 살자고 돈을 모으는데 그렇게 아들딸 타령하다가는 결국 아들 죽이는 겁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간같은 아들을 돕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아들을 떠나서 다른 사람을 도와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내 아들을 살려줍니다. 우리는 내 아들이 된 다음에 한다고 하죠. 아닙니다.
우리들교회가 왜 일년만에 부흥이 됐는가.
정말 말씀을 보고, 아픈 사람이 아픈 마음을 잘 안다고 아파서 말씀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목장마다 목원들을 향한 헌신이 대단합니다.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목장이 기도하고 힘든 곳에 같이 가줬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면 대신 가서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얼마나 아골 골짝 빈들입니까. 도시락 싸들고 말렸습니다.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런 적용을 했기 때문에 부흥한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돌로 치는 것은 헌신입니다.
어떻게 돌로 치겠습니까.
오늘 적용할 것은 내가 회개해야 될 한 사람인가, 도와줘야 될 우리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왜 돌로 치는 게 헌신입니까.
세 번째,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을 주고 받을까요.
19절 -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첫째,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청하며 "내 아들아"하고 불렀습니다.
돌로 치고 불사르는 것이 미움이 아닙니다.
대단한 사랑입니다.
큐티모임에서 날마다 하는 것처럼 숨기지 말고 자복하라고 하면 됩니다. 말로만 해서 됩니까. 내가 가기 싫은 아골 골짜기로 가줘야 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드러내도록, 숨기지 말도록 도와줘야 됩니다. 나의 내면을 직시하도록 도와줘야 됩니다. 여러분의 사건을 통해 내면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아간의 죄, 세상에서 볼 때 아무 것도 아냐, 여리고 전투에서 이기고 외투 하나 금덩이 하나 가졌기로 그게 무슨 큰 죄야, 못 가진 놈이 바보지, 정권을 잡았으면 한 밑천 마련해야 똑똑한 거지...'
이런 말을 듣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도 내 귀에 속 삭이는 '그 정도는 괜찮아, 돈 벌어서 헌금하면 되잖아, 내가 불신 결혼해서 교회 나가게 하면 돼, 내가 안가면 누가 그 집을 구원하겠어....'
그래서 나에게 시날산의 외투가 필요하고 은금이 필요합니다.
내가 눈 한 번 감으면 평생이 보장될 것 같은 겁니다.
누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삼삼한 겁니다.
둘째, 죄를 알도록 도와야 합니다.
21절 -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보고 탐내어" 취했다고 합니다 .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지금의 밍크 코트에 비할 수 있을까요.
내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고 나니까 학부모 모임이 있을 때 밍크 코트를 입고 가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밍크 코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니까 그걸 못 입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있는 걸 버릴 수는 없으니까 추울 때 입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못 입습니다.
남편이 워낙 저보다 적용을 잘하니까 몇 십년 전에 밍크 코트를 사주길래 입고 교회 가려고 했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 그걸 입고 교회 가냐고 합니다. 못 입게 합니다. 왜 사줬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은 난로에 집어던진 적도 있습니다. 밍크 코트가 주인을 잘못 만나서 일평생 장롱에만 있습니다.
여러분은 '밍크 코트를 아내에게 사주면 좋아할꺼야' 이렇게 생각해서 취하지 말아야 될 것을 취함으로 결과가 아간처럼 될 수 있습니다. 사줄 능력이 되는 사람이 사준다면 모르겠는데 취하지 않아야 될 것을 취하니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탐내어서 넘어갑니다. 혈액형으로 보면 B형이 그러길 잘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B형인 분들 상처받지 마십시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서"라고 합니다.
내가 노략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권세를 노략해서, 학벌, 지식, 용모, 다 내가 노력해서 얻었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도 좋아서 탐내는 겁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데 순간적으로 탐심이 드는 겁니다. 권력에 재미를 보면 탐내는 겁니다.
큐티는 탐심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말씀을 잘 전했으면 사람들이 모일까' 이럴 수 있습니다. 내가 전도하고 내가 교회를 움직이는 것 같은 겁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망합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무수리의 과정을 거쳐가게 하십니다.
내가 자식 공부 잘하게 한 것 같고, 나 때문에 집안이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색을 내는 것이 큰 병입니다.
그래서 내 남편, 내 부인, 내 자식 끼고 돌면서 모두에게 괴로움을 끼치는 것입니다. 내 자식 끼고 돌면서 모두에게 괴로움을 끼칩니다. 홀어머니 외아들한테는 시집을 가지 말라고 그랬는데 가만히 보니까 제 아들이 홀어머니 외아들입니다. 그 내 아들을 끼고 돌면 며느리에게 괴로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나의 탐욕은 남을 괴롭게 하는 골치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최계원 전도사님이 썼습니다.
아들이 죽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꾸고 나서는 이제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보냈답니다. 그런 경험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자꾸 탐심을 정리해야 합니다.
'내 아들이 아니다' 생각하면 모두에게 사랑을 받게 돼 있습니다. 내 아들, 내 딸 끼고 돌면 결국 내 아들 내 딸에게도 사랑을 빼앗기고 뒷방 노인네가 됩니다.
저는 늙어서도 보고 싶은 시어머니, 보고 싶은 장모가 되고 싶습니다. 괴로운 노년이 되는가 아닌가는 지금부터 결정이 되기 때문에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보고 싶은 장모, 시어머니가 되려면 다른 사람들 기도해주기 바빠서 아이들이 만나고 싶다고 해도 '시간이 없네' 이래야 됩니다. 이러면 아이들이 더 신비해서 장모님, 시어머니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너희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와야 돼, 내가 아픈데 어떻게 안 올 수 있어' 이러면 오긴 오지만 늙어지면 뒷방 노인네 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다 자기 할 탓입니다. 이걸 예비하고 가야 됩니다.
어제 기독교 방송에서 영화를 보는데 부부가 너무 사랑하다 부인이 치매에 걸렸습니다.
아들딸에게 내가 이상해질지도 모르니까 이해하라고 하고, 남편하고 사랑했던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서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데 그 다음 날로 치매가 시작이 됐습니다.
남편이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부인을 잘 돌보려고 애를 쓰는데 운동을 하러 다니다가 젊은 여자를 만나서 자기 부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리고 부인을 율법적으로 돌보는 겁니다. 그것을 친구에게 고백 하면서 모든 걸 내려놓기를 원한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돌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남편이 사장이었는데 부인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사장 일을 잘해서 부인을 돌보려했지만 사장 자리도 내려놨습니다.
부인하고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살겠다고 결혼 선서를 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부인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도 끊고 사장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평안하게 부인을 간병한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뭔가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것, 내 것'하니까 힘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할 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남편이 다 내려놓으니까 회사를 뺏으려고 했던 시동생도 돌아오고 아들도 돌아왔습니다. 엄마를 돌보는 아버지 때문에 가족이 다 돌아옵니다.
생색을 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힘 때문에 하면서 보고 싶은 어머니, 보고 싶은 시어머니, 장모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를 지으면 괴롭습니다. 그래서 아간에서 '아골'이 나왔습니다.
사실 진멸 대상은 이방인인 라합입니다. 믿음의 대단한 가문을 자랑하는 아간은 진멸해야 되는 입장인데 거꾸로 됐습니다. 시어머니가 권사여도, 장인이 장로님이어도 며느리 사위 구박했다가 진멸 당하는 날이 옵니다. 잘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건드리면 내가 다치게 돼 있습니다.
아간을 돌로 치고 불살랐습니다.
죄를 고백했는데 불사를 것까지 있는가 할지 모르지만 지금 아간이 말만 했지 자기가 취한 것을 안 가지고 왔습니다. 말은 잘 하는데 적용을 못하니까 모든 공동체가 적용하도록 도와야 됩니다. 아골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돌로 치고 불살라야 합니다.
자기가 적용을 못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모태 신앙 중에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아는 것은 많아서 말은 좔좔 나옵니다. 아간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불사르게 해줬기 때문에 우리가 되어서 서로 도와야 됩니다. 너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돈을 감추었다고 죽습니다.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시작이기 때문에 일벌백계로 다루어야 합니다. 본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15장 7절을 보면 아골 골짜기가 유다의 경계가 됐다고 했습니다. 큰 기념이 됐습니다.
나의 탐욕에 하나님이 얼마나 극렬한 분노를 행하시는가 이것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되는 일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극렬한 분노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를 해야 됩니다.
내가 죽어도 적용을 못하니까, 조상 따지고 뭐 따지고, 금은을 쌓아두면서 말만 하고 죽어도 적용을 못하니까 온 공동체가 도와줬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면, 이 땅에서 돌로 침을 당하고 불사름을 당한다면 호세아 2장 15절에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만들 것이라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할렐루야!!
이 땅에서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데 이 땅에서 망하지 않고 가는 것은 저주입니다.
모세에게 대적했던 고라 자손도 삼킴을 당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성전의 문지기가 됐습니다. 죄의 괴로움 때문에 죽어짐으로 구원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공동체는 눈물을 흐리면서 같이 기도하고 문제를 직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돌로 치고 불사르는 적용을 하도록 도와줘야 됩니다.
우리들교회 어떤 집사님은 직원 월급을 못 주는 상태에서 보증 빚까지 갚아야 되는데 모르고 있던 돈 삼천 만원이 생겼습니다. 그 돈을 보증 빚 갚는데 쓰는 적용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래 층 은행의 지점장이 올라와서 돈 쓸 일 없냐고 하고 이억 원 대출을 해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직원 월급도 주고 회사가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아골 골짜기 빈들에 가는 것이 삼천만원 빚 갚는 것입니다. 그걸 하니까 그 다음에 살아납니다. 소망의 문이 됩니다.
혜옥 자매가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그 효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왜 효과가 있겠습니까. 혜옥 자매가 작년에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았는데 우리들교회 모든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아골 골짜기 빈들에 가도록 도와줬더니 수치스러운 죄를 다 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수술을 잘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년만에 재발을 했는데 너무 면역력이 약해져서 항암 치료를 못 받았습니다. 시한부 인생이라고 하는데 날마다 글을 올리고 모든 것에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암이란 놈이 잘 못 와서 반이나 도망을 갔습니다. 다 도망갈 줄 믿습니다. 시한부 인생이 언제 갈지 모르는데 제가 죽을 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상식처럼 듣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암이 나았다고 너무 좋아하고, 암에 걸렸다고 너무 슬퍼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과정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암이 낫고 안 낫고는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암이 낫는 것 너무 좋고, 학교에 붙는 것 좋아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낫고 붙었다' 이러면 당연한 거지 하고, 안 됐다고 하면 '참 감사하네' 이래야 됩니다. 우리들교회의 언어입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안 믿는 사람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혜옥 자매가 좋아졌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다들 기뻐해주시기 바랍니다. 얼싸안고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족한데 왜 기적이 일어나는가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들교회 교인이 아무도 안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를 이기는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죄를 이기는 장사입니다.
이 예수님과 연합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으로 인해 죄를 이기는 복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죄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다 지파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 장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 사람과 우리가 너무 중요합니다.
한 사람 세우기 위해 여호수아는 죄를 지은 아간보고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미운 사람보고 내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청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 때문에 망한 그 한 사람이 내 아들입니다.
너 한 사람 때문에 집안이 교회가 망했는데 그를 내 아들이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같이 아골 골짜기 빈들에 붙잡고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는 아픈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곳이 소망의 문으로 살아날 것을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에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명문가 출신이고, 얼마나 대단한 신분인데 저주의 가문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라합처럼 여리고 기생인 것을 자랑하면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나의 탐심을 아골 골짜기에 불사르기 바랍니다 .
시날산의 외투가 입고 싶어서 합리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잘 되는 것, 못 되는 것 다 나 한 사람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족보를 새로 쓰십시다.
예수님의 족보로 새로 쓰십시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죄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십니다. 목사, 장로 모두 예외가 없다고 하십니다. 바로 그 아간이 나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각자 집안에서 너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는 남편, 부인, 부모, 형제들, 그 한 사람 아간을 위해서 오늘 온 몸으로 껴안으며 '내 아들아' 청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같이 그를 아골 골짝 빈들에 데리고 가서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돌로 치고 불사르는 적용을 하기 원합니다. 그것이 너무 힘들어서 하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셨듯이 가기 싫은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내가 시날산의 외투를 입기 위해서 합리화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리고 기생 라합처럼, 내가 여리고 기생이어도 예수님이 내 인생에 오셨기 때문에 내 어떤 것도 자랑하며 새로운 족보를 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천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섣불리 실망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조상의 저주는 예수님의 보혈로 끊어졌습니다. 조상의 죄 때문에 마귀가 틈타서 공격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제 모든 것은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