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9 - 몽골 42년간의 오랜 전쟁 끝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하다!
몽골군이 남송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은 오고타이 칸의 시대부터 였으니 1234년 몽골군이
남송군과의 공동 작전으로 금나라가 멸망하자 두 제국은 국경을 맞대게 되었으니,
송나라 입장에서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라는 뼈아픈 교혼을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금나라가 망한 다음해인 1235년에 바로 시작된 두 나라의 전쟁은 1276년 (혹은
1279년) 까지 무려 45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이 사이 몽골은 4명의 칸이
그 치세를 보냈고 남송도 5명이나 되는 황제가 제위에 올랐으니 긴 세월 입니다.
전쟁은 3차례 이루어지는데, 1차 원정(1235–48)은 오고타이칸과 아들 구유크칸 시절에, 2차 원정
(1251–60) 은 툴루이의 장남 몽케칸 시절, 3차 원정(1268–76) 은 차남 쿠빌라이칸의 통치
아래 이루어졌으니 동원 병력은 몽골군은50만명이고, 송나라 측은 150만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남송 군대는 보병으로 야전에서는 몽골군을 당해내지 못했는데.... 남송군은 금나라나 호라즘, 러시아군이
그랬던 것처럼 요새화된 성채에서 방어위주의 전략을 폈으니 송의 수비군은 요새 근처 농경지를 지키는
데 주력했는데, 경작지와 식수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급자족하며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아예 행정부를 들어다가 산성으로 옮기기도 했으니 남송은 공방 중에도 성을 쌓아가며 이동
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이런 짓까지 하고도 몽골 제국에게 멸망당하였으니, 물론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제국을 상대로 40여년을 버틴 것도 매우 선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지형도 문제였으니 회수 남쪽에는 수많은 하천이 거미줄 처럼 얽혀 있었는데, 남송의 수군은 이 물길을 따라
보급선을 이어갔고, 수군이 빈약했던 몽골군은 속수무책이었으니.... 몽골군은 어느 지형에서건
질병에 대한 내성이 강한 편이었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고온다습한 강남 기후에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송의 저력은 엄청난 인구와 큰 경제력에 있었으니 끝도 없이 병사와 전쟁물자가 쏟아져 나오고 계속해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나중에는 몽골이 대리국(大理國, 운남성 동부에 있던 나라) 을
경유해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자, 남송은 이들의 예측 경로를 따라 계속 요새를 건설해 나갈 정도였습니다.
반면 몽골은 1235년 개전 초기부터 중국과 유럽 원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고 이후로도 이란과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의 원정과 황족들 사이의 잦은은 내전으로 국력이 한 곳에 모이지 못했습니다.
이에 몽골군은 금나라 출신의 한족 투항자들을 내세웠으니.... 중국 남부에서 자신들의
경기병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자 보병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인데, 한족의 케리크는
1234년 거란족 장교 휘하 3투멧이 편성되면서 본격적인 주전력으로 발돋움 하게 됩니다.
1235년 악명높은 흑군(黑軍)이 창설되었고 1236년과 1241년 추가 징집으로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되는데
본래 케리크 출신의 군인은 진급에 제한이 있었으나 남송과의 작전에 투입된 한족 장교들에게는
이례적으로 높은 지위로 승진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더불어 수군을 육성하여 송나라 수군을 견제합니다.
원나라의 신분 제도에서 1등급은 몽골인, 2등급은 중앙아시아의 색목인 그리고 3등급은
금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화북, 중원의 한족으로 인구가 1천만명도 정도인데 비해
최하위인 4등급인 옛 남송인들은 전체의 84% 로 숫자는 무려 6천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제 1차 침공(1235–48) 은 남송의 선공으로 시작되니..... 몽골과 남송은 대금
연합을 맺고 1234년에 금제국을 멸망시켰는데 남송은 옛 북송의 수도였다가
금나라에게 빼앗긴 개봉과 낙양을 수복하기 위해 하남 지방을 무단으로 침공합니다.
송군은 개봉과 낙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전과 다르게 황폐화되었고, 보급 부족과 분노한 몽골군의
역습으로 남송군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다음해 1235년부터 몽골군의 침공이 시작되니 서쪽
으로는 사천을 경유해 장강을 상류 부터 제압하는 동시에, 동쪽 방면에서 남송의 주요 지역을 위협합니다.
몽골군은 1235년엔 성도를 함락시키고, 1237년엔 양양을 점령하는 등 초반엔 몽골군이
기세등등하였으나..... 서쪽 남송군은 산악 지대에 성을 세워 버텼고
동쪽에서는 명장 맹공의 활약으로 몽골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기세가 꺾입니다.
당시 몽골은 유럽 방면으로도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양면 전쟁 중이어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충분하지
못한 터라 황하 지역의 동쪽 방면군은 지지부진했는데, 1239년 남송의 맹공은
합비에서 승리를 거두고 양양을 수복한 뒤에 사천으로 이동하여 죽어라고 싸워 사천을 거의 수복합니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고 아들 구유크 칸이 대칸이 된 이후 1242년에는 몽골군이 남송의 수도 항저우를
빼앗고 사천에 맹공을 가하다가... 결국 1248년에 정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몽골군은 북쪽으로 퇴각합니다.
몽골의 새로운 대칸이 된 툴루이의 장남으로 징기스칸의 손자인 몽케칸은 남송에
대한 2차 침공(1251–60)을 시작했으니.... 1253년에 몽골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운남 대리국 정벌에 나서 남쪽 우회로를 뚫어 남송으로 진입하는 전략을 시도합니다.
몽케칸과 동생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이끄는 주력군은 세갈래로 운남을 공격해 1256년 대리국을 정복
했으며, 1257년 남쪽으로 부터 남송을 침입하기 위해 쿠빌라이가 이끄는 군대가 베트남을 침공해 수도
까지 점령하지만 스텝 지역 출신에게는 덥고 습한 날씨에 말라리아, 그리고 베트남군 반격으로 철수합니다.
1258년에는 사천의 대부분을 장악한 몽케칸은 주력군을 이끌고 남중국으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왕견이 지키는 조어성에서 5개월 가량 발이 묶이고 군중에
전염병이 창궐하니 1259년 전염병인 이질(또는 콜레라?) 에 의해 몽케칸이 죽습니다.
조어성에서 몽케칸의 죽음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 시리아까지 갔던 서방
원정군이 후계자 구도(쿠릴타이) 에 참여하려고 원정을 중지하고 돌아오지 않았으면
몽골군이 중동을 뚫고 아프리카까지 정복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으며, 그
전에 오고타이칸의 사망으로 몽골군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침입을 중지하고 철수했습니다.
무능한 남송 정부는 농민들의 민란을 진압하느라 대몽골 전선에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했는데 왕견
이 조어성에서 버텨준 것은 남송의 생명줄을 10년 늘려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쿠빌라이는
흩어진 군대를 모으느라 1260년이 돼서야 철수를 시작하는데, 남송의 장군 가사도는 쿠빌라이
와 밀약을 맺고는 후퇴하는 쿠빌라이를 추격하는 듯 마는 듯 한 뒤에 전공을 부풀려 전쟁 영웅이 됩니다.
1260년 대칸이 된 쿠빌라이 칸은 1264년 동생 아리크부카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1271년
원나라를 세우는데.... 몽골이 3차 침공을 하기 전 부터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니,
이 와중에 사천 방면의 장군 유정이 몽골군에 투항하면서 100여척에 달하는 선박을 챙깁니다.
1268년 남송 원정을 결심한 쿠빌라이칸은 양양과 강 건너 번성을 집중공략 하기로 하는데... 양양성은 해자와
늪으로 둘러싸여 있을뿐 아니라 성벽 두께가 6미터가 넘는 요새였으니, 남송의 구원병을 오는 족족
쳐부수는 동시에 몽골군은 회회포를 조립해 폭발성 탄약을 쏟아붓는 등 최첨단의 공성무기를 총동원 합니다.
뿐만 아니라 1270년 부터 몽골군은 7천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육성하니 안 그래도
가사도 등의 무능한 정치인들이 판치던 남송 입장에서는 처참했으니....
몇년이 지나도 양양성이 무느지지 않자 몽골군은 강 건너편에 있는 번성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몽골군은 이슬람의 기술로 만들어진 신형 투석기인 회회포(回回砲) 로 번성을 공격하니 결국 1273년 1월
함락시키는데..... 번성 수비 대장 범천순은 미친듯이 쏟아져오는 몽골군을 보고, "나는 살아서
송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죽어서도 송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라며 목을 메어 죽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장수 우부는 백여명의 결사대로 무수하게 많은 몽골군을 베어내며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찍은 뒤,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으며 번성을
무너뜨린 회회포는 매일 양양을 포격했으며 양식은 떨어져가고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몽골군은 때가 무르읶었다고 판단하고는 여문환의 항복을 권하니, 성 내부에서도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는 의견에 따라서 1274년 3월, 6년을 버틴 수비 대장
여문환이 항복해 양양이 함락되니.... 이제 남송의 대몽골 방어선은 사실상 무너진 것입니다.
몽골군은 송나라 남부로 진격하여 악주, 한양, 양라보등 남송군의 요충지를 무너뜨리는데,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려던 바얀의 앞에 송나라 수군이 나타나자 "항복하라" 며 4일
동안 회유했지만, 항복한 송나라 장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송나라 수군이 결사
항전하자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우회해 무느뜨렸으며 6월 20만 대군이 강주를 함락시킵니다.
남송은 13만 대군으로 맞서보려 했으나 두번의 누란지세를 이겨낸 명장 맹공과 왕견, 여개, 두고
같은 장수는 더 이상 없었고 군세를 이끈건 간신 가사도였는데 결국 정가주에서 이 군대
마저 괴멸되어 가사도가 죽은 뒤엔 남송의 운명은 정해졌으니 원나라의 군대가 장강을 따라
동진하고 상주와 평강부가 원에 투항하자 왕안절이 바얀의 군대와 맞서지만 상주도 함락당합니다.
또한 초산에서 장세걸과 손호신이 아쥬와 동문병 등이 이끄는 원나라의 군대와 맞서지만 원나라
군사들의 화공으로 인해 패하였고, 1275년초 바얀이 십여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따라 동진하니 한양 지역 주민들은 대홍산으로 피신했으며 전투가
끝난 뒤에 쿠빌라이는 백성들을 한양으로 이주시키고 농사를 다시 짓도록 조서를 내립니다.
아릭카야는 “장강 상류에 위치한 강릉은 송나라의 중요한 도시이며, 이곳에 10만명 이상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우리 군이 파죽지세의 기세를 몰아 그를
함락하지 않는다면, 강물이 범람했을 때 송군이 총출동하면 악주와 한양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3월, 아릭카야가 강릉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기 전 악주에 주둔하고 있던 남송 호북안무사
고세걸은 영주, 복주, 악주, 그리고 장강 상류 주둔군을 집결시켜 총 2만
병력과 1,600척의 전선을 악주 북서쪽 15리 형강구에 주둔시키고 악주를 탈환할 계획을 세웁니다.
아릭카야는 소식을 듣고 가거정(賈居貞) 에게 악주를 지키라 명령하고 자신은 수사를 이끌고 장강에서 강
을 거슬러 올라가 고세걸과 싸우러 가서 형강구 동쪽 해안에 주둔하니 한밤중에 고세걸은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고, 아릭카야는 군대를 출동시키니 다음날 아침 양측은 동정호 입구에서 만납니다.
원나라 아릭카야는 진을 치고 만호 장영실에게 군사를 이끌고 고세걸의 중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또 만호 해여노 등에게 좌우에서 송군의 양쪽 날개를 공격하라고 명령하니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송군은 패배하고 도망쳤고 아릭카야는 송군의 잔존 부대를 동정호의 도화탄까지 추격합니다.
고세걸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결국 원군에 항복하니 바로 아릭카야의 명을 받아 악주에
남아 있던 장수 맹지소를 불러들여 그가 이끄는 악주 수비군도 원 군
에게 항복하게 했으며 이후 “토사구팽” 이라고 고세걸은 아릭카야에 의해 처형당하 맙니다.
아릭카야는 장강을 따라 공안까지 전진하여 계획대로 강릉을 공격할 준비를 했으니 강릉부 동남쪽
15리 사시진을 공격하니, 때마침 장강의 수위가 낮아져 사시진 남쪽 강에 많은 모래톱이
노출되자 이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모래톱에 올라 사시진의 성루와 나무 울타리에 불을 질렀습니다.
남송군의 정문량은 마두안(馬頭岸) 에서 원나라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으나 패해 투항했고 원군은
사시진에 쳐들어와 송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니 4월 원군이 사시진을 점령하자 아릭카야는
도성을 명령하니 송군 도통 맹사는 혼전중에 죽었고, 감진 사마몽구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4월 7일, 아릭카야는 장정을 강릉으로 보내 투항을 권하자, 동정호와 사시진 전쟁 이후 호북성
송군의 정예는 고갈되었으니 고달은 청양몽염과 함께 원나라에 항복했으며
이어 협주, 귀주, 상덕, 복주, 영주 등의 성이 잇달아 원군에 투항했으니
이전에 영주에 주둔한 장세걸은 이미 경근왕에 임명되었고, 영주 유수 조맹도 원군에 투항합니다.
‘원사’ 에 따르면, 아릭카야가 출정 2개월 동안 원나라 군대는 총 3개 부, 11개 주, 4개 군, 57개 현, 총 80만
3,415가구, 114만 3,860명을 얻었다고 하며 이로써 경서(京西)와 호북(湖北) 지역은
거의 모두 원나라의 손에 넘어갔고 승전보가 원 조정에 전해지자 쿠빌라이는 3일간의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1276년에는 이불(李芾) 의 군대가 담주에서 아릭카야가 이끄는 원나라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담주가 함락되고 이불은 자결했으며..... 뒤이어
호남성 지역 상당수가 아릭카야의 군대에 투항하였고 아릭카야의 군대는 광서 지역을 점령합니다.
1276년 2월 수도 임안마저 함락되자 남송 정부가 투항한뒤 각지에 조서를 내려 투항하라고 하니
회서의 하귀는 원에 투항했지만, 이정지와 강재가 양주에서 아술이 이끄는 원의 군대와
분투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고, 마지막 재상들인 진의중,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합니다.
1278년 2월 복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들은 홍콩 까지 도주해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몽골군에게 사로잡혔으며, 홍콩 애산에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 세력은
군- 민을 합쳐 모두 20만 명 가까이 되었으며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는 육수부가 전담합니다.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또한 이
잔존 세력에는 옛 후주 황실 가문이자 송 태조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도 끝까지 참여했습니다.
송나라 황족들과 신하들은 육군은 내륙, 해군은 800척 전함에 머물며 최후의 대결을 준비했고, 백성
들과 관료 황족들은 몽골 지배하엔 살지 않겠다고 수십만이 그나마 안전한 바닷배에 있었으니,
최후의 결전에서 함대전으로 펼쳐진 애산 전투의 초반은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가 유리해 보였습니다.
원나라 장홍범은 물러나서 풍악을 올리며 쉬는척을 하더니 이내 포위전을 개시했고, 포위당한
송나라 병사들은 먹을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결국 대패하고
마니 수백척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명이 물에 빠져 죽었으며 이때 이미 포로로
잡혔던 문천상도 몽골 군영 내에 있었는데.....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내라는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때 육수부는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7살이 된 소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으며, 결국 모든 것이
확정되자, 어린 황제와 함께 같이 물에 뛰어들었고 황제의 어머니 양 태후는 패전의 대혼돈
속에서 구출되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나" 며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으며 모두 그 뒤를 따르니 다음날 떠오른 시체만 10만구였다고 합니다.
장세걸은 양 태후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올리고, 안남(베트남) 지역으로 재기를 위해 떠나려
했는데, 때마침 태풍이 불어닥쳤다. 그러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이윽고 거대한 풍랑과 함께, 장세걸의 배도 뒤집히고 말았는데.... 세계 최강의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세상의 끝에서 황제도 태후도 대장군도 재상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으며 마지막 송나라의 잔류 병사들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황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후의 구심점 문천상 까지 처형되니 부흥 운동도 중단됩니다.
전쟁이 끝난후 몽골은 그간 송나라의 저항이 너무 심해 원한이 깊은 나머지 송나라인들을 모조리 사실상 노예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데..... 저항이 적었던 여타 국가의 백성들은 2급 시민 취급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결국 이 지역은 몽골에 강한 저항정신을 가져 후일 원나라가 붕괴하자 한족 반격의 중심지가 됩니다.
남송과 원나라는 44년간 전쟁을 했는데.... 임진왜란 7년도 초기 임진란 1년 반과 마지막 정유
재란 1년 반 사이에 4년간의 휴전이 있었듯 이 전쟁도 3차례에 걸쳐 벌어졌으니
크게 2번은 평상시가 이어졌지만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 엄청난 규모의 싸움들이 이어졌습니다.
송나라의 충신으로 불리는 문천상 (文天祥)이나, 송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몽골의 명장 바린 바얀 (伯顔) 이
태어난 해는 1236년이니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전쟁이 시작할 무렵 20살
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던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에서 64살의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송사에서는 송나라의 최후를 평했는데, “지난 세월은 돌아가고 진정한 군주가 천하를 다스렸지만, 송나라
의 유신들이 충성스럽게 두 왕을 받들어 해상으로 달아났으니 천명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노라. 그러나 신하들의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이 정도이니 이 또한 참으로 슬프도다!”
청나라 조익은 이십이사차기에서 이렇게 평했으니,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나라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진정의 ‘중국 과거 문화사’ 에서는 송나라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평했는데, “13세기에 몽고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때,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 장장 40여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고의 몽케 칸 또한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재상 문천상을 중심
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백년간 사대부를 우대한데 대한 최상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관정치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한 것이기도 했다”
몽골과 오랫동안 싸운 나라는 이웃나라 고려도 있으니 1차 1231년 부터 9차 1258년까지 28년간으로
송나라를 공격한 몽골군이 수십만명 대군인데 비해.... 고려를 침공한 병력은 1차 3만, 6차 5천,
그외 1~2만등 소수이며 또 주력이 아니라 만주에 있던 옛 징기스칸의 동생들의 지방군에 불과합니다.
1차 안북성에서 고려군이 몽골군에게 대패해 몰살당한후 고려군은 항복 약속을 어기고 강화도로
들어가 수십년간 단 한차례도 몽골군과 전투를 하지 않았으니.... 몽골군을 맍은건 지방군과
백성들이었는데, 따라서 고려 왕족과 최씨 무사정권이며 귀족과 신하들은 강화도에서 전쟁
이라고는 모른채 연회와 팔관회 8만 대장경을 새기면서 풍족하고 편안하게 살다가... 항복합니다!