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인 2 - 1차대전에서 오스만과 싸워 독립 약속 받았으나 무산되다!
11세기 마르완 왕조와 라와드 왕조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이란 동부에 세워졌지만 쿠르드인
은 소수였고 오래 지속하지도 못했으니 사실상 2천년 동안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튀르키예와 이란, 이라크와 시리아에 흩어져 살며, 영국이나 미국등 강대국에게 이용만
당하고 배신당했던 쿠르드인 제 2편은 1차대전때 독립 약속을 받았으나 무산된 이야기 입니다.
전쟁은 보병이 가서 깃발을 꼽아야 끝나는 것인데 트럼프 대통령은 지상군 투입에 위험 부담이 큰지라
대신 또 쿠르드족과 접촉했으니, 이라크의 쿠르드족 병사 수천명이 국경을 넘어 이란 땅으로 들어
갔고 동아일보는 “美, 걸프전때 검증된 ‘쿠르드 카드’ 로 지상전, 이란 흔들기” 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란에 들어간 쿠르드족 전투원들이 이라크 출신인지 혹은 이란 출신으로 이라크의 쿠르드에게 군사훈련을
받은뒤 고국으로 돌아간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이 혁명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고,
치안체제를 흔드는 역할을 해서 이란군 전력을 약화시키고, 민중 봉기 분위기도 조성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2천년경 이라크와 이란 국경지대에서 살았던 ‘구티 Guti’ 족의 후손인 쿠르드족은 중세에는
오스만 제국의 쿠르드 토후국 형태로 존재해 왔는데.... 1847년 쿠르드족의 Bedir
Khan Beg 반란 후에는 쿠르드 토후국 대부분을 폐지됐고, 이후 쿠르드스탄 아알렛
(Kurdistan Eyalet) 이라는 별도의 행정 구역을 만들어 이스탄불 중앙정부가 직접 통치합니다.
1821년 2월 도나우 공국에서 반 오스만 봉기가 일어나 제압되었으나, 자극받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그리스인
들이 3월 반란을 일으켰으며, 10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튀르크인 3만
6천명을 학살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리스 독립 전쟁이 시작되니 그리스인들은 1822년 1월 독립을 선언합니다.
오스만제국은 이집트군과 함께 반란 집압에 나서니.... 그리스 독립군에게 온정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함대를 파견했고, 1827년 9월 말 영국인 해이스팅스가 이끄는 그리스 함대가
코린트만의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니 오스만의 이브라힘 파샤 역시 파트라의 그리스 선박을 공격했습니다.
러시아까지 포함된 연합군은 10월 20일 나바리노 만에 진입을 개시해 해전을 개시하니 4시간 정도
계속된 나바리노 해전은 화력에서 우세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니, 연합군은 178명만이
사망했지만 오스만 해군은 4천에 달하는 사상자와 60척의 선박이 대파되었고 29척은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해전은 오스만의 대패로 끝났고 300여년 이상 식민지였던 그리스는 독립을 쟁취합니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민족주의는 들불처럼 오스만 제국에 번지기 시작했으며.... 곧 오스만의
영토 였던 남동유럽 지역의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등의 민족들도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며 하나둘 봉기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독립해 나갑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여론이 친영파와 친독파로 나뉘어 싸우는 상황
이라 중립이었으니, 영국에 군함 여러척을 발주해 인수받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영제국의
해군상 처칠이 영국도 군함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먹튀를 하는 바람에 여론이 들끓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영국 함대에 쫓겨 코스탄티니예로 피난와 있던 독일 군함
2척을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오스만에게 무상 양도하겠다고 일방적
으로 선언하는 바람에 10월 29일 오스만은 동맹국 측에 참전을 결정했지만 결국 패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승리한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만 제국
내의 소수 민족에게 자치를 인정했고, 마찬가지로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영국의 요청으로
오스만 제국과 싸운 쿠르드족도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부에 별도의 영토를 만든다는 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스만 제국은 조각조각 해체될 위기에 처했는데..... 그 전인 1차 대전때 영국군과 프랑스군에
호주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하기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 갈리폴리에 상륙했을 때 오스만의 장군
케말 파샤는 기적적으로 승리했으니, 연합군과 오스만군은 각각 50만명씩의 희생자를 낸 대 전투였습니다.
또 동남쪽인 아라비아와 이라크등은 모두 오스만제국이 통치했으니 영국인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야기 처럼 영국은 아랍인들을 포섭해 시리아 다마스커스로 진격했고 메소포타미아
남부 바스라 Basra 와 페르시아의 인근 영국이 투자한 유전지대를 두고 전쟁이 벌어집니다.
영국은 영국군 외에 인도군을 대거 동원했고 거기다가 현지의 아랍인들과 쿠르드인들 까지
동원해 오스만투르크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으니 연합군은 샤이바 전투
에서 바스라 방어를 포함하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군의 반격이 시작됐으니 쿠트 알 아마라 공성전으로 1915년 12월 7일부터 1916년 4월 29일 까지
메소포타미아 바그다드에서 남쪽 160km 쿠트 Kut 마을에서 찰스 타운센드 소장이 이끄는 수만명의
영국군과 인도군 수비대를 오스만군이 포위했고, 아일머 중장의 구원군이 도착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저 갈리폴리 전투에서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케말파샤는 연합군에 항복한 이스탄불의 오스만 술탄에게
반기를 들고 흑해 삼순에 상륙해 저항군을 조직하니 튀르키예 독립 전쟁이라고 불리는데
영국, 프랑스, 그리스군에다가 아르메니아 군과의 전쟁에서 터키 혁명정부가 마침내 승리했고,
쿠르디스탄 지역까지 장악하니 세브르 조약을 대체한 1923년 로잔조약에서 쿠르드족 독립은 무산됩니다.
세브르조약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한 협상국과 패전한 오스만 제국이 1920년 8월 10일 프랑스
오드센주에 있는 세브르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는 것이니 이대로
되었다면 튀르키예는 현재 영토의 20% 정도에 불과한 앙카라 지방의 소국으로 전락할뻔 했습니다.
세브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니 시리아는 프랑스에,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는 영국에 분할되며
심지어 튀르크의 본토 아나톨리아 반도 까지 강대국들에게 분할되고 마르마라해의 연안은 국제연맹의 공동
관리 지역이 되니 그럼 터키(튀르키에) 는 부르사에서 앙카라까지로 영토가 쪼그라들어 현재 터키 영토의 20%라?
따라서 튀르키예(오스만제국, 터키) 영토는 부르사 - 앙카라 - 삼순으로 이어지는 중북부 일대 소국으로
전락하고 반면에 그리스는 소아시아 서쪽 해안인 이즈미르등 이오니아 지방과 수도 코스탄티니예
(이스탄불) 를 제외한 동트라키아 전역에 에게해의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등을 차지하는 대국이 됩니다.
이탈리아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 서남부 (프리기아 - 콘야 - 안탈리야) 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프랑스는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디야르바크르 일대에 영향력을 그리고
영국은 소아시아 동남부 (반 호수 남쪽 일대), 아르메니아는 동부 (트라브존 - 에르주룸 -
반 호수를 비롯한 서아르메니아 영토) 를 차지하며, 동부에는 쿠르디스탄 자치령을 세웁니다.
또한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은 영토 90% 를 뺏길뿐만 아니라 군대를
5만 명으로 제한당하고, 흑해로 통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는등 정상적인 국가로써의 기능이 불가능한 상태로 됩니다.
다만 영, 프, 이 등 서유럽 열강들도 1차대전을 수행하며 탈진상태였기에 튀르키예인들의 저항
을 강하게 누르지 못했으니...... 이후 이탈리아는 퇴각하였고, 영국은 프랑스에 남동
아나톨리아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다시피 하고 아랍인 지역 지배에 집중하였으며
프랑스는 욕심이 있었지만 가지안테프 전투에서 튀르크 민병대에게 패배해 안티오크로 철수합니다.
아르메니아도 튀르크군에게 패배하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소련에게 점령당하면서
여력이 없어 쫓겨났으며 서부 전선에서는 그리스군이 신 수도
앙카라까지 쳐들어올뻔 하였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활약으로 저지됩니다.
튀르키예는 독립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니 세브르 조약은 폐기 되었고 이후 1923년,
로잔 조약으로 기존의 영토는 물론이고 현재 튀르키예의
하타이주 (이스켄데룬, 안티오크 일대는 1939년에 편입) 를 프랑스로 부터 확보했습니다.
튀르키예 남동부의 요충지 가지안텝 (Gaziantep) 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시리아의
알레포 (Halep) 에 속해 있었으며 튀르크인, 튀르크멘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19세기말 가지안텝은 프랑스와 미국의 선교사의
활동과 도시의 주생산품인 동과 밀, 카페트, 그리고 목화무역으로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때문에 남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동방의 파리” 라는 별명도 붙을 만큼 드물게 서구식 교육시설과
병원을 갖추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근대교육 수준도 높았는데,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주민들 간에 민족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12월 17일 영국군은 가지안텝에 진입해 1년 동안 군정을
실시했지만, 1919년 영국과 프랑스는 협약을 체결해 시리아와 남동
아나톨리아의 위임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넘겼고 같은해 11월 5일에 프랑스군이 진입했습니다.
한편 1919년 초부터 도시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인근의 마라쉬(Maraş), 킬리스의 아르메니아 주민들과
더불어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으니, 전쟁 중에 이곳으로 이주한 반 오스만 성향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갑자기 늘자 원래 가지안텝에 거주하던 튀르크멘, 아랍, 쿠르드계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과 연합해서는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니
당시 프랑스군에 합류해 튀르크 민병대와 대치했던 아르메니아계 민병대의
구호는 "아르메니아가 아니면 무덤을!" (Ya Ermenistan, ya mecaristan!) 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가지안텝의 베야즈한(Beyazhan) 에 사령부를 마련했으니 부유한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미국 선교사가 세운 아메리카 병원과 아르메니아인을 위한 여학교가 있었으니,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등에 업고 튀르크인들을 괴롭혔으며, 프랑스군의 행동도 튀르크인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1920년 1월 21일 14세였던 메흐메트 캬밀은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가기위해 베야즈한 앞을
걷고 있었는데 순찰중이던 프랑스군은 그들의 길을 막으며 캬밀 어머니의
히잡 차림을 조롱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 한 군인이 그녀의 히잡을 잡아채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화가 치민 캬밀은 돌을 들어 군인에게 던져 맞추자 군인들은 캬밀을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으며
다음날 캬밀의 장례식에는 모스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만큼 분노한 안텝의 주민들이 많이
참석했고 집에 있던 고물 엽총과 칼을 모으로 오스만 군대의 옛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예멘 전선에서 싸운 참전용사 샤힌 베이 (Şahin bey)
와 마라쉬 출신의 카라 이을란 (Kara Yılan) 이 이들을
함께 이끌었으니 1920년 4월 1일부터 1921년 2월 9일까지 전투가 벌어집니다.
샤힌 베이가 이끄는 300명 튀르크인 민병대는 그보다 10배는 되는 도시 내에 주둔한 많은 프랑스군
과 아르메니아계 민병대를 상대로 농성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저지했고, 인근
도시인 카흐라만마라쉬와 샨르우르파에서도 민병대들에 힘입어 프랑스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남동부 지방의 대프랑스 전선은 앙카라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신경써 줄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때문에 이 전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안텝 전쟁" (Antep Savaşı) 이라고
따로 분리하는데..... 결국 프랑스는 1921년 10월 20일에 앙카라 협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에서 빠집니다.
이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은 날벼락을 맞았으니.... 아르메니아인이 세운 아르메니아 제1 공화국은
세브르 조약에서 튀르키예 동부 영토 및 북동쪽 해안지대를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튀르키예가 아르메니아
군을 격퇴하고 소련과 튀르키예가 카르스 조약을 맺으니 세브르 조약에서 인정을 받았던 영토를 몽땅 뺏깁니다.
쿠르드족은 영국에서 세브르 조약을 맺을 당시 점령지 일부를 넘겨주어 독립국가인 쿠르디스탄을 세워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튀르키예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브르 조약이 파기되고 점령지가 다시 튀르키예
영토가 되면서 독립국가 건설도 불가능해졌으며 튀르키예 정부는 쿠르드족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1920년 오스만제국의 상황을 보면 수도 이스탄불은 사실상 영국이 점령한 상태였고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군이
독립을 위해 진격했으며, 서쪽에서는 이즈미르를 점거한 그리스군이 내륙으로 진격해 수도 앙카라를
위협했고 남쪽에는 시리아를 얻은 프랑스가 안티오키아에서 북진해 “가지안텝” 으로 쳐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몇 년전 4주간 튀르키에 전국 일주 여행에서 방문한 가지안텝 성채 Gaziantep Kalesi 는 언덕 위에 1.2km 원형
성채로 12개의 탑이 있는데, 로마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감시탑을 기본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때인 565년에
건축했고 오스만시대에 재건되었다. 20세기 초반 독립전쟁때는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 거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쿠르드족은 아리아 계통으로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걸쳐 거주하며 이슬람교 수니파 에 속하고 반(半)유목민
과 농경에 종사하는데 이란어계의 방언인 쿠르만주어 를 사용하며 특히나 민족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쿠르드족이 낳은 위대한 안물은 살라딘이니 1137년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나즘 앗 딘은 모술의 태수 장기의 휘하로 들어가 그 아들인 누레딘의 휘하에서도
출세 가도를 달리니 살라딘은 1163년에 숙부 시르쿠를 수행하여 이집트 원정에 나섭니다.
원정 6년째인 1169년에 시르쿠는 카이로에 입성해 이집트를 정복하지만 바로 죽으니.....
26세의 청년 살라딘이 총독 자리를 이어받음으로써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막이
오르는데 1174년 누레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는 술탄 이 됩니다.
살라딘은 십자군 전쟁 후에 수립된 예루살렘을 압박하게 되었으니 성전(지하드)을 선포하고 1187년
6월 무슬림군은 하틴 전투에서 더위와 갈증으로 무력해진 기독교군대를 대파하고 이어 아크레,
베이루트, 시돈을 가쳐 마침내 10월 드디어 십자군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 합니다.
예루살렘은 보통은 기독교의 성지이지만 한 뿌리를 지닌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한데
특히 이슬람교의 입장에서는 메카와 메디나 다음 가는 성지였으니 아브라함과
예언자의 활동 무대였으며.....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천상에 다녀왔다고 전하기 때문 입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 이 예루살렘성의 아랍인들에게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약속해 놓고는
성이 함락되자 아랍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지 않고 더우기 어린이와 늙은이 까지
죽이며 심지어 생명체는 동물 까지도 모두 죽여서 "더렵혀진 성지를 피로써 정화" 했습니다.
하지만 1187년 쿠르드인 살라딘은 "킹덤 오브 헤븐" 영화에서도 보듯이 기독교인 기사 발리앙과
협상을 벌인 끝에 88년만에 무혈입성 하는데, 약속대로 목숨은 물론 재산까지 반출을 허용
하니 가톨릭 대주교는 마차에 바리바리 금은보화를 싣고 나가자, 살라딘은 야파 까지 호송해 줍니다.
하지만 쿠르드인 살라딘의 투르크군대에 예루살렘 함락은 유럽 각국이 경악해 마지않았고 그 결과
제3차 십자군 이 결성되니, 독일 황제와 프랑스왕 필립 에다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대결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명한 전쟁인데, 결국 이슬람은 예루살렘을 지켜냈던 것입니다!
제 1차 기독교 십자군이 예루살렘의 이슬람교도 아랍인들과 약속을 배반하고 전부
다 잔인하게 살육해 예루살렘성을 피로 물들인데 대해.....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와 약속과 맹서는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배신을 때린 기독교도들에 비해 약속을 지킨데다가 무사히 돌아갈수 있도록 호위대 까지 붙여준 이슬람의
신사 쿠르드인 살라딘을 다시 떠올리는데... 그 후손들은 아직도 독립전쟁에 피를 흘리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5월 21일 터키 동남부에 위치한 하타이 Hatay( 옛 안티오키아) 에서 시리아 국경에 가까운
가지안텝 Gaziantep 오토가르에 도착해 구시가지로 들어가 호텔에 체크인후
Zeugma Mozaik Muzesi 에 가서는 제그우마에서 출토된 화려한 모자이크들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박물관을 나와 택시를 타고 가지엔텝 성채로 올라가는데.... 산 정상에는 거대한 성채가
보이는데 여기 광장에는 물통인지 아님 짜이인지 통을 짊어진 조각상 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분수대를 지나니 엄청 긴 낫을 든 농부가 보이고 총을 든 군인상 앞에는 금속탐지기를
든 경찰이 사방을 주시하는데 우리도 간단한 몸 수색을 받고는 안으로 들어갑니다.
안쪽에는 더 많은 조각상이 늘어서 있는데 보자니 포로가된 사람들도 있고 기마 병사에다가
엎드려총 자세인 군인이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의용군들의 조각상들을 봅니다.
그러고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성 안으로 들어서는데 역시나 총을 든 병사들 조각상
들이 늘어서 있는데, 산 정상 높은 곳이라 시가지 전망이 잘 보이기로
도심의 풍경을 구경하고는 성문 안으로 들어서니 굴속 같은 무슨 통로가 나옵니다.
좁은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영상물이 나오는 앞에 안내 데스크가 있는데 여직원
은 입장료가 무료라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더니 우리에게 CD 까지 한장
주네요? 그럼 여긴 전쟁박물관이니 터키 공화국 독립의 역사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튀르키예가 자리한 소아시아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는 BC 2,000년 바빌로니아가
서고 BC 1700년 히타이트 그리고 BC 500년경에는 앗시리아가
차지했으며 이후 그리스인들의 헬레니즘 왕국을 거쳐 로마와 비잔틴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1084년 셀주크 투르크의 슐에이만 샤가 이 도시 가지안텝을 점령했지만 1270년 몽골 의 침입으로 도시
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1339년 듀르카디로울랄 공화국이 재건되었으나 1,71년 이집트 맘룩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술탄 셀림이 반격해 점령한 1516년 오스만 투르크 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여기 가지안텝 성채 Gaziantep Kalesi 는 산 정상에 1.2km 원형 성채로 12개의 탑이 있는데 로마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감시탑을 기본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65년에 건축했고 오스만
시대에 재건되었다는데 20세기 초반 독립전쟁때는 프랑스 군에 대한 저항 거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성 안팍의 저 많은 조각상들과 또 영상물은 프랑스에 대항해 싸운 것인데 여기 안텝
의 시민들이 용감히 싸워 적을 물리치고는 터기에서 영웅
에게 주는 “가지” 라는 말을 도시 이름 안텝 앞에 붙여서 “가지안텝” 이라고 했답니다.
1차 세계대전에 오스만 터키가 독일편에 참전해서 패전하자 터키 영토 내에 살던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등이
독립하고 그리스가 이즈미르를 점령하는등 나라가 갈가리 찓기면서 터키가 망할 처지가 되자.... 술탄
정부에 반역한 장군 케말 파샤의 주도로 국민군이 결성되어 아르메니아, 그리스, 영국, 프랑스 등과 전쟁을 합니다.
1차대전 후인 1919년 11월 프랑스군은 서쪽으로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하고 또
남쪽으로 시리아에서 부터 북진해 안티오크를 지나 안텝을 침략하며 영국군도 해안의 여러
도시를 점령한데다가 동부전선의 아르메니아군도 3개사단을 동원해 동부 국경을 침공합니다.
케말 파샤의 터키군은 서쪽 이즈미르에 상륙해 아나톨리아 곡창지대를 장악하고 앙카라로 진격하는 그리스군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하였습니다. 때문에 빈자리는 민병대 가 맡게되니 동부전선은 1920년 9월 24일부터
캬즘 카라베키르가 이끄는 독립군 4개사단이 아르메니아군 방어에 성공하고 오히려 반(Van) 을 점령합니다.
남부전선인 가지안텝에서는 1920년 4월 1일부터 1921년 2월 9일까지 샤힌베이의 300명 민병대가
10배는 많은 프랑스군을 저지했으며 이웃 동쪽 도시인 산르 우르파도 지켜내자
패배한 프랑스군은 결국 1921년 10월 20일에 앙카라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빠지게 됩니다.
아렇듯 튀르키에인 민병대가 아르메니아군으로부터 동부 반과 프랑스군으로
부터 남부 가지안텝 전선을 방어한데 힘입어 터키군은 이스멧 파샤가
이끄는 6천 병력으로 그리스군 2만을 이뇌뉘강에서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튀르키예 군대는 이즈미르에서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격한 그리스군에 대해 1921년 8월
앙카라 아피욘 전선에서 반격해서는 1922년 8월 30일 퀴타햐의
둠루프나르 전투에서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군이 그리스군에 최종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터키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날벼락을 맞았으니..... 셰브르 조약을 맺을 당시 영국은 점령지중
일부를 쿠르드족에게 넘겨서 독립을 약속했지만 터키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셰브르 조약을
무효화하고 점령지를 터키(튀르키예) 영토로 돌려주니 지금도 쿠르드족은 독립투쟁 중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케말 파샤의 터키군이 1차 대전후 영국, 프랑스, 그리스, 아르메니아 및 쿠르드인
들과 전쟁에서 패했다면 셰브르 조약에 의해 오늘날 튀르키예는 아주 작은 소국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쿠르드인들은 터키 영토 동남부 지방에 수천년간의 염원인 국가를 세웠을 것입니다.
영국은 쿠르드족이 밀집했던 이라크 모술과 키르쿠르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자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고 독립국가를 세워주겠다던 쿠르드족과의 약속을 저버렸으니 토사구팽을 당한 것입니다.
가지안텝 동쪽에 위치한 우르파라는 도시는 고대에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하는데 너희가 “가지” 를 붙인다면
우리는 영어에 성스럽다는 뜻인 상트 San 를 붙여서 산르 우르파 Sanliurfa 로 또 가지안텝의 남쪽에
있는 베드로와 바울의 기독교 선교 기지이기도 한 안티오키아는 "하타이 Hatay" 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현재 튀르키예 공화국은 단일 민족이 아니니 투르크인이 다수로 70% 를 차지하지만
나머지 30% 는 60여개 소수민족이 있는데 그중에 2위는 쿠르드족으로
7% 가량 된다고 하는데 고대 수메르 문서 에 나타나는 구투 (Gutu) 를 조상으로 봅니다.
혹은 그리스 · 로마의 고전 에 나오는 카르두치 (Carduchi) 가 그 원조라고도 하는데
중세에는 아라비아인의 지배를 받았으나 11∼12세기에는 자립 하였으며 그 분파에서
십자군 시절 아랍의 영웅인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 (1169∼1250) 가 출현 하였습니다.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정복되었으나 사파비 왕조와의 조약으로 터키와 이란령으로
분할되었으며... 터키령의 쿠르드족은 1919년 케말 아타튀르크의 민족 항전에
대립해 1922년 세브르 조약으로 자치정권이 약속되었으나, 로잔조약으로 취소 되었습니다.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는 망하게 된 튀르키예를 구한 존경받는 국부이지만 독립을 놓친 쿠르드족
에게는 원수이니..... 일본과 조선에서 평가를 달리하는 이토 히로부미
와도 같은데, 쿠르드족은 그후 1925년에는 술탄제의 부활을 요구하며 무장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후 분리독립을 외치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나와 1927년에는 궐기했으나 튀르키예군에게 진압당했는데....
민족주의 세력이 단합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면서 독립에 실패한채 각 국가의 소수민족으로서 생활하고
있으며, 20세기에 정치세력이 탄생해 튀르키예와 이라크, 이란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면서 박해를 받습니다.
특히 튀르키예와 이라크, 이란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쿠르드족의 규모가 너무 크고 쿠르드족이 독립할 경우 타 민족들도 분리독립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며, 그들의 거주지가 하필이면 석유산지와 겹치는 곳이 많다는 이유도 큽니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자신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 때문에,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하였으니 쿠르드족은 지난 100년간 8차례나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하였습니다.
쿠르드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 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 제국
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으나...... 결국 튀르키예 독립 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
으로 뒤통수를 맞고 뿔뿔이 분단됐지만 자치와 독립의 꿈은 버리지 않고 싸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