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영상이 세편이나 있지만
그것을 접고 요즘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해서 누가 다치진 않는지
싸우진 않는지 지키고 앉아 있단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보인다.
툭툭 튀어나오는 말들, 표정과 행동들을 유심히 보면 아이의 생각과 관심사를 지배하는 것들, 욕구와 그것을 얻어내는 방식, 관계를 맺는 방식, 공격과 방어기제, 각 아이가 갖고 있는 어렵고 원활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장애와 한계 등 많은 것들이 보인다.
요즘 우리 아이들의 흥미로운 관심사 중 하나는 '괴물' 이다. 아이들은 괴물이란 단어 대신 몬스터란 말을 사용한다. 시대적으로 언제부터 영웅보다 악당이 더 매력적이고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의 놀이 속에도 온갖 괴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게임과 관련이 있다.
아이들은 스스로 괴물이 되는데, 괴물이 나타나면 예전처럼 영웅이 나타나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더 힘이 센 괴물이 나타난다. 당연히 이 괴물들은 사람을 구하지 않고 해치고 죽인다. 그리고 다른 괴물들과 힘자랑을 한다.
물론 어른들은 안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괴물이야기는 '힘'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라는 것을. 더 강하고, 더 세지고 싶은,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과정이며 현상이라는 것을. 힘을 갈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인식한다는 것이니 성장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자기인식의 확장이라고.
부모와 선생들은 알고 있다.
지식과 이론으로 머리로는 잘 안다.
하지만 눈 앞에서 해맑은 얼굴로 신나게 웃으며
잔인하고 섬뜩한 얘기를 떠들며 노는 내 아이를, 내 학생을 본다면 어느 순간엔 근심이 몰려올 지도 모른다. 붙잡아 앉혀놓고 묻고 또 묻거나 그런 말 하면 안된다고 타이를 것이다.
아이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그 어른이 신뢰할 만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의 간섭이나 개입이 없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빠지게 되면 어느 순간 아이들은 정직하게 드러낸다.
나는 그 민낯을 보고 싶었다.
아침 수행명상을 간단히 마친 후 한켠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아이들이 오늘은 무엇을 할거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중이라고 답한 뒤 그때까지 놀라고 했다. 아이들은 이런 저런 놀이를 함께 하다 곧 괴물이 되어 온갖 능력을 발사하고
넘어지고 구르고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내 귀에 한 단어가 들렸다. SCP.
아이들이 나는 scp 999야, 난 scp687이야
하면서 놀기 시작했다.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 scp 687? 그건 등급이 뭐야? "
놀던 아이들이 내게 와서
"강물, scp 알아요? " 하고 묻는다. 난 씨익 웃으며
" 알지. 너희도 알지? scp는 등급이 다 있는거"
scp란 한마디로 괴물, 돌연변이 같은 것인데,
각 scp마다 번호가 있고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뉜다. 아이들이 괴물들에 관심이 많길래
이런저런 괴담들을 듣다가 알게 된 것인데, 나름 방대한 세계관과 조직을 갖추고 있다.
아이들은 우르르 내게 와서 저마다 자기가 아는 scp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곤 scp 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 좋아, 그럼 scp 놀이를 하자. 근데 원래 나와있는 scp를 가지고 하는 건 재미없지. 너희가 각자 자기의 scp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
아이들은 각자 자기의 scp를 창조하느라 순간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하나 둘, 다 만들었다며 손을 들었다.
나는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아이의 이름을 적고
아이가 만든 scp의 이름과 특징, 능력들을 말하는대로 받아적었다.
뒤에 숫자를 12개나 붙인 녀석, 자기 집 현관 비번을 붙인 녀석도 있었다.
아이들이 만든 scp는 모두 빠르고, 힘세고, 잔인하게 죽이고 파괴한다. 그 표현이 구체적이고 적나라해서 굳이 여기에 적진 않겠다.
" 좋아, 그럼 이제 등급을 정해야지? "
각 아이들이 만든 자기의 scp를 다시 읽어보며 등급을 정해보니 모두 가장 위험한 케테르다.
아이들은 서로 자기도 케테르라며 자랑비스므리 한 것을 나눈다. 다른 친구의 scp에 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다.
이제 자기 scp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되어
놀아야 했다.
" 어? 잠깐만 그런데 케테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
내가 곤란해졌다는 듯 말하자, 한 아이가 말한다.
" 어? 케테르면.... 격리돼야 하는데? "
그렇다. 케테르는 위험하기 때문에 격리되어 관리되는 괴물이다.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자 봐봐. 다 케테르여서 따로 따로 다 격리돼야 해."
한 아이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 아니, 잠깐만.... 오 마이 갓 ,그럼 같이 놀 수 없잖아! "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당황하고 황당해 했다.
남보다 특별한 scp를 만들려고 숫자를 12개나 붙이고 까먹을까봐 손바닥에 적어놓기까지 했는데, 다른 친구의 scp를 보며 더 공격적이고 잔인하게 다시 바꾸고 바꿨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격리라니...
아이들과 나는 해결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scp를 케테르가 아닌, scp 세 등급 중의 하나인 격리로부터 자유로운 '안전' 등급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scp는 무조건 잡아먹고 죽이는 것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이라는 조건이 붙기 시작했다.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같이 놀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각자 자기 scp를 다시 소개할 때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물었다.
" 그럼, oo이의 scp6874는 이정도면 안전등급을 줘도 될까? "
그 때 한 아이가 그 아이에게 물었다.
" 만약 친구면, 친구도 잡아 먹나요? "
질문을 받은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친구는 아니라고 한다.
아이들이 서로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 먼저 공격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는데, 만약에 모르고 부딪히거나 건드리면 어떻게 되나요? "
질문한 아이는 질문받는 아이와 얼마전
그런 상황에서 싸웠다. 앞을 보지 않고 가다가 뒤에서 다리를 부딪혔는데, 왜 때리냐며 다짜고짜 화를 냈고, 부딪힌 아이는 실수라며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 음... 실수라면... 잡아먹지 않을거에요."
" 먼저 사과하면 괜찮나요? "
" 네. 진짜로 미안하다고 하면 그냥 같이 놀 수 있어요."
아이들은 서로의 질문과 대답을 해가며
모두의 동의하에 안전등급을 내렸다. 끝까지 케테르를 고수한 아이도 있었다.
이제 scp는 격리되지 않고 같이 놀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기념으로 자기 scp의 그림을 그리고, 커다랗게 등급이 씌여진 증명서를 붙였다.
아이들의 scp는 각자 자기의 반영으로 보였다.
욕구와 감정이 그대로 실렸다.
그것을 표현하고 결국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처음에 비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음에도 아무도 힘이 약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다.
바꾸지 않은 선택도 인정되고 존중했다.
케테르를 고수하는 아이의 이야기도 모두 들었다.
" 근데 케테르면 같이 못놀잖아. 격리되니까 "
한 아이가 말했다.
다른 아이가 말했다.
" 우린 격리아니니까 우리가 갈 수 있지 "
그래서 케테르도 같이 놀 수 있었다.
또 다시 무엇으로 변할지 어떨지 모르지만
scp들은 잘 놀았고
내겐 흥미로운 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